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18권 - 2화 (354/513)

《354》2부 18권 - 2화

자동차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승차감이나 핸들링에 관한 의견을 내놓을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외과적인 수술을 하지는 못하나, 치료받은 횟수가 많다 보니 의사의 능력이나 솜씨에 대한 평가는 가능했다.

‘유헌우 원장이 워낙 굉장했었구나.’

홍콩 사립병원의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고 나서 강성태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유헌우였다.

익숙해져서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 밖에도 안호상 박사와 안다미의 솜씨가 그에 뒤지지 않아서 더욱 알아채지 못했었다.

하기야, 대한민국에서 유헌우만큼 외상 치료 경험, 특히 칼에 당한 상처를 많이 처리해본 사람이 있을까.

엉뚱하게 유헌우를 떠올렸던 강성태는 막 치료를 마친 키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슴과 허리에 감은 붕대, 목덜미와 팔뚝에 붙인 두꺼운 거즈, 치료를 마친 키란의 모습은 강성태와 거의 같았다.

“감사합니다.”

라텍스 장갑을 벗던 의사 네 명이 강성태의 인사를 받고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방을 나갔다.

“배고프지 않냐?”

“빌라에서 나올 때부터 고팠습니다.”

강성태 맞은편의 의자에 앉은 키란이 솔직한 답을 내놓았다.

살아있는 건 이래서 좋다.

함께 무언가를 나눌 수 있어서. 비록 그게 위기 속에서 배고픈 현실이라도 말이다.

순박한 눈빛의 키란을 향해 강성태가 옅게 웃었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바르지오 만시니가 들어왔다.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비행기와 출국 과정을 책임진다는 상황에서 그의 표정이 무겁다면 틀림없이 삼합회와 관련된 일일 게 분명했다.

강성태의 표정을 확인한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삼합회 놈들의 추적이 예사롭지 않아.”

“자정까지라던 여유가 줄어든 거냐?”

바르지오 만시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문제 없을 듯한데 도와준 사람들이 발각될 수 있겠어.”

“CCTV까지 모두 지웠는데 어떻게 알아내는 거지? 우리가 무사히 돌아간다면 뒤를 알아내기 더 어렵잖아?”

“삼합회의 개들이 홍콩 지역을 나눠서 일일이 흔적을 찾는다는 정보였어. 택시 운전기사들 위주로 현금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더군. CCTV는 지워도 목격자는 지우지 못하는 걸 이용하는 거지.”

“머릿수가 많으니까 별짓을 다 하네.”

어쩐지 뒷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던 강성태는 입구에서 보았던 홍콩 경찰을 떠올렸다.

그들뿐만 아니라 치료해준 의사들, 지하주차장에서 방까지 안내해준 청소부까지, 강성태 일행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끔찍한 최후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미안하지만, 미스터 강. 아무래도 내가 나가봐야 할 거 같다.”

“어딜 가려고?”

“이곳 말고 다른 지역에서 내가 보여야 시선이 분산돼. 혹시라도 이곳에 오는 모습을 본 택시기사가 있더라도 내가 다른 곳에서 나타나면 그 말을 믿기 어렵겠지. 이곳 사람들이 부인하기도 쉽겠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성태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듯 바르지오 만시니가 시선을 떨궜다.

“존 보스만과 통화했지? 출발은?”

“오후 4시 홍콩국제공항 예정이라 우리는 3시 30분까지 도착하면 된다. 이쪽에서 추가되는 탑승 인원은 우리 셋과 미스터 은까지고.”

“식사는?”

“샌드위치를 준비했으니까 바로 가져올 거야.”

연달아 질문을 던졌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섭충명의 현재 위치, 그리고 모터사이클이 한 대 필요해. 누구 소유인지 알지 못하는 거로.”

어쩌려고?

바르지오 만시니가 놀란 눈으로 묻고 있었다.

“네가 나갔다가 놈들에게 다시 잡히면 나랑 키란은 이 짓을 다시 해야 되잖아. 가기 전에 뒤통수를 갈겨주면 효과가 훨씬 크겠지.”

“둘이서?”

“너를 구한 게 우리 둘이다. 걱정되면 섭충명의 동선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해. 한적한 곳으로 꼬드길 방법이 있으면 더 좋고.”

욕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긴장도 되고.

바르지오 만시니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출국까지 시간이 별로 없는데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자네가 이럴 필요가 없잖아?”

“잘못되면 처참한 꼴이 된다는 걸 각오하고서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이다. 그들의 비명을 외면하고 갈 수 있었다면 너를 구하러 오지도 않았어.”

강성태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바르지오 만시니가 “후-.” 하는 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정보를 알아보고 올 테니까 샌드위치를 먹고 있어.”

“만약 섭충명을 꼬드겨 내기 어렵다면 다른 곳을 수색하는 삼합회 놈들을 찍어줘. 그놈들에게 발각되기 전에 공격한 것처럼 할 테니까.”

