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16권 - 18화
제8장. 올라갑니다, 형님.
호텔 주차장에 도착한 최치곤을 향해 유충일이 먼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최치곤입니다, 형님.”
“전에 국범이 형님 행사장에서 한 번 봤었지?”
“예, 형님.”
깊숙하게 숙이는 최치곤의 상체를 껴안다시피 붙든 유충일이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렸다.
“보스와 친구라며? 그런 네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숙이면 우리 보스 체면 상하신다. 나한테는 이 정도면 돼. 이리와. 여기가 숙소 직접 관리하는 조성호다. 성호야. 치곤이는 알지?”
“전에 행사장에서 두 번 정도 봤습니다, 형님.”
“최치곤입니다, 형님.”
“너는 충일이 형님 말씀 듣고도 그래? 적당하게 하는 게 좋아.”
“아닙니다, 형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저도 보스를 형님으로 부르고 모십니다. 아무리 사적으로 친구라 해도 제가 건방진 모습을 보이면 병렬이 형님과 진용이 형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공손하고 깍듯한 최치곤을 보며 유충일은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신하기 어렵기도 하겠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보스 체면 상하시지 않게 조심하고 또 조심해.”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야비하고 교활해진 최금식이 광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며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바로 유충일이었다.
남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최금식을 유충일은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게 따랐다. 그런 유충일이 어리석다며 다들 혀를 찼는데, 반대로 우직한 그 모습만큼은 배워야 한다며 입을 모으기도 했었다.
최치곤의 숙소 덩치들은 유충일을 직접 만나 인사하는 것만도 황송하다는 태도로 고개 숙였고, 유충일은 또 강성태의 직속 숙소라는 점을 존중해서 좀 더 넉넉하게 인사를 받았다.
“식구들이니까 아무리 바쁘더라도 얼굴은 익히자.”
그 뒤에 유충일은 광주 식구들을 한 명, 한 명씩, 일일이 소개했다.
별것 아닌 듯한 그 소개가 사실은 형님을 대할 때나 보임 직한 예의라는 사실을 광주 식구들과 최치곤의 숙소 덩치들 모두 알았다.
아무렴 유충일이 최치곤을 두려워하거나, 강성태에게 아부하기 위해 이렇게 숙소 동생들을 소개하겠나. 그저 어떡해서든 강성태의 믿음에 보답하겠다며 나선 모습이어서 최치곤의 숙소 덩치들은 더욱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출발하자. 장소가 어디냐?”
“여기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형님.”
최치곤은 스마트폰을 꺼내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었고, 이어서 거리 풍경과 건물을 유충일에게 보여주었다.
“한번 둘러보는 게 좋겠는데, 주변에 우리 식구들이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있나?”
“해변에 공영주차장이 세 곳 있습니다, 형님. 그쪽에 나눠서 차를 세웠다가 밀고 갈 때 모이면 어떻겠습니까?”
최치곤의 독한 눈빛이 마음에 든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유충일이 호텔 주차장을 돌아보았다.
유충일은 원래 50명을 이끌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 뒤에 부산에 가는 걸 숨기기 위해 20명을 장례식장에 두어서 지금 있는 광주 식구들은 모두 서른 명이었다.
거기에 최치곤이 데려온 숙소 덩치들이 열 명, 전부 마흔 명쯤 되는 인원이어서 세 곳으로 나누면 눈에 띌 위험이 그리 크지 않았다.
“치곤아. 네가 데려온 숙소 동생들을 위쪽 공영주차장으로 보내. 그리고 성호랑 해서 맨션을 한 번 둘러보자. 내 차로 가도 되지?”
“모시겠습니다, 형님.”
덩치들에게 공영주차장을 지정해 준 최치곤이 유충일이 가리키는 승용차로 움직였다.
조성호가 운전했고, 최치곤이 조수석, 유충일이 뒷좌석에 앉아 HK맨션으로 향했다.
