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16권 - 14화
제6장. 완전히 밟아주면 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의 중간을 박노익이 잠시 끊었다.
쉬는 시간을 갖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셔츠를 갈아입어야 할 이병렬과 김진용에게 시간이 필요했고, 강성태 역시 잠시의 휴식을 갖는 게 나쁘지 않았다.
박노익은 강성태와 이병렬을 안쪽 특실로 데려갔다.
“힘들지? 잠시 앉아.”
휠체어에서 견디는 일조차 힘겨워 보이는 조태완이 테이블 앞자리를 권했다.
박노익, 이병렬과 함께 자리한 다음이었다.
“병원에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보스가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데 어떻게 병원에 가?”
강성태의 권유를 받은 조태완이 농담 묻은 대꾸를 먼저 내놓았다.
“가족 하나 없는 정훈이 놈을 외롭게 보내기 싫어서 함께 있는 거니까 장례식 끝날 때까지는 모른 척해 줘.”
나이 든 남자가 보여주는 슬픔처럼, 벽으로 막힌 공간을 돌아보는 조태완의 눈매에 안타까움이 담뿍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입술을 굳게 다물어 감정을 누른 조태완이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계산했던 거지?”
짐작하는 상태에서 건넨 질문이었다.
강성태의 눈을 본 조태완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고, 지켜보던 박노익이 졌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가 무작정 들이받지는 않았을 테고, 뒤에 계획이 있을 거 같은데?”
“지금쯤 치곤이가 김종수 사장을 잡았을 겁니다.”
강성태의 말을 들은 조태완이 고개를 불쑥 들고서 이병렬을 돌아보았다. 알고 있었냐는 의미로 보였다.
“저도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보스가 섭우와 의논해서 처리한 일입니다, 형님.”
“그래서? 종수를 잡는 거 하고 깡치 형님 긁어댄 게 무슨 상관인데?”
“김종수가 일본 쪽 자금을 당겨서 이광준과 함께 사채를 돌렸습니다. 또, 이광준은 민병련과 붙어서 형님 작업한 트럭 기사를 섭외한 거고요.”
입술을 굳게 다문 조태완이 강성태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종수를 일부러 요란하게 잡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이광준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겁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민병련과 손잡았던 이광준이 연락할 곳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조강치?”
“그렇습니다. 이광준은 반드시 조강치에게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그때를 기다렸다가 서창호, 장세조까지 한꺼번에 잡을 생각입니다.”
“그 짧은 순간에 그 정도까지 계산해서 행동했던 거야?”
박노익이 질린다는 투로 입술을 둥그렇게 말고서 놀란 감정을 뱉어냈다.
역시나 놀라고 감탄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보던 조태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광준의 뒤를 밟으려고?”
“그보다는 이광준이 그 세 사람을 불러오게 할 생각입니다.”
“아, 참. 답답해서 숨이 다 막힌다. 그냥 알기 쉽게 말해줘 봐.”
불평처럼 들리는 말과 달리 조태완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김종수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새끼 약점이 어디 한두 개야? 여자, 돈, 모사친 거, 그중에 뭔데?”
“일본 쪽 돈을 연결한 인간이 김종수입니다.”
“돈? 아!”
강성태의 말을 듣던 조태완이 상체를 세우다가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뭔데 그러십니까, 형님?”
이번에는 박노익이 갑갑해 죽겠다는 투로 조태완에게 매달렸다.
“이광준이 손을 쓰게 하려는 거구나! 김종수를 구출해 내면서 오늘 일을 보복할 정도로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서!”
태완이 형님 말씀이 맞아?
박노익이 확인을 원하는 시선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치곤이가 제 친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음으로 지금 신강남파에서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을 제외하고 제가 가장 아파할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든 병렬이를 떠올릴 겁니다.”
홱, 이병렬을 돌아보았던 조태완과 박노익이 동시에 강성태를 찾았다.
“일본 쪽 자금원을 알아낸 이병렬이 최치곤, 김진용과 함께 움직입니다. 조강치가 어떻게 할까요?”
“오늘 보스에게 제대로 씹혔으니까 그 성격에 무조건 뒤를 노리겠지?”
반문했던 조태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계획은 그럴싸한데 조강치는 그렇게 어수룩한 인물이 아니야. 막말로 서창호와 장세조만 보낼 수도 있어.”
“조강치의 자존심을 한 번 더, 완전히 밟아주면 됩니다.”
이번에 또 뭐냐?
이병렬까지 속 터지는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오늘 제가 조강치를 함부로 대한 건 소문 납니다. 그런 상태에서 조강치가 보호하던 민병련을 제가 데려오면 이름값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겁니다.”
“민병련? 민병련을 어떻게…?”
조태완, 박노익, 이병렬이 소름 돋은 얼굴로 강성태의 다음 말을 애타게 기다렸다.
