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17권 - 11화
먼저 치료를 마친 이병렬은 병원 스태프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응급실로 나섰다.
“형님.”
상체를 숙여 인사한 김진용이 병원 스태프에게 눈짓을 건네고는 휠체어를 붙들었다.
“병실로 가세요.”
“예.”
병원 스태프의 요구에 김진용은 분명 그렇게 답했다.
“주차장으로 가자.”
그러나 이병렬의 한 마디에 바로 방향을 틀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화창한 날이었다.
건물을 나서기 무섭게 달려드는 눈 부신 햇살에 이병렬이 고개를 비틀었고, 그 직후에 아르윈이 다가왔다.
“저건 뭐냐?”
햇살에 적응한 이병렬은 아르윈이 조금 전까지 붙어 있던 승합차를 가리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에 탑승한 사람들은 필리핀 조직원들이었다.
“일 생겼어?”
“그게 아니고, 형님. 보스와 형님께서 계시는데 식구들이 아무도 없어서 급하게 불렀습니다. 혹시 불편하시면 돌려보내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이 공손한 태도로 답을 내놓은 다음이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병렬이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렸다.
강성태의 안전을 위해서 조직원들을 불렀다니?
확실히 아르윈은 판단이 빠르고, 행동 역시 그에 못지않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래. 지금처럼 보스만 바라봐. 우리 이렇게 살자.”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진용이와 잠시 이야기 좀 나눌 거니까 편하게 있어.”
“커피 드시겠습니까, 형님?”
“자판기에서 뽑으면 되지.”
“보스께서 좋아하셔서 아메리카노를 몇 잔 준비했습니다, 형님.”
준비했다는 걸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겠나.
이병렬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합차로 움직인 아르윈이 일회용 컵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진한 커피 향이 마치 강성태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가 된 느낌이었다.
“이왕이면 벤치까지 가져다주라.”
이병렬의 요청에 김진용이 휠체어를 밀었고, 커피를 든 아르윈이 따랐다. 주차장 구석의 벤치까지 함께 걸었던 아르윈이 돌아간 뒤였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휠체어의 맞은편 벤치에 김진용이 앉았다.
최근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종일 화창한 날이었다.
“정훈이는?”
“태완이 형님께서 끝까지 자리 지키신 상태에서 달수 곁에 두었습니다, 형님.”
아픈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을 버는 것처럼 둘이서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그 뒤였다.
“너 할 말 있지? 뭐야?”
김진용의 눈빛과 표정만으로 속을 알아본 이병렬이 질문을 건넸다.
“제가 치곤이 동생들한테서 김종수 사장을 넘겨받았었습니다, 형님. 그리고 김종수 사장이 말해준 대로 가서 이광준 사장을 잡아왔습니다, 형님.”
주변을 돌아본 김진용이 나직하게 두 사람에 관해 알려주었다.
“어떻게 하실지 몰라서 일단 안산 공장에 두었습니다, 형님. 고영주라는 년과 조성만도 함께 있습니다.”
커피잔을 내려다보던 이병렬이 눈매를 좁히며 시선을 들었다.
“내가 그것들 묻어버리고, 고영주란 년은 문신 떠서 섬으로 넘기라고 했는데 뭔 소리야? 아! 그 말을 종환이한테만 했었나?”
말을 하던 도중에 김진용을 이해한 것처럼 이병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형님. 섬에 넘겨봐야 괜히 말 나올 소지가 있으니까 차라리 전부 아르윈 형님에게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김진용이 나직하게 건넨 말에 이병렬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아르윈과 승합차, 그 안에 타고 있는 필리핀 조직원을 바라보았다.
이병렬은 그렇게 잠시 답을 주지 않았다.
“그것들을 데려올 수 있겠어?”
“예? 형님?”
“왜? 팔다리라도 끊었냐?”
“그게 아니라 형님. 아르윈 형님께 넘기실 거면 굳이 안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형님.”
“써먹을 곳이 있어서 그러니까 일단 데려와. 늦게 볼 거니까 주변 시선 조심하고. 영등포 공장이 좋겠다.”
“예, 형님.”
이병렬의 지시를 받은 김진용은 답만 내놓을 뿐, 무슨 일로 그러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심지어 궁금하다는 표정마저 꾹 삼켜서 아예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보스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었다는 말은 들었었지?”
“예, 형님.”
주변을 돌아본 이병렬이 김진용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때 사건을 덮었던 검사가 변호사질로 돈 벌어서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떵떵거리며 산다더라. 우리가 작정하면 그런 인간 하나쯤 단숨에 해치우겠지만, 검사 출신 변호사가 실종되면 괜히 사건이 시끄러워질 수 있다.”
단박에 이병렬의 말뜻을 이해한 김진용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김종수 사장하고 고영주란 년을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형님?”