새벽 3시쯤이어서 실제로 맨션에 도착한 건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세우지 말고 그대로 지나가.”
맨션에 도착한 유충일이 무겁게 건넨 지시에 따라 승용차는 2차선 도로를 원래 속도로 달려 맨션을 지나쳤다.
경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맨션 앞에 검은색 승용차와 승합차가 서 있고, 덩치들 십여 명이 입구에 몰려 있을 줄은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맨션을 지난 승용차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5분쯤 달린 뒤에 멈췄다.
“건물 전체를 깡치 형님이 작업한 거 같은데?”
유충일이 볼을 씰룩이며 의견을 내놓았는데 최치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묵는 맨션의 501호에 민병련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조강치 소유의 건물이거나, 아니라도 부산 덩치들이 건물 전체를 사용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성호야. 아까 승용차가 몇 대나 있었는지 봤냐?”
“승용차가 다섯 대, 승합차가 세 대였습니다, 형님.”
조성호의 답을 들은 유충일은 맨션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승용차에 20명, 승합차에 30명, 최소 50명을 깔았다는 건데, 입구야 어떡해서든 밀고 들어간다고 해도 7층 건물 안에 몇 놈이 있을지 전혀 모르니 그게 문제네.”
승용차와 승합차의 숫자로 입구의 인원을 짐작한 유충일이 볼을 씰룩였다.
단순하게 5층만 부산 덩치들이 모두 차지했다고 계산해도 어림잡아 50명에서 70명이 있다고 봐야 했다. 거기에 입구의 50명을 더하면 최소 100명에서 120명의 덩치들이 맨션에 바글거린다는 의미였다.
먼저 강성태에게 연락해서 방법을 찾거나, 인원을 더 불러야 하지 않을까?
최치곤이 머리를 굴릴 때였다.
“우리가 전부 마흔 명이니까.”
이 숫자로 밀고 들어간다고?
“조성호. 스무 명 추려서 입구 틀어막아. 10분만 버텨.”
“예, 형님.”
유충일이 독하게 건넨 지시를 조성호가 비슷한 표정과 음성으로 받았다.
천안에서 병원을 밀고 올라갈 때도 달랑 넷이서 움직였던 최치곤이었다. 그런데 이 새벽 부산에는 이병렬, 김진용은 말할 것 없고, 무엇보다 수십 명을 홀로 상대해 줄 강성태가 없는 자리였다.
“치곤이 동생이 나랑 올라가자. 길은 내가 연다. 무슨 짓을 해서든 민병련 넘겨 줄 테니까 그 새끼 받으면 그대로 서울로 달려. 내가 성호랑 뒤를 막아주마.”
“형님?”
놀라서 돌아보는 최치곤의 시선 속에서 유충일은 진흙처럼 두껍게 독기를 처바른 얼굴이었다.
“보스께서 부산에 숨어 있는 민병련을 데려오라고 하신 건 그 새끼가 그만큼 중요해서겠지. 그 중요한 일을 나랑 우리 광주 동생들에게 주셨다. 그 정도로 우리를 믿어주신다는 거지.”
얼굴에 발라놓은 독기가 유충일의 음성을 타고 승용차 안으로 진하게 퍼지는 느낌이었다.
“보스가 버튼을 누른 일이다. 부산 아니라 세상 없는 곳이라 해도 신강남파 보스께서 원하는 놈은 반드시 데려간다. 죽을 자리라 피하고, 숫자가 밀린다고 몸 돌리는 건 개 양아치지 숙소 생활하는 깡패가 할 짓은 아니다.”
유충일이 뿜어내는 독기가 승용차 안을 가득 메운 뒤에 최치곤과 조성호에게 진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말을 듣고 있던 최치곤과 조성호의 눈빛 역시 잔인한 느낌으로 번들거렸다.
“성호야. 10분이다.”
“맡겨주십시오, 형님.”
