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17권 - 16화
제6장. 홍콩이 아니라 골로 보내줘야겠네.
아르윈은 이미 피를 뱉어내며 괴로워하던 강성태를 지켜본 경험이 있었다.
올림픽 도로를 나서 신월동 오거리를 지난 아르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룸미러를 들여다보았다.
“이대로 갑니까, 형님?”
이왕 선택한 방법이었다.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당당하게 맞서서 마음 써주는 아르윈의 염려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깡패 뭐 있어? 일단 부딪치는 거지.”
룸미러를 통해 강성태의 눈을 본 아르윈이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오목교 아래를 돈 승용차가 지하차도를 향하는 도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도로 양쪽에 서 있는 백색 가로등이 빠르게 옆을 스치면서 지하차도가 승용차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성태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폐에 숨을 가득 채워놓아도 고통이 밀려들면 반항할 방법이 없었다.
‘바르지오 만시니, 섭충명의 위치를 보여줘.’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지하차도를 보며 강성태가 소망을 떠올린 직후였다.
더컹. 더컹.
지하차도 안으로 승용차가 들어섰고, 이어 바닥에서 섬뜩한 소리가 올라왔다.
후끈, 강성태의 심장이 뜨겁게 변했다.
이어 숨이 턱 막혔다.
거기까지였다.
더컹. 더컹.
“후우.”
이래도 되는 걸까.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강성태는 멀쩡했고, 거기에 숨마저 내뱉고 있었다.
힐끔 룸미러로 뒤를 돌아보았던 아르윈이 오히려 당황한 표정으로 터널을 빠져나갔다.
“병원 앞에서 유턴 되지?”
“예, 형님.”
강성태의 요구에 아르윈은 서라대학병원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지하차도를 향해 움직이며 주고받았던 다부진 눈빛이 민망해서인지 차 안에 어색한 감정이 떠돌았다.
방향지시등이 깜빡이는 소리를 들으며 강성태는 오른쪽에 펼쳐진 탄천을 내려다보았다.
상황이 지랄 같기는 한데, 민망하고 어색한 감정은 나중에 해결할 문제고, 지금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신호를 받아 차를 돌린 아르윈이 반대편 차선을 달려 지하차도를 건넜고, 신월동의 포장마차 앞에서 또다시 유턴해 마지막으로 서라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강성태는 여전히 멀쩡했다.
심지어 세 번째는 심장만 조금 두근거렸을 뿐, 후끈한 느낌이나 숨 막히는 증상마저 없었다.
빌어먹을 저주가 풀렸다.
그것도 반드시, 꼭 필요한 순간에 말이다.
“탄천으로 내려가.”
기가 막힌 웃음을 흘려낸 강성태가 지시했고, 아르윈이 탄천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강성태는 차에서 내려 평소에 자주 앉았던 벤치로 향했다. 그리고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재미있습니까?
아니면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다며 흐뭇해하고 있습니까?
하늘을 향해 픽 웃은 강성태는 시선을 내렸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을 앉게 한 강성태는 탄천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내 끔찍하기만 했던 고통, 자동차를 마음 놓고 이용하지 못하는 제약에서 벗어났는데 당장은 후련함보다 아쉬움이 더 컸다.
혹시 내내 강성태가 숙제처럼 안고 있던 교통사고의 비밀을 풀어내면서 저주가 사라진 걸까?
이럴 줄 알았다면, 조강치를 일주일 정도 뒤에 두들길 걸 하는 미친 생각마저 떠올랐다.
엉뚱한 생각을 연달아 떠올리던 강성태는 병원을 돌아보며 달려드는 잡생각을 털어냈다.
없어진 능력을 아쉬워하며 징징대느니,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였다.
바르지오 만시니가 사라지면서 정보를 얻을 창구가 없어졌다. 나중에 할 일이지만, 이 기회에 안정되게 정보를 얻을 방법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한 방 얻어맞았는데?”
“예? 형님?”
“바르지오 만시니라고 정보를 제공해주던 인물이 납치됐어. 아직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그 바람에 삼합회가 얼마나 많은 인원을 동원했는지, 섭충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들이 어디에 묵는지를 알아낼 방법이 없어.”
강성태는 갑갑한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카오에 히트맨과 가디언스파를 보내고 온 아르윈이라면 현재 상황을 바로 알아들을 거란 믿음에서였다.
“태국과 베트남, 일본의 조직까지 함께 움직인다는데 우리는 정보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지. 거기에 조용하게 우리나라로 오던 바르지오 만시니를 납치할 정도라면 저쪽은 우리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거고.”
이제야 강성태의 고민을 확실히 알아차린 것처럼 아르윈이 무겁게 표정을 가라앉혔다.
“경호원들과 가디언스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으면 곤잘레스 회장이야 어떻게든 지켜내겠지. 대신 가디언스 조직원들이 얼마나 희생될지 감도 안 잡힌다.”
“곤잘레스 회장이란 분을 지키면 일단 공사를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형님?”
“그렇겠지.”
답을 한 강성태는 여유를 즐기는 사람처럼 벤치에 등을 기대 느긋한 자세를 만들었다.
