《364》2부 18권 - 12화
제5장.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새벽 2시 넘어서 프리 스테이션을 나선 강성태는 안호상, 안다미와 헤어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 몸이란 게 참 신기해서 멀쩡하게 움직이던 몸이 집에 돌아온 것을 알았다는 양, 눌러두었던 통증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어깨를 비틀어가며 옷을 벗은 강성태는 욕실에 들어가 상처를 조심해가며 몸을 씻었다. 그런 뒤에 모처럼 편안한 운동복 바지와 면티를 입고서 식탁에 앉았다.
홍콩에서 구해 입은 정장이 빨랫감을 모아두는 바구니 안에서 웅크린 채 강성태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강성태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이 만들어질 때까지 싸우리라는 서른 후반의 남자를 떠올렸다.
그가 원하는 것이 자유였다면, 강성태가 원하는 건 마약에 물들지 않는 세상과 정당하지 않은 이자로 짓눌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었다.
마약에도 빈부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순도에 따라 가격 차이가 엄청난데, 소위 최상품 마약은 순도 99.99의 금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높았다.
물론, 순도가 어떻든 간에 본인과 주변을 망치는 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순도가 높을수록 부작용이 적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한숨과 함께 잡생각을 털어낸 강성태는 가스레인지로 움직였다.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왔으니 최치곤이 있었다면 라면을 끓이라고 했을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라면보다 집에서 내린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커피 물을 올리는 사이 최근 있었던 일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김정훈과 서달수를 잃었고, 강성태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두 사람, 이병렬과 최치곤은 병원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열흘 정도 후에는 마카오에서 보리스 파리오와 삼합회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인데 부산에서는 이교창이 야쿠자로 의심되는 놈들에게 당했다.
분쇄한 원두에 뜨거운 물을 돌려가며 부은 강성태는 반갑게 달려드는 향을 맡았다.
물론 좋은 일도 있었는데 안다미를 만났고, 지하차도를 지나도 쇼크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으며, 예상하지 않았던 보상금이 통장에 두둑하게 쌓였다.
머그잔을 들고 식탁으로 자리를 옮긴 강성태는 느긋하게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마카오에 가기 전에 장숙경과 이모네 가족을 만나봐야지?
이모 장숙경에게 아파트도 하나 선물해야 하고.
어설프게 설명해서는 성격 강한 장숙경이 받지 않을 테니 어떻게 돈을 구했는지를 설명할 적당한 핑계도 필요하겠다.
물론, 최치곤에게도 어느 정도는 나눠줘야 하고.
마카오 회의, 부산에서 당한 이교창, 그리고 이병렬이 당부했던 신강남파의 내부 단속, 강성태는 모처럼 느긋하게 앉아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시간은 얼추 새벽 3시였다.
스마트폰을 든 강성태는 부산으로 향하고 있을 박노익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어딘가 힘이 맥이 빠진 듯한 그의 음성이 들렸다.
“강성태입니다. 어디십니까?”
- 태완이 형님과 의논해서 서울로 가는 방향을 돌렸어. 지금 신갈을 지나고 있다.
먼저 위치를 알려준 박노익은 이어서 박승양, 조태완과의 통화 내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우겨놓고 동생에게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한데 태완이 형님 말씀대로 지금은 체면 따지며 흥분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서 돌아볼 때란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동생.
조태완이나 박노익이 어떤 성격인지 익히 아는 강성태였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이 정도로 자제할 만큼 차웅진이 만만치 않다는 의미였다.
“잘 판단하셨는데 미안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 뭐라고 해도 신강남파 체면이 망가진 거라 그렇지. 차웅진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리면 부산 쪽은 말할 것 없고, 광주도 흔들릴 게 뻔한데 이럴 때 내가 서울로 돌아갔다고 해 봐. 다들 차웅진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놀라서 도망갔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부산에 내려가면 되죠.”
- 동생?
“당장 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아침 식사를 함께하기로 하셨다니까 저도 가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 뒤빡칠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보스가 온다는 걸 왜 마다해?
“그럼 약속 잡히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남은 커피를 마셨다.
차라리 잘됐다.
공연히 박노익마저 당했다는 소식을 듣느니 조태완의 의견대로 한 걸음 물러나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었다.
그 외에 바르지오 만시니를 통해 차웅진이라는 인물을 자세하게 알아본 뒤에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다.
몸을 일으킨 강성태는 양치를 마치고 침대로 움직였다.
