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권 - 15화 (347/513)

《347》17권 - 15화

부드럽게 내려가겠노라 들어섰던 길이 사실은 롤러코스터의 첫 내리막처럼 급경사여서 느닷없이 끝까지 달려버린 느낌이었다.

저녁식사를 통해 삼합회와 보리스 파리오를 혼란스럽게 만들겠다는 강성태의 계획은 은선곤이 느닷없는 요구를 내놓으면서 난처한 선택만 남겨두었다.

샐러드를 옮겨놓은 곤잘레스 이두안마저 포크를 손에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강성태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은선곤 씨는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행동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렇게까지 급하게 매달리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곤잘레스 회장께서 이미 제 선친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면 선입견을 품으실 수 있고, 가능하다면 마카오 회의에 참석하고 싶어서입니다.”

“선입견?”

“재벌가의 숨겨둔 자식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룹의 이익을 위해 수를 쓰는 거라고 여기실 거 같았습니다.”

상체를 숙인 통역사가 나직하게 전해주는 말에 곤잘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카오 회의에 참석하려는 이유는?”

“그룹 컨소시엄이 강성태 회장님을 지원한다는 점을 보리스 파리오 회장과 삼합회에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강성태의 시선을 확인한 은선곤이 바로 말을 이었다.

“마카오 회의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중국 기업들이 컨소시엄에 압력을 넣을지 모릅니다. 그런 시도를 해봐야 먹히지 않을 거란 점을 미리 보여준다고 생각하시면 적당합니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어.”

“살고 죽는 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까지 든든한 벽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제가 믿는 벽 뒤에 숨었는데도 죽는다면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된 벽을 선택했거나, 타고난 명이 거기까지거나. 선택에 후회가 없으니 이제는 회장님의 결정을 기다릴 뿐입니다.”

은선곤의 말이 끝나고 잠시 뒤에 통역사가 곤잘레스에게 내용을 모두 전했다.

‘이거 참 구경하는 맛이 있군.’

강성태를 바라보는 곤잘레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일 결정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회장님.”

은선곤의 시원한 답을 들으며 강성태는 먼저 픽 웃었다.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니 식사에 집중하지.”

다시 영어로 말을 꺼낸 강성태가 곤잘레스를 돌아보았다.

“결과가 나오면 내게도 알려주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의미로 함께 한잔하는 게 어떤가?”

포크를 내려놓은 곤잘레스가 잔을 잡았다.

앞에서도 가볍게 마셨다. 그러나 상처 때문에 술을 더 마시기는 곤란했다. 예의상 잔을 든 강성태는 입술만 댔다가 뗐다. 그리고는 뒤에 있는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커피가 있을까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요구를 전한 강성태가 빵을 집는 동안, 곤잘레스는 포크를 움직여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이제는 우리 이야기를 해도 되겠나?”

“내일이나 모레, 존 보스만과 경호 동선을 의논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마카오와 관련된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이후에는 은선곤의 미국 생활과 곤잘레스에 관한 리포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드문드문 멕시코 건설 공사의 규모에 대한 화제가 오갔다.

디저트와 커피까지 즐긴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선 건 밤 9시쯤이었다.

“모처럼 유쾌한 저녁이었네.”

강성태의 손을 먼저 잡았던 곤잘레스가 은선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뵙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회장님.”

“또 보게 된다면, 리포트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아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은선곤을 넉넉하게 대한 곤잘레스가 입구로 향했다.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던 존 보스만이 그를 뒤따랐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두 명의 경호원이 라운지를 나섰다.

“세계적인 거부는 좀 더 엄청난 삶을 살 줄 알았습니다.”

“재벌가는 엄청난 삶을 누리나?”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멕시코 공사를 완성하면 곤잘레스 회장도 좀 더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겠지.”

멕시코의 환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은선곤의 감상을 받아주며 강성태는 입구를 향해 걸었다.

문을 나서자 라운지까지 안내했던 비서 두 명이 강성태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엘리베이터로 걸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인 은선곤이 강성태를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랐다.

1층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오늘 내게 한 이야기가 정세원 회장에게 들어갈 수 있어.”