“우리가 겨우 곤잘레스 회장을 지키는 수준에서 회의를 마친다고 가정해 봐. 그렇게 되면 자신을 얻은 삼합회가 멕시코 공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도록 발악처럼 달려들 거다.”
강성태의 설명을 들을수록 분하고 갑갑한 모양이었다.
느슨한 조명 아래에서 아르윈이 볼을 씰룩였다.
“저, 형님. 전에 모텔에서 도움받았던 것처럼 마카오에 있는 필리핀 직원들을 동원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마카오에도 필리핀 직원들이 많아?”
“홍콩과 마카오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대다수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출신입니다. 세탁기 위나 창고, 주방 바닥에서 잘 정도로 대우가 열악하고, 폭력이나 폭행에 시달리기 때문에 호텔 메이드로 취직하는 게 가장 큰 희망입니다.”
강성태의 표정을 살핀 아르윈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호텔에 취직하려면 가디언스의 힘이 필요해서 제법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또 지시에 절대 반항하지 못합니다, 형님.”
“말이 새나갈 위험은?”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건 필리핀에 있는 가족의 최후를 각오했다는 뜻입니다. 남은 가족들을 위해 주방 바닥에서 잘 정도로 희생하는 필리핀 사람들이라 절대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질문에 아르윈이 섬뜩한 답을 내놓았다.
“마침 30명이 넘어가 있으니까 허락만 해주시면 호텔마다 있는 필리핀 직원들을 확인하고, 정보를 찾아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형님.”
가디언스 조직이 근로자를 송출하기 위해서는 마카오 회의가 무사히 끝나야 한다. 그래서인지 허락을 구하는 아르윈의 음성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하루만 고민하자.”
“정보가 새나갈까 염려하시는 거라면 맡겨주십시오, 형님.”
“지난번에 우리나라 모텔에서 용병을 상대한 것과는 달라. 삼합회의 근거지라고 해도 될 마카오에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삼합회 놈들 눈에 띌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뭐 그런 걸 다 걱정하십니까?
아르윈의 눈빛이 그렇게 항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성태의 의지를 확인했는지 아르윈은 입을 열지 않았다.
“태국과 베트남, 일본 조직이 마카오에 있다는 것도 걸려. 단순하게 의논하려던 거라면 굳이 지금 마카오에 있을 필요가 없거든. 어쩌면 삼합회는 분위기만 조성하고 실제로 달려드는 건 그놈들일 수도 있어.”
설마?
말을 들은 아르윈의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모든 정보를 삼합회에 집중하는 동안, 뒤에서 태국과 베트남, 일본의 조직원들이 움직일 수 있지.”
“태국이나 베트남 조직이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태국의 조직이 근로자들을 파견할 권한을 지녔다고 치자. 열댓 명을 희생해서 그 권한을 가져올 수 있다면 가디언스파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무조건 달려들 겁니다, 형님.”
이제야 강성태의 고민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얼굴로 아르윈이 답을 내놓았다.
“마카오에 있는 호텔에 태국이나 베트남 직원들도 많겠지. 곤잘레스 회장 같은 거물까지 암살하려 드는 상황에서 필리핀 직원들의 움직임을 그들이 보고한다면 삼합회가 어떻게 나올 거 같아?”
뭐라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아르윈이 답답한 느낌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금 말씀드렸는데 거기까지 계산하셨습니까?”
그래놓고는 감탄처럼 들리는 질문을 내놓았다.
“우선 내일까지만 고민하자. 필리핀 직원들이 다치지 않으면서 결과를 얻을 방법을 알아보는 게 먼저다.”
“예, 형님.”
아르윈을 다독인 강성태는 탄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장 손에 쥔 건 없었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던 고리 하나를 얻은 느낌이었다.
필리핀 직원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선에서 그 고리에 줄을 엮을 수 있다면 바르지오 만시니를 찾거나 섭충명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른다.
“방지병원으로 가자.”
몸을 일으킨 강성태는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었다.
어둠이 자욱한 탄천의 주차장에서 승용차의 뒷자리에 탄 강성태는 바르지오 만시니를 떠올렸다.
‘멍청아. 얼른 위치를 알려줘.’
이미 경험했었던 일이고, 또 언제고 이런 상황에 대비하던 인물이었다.
살해되지 않았다면 한 번은 연락한다.
어나니머스라면 그를 찾아낼 능력도 충분할 테고.
아쉬운 건 시간이었다.
만약 바르지오 만시니가 현재 중국에 있고, 회의 일정에 맞춰 마카오에 데려온다면 그를 구할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다.
병실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면 한 번은 연락이 올 텐데도 지하차도를 지날 정도로 독하게 그를 찾으려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탄천을 빠져나온 승용차가 양화대교를 달릴 때였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강성태의 눈에 규칙적으로 달려드는 조명을 받으며 운전에 집중하는 아르윈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집에는 안 가?”
“예? 형님?”
“필리핀에서 돌아온 뒤에 키란하고 있었고, 나랑 부산에 다녀왔고, 또 지금까지 함께 있었는데 집에 안 가보냐고?”
