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2부 18권 - 9화
제4장. 듣고 있습니다.
병실에 들어선 강성태를 보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병렬이 몸을 세웠고, 뒤편에 서 있던 김진용이 상체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선물은?”
인사하는 김진용의 앞에서 이병렬은 강성태의 손에 시선을 주었다.
“면세점에 들를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왔다. 시간 봐서 양복을 한 벌 사줄게.”
강성태의 대꾸가 마음에 들었다는 투로 이병렬이 웃었다.
“앉자. 커피 할래? 진용이가 신경 써서 준비한 게 있거든.”
곤잘레스 이두안이 그러더니 이병렬도 강성태가 마실 커피를 신경 쓰고 있었다.
“이번까지만 준비한 거로 마시고 다음부터는 봉지 커피로 주라.”
“봉지 커피?”
“믹스 커피 말이야. 그게 마셔보니까 달달한 게 좋더라고.”
“조직에서 구르더니 우리 보스 입맛이 싸구려가 됐구만.”
둘이서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김진용이 온수대에서 받은 물을 포트에 다시 끓이고 있었다.
“태완이 형님하고 통화했다.”
강성태는 조태완과의 통화 내용을 이병렬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였다.
김진용이 포트를 기울여 커피를 담은 거름망에 둥그렇게 붓고 있었다. 누군가에게서 배운 모양이었다. 고마웠다. 하지만, 김진용을 시작으로 앞으로 강성태를 만나거나 챙겨야 하는 덩치들이 저런 기술을 배우려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당장 달려드는 커피 향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커피 드십시오, 형님.”
“고마워.”
커피를 받은 강성태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시자 이병렬과 김진용이 기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강성태는 마음에 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이병렬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본 돈이 정말 그렇게 들어와?”
“전국에서 크게 사채를 하는 업자들의 절반은 일본 야쿠자 돈을 굴린다고 들었거든. 그거 말고도 TV에 광고까지 하는 업체들 대부분은 일본 돈이라고 하던데 자세한 건 아무래도 노익이 형님을 만나봐야 제대로 알지 않을까?”
강성태의 질문에 답한 이병렬이 확인처럼 시선을 들었다.
“지난번에 김종수가 돈을 들여온다는 말도 있었고, 아무래도 노익이 형님과 부산 다녀와 봐야 확실하지 싶다. 언제 갈래?”
“일주일은 움직이지 말라고 들었다.”
“차 타고 갈 거고, 커피숍에 얌전히…. 아, 거 진짜! 뭐하면 휠체어 가지고 가면 되잖아.”
끝까지 말리면 김진용과 둘이서 따로 움직일 눈빛이었다.
“얌전히 있는 거다.”
“내가 또 보스 말은 정말 잘 듣는 넘버 투 아니냐?”
말해놓고 본인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이병렬이 기가 찬 표정으로 웃었다.
“홍콩은 어땠어?”
“그냥 원만하게 끝났어. 그래서 일찍 왔고.”
“원만하게? 목에 새로운 상처까지 달고서 원만하게?”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굳이 홍콩에서의 일을 떠벌이기 싫어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노익이 형님께 전화 한 통만 하고.”
그런 뒤에 박노익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통화되십니까?”
- 그렇지 않아도 태완이 형님께서 말씀하셔서 동생 전화를 기다리던 참이다. 전화로 길게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내일 점심 어때?
“사무실로 가면 되겠습니까?”
- 나는 어디든 상관없어.
“그럼 내일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얌전히 탁자에 있던 잔을 들어 반쯤 식은 커피를 마셨다.
“내가 이 모양이라 그런데 내일쯤 진용이나 종환이, 아니면 섭우를 데리고 클럽이랑 카지노 한 바퀴 돌아줘. 부산 일로 태완이 형님께서 저리 급하게 전화한 걸 보면 내부 단속이 아쉬운 게 아닌가 싶거든.”
강성태가 든 시선 앞에서 이병렬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깡패라는 게 그래. 틈이 생기면 엉뚱한 생각을 품어. 현금 매상 빼돌려서 딴 주머니 차는 걸 모두 막을 수는 없지만, 조직이 관심을 두고 지켜본다는 걸 알려주면 아무래도 조심하게 되지. 명심해. 보스가 조직의 시작이고, 끝이다.”
강성태를 향해 조직의 생리를 전하는 이병렬은 직전까지와 달리 음성마저 진지했다.
“보스가 적당한 선에서 노름이나 술을 좋아하길 바라는 놈들도 있을걸? 그래야 해 먹기 좋거든. 클럽 대가리가 다른 주머니를 차면 아랫놈들 역시 뒷돈 받을 일을 찾아. 그렇게 천천히 썩어가는 거고 한 번 물든 놈은 못 돌아와.”