강성태가 나직하게 건넨 경고를 은선곤은 고개를 숙여 받았다.

그 직후였다.

고개를 세운 은선곤의 지적이고 세련된 눈빛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고집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 딴에는 도박과 같은 승부수를 던진 모양이었다.

어차피 강성태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멕시코 현장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는 절박함도 보였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은선곤 씨.”

“예, 회장님.”

로비를 가로지르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은선곤을 불렀다.

“의논할 일이 생기면 시간 구애받지 말고 연락해.”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강성태의 의문에 답하는 것처럼 조금 전까지 고집이 담겼던 눈에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은선곤을 향해 가볍게 웃어준 강성태는 그대로 로비를 빠져나갔다.

“나오셨습니까, 형님?”

고개를 깊게 숙인 아르윈이 열어주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들어간 직후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호텔 이용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은선곤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힐끔 은선곤을 돌아보았던 아르윈이 문을 닫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병원으로 가십니까?”

“응.”

호텔을 빠져나오며 질문을 던졌던 아르윈이 방지병원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강성태는 잠시 호텔을 돌아보았다.

멕시코 공사에서 지켜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시선을 앞으로 가져온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카오로 향하는 일정은 정직하고 꾸준하게 다가오는데 삼합회는 몇 명이나 움직일지, 섭충명은 어디에서 묵는지, 바르지오 만시니가 사라지는 바람에 눈과 귀를 막은 꼴이었다.

결국, 구르카 용병들을 불러야 하나?

무기는 레드워터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을 테고.

문제는 느닷없이 막혀버린 정보였다.

눈빛을 가라앉히며 고민하는 사이, 승용차가 방지병원에 들어섰다.

강성태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이종환이 먼저 고개를 숙였고, 그 뒤로 보조대에 왼쪽 팔을 걸친 조성호가 덩치들 십여 명과 함께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무슨 일이야?”

“태완이 형님께서 형님을 혼자 두었다고 크게 꾸지람을 내리셨습니다. 성호는 충일이가 걱정돼서 올라왔는데 병원 주변에서 눈치 볼 바에는 차라리 들어와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불렀습니다.”

강성태에게 보고한 이종환이 아르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강성태는 조성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충일이는 봤어?”

“예, 형님.”

“저녁은?”

“먹었습니다, 형님.”

이왕 아르윈이 다가온 참이었다.

이종환이 아르윈에게 조성호를 인사시키는 사이, 강성태는 주차장 구석의 벤치로 옮겨가 앉았다.

남은 여유는 사흘이었다.

그 안에 제대로 된 정보를 찾지 못한다면 죽은 바르지오 만시니를 보게 될 테고, 섭충명의 제거를 뒤로 미뤄야 하며, 마카오 회의 내내 누가 당할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고민하던 강성태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언제는 쉽게 된 적이 있었나?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

화려하게 꾸몄지만, 너무 많은 금색과 붉은색 치장 탓에 어쩐지 촌스러워 보이는 공간이었다.

명나라 시대 황제가 앉았을 법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섭충명은 태블릿에 올라온 사진들을 하나둘 넘겼다.

호텔 앞에 선 강성태의 모습을 확인하던 섭충명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비틀었다.

“이놈은 뭐야? 깡패는 아닌 거 같은데?”

“한국에서 만든 컨소시엄의 총괄 비서라는 이상한 직책을 맡은 은선곤이라는 놈입니다.”

“이상한 직책은 또 뭐고?”

“한국에서 컨소시엄이 구성된 적은 여러 차례 있지만, 총괄 비서라는 자리를 만든 적은 없습니다. 뭔가 특별한 임무를 맡은 게 아닌가 싶어서 조사 중입니다.”

호텔 앞에서 상체를 깊게 숙인 모습과 이어서 몸을 세운 은선곤의 얼굴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던 섭충명이 고개를 들었다.

“준비는?”

“곤잘레스 일행이 사용하는 객실 다섯 개를 제외한 그 층의 모든 객실을 이미 예약해 두었습니다.”

섭충명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밀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 디지털 시대에서는 정보를 먼저 쥐는 사람이, 혹은 더 많이 얻은 사람이 살아남는다. 무식한 몸뚱이와 돌아가지도 않는 이거.”