“민병련까지 뺏기면 어떡해서든 망가진 체면을 세우려고 발광하겠죠. 병렬이를 죽여서라도요.”
말을 마친 강성태는 확인처럼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있겠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이병렬이 만족한 눈으로 웃었다.
**
최치곤은 김종수를 데리고 남양주로 달렸다.
“치곤아? 내 말 좀 들어 봐.”
“그 씨발 새끼 좀 조용히 못 시켜?”
승합차의 뒷좌석에 앉은 최치곤이 인상을 버럭 찌푸린 직후였다.
“아이, 이 개새끼야!”
가장 뒷좌석에 앉았던 덩치 둘이 앞 좌석을 잡고 몸을 세워서 바닥에 눕혀둔 김종수를 콱콱 밟아댔다.
“꺼윽! 끅!”
팔을 뒤로 돌려 타이로 묶어둔 상태였다.
얼굴, 목, 가슴, 허리, 허벅지, 가릴 것 없이 내리찍는 잔인한 발길질에 김종수의 처절한 비명이 승합차를 가득 메웠다.
한 5분쯤 밟아댄 덩치 둘이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자 억지로 삼키는 김종수의 신음이 승합차의 엔진 소리 사이에서 간헐적으로 피어났다.
“여보세요, 김종수 사장님. 분위기 파악 좀 합시다, 예? 민병련, 그 개새끼하고 붙어서 정훈이 형님 깨졌어요. 지금 우리 성태 형님이랑 병렬이 형님이 어떤 심정일지 가늠이 안 돼요?”
고개를 돌려 바닥에 처박힌 김종수를 바라보며 최치곤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장례식만 아니었으면, 부산 벌써 뒤집고도 남았다고. 이 와중에 신고? 씨발, 내가 그런 거 걱정할 놈으로 보여? 그리고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김종수 사장님 현역일 때, 어디 그런 거 걱정하고 사람 달았어?”
혹시나 또 밟으라고 할까 봐 김종수는 바닥에 떨군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화도를 지난 승합차는 수동 안쪽을 향해 달렸고, 전원주택 건설 현장을 지나 바닥이 들썩이는 거친 산길로 들어섰다.
끼이익.
승합차가 멈춘 뒤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기다리던 덩치들이 다가와 최치곤을 맞았다.
승합차의 뒷문을 연 덩치 둘이 돼지를 끌어내리듯 김종수를 당겼다.
철퍼덕, 바닥에 떨어진 김종수의 양쪽 팔을 당긴 덩치들은 그를 미리 파둔 구덩이에 그대로 굴려 넣었다.
잔돌이 섞인 황토 구덩이에 빠진 김종수가 뒤로 묶인 팔을 하고도 버둥버둥 몸을 세웠다.
“치곤아! 아니, 동생! 나 좀 살려주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눈이 뒤집힌 최치곤의 모습을 보며 설마, 설마 하던 김종수가 현실을 받아들이고는 절박하고 애절한 표정으로 매달렸다.
“야! 그 개새끼는 어디 있어?”
“트렁크에 넣어두었습니다, 형님.”
“얼른 가져와서 넣어.”
최치곤의 지시를 받은 덩치들이 승용차의 트렁크를 열어서 입과 팔, 다리를 청테이프로 꽁꽁 두른 조성만을 들었다.
꼭 김종수의 키 높이와 비슷한 구덩이였다.
휘익. 철퍼덕.
목이 부러져 뒈져도 어쩔 수 없지.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을 정도로 덩치들은 피범벅인 조성만을 시원하게 구덩이에 던졌다.
“동생! 동생!”
김종수가 애절하게 부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재킷 주머니에 있던 최치곤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혹시 급한 지시일까 해서 스마트폰을 확인한 최치곤이 잠시 망설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잠깐만 기다려.”
덩치들에게 지시한 최치곤은 승합차 안으로 들어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저예요. 은주.
“무슨 일이야?”
- 혹시 시간 되면 저녁 할 수 있어요? 꼭 오늘 아니어도 돼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런데 제안을 들은 최치곤은 먼저 승합차 밖으로 보이는 구덩이에 시선을 주었다.
강성태가 피 묻은 손으로 안다미를 안을 수 있겠냐며 씁쓸하게 웃던 심정을 최치곤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은주야. 나 말이다. 성태 진짜 좋아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약을 막겠다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성태를 존경하고.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성태를 노리는 놈들이 정말 많아.”
엉뚱한 말을 늘어놓던 최치곤이 노을만큼이나 적적하게 웃었다.
“안다미 씨 친구를 도울 때, 밀동에서 성폭행당한 여자아이를 위해 달려갈 때, 마약을 막기 위해 삼합회와 싸울 때, 누군가는 성태 대신 더러운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어. 그거 내가 할 거다.”