일이 끝없이 생겼지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만나는 의사 선생한테 가봐야 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일어서자. 그리고 앞으로 어디 다녀오면 나는 몰라도 의사 애인한테는 선물 좀 사 오고 그래. 내가 그런 쪽을 좀 아는데 꽃을 사가. 그게 효과가 좋아.”
두꺼비를 흉내 내듯 웃음을 삼키는 김진용의 표정이 아니더라도 여자 문제에 관해서 이병렬의 능력에는 물음표가 붙었다. 게다가 벽에 몰아붙이고 혀를 날름거리라는 최치곤보다는 그래도 인간적인 조언이었다.
안다미를 찾아가 봐야 할 것만은 분명해서 강성태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병렬과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강성태는 병실을 나섰다.
홍콩에서 돌아온 길이었다.
잠이 부족한 데다, 바르지오를 구해내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닌 탓에 꽤 피곤했는데 그렇더라도 안다미를 만나고 싶었다.
최치곤과 유충일을 위해 애써준 데 대한 인사조차 제대로 못 해서 진짜 꽃이라도 들고 가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서라대학병원에 들러보자.
마음을 정한 강성태가 주차장에 내려갔을 때였다.
“다녀오셨습니까, 형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다가오는 덩치들 앞에 아르윈이 있었다.
“여기 키란 동생을 병원에도 데려다줄 겸 해서 조직원들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형님.”
“잘 왔어. 그렇지 않아도 서라대학병원에 가볼 생각이었거든. 다른 일은 없어?”
“내일 가게 오픈하는 거 빼고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형님.”
“차 가져왔지?”
“형님 차를 병원에 뒀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주차장 안쪽으로 움직인 키란이 독일제 S500을 앞쪽으로 가져왔다.
“힘들겠지만, 병렬이와 충일이, 치곤이 부탁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형님.”
주차장에 있는 덩치들을 다독인 강성태는 키란에게 눈짓을 주고는 승용차에 올랐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덩치 한 명이 움직여 뒷문을 열었고, 강성태가 타고 난 뒤에 문을 닫고는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그리고는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승용차를 향해 서열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수없이 보고, 매번 출발할 때마다 받는 인사였지만, 지금껏, 앞으로도 절대 편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
토끼는 풀을 뜯어야 속이 편하고 늑대는 고기를 먹어야 살아간다. 토끼나 늑대와는 좀 다른 경우지만, 며칠을 얌전히 호텔에 있던 이교창은 인내심의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죄지은 것도 아니고, 저녁부터 호텔 방에 얌전히 처박혀 있으려니까 팔꿈치와 무릎이 욱신거리더니 지금은 아예 교도소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좋은 횟감은 관두더라도 조개 구워가며 소주 한 잔 들이켜주면 갑갑한 속이 쑥 내려가련만, 창밖으로 보이는 건 부산의 빌딩들이고, 바다 냄새는커녕 호텔 방 특유의 묘한 향이 전부였다.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대던 이교창은 소파에 던져두었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부산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서 달려들 놈들도 없었고, 또 있다고 해도 경상도에서 데려온 동생들이 함께 있어서 딱히 위험할 일도 없었다.
번호를 누른 그가 스마트폰을 귀에 대는 순간이었다.
- 예, 형님.
굵직하고 걸걸한 답이 바로 건너왔다.
“조개구이에 소주나 한잔하고 올라니까 준비해.”
- 예, 형님.
답을 들은 이교창은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들 나오는 룸빵에서 양주 들이켜겠다는 것도 아니고, 조직에서 관리하는 업장에서 공짜 술을 내놓으라고 할 마음도 없었다.
그저 바다 냄새 맡으며 번개탄에 구운 조개를 안주 삼아 가볍게 소주 두어 병 마시고 들어올 생각이었다.
**
신월동은 강성태가 속속들이 손금보듯 하는 동네였다.
빵집은 물론이고, 명가 들깨 칼국수 골목, 작은 김밥집 하나하나 모르는 곳이 없었다.
서라대학병원으로 향하던 강성태는 문을 닫기 직전의 꽃가게에 들러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이병렬의 충고를 따르다니?
물론 안다미는 홍콩에 다녀온 걸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홍콩에 다녀왔으면서 맨손인 게 미안했고, 다음으로 최치곤과 유충일을 구하기 위해 나선 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응급실에 꽃을 들고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괜히 동료들과 병원 스태프들의 시선만 빼앗을 테고, 보관도 어려울 거라서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하게 내밀 생각이었다.
