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2부 18권 - 11화
자정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강성태를 바라보는 안호상의 표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강성태가 듬직하고 대견하다는 느낌, 그러다가 문득 드는 불안함,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 그러면서도 딸인 안다미의 미래가 염려되는 감정이 술기운을 넘어서 수시로 드러났다.
강성태가 알아보았을 정도이니 안다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시종일관 술잔을 기울이며 안호상과 지내왔던 과거의 일들을 재미있게 풀어냈다.
지금 보이는 안호상의 감정을 이해하며, 이 정도 반응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무렴, 딸이 사랑한다는 남자가 매일 칼에 찔려 나타나고, 죽기 직전의 동료들을 맡기는데 어떤 아버지인들 마음 편할 수 있겠나.
그나마 멕시코에서 안다미를 구해주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이렇게 받아준 것만 해도 안호상에게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막말로 구해준 건 구해준 거고, 차라리 돈으로 보상할 테니 떠나가 달라고 했어도 사실 강성태는 뭐라 할 말 없는 모습이었다.
“우리 노래나 하러 갈까?”
시선을 들어서 강성태의 눈을 보았던 안호상이 뜬금없는 제안을 내놓았다.
아차 싶었다.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강성태에게 노래방에 가자는 안호상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성태의 심정을 안호상 역시 알아차렸던 모양이었다.
“아빠. 너무 늦었어요. 저 내일 오전에 출근이에요.”
“가시죠, 아버님. 저 노래 좀 합니다.”
“성태 씨?”
“흐하하하. 그래, 우리 사윗감 노래 한번 들어보자. 너는 먼저 들어가.”
복잡한 감정을 보여서 미안한 아버지, 그 모습을 이해해서 노래방에 가자는 제안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강성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던 안다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가요. 노래방. 노래만 못해봐라.”
그렇게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계산하려 움직이는 강성태의 팔을 안호상이 잡았다.
“이건 아버지가 사야지. 너는 다음에 좋은 곳에서 사.”
유쾌한 모습을 유지하려는 안호상의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강성태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맛있게 드셨어요?”
“나는 늘 좋지.”
넉넉한 농담과 함께 계산을 마친 안호상이 강성태, 안다미와 가게를 나섰다.
노래방을 찾으려면 신월동 오거리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멀리 갈 거 없이 저기 어때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안다미가 프리 스테이션을 가리켰다.
간판과 입구를 새로 단장해서 확실히 깔끔해 보였고, 무엇보다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음악 소리가 듣기 좋았다.
오죽하겠나.
실력 있는 연주에 필리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일 테니.
일이 꼬이려고 그랬을까.
강성태가 다른 곳을 추천하려는 순간, 계단에서 올라온 필리핀 조직원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말릴 틈도 없이 정중한 태도로 상체를 깊게 숙였다.
“아는 사람이냐?”
“필리핀 출신 가수인데 이곳에 가게를 새로 오픈한다고 했었습니다. 그게 저기인 모양이네요.”
적당하게 둘러댔다. 그런데 다른 곳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강성태의 심정을 외면하고 이어서 아르윈이 입구로 나왔다.
“형님.”
그는 심지어 강성태를 향해 곧바로 다가왔다.
‘하지 마. 인사하지 마. 절대로.’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강성태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강성태의 눈빛을 알아차린 아르윈이 적당한 인사를 건넨 후에, 이어 안다미를 향해 아는 체했다.
“여기에서 일하세요?”
“예. 내일 개업이라 오늘 간단하게 모였습니다. 키란도 여기 있고요.”
“키란 씨가요?”
“혼자 지내는 게 안쓰러워서 데려왔는데 아침까지 병원에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뒤통수를 만지며 말을 전한 아르윈이 안호상을 향해 뜬금없이 인사했다.
“방지병원에서 뵈었는데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르윈이라고 합니다. 여기 강성태 회장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필리핀 연주자와 가수들의 출연이 수월해졌고, 대우도 전에 비할 바 없이 좋아졌습니다.”
“우리말을 잘하시네요.”
“아버지가 한국분입니다.”
“아, 그래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손님들을 상대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아르윈은 안호상과의 대화를 능숙하게 풀어냈다.
“이쪽은 어쩐 일이십니까?”
“적당한 노래방을 찾다가 간판이 눈에 들어와서 왔던 길이오. 내일 개업이라니까 다음에 꼭 들리지요. 혹시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으면 추천 좀 해주시겠소?”
아르윈이 강성태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간절한 눈빛이어서 순간, 강성태는 옅게 웃고 말았다.
“원장님만 괜찮으시면 제가 모시고 싶습니다. 여기 안다미 선생님께 신세도 많이 졌고요. 어떠십니까?”
“개업이 내일이라며?”
“축하해주시는 의미로 받아주십시오.”
가디언스파 책임자로만 알던 아르윈에게 이렇게나 싹싹한 모습이 있는 줄은 몰랐다.
언젠가 이병렬이 진상 손님을 달래다가 얼굴에 맥주를 맞았다더니 아르윈도 손님을 상대할 때는 이렇게 자세를 낮추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래?”