“거머리처럼 다른 사람 피 빠는 건 타고 난 것들이잖냐. 혹시라도 상대방이 방심하면 독을 뿜어내서 조직과 사람을 해치는 전갈로 바뀌는 인간들이고.”
“당장은 살고 싶어서라도 말을 듣겠지만, 괜히 중간에 튀어서 일을 망치면 어떻게 합니까, 형님?”
대답 대신 이병렬은 고갯짓으로 아르윈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려 아르윈을 보았으나 김진용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는 우리 보스랑 달라서 양아치는 양아치 방식 그대로 대해. 이광준, 그 개새끼가 트럭 운전수 섭외하는 바람에 정훈이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뭐가 걸려? 잘 써먹고 아르윈한테 넘기면 되지.”
“아!”
“그냥 우리끼리 폐품 활용하는 거다. 일단 보스에게는 말하지 마라. 봐서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오면 그때 말하게.”
“혹시 성태 형님께서 다른 계획이 있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형님?”
“그럼 그때 가서 취소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예, 형님.”
김진용이 감탄하는 얼굴로 이병렬을 보았다.
“그런데, 형님. 지금까지는 몰라도 부산 일은 숫자도 많았고, 그만큼 보는 눈들이 있어서 아무래도 문제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뒤에 그는 걱정이 올라온 얼굴로 질문을 내놓았다.
“나도 그렇기는 한데 올라오는 차 안에서 들어보니까 여기저기서 덮으려고 애쓰는 모양이더라. 우리 보스 말이다. 깡패 안 하고 다른 거 했어도 보스 자리 차지했을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와 지내게 된 거 보면 저 하늘에 뭔가 뜻이 있는 거겠지.”
이병렬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김진용은 몹시도 감동한 얼굴이었다.
**
치료를 마친 강성태는 다시 최치곤과 유충일이 있는 커튼 안으로 움직였다.
고개를 돌렸던 안다미가 안심하는 얼굴로 강성태를 맞았다.
“꿰맨 자리가 있을 텐데 이렇게 걸어 다니게 뒀어요?”
“먼저 치료받은 이병렬은 휠체어에 앉혔는데 나한테는 다른 말 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는요?”
“그러고 보니 안 먹었네요.”
“왜 그렇게 몸을 혹사시켜요? 안 되겠네, 진짜. 내가 얼른 데려와서 끼니부터 챙겨주든가 해야지, 원.”
밉지 않은 얼굴로 강성태를 타박한 안다미가 바깥으로 시선을 주었다.
“얼른 가서 식사부터 하고 와요.”
“키란의 치료 끝나면 함께 먹겠습니다.”
“키란 씨요?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 키란 씨?”
“예.”
기가 막힌 모양인지 안다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미 씨는 식사했습니까?”
“저런 환자 둘을 두고 밥이 넘어가겠어요?”
“식사 안 했으면 같이 가요.”
“바깥에 이병렬 환자 기다리고, 키란 씨도 있잖아요. 내가 있으면 불편할 테니까 편하게 식사하세요.”
어쩐지 톡톡 쏘는 말투처럼 들렸는데 안다미의 눈에는 애정과 배려가 가득했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의 어깨와 등을 다독여준 강성태는 커튼을 나섰다.
마침 치료를 마쳤는지 키란이 유헌우와 함께 걸어왔다.
“성태 씨. 여기 키란 씨는 몰라도 이병렬 씨는 한 번 더 무리하면 위험합니다. 아시죠?”
뻔뻔한 음성이기는 했지만, 유헌우는 치료나 환자 상태에 관해 농담을 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모르는 부상이 있습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성태 씨의 회복력이 이병렬 씨에게는 없어요. 지난번 상처가 덧났던데 그 부위에 새롭게 멍이 들었더라고요. 참을성 하나는 인정합니다. 내가 그렇게 곪은 자리를 다시 얻어맞았으면 주저앉아 움직이지도 못했을 겁니다.”
응급실 출입문을 돌아보았던 강성태가 다시 시선을 가져온 다음이었다.
“휠체어 앉힌 것도 그 상처들이 더는 벌어지지 않게 움직임을 막으려고 한 겁니다. 성태 씨가 강하게 말해서라도 최소 일주일은 입원하는 게 좋아요.”
“알겠습니다.”
“성태 씨도 너무 부상이 잦아서 회복 기간이 길어지고 있으니까 당분간은 더 조심하고요.”
당부를 전한 유헌우가 중환자실을 대신해 커튼으로 막아놓은 공간을 향해 움직였다.
키란에게 눈짓을 건넨 강성태는 곧장 응급실 바깥으로 향했다.
덧난 상처 탓에 고통이 심했던 모양인데도 이병렬은 악착같이 강성태를 따랐고, 마지막에는 장세조를 상대했었다.