말뜻을 알아차린 바르지오 만시니가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한 표정으로 그가 방을 나선 뒤였다.

“가끔 홍콩 여행을 꿈꿨었는데 지금은 꿈에 나올까 봐 겁이 납니다.”

키란이 순박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엉뚱한 말을 꺼내놓았다. 그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해 있어서 용병 시절에 보이던 바로 그 미소였다.

“멕시코 공항의 기둥 뒤에서 형님을 기다렸을 때 말입니다.”

미안해하는 강성태의 감정을 알아차린 모양으로 키란이 말을 이었다.

“형님이 저를 밀쳐내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말을 한 키란이 쑥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거창하게 시작한 서두치고는 어딘가 아쉬운 결말이었지만,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키란치고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워서 강성태는 픽 하는 특유의 웃음을 보인 뒤에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게 달린 창을 통해 펼쳐진 홍콩의 하늘은 바닷가 특유의 유독 파란 배경에 겹겹이 뭉쳐놓은 뭉게구름이 가득해서 마치 한국의 가을을 연상시켰다.

무사히 돌아가자.

이곳에서 도와준 이들을 구한 다음에.

한국의 하늘 아래에 있을 안다미, 최치곤, 이병렬의 모습을 떠올린 강성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

책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울린 직후였다.

액정을 확인한 곤잘레스 이두안은 승리를 반쯤 확신하는 얼굴로 팔을 뻗었다.

스피커 통화버튼을 누른 그는 곧바로 서울의 빌딩 숲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거실 창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여보세요?”

-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그렇군요. 바쁠 텐데 어쩐 일입니까?”

- 혹시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레드 워터의 수장인 제이 브라이튼이 아무것도 모른 척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와 질문만 듣고 그가 정말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곤잘레스 이두안은 사업 접어야 한다.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긴 설명을 하지 않겠소. 홍콩에서 미스터 강과 바르지오 만시니, 그리고 한국의 직원을 직접 데리고 오고 싶소.”

- 흐음.

제이 브라이튼이라고 해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요청이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다 알면서도 곤잘레스 이두안은 빌려준 돈을 내놓으라는 사채업자와 같은 표정으로 답을 기다렸다.

- 회장님이 직접 가지 않으면 일이 훨씬 쉽습니다.

“그렇게 하면 레드 워터의 수장이 나를 외면하고 보리스 파리오를 선택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푹 찌르는 듯한 대꾸가 당황스러웠는지 제이 브라이튼은 가벼운 웃음을 먼저 내놓았다.

- 그렇지 않아도 보리스 파리오 회장에게서 연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이의 선택은 어느 쪽이오?”

- 보리스 파리오 회장과 협상할 마음은 없습니까? 그가 중국에 투자한 금액의 절반을 건질 길을 열어주시는 거로 충분합니다.

이거 봐?

곤잘레스 이두안은 눈썹을 갈매기 날개처럼 만들며 눈빛을 번득였다.

구렁이와 오소리, 족제비에 너구리를 합쳐놓은 듯한 인간, 보리스 파리오가 그런 제안을 먼저 내놓았다면 무언가 궁지에 몰렸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바르지오 만시니가 구출된 것과 관련해서 말이다.

“제이 브라이튼.”

- 예, 회장님.

“그런 협상은 권총을 들이대기 전에 해야 효과가 있지요. 거기에 방아쇠를 뺏겼다면 조건을 내세울 게 아니라 자비를 구하는 게 도리에 맞습니다.”

- 방법이 없겠습니까?

보리스 파리오가 확실히 궁지에 몰렸구나!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던 곤잘레스 이두안은 주먹을 지그시 쥐었다.

“미스터 강에게 접촉했었던 거로 봐서 내 팔과 다리를 먼저 자르려 했던 모양인데 보시다시피 상황이 이렇게 됐지요. 투자금의 10퍼센트를 보장하겠소. 얌전히 물러난다는 조건이오.”

곤잘레스 이두안이 생각하기에도 빡빡한 조건이었다.

이걸 제이 브라이튼이 고민한다면 보리스 파리오는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 회장님은 여전히 까다로우시군요.

“멕시코 공사는 내가 시작했소. 거기에 미스터 강이 있고, 바르지오 만시니가 돌아왔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니겠소?”

- 그런가요?

넉넉하게 대꾸가 들려온 뒤였다.

- 10분 뒤에 전화 드려도 되겠습니까?

“긍정적인 답을 기다리겠소.”

빠르게 대화가 오간 뒤에 통화가 끝났다.

‘보리스 파리오, 내가 미스터 강의 영향으로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너는 죽는다.’

숨을 내쉰 그는 곧바로 강성태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다음이었다.

- 강성태입니다.

강성태의 대꾸가 있었다.

“뭐 하고 있었나?”

- 샌드위치를 먹고 있습니다.

“식사가 너무 허술하군. 내가 괜찮은 스테이크를 준비해서 갈 테니까 너무 먹지는 말게.”

짧은 대화의 끝에서 강성태와 곤잘레스가 비슷한 느낌으로 함께 웃었다.

