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18권 - 3화 (355/513)

《355》2부 18권 - 3화

제2장. 그거 안됐군.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은선곤은 물론이고, 키란과 바르지오 만시니까지 함께 있는 자리였다.

강성태는 먼저 세련된 태도로 샌드위치를 쥐고 있는 은선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곤잘레스 회장이 직접 온다는 말은 알지?”

“죄송합니다.”

그룹 소유의 비행기를 마음 놓고 사용하지 못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은선곤이 엉뚱한 사과를 내놓았다.

“그걸 탓하려는 게 아냐. 그보다는 곤잘레스 회장이 인터뷰를 원한다. 한국의 방송사를 부를 생각이어서 지금까지는 뒤에서 움직였지만, 인터뷰를 하고 나면 전면에 서게 돼. 이번 일로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은선곤의 인생이 걸린 일이라 싸구려 커피와 급하게 구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건네기에는 미안한 제안이었다.

“보스가 버튼을 누르면 조직원은 따라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러나 강성태의 염려와 달리 은선곤은 고민할 필요 없다는 듯 단숨에 대꾸를 내놓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보스의 왼편에서 걷게 해주십시오.”

얼마 남지 않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려던 강성태는 무슨 소리인가 하는 눈으로 은선곤을 보았다.

“제가 몸담은 그룹의 회장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모습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경호 동선이라는 게 있어. 존 보스만이라고 지난번 저녁 먹을 때 보았던 덩치가 커다란 경호팀장이 있는데 그가 항상 왼편을 차지해. 그러니까 오른쪽에서 걸어.”

“저는 보스의 왼편을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곤잘레스 회장의 오른쪽이다.”

빠르게 오간 대화의 끝에서였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은선곤이 고개를 숙이며 답을 내놓았다. 어디서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깡패들을 흉내 낸 듯한 인사였다.

함께 있던 키란과 바르지오 만시니가 기가 찬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은선곤 나름으로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저 모습을 이병렬이 보았다면 뭐라고 할까?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강성태는 바르지오 만시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부했던 내용을 묻는 시선이었다.

“모터사이클, 내비게이션, 따로 사용할 스마트폰, 모두 준비했다.”

무슨 말인가 하는 얼굴로 은선곤이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사이에도 그는 냅킨을 집어 세련된 동작으로 입가를 닦았다. 사실 별거 아닌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모습에서도 은선곤은 확실히 곤잘레스 이두안의 곁이 어울리지, 폭력 조직에서 뒹굴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라는 점이 도드라지는 느낌이었다.

“삼합회가 머릿수를 바탕으로 우리를 파고 다니는 모양이라 잠시 나가서 혼선을 주려고.”

그 몸으로? 또 달랑 둘이서?

은선곤의 눈이 글로 써놓은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묻고 있었다.

“JBC 보도국장의 번호를 줄 테니까 혹시 방송 카메라를 든 일행을 먼저 보게 되면 알아서 인터뷰를 진행해.”

“오후 비행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4시로 들었습니다. 3시 30분까지 공항에 도착해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야?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 바르지오의 시선을 향해 키란은 어깨만 들썩였다. 그도 이렇게 빠르게 주고받는 우리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탓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이 처참한 꼴을 당해. 최악의 순간을 각오했으니 도왔겠지만, 그렇다고 빤히 닥쳐오는 위험을 모른 척하고 출국할 수는 없어.”

“왜….”

문을 던지려던 은선곤이 갑자기 변한 강성태의 눈을 보고는 뒷말을 삼켰다.

“여기 있는 바르지오도 같은 질문을 했었지. 하지만, 그는 직접 나서려는 마음쯤 가졌다. 왜 굳이 나서서 이 사람들을 도우려는 거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면 내 곁에서 헛짓하지 말고 그룹으로 돌아가.”

느닷없이 바뀐 강성태의 날카로운 눈빛과 지적에 은선곤은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할 텐데 표정만큼은 여전히 덤덤해서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확연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깡패라고 해서 내 이익만 바랄 거였다면 마약과 사채를 막기 위해 피 흘리지도 않았어.”

“죄송합니다. 회장님의 안위가 염려돼서 짧게 판단했습니다.”

은선곤이 깍듯하게, 그러나 아직 강성태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사과를 내놓았다.

“은선곤.”

“예, 회장님.”

“피 흘리는 싸움은 내가 한다. 하지만 보리스 파리오와 같이 전략과 회계, 전술로 나오는 적을 상대하는 건 너의 몫이다. 그런 싸움을 하면서도 절대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게 있어.”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투로 은선곤이 강성태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처지는 사람도 나올 테고, 곤란한 상황에 놓인 사람도 있을 텐데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외면하지 마라. 우리를 도와준 사람, 그리고 우리와 함께 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더.”

