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18권 - 8화 (360/513)

《360》2부 18권 - 8화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한 강성태가 일행을 홍콩 공항까지 무사히 데려왔다면, 곤잘레스 이두안은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한 연줄을 이용해 홍콩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세종과의 짧은 인터뷰를 마친 그는 마치 제주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국내선을 이용하듯 간단한 절차로 강성태 일행을 이끌었다.

그의 자가용 비행기가 홍콩 공항을 이륙한 다음이었다.

“조금 이르지만, 저녁을 먹을까 하는데 어떤가?”

“감사합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의 제안을 강성태가 받아들였다.

돈의 위력이었다.

자가용 비행기 앞쪽의 테이블에서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고급 식기들을 이용해 스테이크로 저녁을 내주는 일이 말이다.

삼합회의 위협에서 벗어나 자가용 비행기에서 즐기는 저녁 식사였다. 더는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가 은선곤과 바르지오 만시니의 얼굴에 식욕만큼이나 진하게 올라와 있었다.

“보리스 파리오는 함정에 빠진 눈치일세.”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홍콩에 오기 전까지 주고받았던 연락들과 알아낸 일들을 순서대로 들려주었다.

“지금 말한 내용에는 내 추측이 포함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화이트 테일이 확실한 정보를 얻어내야겠지.”

“이번 일은 죄송했습니다.”

말끝에서 건넨 곤잘레스 이두안의 시선에 대고 바르지오 만시니가 멋쩍은 얼굴로 사과를 내놓았다.

“우리끼리 의견 충돌이 있을 수는 있지. 미스터 강도 그랬거든. 내가 말리는 자리에 뛰어가서 카르텔의 하부조직을 궤멸시켜서 나를 곤란하게 할 때도 있었고.”

식사를 하면서 들으라는 투로 곤잘레스 이두안이 바르지오의 접시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우리끼리는 괜찮아. 내가 수습할 수 있으니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수습하면서도 불만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 상대편에 서 있는 자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도움을 청하는 건 불편하지.”

덤덤하게 내놓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육즙이 모두 빠져나간 스테이크를 삼킨 것처럼 뻑뻑한 감정이 식탁을 넘나들었다.

“미스터 강이 홍콩에 달려갔기에 나 역시 움직였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아주게. 물론, 덕분에 보리스 파리오의 약점을 알게 되었다는 이점은 있었지.”

짧은 질책을 마친 곤잘레스 이두안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상체를 세웠다.

“이번 일을 사과하는 의미로 그가 자네와 키란, 그리고 화이트 테일에게 각각 5백만 달러를 지불했네. 미스터 강과 화이트 테일의 계좌는 전에 받아둔 게 있으니 알아서 입금할 텐데 키란은 어떻게 처리해주는 게 좋을까?”

한화로 55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은 그런 거금을 홍콩까지의 왕복 교통비를 지급한다는 투로 묻고 있었다.

뜻밖의 통보에 당황스러웠으나 강성태와 바르지오는 보리스 파리오의 재력과 곤잘레스 이두안의 일 처리 방식을 알고 있어서 그럭저럭 태연할 수 있었다.

키란은 다른 모양이었다.

하기는, 한화로 55억 원이면 키란의 모친이 사는 반경 5킬로미터 안쪽의 집을 모두 사지 않을까 싶을 만큼 네팔에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더구나 멕시코에서 안다미 일행을 구해내며 받은 돈도 있어서 그야말로 돈방석에 올라앉는 상황이었다.

키란의 시선을 받은 강성태가 곤잘레스 이두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카오 회담 이후에 보리스 회장과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돈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받아두게. 자네가 거절하면 삼합회의 손아귀에 들어갈 게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곤잘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그와 협상하면서 우리 미스터 은의 수고를 깜빡 잊었지 뭔가. 그래서 미스터 은에게는 내가 직접 고마움을 표시할까 하는데 어떤가?”

처음 시작은 강성태를 보고 말했으나 마지막 질문에서 곤잘레스는 은선곤을 돌아보았다.

“저는 강성태 회장님을 모셨을 뿐입니다. 또, 멕시코 공사를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 나섰던 데다, 아직 컨소시엄의 직원이어서 포상금을 받기 어렵습니다.”

“자네가 이미 우리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저는 강성태 회장님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회장님께서 강성태 회장님과 함께하는 동안 같은 울타리 안에 있을 겁니다.”

이런 맹랑한 대답이 있나?

은선곤을 빤히 바라보던 곤잘레스가 묘한 느낌의 미소를 그려냈다.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럼 이제 커피를 마셔볼까? 미스터 강을 위해 내가 특별하게 준비했지.”

