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17권 - 8화
제3장. 강성태와 은선곤이라.
점심을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멕시코 건설 컨소시엄 회장단 비서실장, 엄청나게 긴 직책을 맡은 은선곤은 강명그룹 회장실에 들어섰다.
비서의 안내에 따라 거대한 문 앞에 선 은선곤은 재킷을 만진 뒤에 안에서 부르기를 기다렸다.
먼저 들어섰던 비서가 곧바로 나와 문 옆에 섰다.
단정하게 고개를 숙여 비서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은선곤은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은선곤입니다, 회장님.”
“그래.”
책상에서 일어선 강명그룹 회장 정세원은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은 채 책상 안쪽 벽을 따라 걸었다.
공식, 비공식적으로 방문객을 만날 때 사용하는 다섯 개의 접견실과 두 개의 회의실을 제외하고, 정세원이 정말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일종의 밀실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정세원이 식물원처럼 잘 꾸며진 사이로 놓인 소파의 상석에 앉아 왼편을 가리켰다.
단정하게 움직인 은선곤은 고개를 숙인 뒤에 정세원이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자료는 확인해 봤어?”
“예, 회장님. CCTV 영상으로 봐서는 강성태 회장이 확실합니다.”
“흐음.”
불편한 심기를 쏟아낸 정세원이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판단은?”
“회장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싶었다면 회의실로 불렀거나, 전체 회의를 했겠지. 내가 듣고 싶은 건 너의 판단이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은선곤은 시선을 떨궜다.
먹먹한 침묵이 흐른 뒤였다.
이번에는 신음처럼 들리는 숨을 쏟아낸 정세원이 먼저 침묵을 깼다.
“멕시코 현장은 향후 10년, 우리 건설 분야를 지탱해 줄 만한 사업이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이 그룹 전체의 역량을 아프리카 건설에 쏟아붓는 바람에 우리에게 올 수 있었지, 그쪽 곽대출 부회장이 움직였다면 기회가 오기 어려웠을 거다.”
냉정한 표정으로 현상을 분석한 정세원이 말을 이었다.
“그 멕시코 건설 현장의 책임자가 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국내 사업 네 곳을 양보했다. 그러니까 이제 분명하게 말해. 어떻게 하고 싶으냐?”
“회장님. 저는 오로지….”
“네가 어머니 성씨를 따랐기 때문에 은씨가 되었지만, 너는 영락없이 돌아가신 회장님과 판박이다. 특히, 어떤 순간에도 고개 숙이는 그 진중함은 소름 끼치도록 똑같다.”
같은 답변을 내놓는 은선곤의 입을 정세원이 매서운 음성으로 막았다.
“나는 네가 멕시코 현장에서 뿌리내렸으면 싶다. 확실하게 해서 2차 공사까지 따내. 그걸 배경으로 스스로 일어나. 바람은 그렇지만, 멕시코 건설 기회가 사라지는 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포기한다면 다른 기회를 만들어주마.”
고집스러운 음성에 담긴 단호한 통보였다.
“고강준 고검장과 소신영 회장이 강성태 회장을 무너트릴까 하고 고민 중이다. 나를 비롯한 5대 그룹이 나서면 한번은 그를 지켜줄 수 있지. 네 인생이 걸려 있으니 결정도 네가 해.”
지금껏 아래를 향해 있던 은선곤이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을 들어 정세원을 보았다.
“눈빛까지 돌아가신 회장님과 똑같구나.”
쓰디쓴 음성으로 정세원이 탄식을 토해낸 직후였다.
“강성태 회장을 지켜주십시오.”
다가오는 침묵을 밀쳐내는 것처럼 은선곤이 뜻을 내놓았다.
“그에게 네 인생을 걸겠다? 이유는?”
“안내하는 동안 잠깐 보았지만, 혹시 인생을 걸게 된다면 그런 사람에게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너라면 뭔가 철저한 계산을 했을 거라고 기대했지, 그런 식으로 감상적인 이유를 내놓을 줄을 몰랐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정세원을 향해 은선곤이 입을 열었다.
“강성태 회장은 절대 폭력조직의 수괴로 끝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보았으니까 그 점은 인정하지.
의미가 분명한 눈빛으로 정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멕시코 건설을 연결하면서 커미션 따위 관심 두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제게 겸손했습니다. 그 외에 신강남파 수장이 될 때까지의 자료를 보고 판단했습니다.”
“곤잘레스 이두안도 계산에 있겠지?”
“운이 된다면, 그리고 강성태 회장이 제 능력을 인정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우-.”
답을 모두 들은 정세원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물끄러미 은선곤을 바라보았다.
“마카오 회담은 알고 있지?”
“예, 회장님.”
“중국과 손잡은 보리스 파리오가 강성태 회장을 누르면 모든 게 끝나. 그리고 이번에 강성태 회장을 구해주게 된다면 너는 더 이상 내게 어떤 요구도 하지 못한다. 그것도 알지?”
“강성태 회장을 지켜주십시오.”