“사업은 그렇게만 진행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외면할 때도 있어야 하고, 어떤 때는 이익을 우선 고민해야 합니다.”

반항일까?

단순하게 보자면 그런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강성태의 생각을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싶어 내놓은 질문으로 들렸다.

“여기 바르지오 만시니를 구하지 않았다면 이런 위기는 없었겠지. 그 뒤에 멕시코 건설 총책임자가 될 은선곤을 누군가 납치했을 때도 이익을 우선 계산해야 한다면 비슷한 경우가 나올 테고. 내가 그런 인간이었어도 네가 나를 선택했을까?”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얼굴로 은선곤이 멍하니 강성태를 보고 있었다.

“기업? 폭력 조직? 이름이나 모양새가 어떻든 함께 살자. 내가 조금 배고프더라도 마약, 고리대금, 인신매매 따위 절대 안 된다고 칼 들 거니까, 수익이 좀 줄어들더라도 멕시코 현장에서 외면당하는 사람이 없게 만들어. 그게 내가 은선곤에게 바라는 일이고, 그래서 널 받아들인 거다.”

잠시 강성태를 바라보던 은선곤이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재벌이라는 그늘에서 커온 탓에 생각이 짧았습니다. 많이 배웠고, 이제 좀 더 회장님의 뜻에 맞게 행동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깍듯하게 숙이는 고개만큼 깔끔한 사과를 은선곤이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염려되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약 내가 제시간까지 공항에 도착하지 못하면 그대로 출발해. 나머지는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 여기 바르지오 만시니와 의논하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거 어째 좀 위험한데?

점점 다부지게 변하는 은선곤을 바르지오 만시니가 염려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강성태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

보리스 파리오는 프랑스인의 피가 섞인 유대계 미국인으로 정수리 주변의 머리칼이 동그랗게 비어 있었다.

퉁퉁한 볼살과 몸 전체에 살집이 올라서 얼핏 후덕해 보였다. 그러나 눈매가 작아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인상이었다.

그는 마카오의 유러피안 호텔 A동의 특실에 있었다.

- 결정은 회장님의 몫입니다.

중앙 분수를 내려다보던 그는 책상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나온 제이 브라이튼의 통보가 못마땅한 것처럼 눈꼬리를 찌푸렸다.

“제이 브라이튼. 그가 제시한 10퍼센트는 협상이 아니라 모욕이오. 투자했던 돈을 모두 포기하고 거실에서 TV나 보며 늙으라는 모욕이란 말이오.”

- 바르지오 만시니를 납치했던 일에 대한 분노가 워낙 커서 곤잘레스 회장의 제안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내가 지시한 게 아니오.”

- 물론 그러실 거라고 믿습니다. 다만, 과거 한국인 의사의 납치에 개입했었던 삼합회가 현재 회장님을 위해 움직이는 데다, 이미 바르지오 만시니가 구출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습니다.

제이 브라이튼의 냉정한 평가가 나온 뒤였다.

보리스 파리오는 손수건을 꺼내 코 주변과 입가를 닦았다. 난처하거나 곤란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가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그렇게까지 나를 모욕한다면 나 역시 더는 양보할 이유가 없소.”

- 회장님의 판단을 존중하겠습니다.

냉정한 인간 같으니라고.

매달리는 모양새를 빤히 느꼈을 테니 한 번쯤 중재해줘도 좋으련만, 제이 브라이튼은 보리스 파리오의 막다른 결정을 두말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가 그렇게 나온다면 미스터 강과 바르지오 만시니는 절대 홍콩을 벗어나지 못할 거요.”

- 지금 말씀은 전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제이 브라이튼, 당신 역시 바르지오 만시니의 납치에 언짢아서 이러는 거요? 그래서 당신이 그들의 출국을 도와주려는 거요?”

- 만약 제가 바르지오의 일이 못마땅했다면 이미 홍콩에 있는 삼합회 대부분이 사살됐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크흠.”

본전도 찾지 못한 보리스 파리오가 낮은 신음으로 언짢은 심정을 표현했다.

“당신의 도움 없이 미스터 강과 화이트 테일이 홍콩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 글쎄요.

“홍콩이오, 홍콩. 곤잘레스 이두안이 중국 정부와 홍콩 행정부, 삼합회의 손안에서 그를 멀쩡하게 데려가고 싶다면 좀 더 제대로 된 제안을 내놓아야 할 거요.”

- 이미 곤잘레스 회장은 최종 제안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다른 요구를 했다가는 신용만 잃습니다. 제가 하는 중재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온갖 무력 세력과 협상했던 경험 탓인지 제이 브라이튼은 보리스 파리오의 경고를 냉정한 태도로 밀어냈다.

“제이 브라이튼. 미스터 강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바르지오 만시니와 구르카 용병, 그리고 한국의 직원과 무얼 할 수 있겠소?”

- 저라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 겁니다.