여기에서 어떻게 거절하겠나.
고개를 돌린 앞에서 안다미의 눈매가 그리 탐탁지 않았다. 호텔 룸에 함께 있었다던 필리핀 여자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눈치를 살피는 강성태를 보며 안다미가 어이없다는 느낌의 웃음을 보였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들어가 보죠. 어때요? 성태 씨?”
“예.”
강성태는 정말이지 얌전한 태도로 안다미의 결정에 따랐다.
**
조태완은 거실에서 스마트폰을 받았다.
- 쉬시는 데 죄송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자면 그게 이상하지. 부산에 가던 길 아니었어?”
- 예. 지금도 고속도로에 있습니다. 그런데 형님. 조금 전에 제가 아는 사채업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내용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세아가 있는 안쪽을 돌아보았던 조태완이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무슨 일인데?”
- 교창이가 당한 일의 배후에 차웅진 회장이 있답니다.
“이런 씨발.”
마치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투로 이름을 듣기 무섭게 조태완은 욕을 뱉어냈다.
편안한 잠옷 차림이었다. 그런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맞은편의 작은 바로 움직여 잔과 코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 짐작하셨습니까?
어깨와 볼에 스마트폰을 끼운 조태완은 코냑의 뚜껑을 뽑고는 잔에 반쯤 채웠다.
“혹시 하는 마음은 있었지. 강치 형님이 들여온 돈이나 약을 풀어낼 사람이 그 양반 말고는 없으니까. 대신 너무 오래 이름이 안 들려서 외국으로 나갔거나 은퇴한 거 아닌가 기대한 것도 있고.”
왼손으로 코냑의 뚜껑을 눌러 닫은 조태완이 잔을 손에 넣고 술을 천천히 돌렸다. 빌라에서 칼을 맞은 이후로 절대 입에 대지 않던 코냑이었다.
“사채업자는 뭐래?”
- 웅진이 형님이 야쿠자로 앞마이를 세웠고, 뒤에서 삼합회가 움직인 거로 보고 있답니다. 그래서 저더러 부산에 가지 말고 우선 보스를 만나서 의논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오는 길이야?”
- 부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형님.
박노익의 답을 들은 조태완은 잔을 기울여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을 마신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독한 기운을 삭였다.
- 보스에게 제가 수습하게 해달라고 당부해놓고 이대로 서울로 가면 우리 신강남파가 겁먹은 모양새가 될 거 같아서 도저히 그냥은 못 올라가겠습니다, 형님.
“동생은 아직 젊다.”
- 형님이라도 이렇게 하셨을 거 같습니다.
“나는 동팔이 새끼한테 연장질 당하면서 다 부러졌어.”
쓰게 웃으며 답한 조태완이 잔을 돌리며 안에서 휘감기는 코냑을 내려다보았다.
“동생. 그러지 말고 일단 올라와. 우리 나이는 자존심보다는 어떤 게 현명한 행동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돼. 그게 조직과 보스를 위하는 길이고. 고문이라는 자리는 그래야 한다.”
박노익의 대꾸는 없었다.
과거라면 침묵하는 박노익에게 당장 으르렁거리며 쌍욕을 날렸을 조태완이 그를 이해한다는 듯 잠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차웅진이라면 우리 중 누가 죽어 나갈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 둘 다 교도소에서 남은 인생을 모두 보내야 할지도 모르고. 우리 보스 성격이 부러지면 부러졌지 고개 숙이지 않으리라는 건 동생도 알지?”
- 그래서 내려가려는 겁니다, 형님. 교창이가 저렇게 당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시작은 제 손으로 하겠습니다.
“당하는 게 시작이라고 생각하냐? 보스가 눈 뒤집혀서 날뛰는 거 보려고? 동생이 당해서 누워있으면 퍽도 우리 보스가 냉정하게 차웅진을 상대하겠다.”
웃을 대화가 아니었는데도 말을 뱉은 조태완이 킬킬대며 웃었고, 스마트폰 너머에서 박노익이 비슷한 느낌의 웃음을 토해냈다.
“예전에 내가 차웅진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업소 관리하는 상무였는데 가게에 와서 인사했었지. 나는 고개도 못 드는 형님들이 그 앞에서 기다시피 하더만. 언젠가 나도 저렇게 돼야지 했는데 나는 임자를 만났지. 자네도 비슷할 테고.”
- 보스를 말씀하십니까?
“그럼 누가 또 있어? 말이 나서 하는 말인데 호텔에 잡혀서 죽기 직전에 성태 형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었다. 그때 생각했던 건데 이 인간한테는 진짜 안 되겠구나 싶더라. 그래서 동팔이가 작업할 때 가장 먼저 연락했었다.”
천하의 조태완이 수치스러운 지난 일을 꺼내놓는 터라 박노익은 “예, 형님.” 하는 추임새만 겨우 내놓았다.
“정훈이 장례식장에서 강치 형님을 씹어대는데 속이 얼마나 후련하던지 정말 고맙더라. 그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보스한테 나는 적수가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보스를 믿는다.”