내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자둬야 할 시간이었다.
**
육개장과 물을 준비한 조봉진이 한 걸음 물러난 뒤였다.
숟가락을 들던 이병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가 그래?”
“태완이 형님 모시는 또래와 통화하다가 들었습니다. 밤에 노익이 형님이 서울로 오셔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답니다.”
“후-.”
병실에 있기는 했지만, 이병렬은 라운드 면티에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그런 그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침을 준비한 조봉진과 그 앞에 함께 있던 김진용이 긴장한 표정으로 이병렬의 눈치를 살폈다.
“어떤 새끼냐?”
“예? 형님?”
“어떤 개새끼가 너한테 그 이야기를 했냐고?”
“죄송합니다, 형님.”
고개를 떨구며 내놓는 조봉진의 사과에도 이병렬은 눈빛을 풀지 않았다.
“누구냐고? 그 말을 해준 새끼가?”
“형님께서 물으시잖아?”
지켜보던 김진용이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듯한 눈으로 돌아본 직후였다.
“김석문이라고 지난번에 치곤이 형님이 꾸린 숙소에 있던 또래입니다, 형님.”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조봉진이 답을 내놓았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내 동생이라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욕을 퍼붓던가, 아니면 나나 진용이한테 끌고 왔어야지. 어디 이 씨발놈아, 모시는 형님 속사정을 밖에다 대고 나불거려? 그것도 교창이 형님이 당한 마당에?”
“죄송합니다, 형님. 생각이 짧았습니다.”
“생각이 짧아? 그래도 신강남파에서는 상징적인 분이 태완이 형님이야. 그런 분이 아침 식사를 누구랑 왜 하는지 시시콜콜 말이 도는 게 그냥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야? 이런 씨발 새끼가?”
언제 주먹이 날아가거나 탁자가 엎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진용아. 옷 좀 가져와.”
“예, 형님.”
독이 오른 이병렬의 지시에 김진용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는 거기 전화기 좀 가져오고.”
이번에는 조봉진이 후다닥 움직여 스마트폰을 가져와서 고개를 깊게 숙이며 내밀었다.
**
아침을 조태완, 박노익과 함께하기로 해서 잠에서 깬 강성태는 역시나 집에서 만든 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7시 30분이어서 박노익에게서 연락이 오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커피를 즐기면서….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예상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듯 책상 위에 두었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나다. 통화 좀 괜찮아?
이른 시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이병렬의 음성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야?”
- 오늘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께서 아침을 함께 드시기로 했다는데….
“나도 함께 먹기로 했어. 왜?”
- 그게 말이지.
통화의 중간에서 이병렬은 조봉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경호라고 하기엔 거창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조태완을 지키는 놈들이 해서는 안 되는 실수인 것만은 분명했다.
- 봉진이가 나불대고 다닐 정도면 말 이미 다 퍼졌다. 가뜩이나 경상도 교창이 형님이 당한 뒤라서 언제 기회를 노릴지 모르거든. 내가 영권이네 애들 태완이 형님께 보내고, 신월동 동생들 데리고 갈 테니까 빌라에 그대로 있어.
“그럴 필요가 있어?”
- 있어.
강성태의 질문에 이병렬이 확신처럼 단답형의 답을 내놓았다.
- 보스 실력이라면 어설프게 다치지는 않겠지. 하지만, 교창이 형님이 당한 이후에도 혼자 다닌다는 게 소문나면 어설픈 칼잡이 새끼들이 꼬드김에 넘어가서 설치기 딱 좋아.
미리 대비하자는 의미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었다. 강성태 역시 경호원으로 살 적에 바로 그렇게 행동했었다.
- 아직 상대 조직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은 상태니까 일단 내 말대로 하자. 이참에 조직 전체가 긴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상대방 배후에 차웅진 회장이라는 사람이 있다던데?”
- 뭐?
짧은 반문이었다. 그런데도 그 안에 놀라움, 생뚱맞음, 그리고 황당함이 한꺼번에 들어서 이름을 알려주었던 강성태가 오히려 의아한 느낌이었다.
- 차웅진 회장이라고 그랬지? 지금?
“노익이 형님이 그러던데? 그래서 태완이 형님과 의논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는 거라고.”
- 후-.
“차웅진 회장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다들 이러는 거야?”
- 조직 선배는 아닌데 부산 강치 형님이 고개 조아리며 숟가락 올려놓고, 그 옆에서 태완이 형님이 차 심부름했을 정도의 거물.