“치곤아. 부산에서 민병련 뺏겼다는 사실이 퍼지면 깡치 형님은 말할 것 없고, 부산 깡패 모두 잣 되는 거라서 고속도로에서라도 들이받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민병련은 내가 꺼낸다. 그 새끼를 붙들면 절대 돌아보지 말고 서울로 달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형님?”
최치곤을 향해 시선을 준 유충일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형님들을 남겨두고 서울로 달려가면 성태 형님이 실망하십니다, 형님. 숙소 동생 셋을 추려 민병련을 데려가게 하고, 저는 형님 모시겠습니다, 형님.”
최치곤의 다부진 각오를 들은 유충일이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투로 픽 웃었다. 그런 뒤에 느닷없이 주먹을 들어 최치곤의 오른쪽 어깨를 퍽,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끄윽.”
“천안에서 몸 상했다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너까지 챙기라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니냐?”
팔을 뻗은 유충일이 어깨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독하게 인상을 찌푸린 최치곤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마음은 받았다. 그러니까 이번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최치곤을 다독인 뒤였다.
“가자, 성호야.”
유충일의 지시가 떨어졌고, 이어 승용차가 움직였다.
**
새벽 2시가 넘으면서 조문객이 끊겼다.
술이 과해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혹은 시비가 있을 법도 한데 수백 명의 덩치가 몰려 있는 장례식장은 숙연한 분위기, 그 자체였다.
강성태는 저녁을 먹었고, 커피를 마셨던 그 방에 앉아 있었다.
자정을 넘겨 새벽 1시쯤, 이병렬과 김진용은 입구를 지키는 덩치들을 돌아보고 다독인 뒤에 돌아왔다.
민병련을 잡기 위해 부산으로 달려간 최치곤과 유충일이 맨션을 뚫고 올라갈 시간이었다.
“종환이하고 섭우는 저녁을 먹었나?”
팽팽하게 당겨지는 긴장을 늦추겠다는 것처럼 이병렬이 엉뚱한 혼잣말을 내놓았다.
“그 새끼들, 줄곧 서 있었나 보더라고. 하여간, 보스를 진심으로 따르는 놈들은 이상하게 요령이 없어, 요령이. 영권이 새끼 봐. 클럽 일 본다는 핑계로 밥 처먹고, 떡 처먹고, 다 먹잖아.”
이병렬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방으로 박노익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괜찮으니까 그냥 앉아. 아, 앉으라니까.”
삼촌처럼 세 사람을 다독인 박노익이 강성태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새벽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무슨 일로 들어섰는지는 몰라도 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조금 전에 깡치 형님이 내게 전화했었다.”
혹시 맨션 일이 잘못되었나?
강성태를 돌아본 이병렬이 박노익에게 시선을 돌린 다음이었다.
“보스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래?”
질문을 건넨 박노익이 오히려 궁금한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아십니까?”
“안 그래도 물어봤지. 그랬더니 직접 말하겠다며 자르더라고.”
강성태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55분이었다.
최치곤과 유충일이 실패해서 붙들렸다고 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전화해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강성태는 박노익이 불러주는 번호를 스마트폰에 입력한 뒤에 스피커 통화버튼을 눌렀다.
냉정하자. 표시 내지 말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해한 죗값은 나중에 받기로 하고, 당장은 최치곤과 유충일만 생각하자.
뚜르르륵. 뚜르르륵.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카랑카랑한 음성에 부산 억양이 슬며시 발린 대꾸가 넘어왔다.
“강성태다.”
- 하, 그놈 참.
마치 할아버지의 수염을 당기는 손자를 대하듯, 뜻밖에도 조강치는 강성태의 반응이 귀엽다는 투였다.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박노익이 어깨들 들썩이며 양손을 벌렸다. 조강치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야?”
- 이놈아. 세상에 독불장군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 널 보니까 내가 늙었구나 싶다.
연달아 건너오는 태평한 반응으로 봐서 조강치는 아직 최치곤과 유충일이 부산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 직후였다.