붕대를 감아서인지 팔과 가슴 부위가 벙벙해진 키란도 그렇고.
“아르윈에게 말 들었지?”
“마카오 회의 말입니까?”
“힘들겠지만, 그 일까지 도와줬으면 싶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요청을 받은 키란이 엉뚱한 대꾸를 내놓으며 응급실을 나섰다.
승합차에 붙어 있던 아르윈이 다가왔고, 벤치에 있던 김진용이 몸을 세워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이병렬이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은선곤은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서류를 정확하고 빠르게 분류했고, 곤잘레스 이두안 측에서 요구하는 자료들을 꼼꼼하게 검토했다.
“1차 서류는 이렇게 보내기로 하죠. 바로 넘기세요.”
꼼꼼함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리기는 했지만, 은선곤은 다른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는 심지어 수십 장의 보고서에서 직원이 타이핑 실수로 ‘0’ 하나를 더 넣은 것까지 찾아내서 체크할 정도였다.
5개 그룹이 컨소시엄을 형성했고, 강성태가 추천한 건설사 세 곳이 아래로 끼어든 사업이었다.
예상 단가, 필요 인원, 장비들, 충분히 날카로워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다.
“여기 보고서 말인데요. 숫자가 잘못 입력돼 있네요. 다른 그룹사에서 이 보고서를 모두 봅니다. 멕시코 현지에도 보낼 거고요. 빠르게 처리해주는 건 고마운데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실수한 직원에게 다가가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었고, 다른 직원들이 알아듣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처리했다.
인텔리 느낌 물씬 나지, 5대 그룹의 회장단이 신임할 정도로 배경과 실력 갖췄지, 외모 번듯하지.
남자 직원들은 그와 계속 일하기를 희망했고, 여직원들은 은근 가슴이 설레는 눈빛을 했는데 은선곤은 오로지 일에 빠진 사람처럼 그런 면에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책상에 돌아온 은선곤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지문 인식으로 잠가놓는 왼편 서랍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룹 총괄 기획실 산하 정보팀에서 보낸 자료들이었다.
강성태의 과거 용병 경력, 레드워터 시절의 사진, 신강남파 보스가 되기까지의 과정, 친척과 주변인, 그 외에 밀동 사건, 맹인선을 위해 움직였던 일들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나 놀라운 건 강성태의 비호 세력 부분이었다.
소신영 JBC 회장, 고강준 고검장, 이우섭 부의장, 곤잘레스 이두안, 어나니머스까지, 5대 그룹의 멕시코 컨소시엄 총괄 비서인 은선곤조차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만나는 사람이 의사라는 독특한 이력도 은선곤의 관심을 끌었다.
의사에 개인병원 원장의 외동딸인 상대에게 돋보이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강성태는 개인적인 이익을 얻은 적이 없었다.
신강남파가 관리하는 업장의 수익만 거머쥐어도 강남의 백 평 빌라에서 떵떵거릴 텐데 여전히 신월동에서 지냈고, 이따금 포장마차를 가는 게 전부였다.
은선곤은 자료를 넘겼다.
일대일로 명분 아래 해외로 손을 뻗는 중국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삼합회, 그리고 거대한 자본을 투자해 그에 올라탄 보리스 파리오 회장까지.
이번에 있을 마카오 회담에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잘못되면 은선곤의 인생 전반부가 모두 날아간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 강성태란 남자와.
물론, 사람 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마카오 회담에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을 은선곤은 분명하게 계산에 두었다. 다만, 아직 이후의 대책이 없을 뿐이었다.
“1번, 미국으로 건너가서 작게나마 새롭게 시작하고.”
서류를 넘기며 은선곤은 마치 다른 사람에게 조언하듯 할 수 있는 일을 혼잣말로 내놓았다.
“2번,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컨설팅 회사에 취직하거나.”
두 번째 방법을 나직하게 뱉어낸 은선곤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3번, 신강남파 조직원이 되는 것.”
숨을 크게 들이마신 은선곤은 평소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표정을 하고는 히죽 웃었다.
‘어머!’
저런 면이 있었어?
귀여워!
힐끔거리던 여직원들의 눈에서 하트가 무수히 떠올랐는데 은선곤은 서류의 가장 앞에 있는 ‘강성태’란 이름만 뚫어지고 보았다.
처음이었다.
누구와도 마음 나누지 못하고 어머니와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그의 가슴을 이렇게까지 흔드는 사람은.
어쩌면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렸던 그가 정작 원했던 모습이 강성태여서 이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시간 괜찮으면 내일쯤 식사나 함께할까요?”
강성태의 제안을 떠올린 은선곤이 이번에는 설레는 표정으로 웃었다.
‘뭐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그의 미소를 지켜보던 여직원들의 눈에 의아한 느낌과 함께 시샘하는 빛이 떠올랐는데, 은선곤은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