이병렬의 표현을 상상하던 강성태는 진짜로 숟가락을 올려놓는 조강치와 커피를 준비하는 조태완을 떠올리며 웃었다.
-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하여간 내가 갈 테니까 거기 그대로 있어.
“일주일만 참으라고 했잖아. 내가 신월동 숙소에 연락해서 함께 병원으로 갈 테니까 거기 있어.”
- 그래놓고 택시 탈 거 아냐? 빌라에 그냥 있어. 그리고 태완이 형님 쪽에 영권이네 애들 보낸다?
“알았다.”
더는 말리기 어려워서 강성태는 답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박노익은 말할 것 없고, 조태완이 차 심부름을 할 정도인 건지, 당장 차웅진 회장이라는 사람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
통화를 마친 이병렬은 바로 정영권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제법 울렸는데 정영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개새끼!”
욕을 뱉어낸 이병렬은 종료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이번에는 트와일라잇을 맡은 정소국의 번호를 찾았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였다.
- 정소국입니다, 형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너, 지금 어디냐?”
- 클럽 마감하고 동생들하고 아침 먹고 있습니다, 형님.
“그럼 숙소 애들 전부 데리고 지금 태완이 형님께 가. 가서 입구 틀어막고 내가 연락할 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막아.”
- 예? 형님?
“태완이 형님 움직이시는 게 샜어. 영권이 새끼 연락이 안 돼서 너한테 연락한 거니까 지금 당장 달려가라고.”
- 알겠습니다, 형님.
“도착하는 대로 바로 연락해!”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이병렬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기, 형님. 그렇게 따지면 노익이 형님께서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아! 이런 씨발!”
아차 하는 얼굴로 상체를 세운 이병렬이 또다시 스마트폰의 연락처를 찾았다.
- 여보세요? 진용도입니다, 형님.
“야! 신월동 숙소 애들 반으로 쪼개서 보스 빌라 앞으로 가고, 나머지는 지금 바로 기주한테 연락해서 노익이 형님 계신 곳으로 가! 비상이니까 연장들 전부 차고 가.”
- 예? 형님?
“아니 근데 이 씨발 새끼들이 전부 빠져가지고! 야, 이 새끼야. 지금 부산에서 교창이 형님이 당했는데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움직이는 거야?”
- 아닙니다, 형님. 지금 바로 동생들하고 움직이겠습니다. 보스께 동생들 절반 보내고, 나머지는 노익이 형님 모시러 가겠습니다, 형님.
“도착하는 대로 연락해라.”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이병렬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 식어버린 육개장을 착잡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너는 새끼야, 그러고 있지 말고 커피나 한 잔 타와.”
“예, 형님.”
한쪽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조봉진이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움직였다.
“선사 시대 공룡이 살아난 것도 아니고, 느닷없이 차웅진 회장이 왜 나오는 거야?”
“저는 말로만 들었습니다, 형님. 조직 선배도 아니고, 어차피 성태 형님께 대들 조직이 없는데 이렇게 조심해야 합니까, 형님?”
질문을 받은 이병렬이 김진용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양반 할아버지가 일제 총독부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더라. 그때 쌓아놓은 돈으로 정치 쪽에 힘을 써서 조직을 정리하다시피 했던 양반이라고 들었다.”
이병렬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에 종로랑 청량리, 영등포에 삼칠별타라는 불법 성인오락실이 유행했던 적 있거든. 그거 전부 그 양반 작품이다. 30년 전쯤이라 옛날이라고 하기는 그런데, 그거 먹으려고 대들던 조직은 경찰서가 아니라 안기부에 끌려가서 아예 바보가 돼서 나왔다는 전설을 만든 사람이 차웅진 회장이다.”
“그건 옛날이야기 아닙니까, 형님?”
김진용의 질문에 이병렬이 쓰게 웃었다.
“보스가 아무리 검찰하고 방송국 회장을 붙잡았다고 해도 그 양반은 그 위쪽을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공권력이 전부 우리를 죽이겠다며 달려들 수 있어.”
이병렬의 설명이 끝난 다음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받아들였는지 반 박자쯤 느리게 김진용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부산 쪽을 두들기고 나서 나타난 걸 보면 일본하고 연결됐었던 모양이지. 나는 진짜 차웅진이라는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설명을 마친 이병렬은 조봉진이 가져다 놓은 종이컵을 들었다. 손도 대지 않은 육개장이 먹다 남은 것보다도 볼품없이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