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2부 18권 - 10화
뭔가 느꼈을까.
아니면 강성태를 기다려서 그랬을까.
활짝 웃으며 상체를 세우던 안다미가 가게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꽃다발과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강성태를 보며 눈가를 좁혔다.
- 홍콩에 다녀온 길이라며? 뭔지는 몰라도 관광 갔던 건 아닐 테고, 몸도 아직 제대로 낫지 않았으니까 이번 일은 노익이에게 맡기면 어때?
“노익이 형님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렵잖습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에 선 강성태를 확인하느라 안다미가 상체를 기울여가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러지 말고 노익이에게 맡겨. 교창이를 추천한 게 노익이라 지금 보스가 직접 나서면 아무래도 망신당하는 모양새라 그래. 하루만이라도 참았다가 보고를 받고 움직이면 어때?
강성태를 생각해서 한 말인지, 아니면 정말 박노익의 체면을 봐줘서 이러는 건지 확실하지 않아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병렬이 옆에 있다면 듣는 순간 알아챘을 일인데 말이다.
- 사채로 돌린 돈 때문이라면 어차피 노익이가 전문가야. 그러니까 이번은 내 말대로 하자.
또다시 넘어온 조태완의 음성이 간곡해서 강성태는 일단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 알았다. 그럼 내가 노익이와 통화할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횟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바깥에서 유독 하얗게 밝혀 놓은 횟집 조명 안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손님들의 시선이 강성태에게 몰렸다.
홍콩에서 구한 양복이 지금 서울에서의 유행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 바람에 과거 금주 시대의 마피아 복장처럼 강성태를 더욱 도드라지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장미꽃이 가득한 꽃다발마저 들어서 손님들의 시선은 꽃다발, 강성태,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안다미를 향해 이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와.”
뒤늦게 일어난 안호상이 강성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몸은?”
“돌봐주신 덕분에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강성태의 목덜미로 올라온 메디폼을 분명하게 보았는데도 안호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미 씨.”
“고마워요.”
순서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꽃다발을 받아든 안다미가 별만큼이나 반짝이는 눈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이 정도로 기뻐하는 안다미를 보자, 어쩐지 이병렬에게 한 수 뒤진 심정이었다.
“뭐 해? 앉아. 앉아서 이야기해. 여기 콜라 하나 주세요.”
인사하는 안다미의 맞은편에서 안호상이 손바닥을 아래로 저으며 자리를 권했다.
셋이서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안다미가 간장과 초장을 담을 작은 종지를 앞에 놓아주었고, 직원이 콜라 한 병과 맥주잔 두 개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원장님? 이분은 누구세요?”
“우리 사위?”
“정말요?”
자주 오던 곳이었나 보다.
배가 불룩한 아주머니의 질문에 넉넉하게 답한 안호상이 대견하다는 시선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좋으시겠어요.”
“내 소원이 아들 녀석과 사우나 가는 거였잖아. 골프도 하고 싶고. 결혼만 해 봐. 내가 은퇴하고 저 녀석과 종일 놀러 다닐 거니까.”
“병원은요?”
“아, 얘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
술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오늘 안호상은 유쾌했다. 심지어 안다미와 강성태를 자랑하고픈 욕망마저 벌겋게 변한 눈가와 볼에 묻어있었다.
“성태 씨.”
그 앞에서 안다미가 콜라를 들어서 강성태의 잔에 따라주었다.
말하지 않았다. 안호상과 안다미 모두.
그러나 상처 때문에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으로 보였다.
이런 신랑 만나서 좋겠다는 넉살과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직원이 돌아간 뒤였다.
안다미가 그때까지 다리에 올려두었던 꽃다발을 들어서 가슴에 안고는 향을 맡았다.
과장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장미꽃 꽃다발이라고 하지 않았었냐?”
“그걸 기억하세요?”
강성태는 의아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다미 씨 정도면 꽃다발 주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거 같은데요?”
“으음.”
안호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성격이 저래서인지 몰라도 어설프게 살고 있는 아파트가 어쩌네, 차가 어쩌네,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했네, 했지만 이렇게 꽃을 사 온 건 처음인 거 같은데? 아 참! 그러지 말고 회부터 좀 먹어. 아니면 뭘 좀 더 시킬까?”
“이거면 충분합니다.”
회를 집어 입에 넣은 강성태가 아쉬운 얼굴로 소주를 돌아보자 안호상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웃었다.