곤잘레스가 시선을 돌리자 커피잔과 포트를 든 직원이 빠르게 다가왔다.

**

강명그룹 기획실은 자리마다 놓인 노트북과 사무용 컴퓨터 모니터에 JBC 뉴스를 띄워놓았다.

-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과 함께 홍콩에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금 목적을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 멕시코 건설 사업 컨소시엄을 대표해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마카오 회의를 앞두고 세부 내용을 조율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 강명그룹을 중심으로 한 컨소시엄의 비서실장을 맡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면 우리 컨소시엄의 멕시코 건설 공사 수주가 확정적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 어느 정도 선까지는 확보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확실한 답을 원하는 기자를 상대로 은선곤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러나 깔끔한 인상, 반짝이는 눈매, 세련된 태도, 막힘없는 말솜씨, 뉴스를 접한 시청자들에게 앞으로 진행될 멕시코 건설 공사의 책임자가 은선곤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뒤에 인터뷰한 곤잘레스 이두안이 은선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점을 직접 말해주었고, 함께 출국 게이트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단숨에 거물이 된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신뢰를 받는 것만은 분명하게 보여준 인터뷰였다.

**

김포공항에 내린 강성태는 곤잘레스 이두안이 준비한 승용차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방지병원에서 내리면 되겠나?”

“그게 좋겠습니다.”

키란과 바르지오 만시니, 은선곤이 뒤에서 따르는 다른 승용차에 타고 있어서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였다.

“중국 정부가 보리스 파리오의 지분을 노리는 눈치일세. 명분은 우리 사업을 놓친 게 되겠고. 그러니 보리스는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마카오 회담에서 사업을 가져가거나 아니라면 건설 업체를 중국으로 지정해야 살아남는 처지지.”

“보리스 회장 같은 분이 그렇게 쉽게 당하겠습니까?”

조수석 뒷자리에 앉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보리스나 나 같은 이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이지. 거느린 직원들은 많고, 은행에 들어 있는 자본을 돌려 이익을 내야 하니까. 길게 이어질 사업이 안정적이기까지 하다면 누군들 마다하겠나.”

보리스 파리오를 떠올렸는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가장 큰 실수는 변호사와 계약서를 너무 믿었다는 점일세. 그 두 가지를 모두 무시하는 상대를 만났을 때, 전혀 방법이 없는데도 말이지. 게다가 삼합회 같은 폭력 조직과 사업을 함께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나.”

말을 마친 곤잘레스 이두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최근에 내가 내린 결정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한국에 와서 자네를 찾은 게 아닐까 싶네. 만약 지금 멕시코에 있었다면 자네를 기다리다가 주저앉았을 테니까.”

“대신 홍콩에 직접 오시는 수고도 생겼습니다.”

“원래는 보리스가 자신의 비행기로 데려다주겠다는 걸 내가 거절한 걸세. 화이트 테일을 납치했던 그의 뒤통수를 때려주는 일인데 이런 순간을 양보할 만큼 내 소양이 깊지는 않다네.”

말끝에서 곤잘레스 이두안과 강성태가 비슷하게 웃었다.

“고맙네, 미스터 강. 마카오 회담도 잘 부탁하네.”

그리고 그가 전하는 나직한 인사와 당부가 창밖으로 흘러가는 가로등 불빛처럼 강성태를 스쳤다.

그 뒤로 몇 가지 사소한 이야기를 더 나누는 사이, 승용차가 방지병원에 도착했다.

“도움이나 협조가 필요하면 언제고 연락하게. 그리고 보리스가 보낸 보상금은 내일 오전에 입금될 테니 그렇게 알고.”

“감사합니다.”

곤잘레스와 인사를 마친 강성태는 뒤편에서 기다리는 승용차로 움직였다. 키란과 바르지오, 은선곤이 차에서 내려 강성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쉬고, 나머지는 전화로 이야기하자.”

“진심으로 고맙다, 미스터 강.”

바르지오와 인사를 나눈 강성태는 은선곤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생했다. 오늘은 쉬고 그룹 일을 본 뒤에 연락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인사를 마친 강성태는 키란과 함께 방지병원에 들어섰다.

고작 하루 만에 돌아온 장소였는데 마치 몇 년은 떠나 있었던 것처럼 반가운 감정이 밀려왔다. 다른 곳도 아닌 병원에서 말이다.

이미 밤으로 접어든 시간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주차장에 있던 대림동과 광주 식구들이 깊숙하게 상체를 숙였고, 그 옆에 있던 필리핀 조직원들이 비슷한 모양새로 강성태를 맞았다.

“유충일은?”

“병렬이 형님을 뵙고 난 뒤에 다시 잠드셨습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여준 강성태는 키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급실에 잠시 들렀다 나올 테니까 쉬고 있어.”