태블릿을 내려놓은 섭충명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콕콕 찍어댔다.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믿고 강성태에게 달려들었던 놈들이 모두 죽은 이유도 변화된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경한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부하를 향해 섭충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놈의 귀를 자르고, 눈을 파냈다. 태연한 척하지만,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심정이겠지. 놈의 목을 잘라 마카오의 앞바다에 버려. 놈의 죽음이 멕시코 사업을 시작으로 우리가 세계의 밤을 움켜쥐는 신호탄으로 만들어야 한다.”

감동이 한껏 올라온 부하가 섭충명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놈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나?”

“특수 훈련을 받은 놈이라 그런지 제법 버티고 있습니다.”

“중요한 역할에 사용해야 하니까 너무 험한 꼴을 만들지는 마라.”

“알겠습니다.”

이제는 나가보라는 투로 섭충명은 손을 뒤로 털어냈다.

부하가 나간 뒤였다.

“삼합회와 이 섭충명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마카오에서 제대로 가르쳐주마. 마피아가 차지했던 어둠의 세상에 새로운 주인이 등장할 텐데, 그게 바로 나다.”

혼잣말을 뱉어낸 섭충명이 오만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

벤치에 앉아있던 강성태는 고개를 돌려 아르윈을 찾았다.

바르지오 만시니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마카오의 싸움을 끝낼 수 있다. 우선 그것만 생각한다.

“아르윈.”

강성태가 부르자 아르윈이 빠르게 다가왔다.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상체를 짧게 숙이고 자리에 앉는 아르윈을 보며 강성태는 쓰디쓴 느낌의 숨을 내뱉었다. 어느 틈에 이런 모습에 익숙해진 자신을 깨달아서였다.

“전에 지나갔던 신월동 지하차도 기억하지?”

“예? 형님?”

“놀랄 거 없고. 한 번 더 지나가 볼 생각이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움직이자.”

지하차도를 지나는 일에 숨겨진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강성태를 향한 아르윈의 눈빛이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의식을 잃으면 그대로 서라대학병원으로 달려. 의식이 있으면 아래 고수부지로 내려가고.”

“예, 형님.”

강성태의 눈을 보며 말릴 수 없다고 여겼는지 아르윈이 나직하게 답했다.

“이대로 가십니까, 형님?”

이병렬이나 최치곤을 들여다보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병원 안쪽에서 지켜보던 이종환이 혹시 일이 있나 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서라대학병원에 다녀올 테니까 그냥 여기 있어.”

“태완이 형님께서 반드시 곁을 지키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형님.”

“그래서 데이트에 따라오려고?”

이종환은 안다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곤란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아르윈하고 갔다가 올 테니까 이곳에서 기다려.”

더는 나서지 못하는 이종환을 두고 강성태는 승용차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온 이종환이 문을 열어주었고, 조성호와 광주 덩치들이 뒤에 늘어섰다.

이런 인사를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 있을까.

“다녀오십시오, 형님.”

생각과 달리 줄줄이 하는 인사를 받으며 강성태는 방지병원을 나섰다.

밤이 깊어지고 있어서 호텔로 향할 때보다는 확실히 속도가 빨랐다.

이렇게라도 바르지오 만시니를 찾아본다. 혹시라도 섭충명이 있는 장소를 알게 된다면 키란과 둘이 그를 제거할 거고.

강성태는 창으로 몸을 기울여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았던 미래가 뒤틀린 이후, 더 시도했다가는 정말 죽음으로 끝날 거란 불길한 예감이 확신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다시는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달려드는 죽음의 유혹을 볼 안쪽을 씹어가며 이겨내는 게, 그리운 사람들을 모두 두고 2년간 전장을 헤매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올림픽 도로에 올라탄 승용차가 빠르게 속도를 높일 때,

“후.”

맞은편의 불빛을 품은 한강을 바라보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심장과 폐가 동시에 타는 듯한 끔찍한 고통, 의식을 붙들기 위해 볼 안쪽을 씹어야 하는 두려움을 털어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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