- 형님?
“씨발. 차웅진이 넘기 어려운 벽이기는 한데, 우리한테는 강남 삼대장을 누르고, 부산 강치 형님을 자빠트린 보스가 있잖냐. 막말로 차웅진이 조직 선배도 아니고, 깡패 뭐 있어? 보스가 붙으라면 다 같이 달려가서 해보는 거지.”
- 약주 하셨습니까, 형님?
“이 새끼가?”
- 흐하하하하. 그렇게 욕해 주시니까 젊은 시절로 돌아간 거 같습니다, 형님.
“원하면 더 해주마.”
- 아닙니다, 형님. 그럼 다음 요금소에서 차 돌려서 우선 올라가겠습니다.
“피곤하더라도 아침 같이 먹자.”
- 일어나시면 전화 주십시오, 형님.
“차웅진하고 붙으려면 쉽지 않다. 조심해서 와.”
- 아침에 뵙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조태완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들고 있던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크흐.”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모자라 술기운을 뱉어낸 그는 아직 반도 마시지 않은 잔을 내려놓았다.
“뒈질 때도 됐구만, 참 질기게도 사네, 진짜.”
차웅진을 떠올린 것처럼 혼잣말을 뱉어낸 조태완은 안쪽에서 나오는 인기척에 시선을 들었다.
“왜 안 자고?”
“오빠가 그러고 계시니까요.”
“아이고, 참. 전에는 어떻게 지냈냐?”
“오빠 연락받을 때까지 책 읽으면서 견디곤 했어요.”
어쩌지 못한다는 얼굴로 조태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는데 술을 드시면 어떻게 해요?”
“그냥 냄새만 맡았어. 그나저나 뭐 먹고 싶은 건 없냐? 남들은 한밤중에 딸기도 생각나고, 한겨울에 수박도 먹고 싶다던데?”
“저, 먹고 싶은 게 있기는 해요.”
“뭔데?”
고개를 기울인 조태완 앞에서 오세아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뭔데 말을 못 해?”
“강남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먹었던 스테이크요.”
고개를 갸웃했던 조태완이 ‘에이그.’ 하는 눈으로 오세아를 보았다.
오세아를 돌보다가 처음으로 감정을 전했던 곳이고, 그때 주문했던 음식이 스테이크였다.
“내일 먹어도 되겠어? 지금은 어차피 문을 닫아서 주방장 납치하지 않는 한 구하지도 못해.”
“가실 수 있어요?”
“스테이크 하나 못 먹겠냐? 대신 오전에는 약속이 있으니까 저녁에 가자. 그러면 되겠지?”
오세아의 등을 다독인 조태완이 조심스럽게 움직여 침실로 향했다.
딸일지, 아들인지 모르지만, 태어날 아이만큼은 꼭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을 가슴 속 깊이 품은 채였다.
**
아르윈은 눈치가 빨랐고, 그만큼 필리핀 가수들과 조직원들을 빠르게 통제했다.
그 바람에 분위기는 정말 최고였다.
솔직히 말해 안호상은 노래를 정말 못 불렀다. 그리고 부르는 노래 중 그나마 알 만한 곡이 ‘보리밭’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어느 분야나 전문가가 있는 법이어서 안호상의 엉성한 박자에 필리핀 연주자들의 연주가 착착 감겨 들어갔고, 필리핀 가수들이 화음을 멋지게 깔아주자 분위기가 살아났다.
맥주가 나왔고, 주방에서 최선을 다해 만든 요리도 나왔다.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는 안호상을 양팔로 안은 안다미 역시 오랜만에 과거를 회상하는 부친의 모습이 나쁘지 않은 것처럼 감정이 한껏 올라온 얼굴이었다.
“자! 이제 자네가 해 봐.”
안호상이 넘겨주는 마이크를 강성태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 거절하는 건 모처럼 만의 분위기를 깨는 느낌이어서 그랬다.
연주자에게 곡을 알려준 강성태는 안호상에게 인사하고 마이크를 들었다.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짙은 어둠을 헤매고 있어.”
커피알리고 회식 때 간혹 노래방에 들렀고, 김민재, 김민정과 갔을 적에도 부르기는 했지만, 한동안 잊고 지냈던 노래였다.
“지쳐 쓰러지며 되돌아가는 내 삶이 초라해 보인데도.”
연주자들이 시선을 돌려 마주 볼 정도로 놀랐고, 아르윈과 키란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안다미는 넋을 빼앗긴 얼굴이었다.
천천히 돌아가는 조명, 직접 연주해서 나오는 반주, 작은 무대였지만, 그 위에 선 강성태는 유독 빛나 보였다.
“소중하게 남긴 너의 꿈들을 껴안아 네게 가져가려 해. 어두운 세상 속에 숨 쉴 날들이 이제 잊혀지도록.”
노래가 끝난 순간, 안다미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긴 숨을 내쉬었다.
“정말 잘 부르는구나. 성태 저 친구는 차라리 가수를 할 걸 그랬다.”
그리고 안호상이 진심에서 나온 감탄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