“보리스 파리오의 힘을 이용해 홍콩에서 나올 생각인데 가능하면 한국의 방송사에서 보도했으면 싶네. 가능한가?”

-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홍콩에서 출국하는 과정이 합법적이었다는 증거를 남길 필요가 있어. 다음으로 멕시코 공사의 주역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필요도 있고.”

- 은선곤을 전면에 내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당장은 그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네. 만약 그가 한국에서 해고당해도 나와 일하게 될 거라는 수준에서 힘을 실어주는 게 좋지 않겠나? 그래야 한국의 그룹이 등을 돌리는 일이 없지.”

막힘 없이 대화가 오간 뒤였다.

- 보리스 파리오 회장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회장님께서 그분과 손잡을 생각이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제가 잘못 판단한 겁니까?

돌을 얹은 것만큼이나 묵직한 질문을 강성태가 내놓았다.

확실히 강성태는 쉽지 않다.

너무 급해서 멍청해진 보리스 파리오와 달리 어떤 위기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점이 특히 그랬다.

“적을 상대할 때 언제 자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 있었나? 나는 나대로 그를 상대할 테니까 현장에서의 판단은 자네가 하게.”

질문을 받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의미심장한 답을 먼저 건넸다.

- 보리스 파리오 회장이 신뢰를 지키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시는 거군요.

“그가 내 조건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걸세.”

- 한국의 방송사에 연락하겠습니다.

“괜찮은 스테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하지.”

통화를 마친 곤잘레스 이두안이 만족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

경상도 대가리 이교창은 병원 건물에서 나와 앞에서 기다리던 승용차에 올랐다.

“우선 호텔로 가자.”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운전석에 앉은 덩치가 바로 승용차를 움직였다.

“후아.”

점심시간이 지난 이른 오후였는데 이교창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뒤로 기댔다.

조강치가 운영했던 업장들을 하나씩 정리했고, 다음으로 병원에 입원한 덩치들의 입을 돈으로 틀어막으며 부산의 조직을 정리하고 다독였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과정이 훨씬 힘겨웠다.

게다가 장세조와 서창호가 각각 거느렸던 조직을 하나로 묶어야 해서 잡음도 많았고, 이따금 반항하는 놈들도 나왔다.

그나마 신강남파에 속하게 된 만큼 조태완과 박노익이 원하는 대로 운영비를 내려주었고, 경상도 조직들이 이교창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버텨주는 덕에 중심을 잡아가는 중이었다.

천하의 조강치가 이토록 쉽게 무너지다니.

하기는, 부산의 주인으로 군림하기는 했지만, 워낙 인심을 잃어서 누구 하나 슬퍼하는 놈이 없었다.

보고야 호텔에 들어가서 하면 되니까.

등받이에 기댄 고개를 창으로 돌린 이교창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에 시선을 주었다.

한낮의 햇살을 받은 물결이 부서져 내리던 HK맨션의 유리창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맨션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교창은 알지 못했다. 다만, 병원에 있는 부산 덩치들의 입을 통해 살벌한 상황을 실감 나게 들을 수 있었다.

“말씀도 마십시오, 형님. 강성태…. 죄송합니다, 형님. 성태 큰형님께서 앞장서서 밀고 올라오는데 진짜 무서웠습니다, 형님.”

3층을 지켰던 덩치들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다가 말고 진저리를 쳤다.

“연장빨이 전혀 안 먹히는 겁니다, 형님. 거기에 성태 큰형님께서 앞장서시니까 뒤에 있던 식구들까지 악에 받쳐서 잡아당기는데, 끌려가면 일단 머리통 깨지면서 시작이었습니다, 형님.”

이교창은 그날 산산이 부서져 아래로 떨어지던 계단의 유리창 조각과 그 뒤에 터졌던 거친 수컷들의 고함을 떠올렸다.

“그런데 형님. 일본 쪽 애들이 형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형님.”

당시를 떠올리던 이교창에게 설명 끝에서 부산 덩치가 건넨 말이었다.

조강치의 조직이 무너지는 바람에 일본 조직들은 지금껏 진행해오던 사업이 망가질까 애가 타는 눈치였다.

창밖을 보며 이교창은 비릿하게 웃었다.

“씨발 새끼들이 어디 남의 땅에서 설쳐?”

“예? 형님?”

“너한테 한 소리가 아니니까 그냥 가자.”

운전하는 덩치를 다독인 이교창은 부산의 하늘을 보며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마약과 고리대금을 손대지 않겠다는 선언도 놀라운데 일본놈들 꼴을 안 보겠다는 보스를 모시게 되다니.

한 번쯤 경상도와 부산에 길게 선을 긋는 깡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살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기회를 잡을 줄은 몰랐다.

조만간 만나게 될 거다. 부산 덩치들이 박노익, 이교창의 위에 있다는 의미로 큰형님이라 부르는 강성태를 말이다.

창밖을 보며 이교창은 다시 한 번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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