장숙경을 만나보았을 때의 첫인상과 이모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이렇게 안다미의 곁에 앉아 있는 강성태를 보는 솔직한 감정, 술기운을 빌린 듯 안호상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연신 소주잔을 들어서 안다미와 함께 들이켰다.
20분쯤 지난 뒤였다.
“아빠. 성태 씨 보내도 되죠?”
“뭐?”
안다미가 던진 질문을 받은 안호상이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급한 일이 있는 얼굴이거든요. 그래서 혹시 진짜 그런 거면 그만 가보라고 하려고요.”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안다미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우리 둘이 있다가 급한 수술로 달려가는 일이 굉장히 많을 거예요. 그때도 지금 나처럼 이해해줘야 해요.”
이런 강단이라니.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가 막힌 심정이어서 강성태는 보기 좋은 웃음을 그려냈다.
“누군가 성태 씨의 도움을 기다리는 거잖아요. 어떤 일을 해도 나는 성태 씨 믿을 건데, 알죠? 필리핀 여가수랑 한방에 있는 것만큼은 안 돼요. 알았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힐끔 강성태를 돌아보았던 안호상이 ‘너 잘못 걸렸다.’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안다미가 이 정도로 끝내는 거 봐서는 그리 큰 잘못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일이 있기는 한데 제가 나서지 않기로 해서 억지로 참고 있는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부산에서 일이 있었습니다.”
유충일과 최치곤을 기억하는 두 사람의 얼굴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마음 같으면 달려가고 남는데 그 일을 더 잘할 분이 있어서 하루쯤 기다렸으면 한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견디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본 모양입니다.”
“누가 크게 다쳤나?”
주변을 돌아본 강성태는 가능한 한 태연한 얼굴로 안호상을 마주 보았다.
“부산을 통해 일본 자금이 꽤 들어와 있었던 모양입니다. 모두 고리대금업으로 풀렸고요. 그걸 막았더니 일이 생겼나 봅니다.”
“일본에서 들어온 돈을 자네가 막는다고? 그게 가능해?”
“정식으로 들어온 돈이 아니라 소규모 기업에 투자하는 형태로 들어와서 사채로 풀리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일본 폭력 조직의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괜찮은 거야?”
“아빠-아!”
이야기에 너무 빠져든다고 여겼는지 걱정이 가득한 안호상을 안다미가 애교 묻은 음성으로 불렀다.
“성태 씨가 알아서 할 거예요. 아빠하고 나한테는 거짓말하기 싫어서 있는 대로 말한 걸 테고요.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들어요. 제가 밀동 여학생 이야기 말씀드렸죠? 성태 씨는 그런 사람이에요.”
안호상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안다미의 눈을 보며 강성태는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저 맑은 눈빛에 담긴 믿음에 맞게 행동했는지 자신하기 어려워서였다. 당장 꽃다발을 들었던 손에 밴 피 냄새도 제대로 지우지 못했다.
“그럼 안 가도 되는 거예요?”
“예. 대신 한 가지 바라는 건 있습니다.”
“뭔데요?”
뜨거운 눈빛을 마주하며 나눈 대화였다.
이것들이 설마 사람 많은 곳에서 아비를 앞에 두고 키스를 하지는 않겠지?
강성태보다는 안다미의 강단이 두려운 눈치였다. 안호상은.
“폭탄주 한 잔만 마시면 안 될까요?”
“그래! 안 가도 되면 차라리 한잔해라.”
“아빠?”
“놔둬. 남자라는 게 이럴 때 객기도 부리고 하는 거지. 대신 딱 두 잔만이다.”
“왜 또 늘어요?”
“한 잔은 너무 야박하잖아.”
안다미의 새초롬한 눈빛을 모른 척한 안호상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여기 맥주 한 병만 주세요.”
“예, 원장님.”
맥주가 왔다.
잠시 고민하던 강성태는 안호상을 생각해 소주를 적당하게 바닥에 깔고 맥주를 그 세 배쯤 부었다.
“이건 성태 씨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성태 스타일은 뭐냐?”
“일대일이에요.”
강성태가 만든 잔을 가져가 시원하게 마셔버린 안다미가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는 강성태 앞으로 내밀었다.
‘괜찮겠어요?’
강성태가 시선으로 물었고,
“지난번에 포장마차에서 봤잖아요. 나를 훈련시키신 분이 우리 아빠예요. 다섯 잔쯤 괜찮으실 거예요.”
안호상이 궁금하게 바라보는 앞에서 강성태는 일대일의 폭탄주를 석 잔 만들어서 두 사람 앞에 놓아주었다.