“내가 그 동양인, 아니 정확하게 한국인인 미스터 강에 대해 모르는 게 있소?”

- 경호팀장을 제안하실 때 그의 능력을 검토했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점이 있냐고 묻는 게 아니오? 구르카 용병이 되었고, 제이 브라이튼의 아래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곤잘레스 이두안의 경호원으로 일한 거 말고 더 있소?”

- 제가 아는 미스터 강은 무슨 수를 쓰든 키란과 바르지오, 그리고 한국인 직원을 한국으로 돌려보낼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미스터 강을 잡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리스 회장께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피가 홍콩에 흐를 겁니다.

“끄응.”

-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삼합회와 중국 특수부대, 홍콩 행정부를 동원해 보십시오. 때로는 전해 듣는 말보다 경험이 확실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제이 브라이튼은 이런 일에 과장을 섞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고작 강성태를 잡자고 홍콩에서 유혈 사태를 만들면, 그 책임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된다.

가뜩이나 그의 지분을 빼앗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중국 정부에게 보리스 파리오를 내쫓을 명분으로 이보다 좋은 게 있을까.

‘곤잘레스 이두안이 10퍼센트를 제시한 게 여기까지 짐작해서였던가? 내가 끝까지 강성태를 노리면 빈털터리가 될 거라는 사실을 예상해서?’

믿고 싶지 않지만, 펼쳐지는 상황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제이 브라이튼.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조언 하나만 들읍시다. 내가 그 정도 고객은 되지 않소?”

급하게 건넨 질문에 제이 브라이튼은 바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대로 전화가 끊기면 보리스 파리오는 마지막 끈을 놓친 꼴이 된다.

“중재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래된 친구로 조언해준다고 생각해 주시오.”

미국에 있는 인연들을 떠올리도록 보리스 파리오는 친구라는 단어를 어색하지 않게 사용했다.

- 저라면 중국 정부와 홍콩 행정부를 설득해서 미스터 강 일행을 무사히 한국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물론 홍콩에서의 일을 모두 덮어주셔야 합니다. 그런 뒤에 마카오 회담에서 담판을 짓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합니다. 오늘 통화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요청대로 조언 하나였다. 그 뒤에 붙잡을 틈도 없이 제이 브라이튼이 통화를 마쳤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씰룩인 보리스 파리오는 지금껏 내려다보던 분수를 외면하고 책상에 앉았다.

처음 중국 정부의 제안은 환상적이었다.

도로와 철도, 항만을 건설하는 비용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백 년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방식이어서 손실 위험이 적은 반면에 장기적 수익이 보장되었다.

99년 동안 영국에 홍콩을 넘겨주었던 과거에서 얻어온 발상으로 보였다. 아무렴 어떠냐.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수주 실적 또한 나쁘지 않아서 보리스 파리오는 지닌 재산을 모두 중국 정부의 계획에 밀어 넣었다.

다 좋았다.

단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신뢰라고는 개의 콧등에 묻은 물기만큼도 없는 중국 정부의 담당자들이 문제였다.

심지어 돈을 빌려준 나라에 중국의 건설사, 인부, 장비들만 사용해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세부 사항을 변경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실력과 기술이 부족한 중국 건설사로 인한 손실, 무리한 요구로 투자 대상국의 공사 중단, 그에 대해 항의하는 보리스 파리오가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중국 정부는 항의하는 그의 지분을 뺏고자 기회를 노렸다.

“10퍼센트?”

아무리 처지가 곤란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만 달러가 천 달러로 줄어도 잠이 들지 못할 텐데, 한화로 30조 원을 쏟아부은 일에 3조 원을 들고 돌아가라면 누군들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물론 멕시코 일에 투자한 금액은 한화로 5조 원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업을 책임지라며 밀어댄 중국 정부는 멕시코 사업 수주 실패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씌울 테고, 손실을 보전한다는 핑계로 그의 모든 지분을 뺏어갈 게 틀림없었다.

어쩌다가 이런 사업에 손을 댔던 건지.

신뢰만 없나.

한다는 짓만 해도 그렇다.

멕시코 사업을 가져오는 일에 삼합회라는 폭력 조직을 동원했다. 그래놓고는 조직원을 멕시코에 보내 한국인 의사들을 납치하더니, 이번에는 또 바르지오 만시니를 강제로 홍콩에 끌고 왔다.

제대로 지키기라도 하든가.

말만 하면 목청을 높이며 달려들더니 강성태와 키란, 두 사람에게 바르지오 만시니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보리스 파리오는 갑갑한 눈길로 책상에 얌전히 누운 스마트폰을 노려보았다.

어떡해서든 마카오 회담을 성사시켜야 했다.

멕시코 사업을 가져오는 것만이 보리스 파리오가 살아날 유일한 기회였다.

“후-.”

긴 숨을 내쉰 그는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팔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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