- 그래서 말인데, 부산 네가 가져라.
강성태의 뒤통수를 세게 갈기는 듯한 제안이 건너왔다.
이건 또 무슨 헛수작이지?
박노익마저 황당하다는 얼굴로 강성태와 이병렬을 돌아보고 있었다.
- 내가 말이다. 내일 아침에 너를 후계자로 지정해 줄 테니까 새벽에 내려와. 물론 창호와 세조가 달려들 텐데, 그건 우리 바닥 룰 대로 네가 정리해야지. 부산을 먹는데 그 정도 수고는 해야 하지 않겠냐?
의미 있는 눈빛을 던진 박노익이 스마트폰을 들고서 녹음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그런 뒤에 통화를 계속하라는 의미처럼 손을 짧게 앞으로 돌렸다.
- 왜 대답이 없어?
“지금 들은 말을 서창호나 장세조에게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 흐하하하하.
펄쩍 놀라는 박노익의 표정을 직접 본 사람처럼 조강치의 웃음은 비릿했다.
- 내가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다. 네가 보스가 되면 나를 고문으로 남겨준다는 약속. 대신 네가 먼저 창호나 세조에게 무너지면 그놈들 몫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이 내용을 그놈들에게 전해도 상관없다.
“양다리를 걸치시겠다?”
- 내가 독하게 마음먹는 순간, 경상도 전체가 일어나. 그 정도는 거기 노익이도 알고 있을 텐데? 아! 노익이도 함께 듣고 있나?
또다시 놀란 박노익이 고개를 불쑥 들었다.
- 부산을 시작으로 경상도를 편하게 먹을 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창호와 세조를 꺾고 경상도의 주인이 될 건지, 아니면 누가 죽고, 누가 빵에 갈지 모를 싸움을 할 건지는 네가 결정해라.
“한 가지 착각한 거 같은데?”
강성태가 나직하게 입을 열자 숨죽인 것처럼 스마트폰 건너편에서 아무런 대꾸도 넘어오지 않았다.
“나한테 욕먹은 순간에, 그리고 얌전히 몸 돌린 모습을 보인 거로, 부산 조강치는 이미 끝났어.”
- 이 새끼가 진짜?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조강치의 거친 반응이 툭 달려들었다.
“힘 빠진 조강치를 위해 경상도가 일어날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서창호와 장세조를 누르기도 벅차 보이는데?”
- 이 어린놈의 새끼가!
“큰소리친 만큼 독하게 버텨. 그래서 서창호와 장세조를 밟아.”
뭐야, 이건?
강성태의 의도가 궁금한 얼굴로 이병렬이 시선을 주었다.
- 부산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서창호와 장세조를 눌러달라는 거냐?
조강치 역시 이병렬과 같은 의문을 품은 모양이었다.
- 확실히 요즘 젊은 놈들의 얄팍한 계산은 당할 방법이 없어. 하지만,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같은데?
강성태는 대놓고 픽 웃었다.
“네놈 목은 반드시 내가 갈라주겠다는 뜻이니까 오해하지 마. 살아있어야 목을 가르지. 안 그래?”
- 너는 그냥 미친 새끼구나. 오냐. 이 조강치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제대로 보여주마.
조강치의 카랑카랑한 각오를 끝으로 통화가 잘렸다.
“어지간하면 달래는 척하면서 잡아내지 그랬어?”
통화를 지켜보았던 박노익이 아쉽다는 얼굴로 조언을 건네고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우우웅.
짧은 진동과 함께 그만큼 짧은 문자가 액정에 올라왔다.
[올라갑니다, 형님.]
친구가 아니라 조직의 보스에게 보낸 최치곤의 문자였다.
그 짧은 글에 독기 가득한 최치곤의 눈매가 보이는 것 같아서, 함께 뛰어드는 유충일과 광주 식구들의 각오가 쏟아지는 느낌이어서, 강성태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