“이럴 거면 한 잔만 해야지.”
“아버님이 그러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는 이거 자주 마시냐?”
“전에는 일 끝나고 가끔 마셨습니다.”
“얼마나 마시는데?”
안다미를 돌아본 강성태가 다시 안호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략 열 잔 정도면 기분 좋게 끝났습니다.”
“안 취해?”
“예.”
기가 막힌 얼굴로 웃은 안호상이 마침내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셋이서 처음 마시는 술이구나. 그런 기념이라면 이 정도는 마셔줘야지.”
안호상이 내민 잔을 향해 강성태가 잔을 뻗었다.
몸을 돌려 잔을 비우는 강성태를 안호상, 안다미, 가게의 아주머니, 손님들이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
박노익은 뒤 볼 것 없이 부산으로 달렸다.
운전은 평소 데리고 있던 동생이 했고, 조수석에 문기주가 앉았으며, 뒤에 승용차 두 대가 따랐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부산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박노익은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의 액정을 확인했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나요. 박노익.”
- 말씀하셔서 알아봤는데 일이 좀 큽니다. 그냥 큰 게 아니라, 이거 완전히 공룡 알이에요. 아시지, 공룡알? 괜히 건드리면 엄마 공룡, 아빠 공룡, 다 나타나서 불 막 뿜어대는 공룡. 아기 공룡, 뚜르르뚜르. 엄마 공룡, 뚜르르뚜르.
지금 부산의 상황과 밤에 달려가는 심정을 빤히 알 텐데도 속없이 늘어놓는 너스레에 박노익은 올라오는 분통을 억지로 삼켰다.
“공룡 아니라 세상 없는 게 나와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누가 한 짓인지나 알려주시오.”
- 차웅진 회장이오.
이를 깨문 채 던진 박노익의 질문에 박승양은 주저하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 말문이 턱 막히시지? 거기에 일본 야쿠자가 앞마이를 섰고, 뒤를 삼합회가 지원하는 형태요.
“차웅진 회장이 나선 게 분명합니까?”
- 그 양반이 조강치를 통해 자금을 돌렸던 모양이오. 정치권, 검사, 판사, 하다못해 국세청까지, 과장급 이상치고 그 양반 돈 안 먹은 사람이 없다는 차웅진 회장이 움직인 건 분명합니다.
“흐음.”
- 신강남파 보스가 대단하기는 한 거지. 지난 17년간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떠돌지 않을 만큼 그림자로 살았던 차 회장을 불러냈으니까. 나는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보았지만, 거기엔 오직 어둠뿐이었어. 이게 지금 신강남파의 미래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들으면 빈정대는 소리였는데 박노익은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조태완과 박노익을 꼬마 취급할 수 있는 인물, 지금껏 강성태가 손에 넣은 조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조직을 대번에 그의 아래로 쭉 줄 설 정도의 힘과 권력, 돈을 지닌 인물이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그가 부른다는 말 한마디면 겨우 수습한 광주와 부산의 조직원들 상당수가 우르르 달려갈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 조개를 줍다 보니까 뻘밭에 발이 빠진 겁니다. 물은 자꾸 밀려오는데 킹크랩이 집게발로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매달린 꼴이고.
“알았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또 아는 게 있으면 연락해주시오.”
- 박 회장. 오늘은 일단 부산에 안 가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지금 차를 돌립시다.
가라앉은 음성으로 전하는 박승양의 경고였다. 그리고 그의 이런 경고는 함부로 할 게 아니었다.
- 명동에서 어음 심부름하던 박승양이 사채시장의 일 빳다로 꼽히는 세상이오.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과거의 인물은 새 물결에 쓸려가는 법이고. 강남 삼대장이 젊은 보스를 모실 거라고 누가 생각하기나 했었소?
천하의 박승양이 박노익을 달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부산으로 향하는 길이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 차웅진 회장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지금은 부산으로 가기보다는 그 젊은 보스에게 가서 의논하는 게 먼저요.
“크흠.”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보며 박노익은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박승양의 권유가 가장 현명한 방법인 건 안다. 하지만 말이다. 깡패가 돼서 밀어줬던 동생이 당했다는데 얼굴을 안 내미는 건 신강남파 스스로 겁먹었다고 떠드는 것과 같았다. 더구나 강성태에게 내려오지 말라고 당부까지 한 상태여서 박노익이 돌아가면 신강남파 전체가 바보 꼴이 된다.
“알았습니다. 또 통화합시다.”
짧게 말을 던진 박노익은 종료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는 말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차창 밖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