“예, 형님.”

목 위로 커다란 메디폼의 끝이 올라와 있었고, 홍콩에서 급하게 구해 입은 어색한 복장이었지만 최치곤과 유충일을 들여다보는 걸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강성태는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을 아는 스태프들과 눈인사를 나눈 뒤에 먼저 유충일의 침대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어깨에 매단 고리에 팔을 걸친 조성호가 화들짝 일어나 상체를 깊게 숙였다.

“병렬이 형님 뵙고 나서 다시 주무시는데 그 뒤로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형님.”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유충일은 의사가 다가와 죽었다고 말하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무엇보다 시커멓게 죽은 얼굴색이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유헌우와 안다미, 그리고 병원 스태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살겠다는 유충일의 강한 의지가 그가 살아있는 동력이겠지만, 뭐라 해도 신기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렇게라도 견뎌준 게 고마워서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고생해.”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형님.”

고개 숙이는 조성호를 두고 몸을 돌린 강성태는 최치곤을 향해 움직였다.

커튼을 열고 들어갔을 때 최치곤은 멀뚱멀뚱한 얼굴로 강성태를 보았다.

“어? 언제 왔냐?”

병원 스태프인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강성태를 보자 놀란 눈치였다.

“좀 어떠냐?”

“누워만 있으려니까 좀이 쑤셔서 죽겠다.”

강성태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최치곤에게 연결된 기계들과 링거를 돌아보았다.

“나는 사흘만 더 지켜보다가 병실로 올라갈 거래. 홍콩에 갔었다며?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캬하! 이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거냐?”

말투와 억양은 전과 다르지 않았는데 너스레를 떠는 최치곤의 음성에는 기운이 부족했다.

“은주가 매일 일 끝나면 들러.”

“그래?”

“잘된 거 같은데 뭔가 마음이 무겁다.”

“잘됐다면서 마음 무거울 게 뭐가 있어?”

“내가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이제 생각이라는 걸 좀 하는 거냐?”

“사람이 진지하게 말을 하는데!”

최치곤의 염려 끝에서 둘이 함께 웃었다.

살아있는 건 정말 좋다.

키란과 함께 배고프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최치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 또한 살아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그렇게 돌아다니냐? 용병 훈련에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방법도 있냐?”

“다미 씨의 관심과 애정 덕 아니겠냐?”

최치곤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투로 인상을 찌푸렸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병렬이다. 잠시만.”

스마트폰의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병원에 왔냐?

주차장에 있던 덩치들의 보고를 받은 눈치였다. 이병렬의 음성이 독촉하듯 강성태에게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지금 올라가려던 참이다.”

- 내가 문제가 아니라 태완이 형님이 찾으신다. 홍콩에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방금 주차장에 있던 애들이 응급실에 들어갔다니까 할 말이 없잖아. 충일이랑 치곤이 봤으면 태완이 형님께 전화 한 번 드려봐.

“알았다. 전화 드리고 올라갈게.”

강성태는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태완이 형님이 급하게 찾았단다. 전화 먼저 해볼게.”

최치곤에게 내용을 설명한 강성태는 조태완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 홍콩에 갔다던데? 국제 전화야?

“지금 막 방지병원에 돌아왔습니다. 찾으셨다면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 그게 말이지.

주변을 둘러보는 듯 조태완은 잠시 뜸을 들였다.

- 노익이가 추천하기도 했고, 나도 그놈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부산 정리를 경상도 이교창에게 맡겼었거든. 그 건 알고 있었지?

이교창이 다른 짓을 했나?

우선 듣고 보자는 생각에 강성태는 조태완의 말에 집중했다.

- 일본 쪽 애들이 연락했었다더라고. 전에 김종수랑 계약했던 자금도 그렇고, 강치 형님 쪽에서 굴리던 돈도 있어서 그걸 정리해야 하지 않냐고?

“김종수는 돈을 들여오지 않은 거로 아는데 부산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그런 게 있었습니까?”

- 교창이 말로는 사채 쪽으로 제법 돌았던 거 같다더라고. 만약 그 부분을 약속대로 처리해주지 않으면 불편해질 거라고 협박도 했다는데 아무래도 보스가 직접 듣고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이교창과 통화하면 됩니까?”

- 가장 좋은 건 노익이와 부산에 다녀오는 거지. 인사받아주고 직접 듣는 게 교창이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도 되고.

진짜 다른 조직들도 보스의 일이 이렇게 많을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막 도착했으니까 병렬이 만나본 뒤에 연락하겠습니다.”

- 보스가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이제부터 편하게 처리해.

조태완은 실제로도 짐을 하나 덜어낸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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