툭 건네기는 했는데 참 뻔뻔한 질문이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필리핀에서 온 아르윈에게 운전을 요구한 사람이 강성태였다.
“집사람이 요즘은 하루하루가 행복하답니다, 형님.”
“집에 안 들어와서?”
웃기려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질문을 던진 직후에 강성태가 픽 하고 웃었고, 아르윈이 비슷한 느낌의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안산 같은 지방에 출연자들을 넣을 때, 형님. 지방 조직들의 형님들이 여자 가수들을 요구할 때가 잦았습니다. 달려가서 말리기도 하고, 대놓고 맞붙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출연이 막히곤 했었습니다, 형님.”
당시를 떠올렸는지 앞을 바라보고 있는 아르윈의 눈 끝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형님 모신 이후로도 잠자리를 요구할 때는 있는데, 예전보다 확실히 줄었고, 무엇보다 맞붙을 상황이 되면 무조건 한 수 접어줍니다, 형님.”
“진용이 통해서 출연하는 데도 그런 일이 있어?”
“출연하는 업장 관리하는 조직 말고, 경쟁 조직에서 시비 걸려고 나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형님. 그런데 그렇게 나섰다가도 신강남파 소속이라는 걸 알면 바로 꼬리를 감춥니다.”
“그건 알겠는데 집에 안 들어가도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는 이유가 뭐야?”
“출연자들의 아픈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전에는 울며 걸어오는 전화를 종일 상대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희망에 찬 전화를 받아서 함께 웃는답니다. 집사람이 그랬습니다, 형님. 형님 같은 분 모시는 건 복이라고.”
간지러운 내용이어서 강성태는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수의 꿈을 키우는 출연자도 있겠지만, 필리핀에서 온 대다수는 사람들이 뱉어낸 욕망을 나눠 먹으며 멀리 있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무게를 진 사람들이었다.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그들이 의지할 곳이 가디언스파라는 사실은, 조금 과장하면 멕시코 건설 현장에 파견된 우리 근로자들이 현지인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장 하소연할 수 있는 대상이 신강남파라는 의미가 된다.
그때 신강남파가 억울해하는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피를 빨아먹을 건지, 억지를 부리는 멕시코 사람들을 상대로 달려들 건지에 따라 아르윈의 말대로 행복과 불행이 갈린다.
너무 일이 커지는데?
창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승용차가 방지병원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이종환과 조성호가 바쁘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고는 상체를 깊게 숙였다.
“다른 소식은 없어?”
“치곤이는 여자친구가 와 있고. 충일이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형님.”
치곤이한테 여자친구가 있다고?
강성태의 표정을 살핀 이종환이 의아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은주라고 형님. 신월동 카페에서 근무하는 분입니다. 어제도 여기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안다미가 말해준 모양이었다.
단박에 상황을 이해한 강성태는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병렬이한테 올라가 있을 테니까 쉬어.”
“아르윈 형님하고 야식을 먹을까 합니다. 드시겠습니까, 형님?”
“병렬이랑 알아서 하면 돼.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먹어.”
“병실까지 모시겠습니다, 형님.”
사명감을 지닌 이종환이 덩치 둘과 함께 강성태를 따랐고, 이병렬의 병실 앞에서 상체를 깊게 숙인 뒤에 돌아섰다.
병실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이병렬이 상체를 일으켰고, 그 옆에 앉아있던 김진용이 몸을 세우고는 고개를 숙였다.
“데이트라면서?”
“바쁜 모양이더라고.”
“아효. 신강남파 보스 졸라 안 됐네.”
간단하게 대꾸한 강성태는 겉옷만 벗은 채 빈 침대에 올라가 길게 누웠다.
“가라고, 좀!”
“진용이를 보내.”
“아, 진짜.”
툴툴대는 이병렬의 불만을 무시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읽던 책을 찾았다.
“진용아. TV 볼륨 좀 높여.”
강성태를 보내고 싶은 눈치였다. 책 읽은 걸 방해하면 집에 가서 좀 더 편하게 쉬지 않을까 기대하는 얼굴로 이병렬이 지시했고, 김진용이 실제로 TV 볼륨을 높였다. 그러나 소란스럽던 카페에서도 글을 읽던 강성태에게는 절대 안 먹히는 일이었다.
여전히 글을 읽는 강성태를 보며 이병렬이 입맛을 다실 때였다.
우우웅.
손에 들고 있던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강성태가 몸을 번쩍 일으켰다.
“왜? 뭔데?”
“기다리던 연락.”
“의사 선생이 지금이라도 오래?”
이병렬의 질문에도 강성태는 먼저 문자를 확인했다.
[분실된 스마트폰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그런 뒤에 문자가 연결해준 지도를 엄지와 검지로 확대했다.
“바르지오 만시니의 위치를 찾았다.”
“누구?”
“납치됐던 옛날 동료.”
“어디인데? 어디에 있는데?”
“홍콩.”
강성태가 답을 한 직후였다.
“하아, 이 씨발 새끼들! 홍콩이 아니라 골로 보내줘야겠네.”
눈빛을 빛내는 이병렬을 향해 강성태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