“그것참.”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정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선대 회장님께서도 한번 결정한 걸 바꾸신 적은 없었지. 알았다. 나가 봐.”
자리에서 일어선 은선곤이 고개를 숙일 때였다.
“한 가지만 충고하마. 나가는 대로 강성태 회장에게 연락해. 생색내라는 게 아니다. 고검장과 소 회장이 부산 일로 강 회장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려주라는 뜻이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뒤에 나서는 은선곤을 보며 정세원은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탐날 정도의 능력과 재능을 타고났지만, 은선곤을 그룹에 계속 두었다가는 지경그룹 천중명과 같이 정세원의 자식들을 밀쳐내고 그룹을 차지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은선곤이 야비한 성품이란 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유혹을 던져봤지만, 그는 정세원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말이다.
한 어머니에서 나온 친동생만 되었어도.
은선곤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던 정세원이 협탁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 네, 회장님.
“내 자리로 갈 테니까 그리로 소신영 회장을 연결해줘.”
-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회장님.
인터폰에서 손을 내린 정세원이 바로 몸을 세웠다.
**
박노익은 먼저 가장 믿는 심복 문기주를 이용해 조강치를 빼돌렸다. 그런 뒤에 경상도 보스 이교창을 내세워 이미 기가 꺾인 부산 덩치들을 다스렸다.
“병원을 섭외해 두었으니까 그리 움직여.”
마지막으로 그는 조태완이 섭외해 둔 병원을 부산 덩치들에게 알려주었다.
특히, 병원은 조강치가 월급 원장을 두는 방식으로 만들어놓은 외과 병원이 더 있어서 부산 덩치들의 치료에는 문제가 없었다.
“깡치 형님이 부산 검찰과 경찰에 미리 손을 써놓았던 모양이다. 태완이 형님이 그 외에 따로 작업하고 있어서 당장 크게 문제 될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얼른 서울로 올라가.”
“형님. 깡치 형님이 7층 천장에 CCTV로 협박했었습니다. 장세조나 서창호의 숙소 애들을 불러서 그 부분을 확인해야 할 거 같습니다.”
“끝까지 정말 그 양반답네. 알았다. 그것까지 내가 알아볼 테니까 일단 서울로 가. 방지병원인가 그리 갈 거지?”
“우선 그렇게 할 생각인데 올라가는 동안 변동이 있으면 전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박노익과 짧게 의논을 마친 강성태는 이종환과 고룡동을 향해 움직였다.
“언제 올라올 거야?”
“경상도 교창이 형님이 이리 오신답니다. 그때까지 노익이 형님 곁에 있다가 올라가겠습니다.”
이종환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낸 고룡동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생했다. 서울에서 한번 보자.”
“감사합니다, 형님.”
그렇게 이종환과 고룡동을 다독인 강성태는 이병렬, 키란과 함께 아르윈이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줄줄이 늘어선 신강남파 식구들이 인사하는 틈에서 아르윈이 차를 움직였다.
서울로 향하는 길이었다.
물수건으로 대강 닦았고, 차에 두었던 옷으로 갈아입어서 당장 흉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친 데다 거칠어진 모습만은 숨기지 못했다.
연락 온 건 없었을까?
승용차의 뒷자리에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안다미가 연락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부재중 전화나 문자는 전혀 없었다.
만약 최치곤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아픈 통보가 되더라도 안다미는 분명 강성태에게 연락할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건, 아직 응급수술이 이어진다고 보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강성태는 바르지오 만시니의 번호를 찾았다.
[연락 부탁한다.]
문자를 마친 강성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조수석에 앉은 키란과 이병렬을 돌아보았다.
대충 붕대로 싸매기는 했는데 두 사람 모두 새로 갈아입은 옷 위로 은은하게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피가 배어 나온 건 강성태 역시 다르지 않았다.
“충일이나 치곤이에 관해 연락 온 건?”
“아직 수술 중인지 연락 온 게 없어.”
“최소한 죽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방지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렇게 믿으려고.”
“염병. 유 원장을 또 봐야겠네.”
툴툴거린 이병렬이 차창에 기대듯 상체를 기울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졸라리 화창하네.”
김정훈을 보내주는 날이었다.
떠나는 김정훈을 생각했는지 이병렬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에서 몸을 세운 이병렬이 등받이에 기대고는 잠을 청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아까 우리 나오고, 깡치 형님에게 종환이가 칼 드렸을 거야.”
이게 무슨 소리야?
강성태가 시선을 돌린 옆자리에서 이병렬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CCTV로 찍는다고 했으니까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지. 보스가 칼을 주기는 했어도 깡치 형님의 마지막은 종환이가 해결한 거야.”
“부검하면 다 나올 텐데 뭐하러 그런 일을 해?”
“태완이 형님이 나서면 그 정도는 덮어. 그러니까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그러니까 정말 잘못됐을 때, 쉽게 인정하지 말고 모르겠다고만 해.”
이종환에게 눈짓을 하더라니.