꽃다발을 마련한 강성태는 바로 옆에 있던 빵집으로 들어가 샌드위치와 다른 간식거리들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곧 만날 안다미를 떠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최치곤에게 절대 지지 않는 강단, 단호한 표정과 말투, 어떤 경우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성품이지만, 강성태에게 안다미는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이었다.
밤 10시 30분쯤이었다.
아무리 깜짝 방문이라 해도 응급실 근무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안다미의 번호를 눌렀다.
한 번 걸어보고 받지 않으면 문자를 남길 생각이었다.
- 여보세요?
그런데 예상 밖으로 평온한 안다미의 음성이 들렸다.
“통화 괜찮아요?”
- 아빠랑 모처럼 함께 있어요. 어디에요?
“오목교 건너기 전이요.”
- 혹시 병원으로 오려고 했어요?
“예.”
잠깐 망설였으나 강성태는 솔직하게 답했다.
- 잠시만요.
스마트폰 건너에서 “아빠. 성태 씨가 병원에 오려고 했다는데 이리 오라고 해도 돼요?” 하는 안다미의 질문과 “너랑 둘이 있고 싶은 걸 텐데 그러지 말고 가서 만나.” 하는 안호상의 넉넉한 대꾸가 들렸다.
- 여보세요?
“아버님과 보내는 시간을 방해한 거면 내일 봐도 됩니다.”
-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거 싫으니까 얼른 와요. 여기 신월동 사거리 횟집이에요. 화곡동 넘어가는 방향으로 커피전문점 있고, 그 옆에 군산수산이요.
“진짜 방해하는 거 아니죠?”
- 아빠가 좋아하시는데요?
웃으며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빵집을 나서 기다리던 아르윈에게 내용을 알려주었다.
“나 내려주고 키란을 병원에 데려다줘.”
“저기 형님. 내일 가게 오픈이어서 오늘 한가할 때, 키란과 함께 있었으면 합니다.”
고개를 돌린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키란이 멋쩍게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강성태와 비슷하게 상처를 품은 키란이었다.
염려되기는 했는데 강성태 역시 상처투성이 몸으로 안호상, 안다미 부녀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게다가 병실에서 필리핀 아가씨를 소개했다는 말도 떠올랐다.
“무리하지 마.”
“감사합니다, 형님.”
키란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셋이서 신월동 오거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괜찮으시면 원장님과 안 선생님 모시고 가게로 오십시오, 형님.”
핸들을 붙잡은 아르윈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원하는 바를 내놓았다.
안호상, 안다미와 함께 아르윈이 운영하는 가게를 가?
꾸벅꾸벅 인사할 아르윈과 조직원들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일이었다.
다리를 건넌 승용차가 신월동 오거리를 향해 달릴 때였다.
“봐서 가게 되면 전화할게. 그리고 괜히 나 때문에 차 돌리지 말고 프리 스테이션 앞에 세워. 원장님과 다미 씨 앞에서 인사받는 모습 보이기 싫어 그런 거니까 말대로 해.”
강성태는 아르윈에게 분명하게 뜻을 전했다.
표정을 살핀 아르윈이 실제로 신월동 오거리를 지나 프리 스테이션 앞에 차를 세웠다.
“키란 잘 챙겨.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들어가십시오, 형님.”
프리 스테이션 앞에서 두 사람과 헤어진 강성태는 화곡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샌드위치와 빵은 아르윈에게 넘겨주어서 꽃다발만 위로 든 상태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강성태와 꽃을 보며 부럽다는 표정과 야릇한 미소를 남기며 지나쳤다.
길 건너편에 있는 군산수산의 간판과 유독 희게 빛나는 조명을 발견한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주머니 안에서 울었다.
왼손에 꽃다발을 든 상태에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액정에 올라온 이름은 조태완이었다.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 조용하게 통화해야 하는데 괜찮아?
“말씀하시면 됩니다.”
길 건너편이었다.
환하게 밝힌 가게 안쪽의 자리에서 웃으며 무언가를 말하는 안다미와 흐뭇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안호상의 모습이 보였다.
- 부산에 있던 교창이가 조개구이집에 갔다가 당한 모양이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 어떤 놈들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 함께 있었던 애들 말로는 야쿠자 놈들이 아닌가 싶다던데 그것도 만나봐야 알 거 같다.
강성태는 시선을 내려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보았다.
주변 가게들과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매혹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 여보세요? 듣고 있어?
“예. 듣고 있습니다.”
다시 시선을 든 강성태의 눈에 환하게 웃는 안다미의 모습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