그 자리에 있던 부산 덩치들과 신강남파 덩치 숫자가 얼마인데 증인 하나 못 찾겠나. 거기에 아무리 중한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어떻게 이종환에게 죄를 떠넘길 수 있겠나.
마음은 그런데 지친 이병렬과 당장 그런 걸 따지고 싶지 않아서 강성태는 잠자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강성태는 시선을 내려 손안에 든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비행기를 타고 있더라도 급한 연락을 보내면 동료를 통해 답을 하겠다고 했던 바르지오 만시니의 답이 아직 오지 않았다.
혹시?
나쁜 생각이 떠오른 강성태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존 보스만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존 보스만입니다, 미스터 강.
“화이트 테일이 우리나라로 출발한다고 했는데 혹시 연락받은 거 있어?”
- 처음 듣습니다. 정말 그가 한국으로 출발했습니까?
“지금쯤 비행기 안에 있어야 맞아. 출발했는지, 그랬다면 어떤 비행기에 탑승했는지를 알아봐 줄 수 있을까?”
- 그 정도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굵직한 존 보스만의 답을 끝으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렸다.
손에 남은 상처, 팔과 옆구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이병렬과 키란까지, 대한민국에서 참 엄청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강성태에게 달려들었다.
조강치가 부산과 경상도에서 동원한 숫자가 천 명, 강성태가 데려간 식구들만 사백 명이었다.
그렇게 많은 덩치들이 피바람을 일으켰으니 사건화가 된다면 조강치의 말대로 줄줄이 교도소에 들어갈 테고, 강성태부터 이병렬, 이종환까지는 정말 머리가 하얗게 돼서야 나올 만한 일이었다.
강성태가 조강치를 쓰러트리는 순간에 이병렬은 이런 계산을 먼저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한다는 심정으로 이종환에게 눈짓을 던졌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강성태는 부산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밀수를 제보했던 부모의 죽음마저 덮어버렸던 인간들이 정의를 내세워 강성태를 벌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다. 막말로 벌을 해야 한다면,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해먹는다는 그 인간을 먼저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외쳐도 빛의 세상에 그림자가 대항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악착같이 방법을 만들어내야 한다면 그들을 어둠의 세계로 끌어내린 뒤에 맞서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생각을 정리한 강성태는 조금 전의 이병렬을 흉내 내듯 창에 상체를 기울여 부산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한을 품었을지 모를 김정훈이 조금은 편안하게 떠나기를 바랐고, 이제는 악몽에서라도 더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시달리지 않았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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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비서에게 전화를 연결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책상에 올려놓은 스마트폰 액정이 소신영의 이름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이름을 확인한 정세원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창가로 움직였다. 모든 걸 잠시 미루고 가까운 물가에라도 가고 싶을 정도로 화창한 날이었다.
“정세원입니다. 회장님.”
- 우리 정 회장이 연락하셨다기에 전화 드렸습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능구렁이처럼 뻔뻔한 소신영의 음성에 정세원은 먼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조금 전에 이상한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부산 특정 지역에서 만들었다던데 그 일로 멕시코 건설에 차질이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생기지 뭡니까.”
- 흐음.
“마침 그 지역을 공사중이라는 핑계로 통제했고, 영상은 부산 검찰이 직접 확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소 회장께서 고검장과 함께 애써 주셨으면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뜨끔하겠지.
고강준과 이우섭은 5대 그룹이 함께 움직일 힘이 필요하고.
어떻게 하시겠소, 소신영 회장?
정세원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을 기다릴 때였다.
- 확실히 그룹이 지닌 정보력이 대단합니다.
뜬금없는 소신영의 감탄이 먼저 건너왔다.
“우리 같은 장사치야 어떡해서든 돈 되는 일을 지켜야 해서 꼭 그 수준에서 움직일 뿐입니다. 고강준 고검장이 고민하는 모양인데 소 회장께서 힘을 발휘해주시면 어떻습니까?”
- 제게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고검장에게는 야망이 있지 않습니까? 또, 강성태 회장과 개인적인 인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잘것없지만, 멕시코 사업을 계속 진행할 수 있게 배려해주시면 그 점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보답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부산 검찰청에 있는 영상을 조용하게 덮을래, 아니면 강성태를 체포하는 거로 5대 그룹과 척질래?
답을 기다리기 지루한 것처럼 정세원이 눈가를 찌푸릴 때였다.
- 마침 고검장과 약속이 있으니까 잘 말해보겠습니다.
예상했던 답이 건너왔다. 그리고 답을 듣는 순간에 정세원은 소신영과 고강준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부족하지만, 제가 고검장께서 총장이 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움직일 거라고 전해주십시오.”
통화를 마친 정세원은 스마트폰을 든 채 뒷짐을 지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성태와 은선곤이라.”
어쩌면 짧은 인연으로 끝났을지 모를 용과 호랑이를 제대로 연결해준 건가 싶은 생각에 정세원은 쉽게 책상으로 자리를 옮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