비장한 이야기를 최치곤은 정말이지 덤덤하게 건넸다.
이은주가 바보가 아니라면 그동안 시커멓게 탔던 속마음을 비워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음성과 말투였다.
“내 손에 피가 묻어야 성태가 조금이나마 덜 다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성태가 그 정도로 좋아. 존경할 정도로. 그러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고 전화하는 데 부담 갖지 마.”
최치곤이 독백처럼 속마음을 털어놓은 직후였다.
- 고작 그 정도에 마음 돌릴 거면서 날 좋아한다고 했었던 거예요?
예상하지 못했던 대꾸가 불쑥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 그날 밤, 얼굴, 목덜미, 손에 난 상처 봤어요. 식은땀 흘리는 것도요. 누군가와 싸운 거겠죠. 하지만, 옆집 노인분들 대하는 치곤 씨 모습만 봤어요. 어떻게 할래요? 나랑 저녁 먹을래요? 아니면 정말 이대로 끝내요?
최치곤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 선량한 사람 괴롭힐 거 아니죠? 매니저님과 함께 어려운 사람 돕고, 마약 막을 거죠? 아니에요? 내가 잘못 안 거예요?
“맞아.”
최치곤은 바보처럼 답했다.
- 다른 소리 하지 말고 저녁 먹어요. 언제 시간 돼요?
“며칠은 바쁠 거 같아.”
- 그럼 일 끝나는 대로 전화해요. 알았어요?
“응.”
- 많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멍하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최치곤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응원까지 받았는데 일을 제대로 해야지?”
히죽 웃었던 최치곤이 좀 더 독해진 얼굴로 승합차에서 내렸다. 그의 표정과 눈빛이 얼마나 독해졌는지 얼핏 봐서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욕을 잔뜩 먹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병렬이 형님이 움직이신단다. 얼른 묻고 가자.”
“예, 형님.”
고개를 숙인 덩치들이 삽을 들고 주변에 높다랗게 쌓인 흙을 구덩이로 퍼넣었다.
“동생! 내가 일본에서 들어온 돈 모조리 넘겨줄게! 나 한 번만 살려주라!”
“염병하고 있네! 내가 친구지만,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우리 보스를 따른다는 거 몰라? 그깟 돈에 팔려서 배신할 거로 알았어?”
애절한 김종수에게 냉정한 대꾸를 건넨 최치곤이 고개를 돌렸다.
“뭐 하냐? 서둘러 묻고 가자!”
최치곤이 눈알을 부라리자 덩치들이 삽을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동생! 푸후! 동생!”
흙을 얼굴로 뒤집어쓴 김종수가 발악처럼 부를 때였다.
승용차를 향해 최치곤이 눈짓을 던졌다. 그리고 얼마 뒤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최치곤의 스마트폰이 다시 울었다.
“야! 잠깐 조용히 해 봐. 여보세요? 최치곤입니다, 형님.”
몸을 돌린 최치곤이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
“천안 맞습니다, 형님.”
고개를 비튼 최치곤이 이가 드러날 정도로 인상을 찌푸렸다.
“민병련이 아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형님. 예, 형님. 다시 찾아보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최치곤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구덩이를 들여다보았다.
“씨발! 민병련 이 개새끼! 도대체 어디 처박힌 거야? 야! 얼른 묻어!”
“동생! 민병련이 어디 있는지 내가 알아!”
“잣 까는 소리 자꾸 하면 대가리 터트려서 조용하게 만들 거니까 조용히 해!”
“푸후! 동생! 내가 민병련하고 통화하면 되잖아! 동새-앵!”
구덩이 벽에 기대서 악을 쓰는 김종수를 보며 최치곤이 손을 들었다.
“진짜야, 그 개소리?”
“통화할게. 통화해서 증명할게. 대신 살려주라.”
“후우.”
고개를 돌려 고민하던 최치곤이 다시 시선을 구덩이로 내렸다.
“진짜 민병련이 어디 있는지 알아? 그럼 지역만 말해봐.”
“부산 호텔에 있어. 광준이 형님도 그쪽으로 갔고. 내일 오전에 일본에서 들어오는 돈만 정리하면 나도 그리 가려고 했었다고.”
“씨발. 마카오 회의 때문에 지금 움직일 사람이 병렬이 형님하고 나밖에 없는데 부산에 가라고? 하마터면 골사발에 내가 또 당할 뻔했네. 야! 묻어.”
“그러지 말고 광준이 형님하고 병련이 내가 불러내면 되잖아! 대신 나는 확실하게 살려주라! 그거면 돼!”
“아, 그 양반 참. 이광준 사장하고 민병련이 뭐 미쳤다고 부산에서 나오냐고? 이 양반이 사람을 진짜 개 대가리로 보네?”
“일본에서 들어오는 돈이 있다니까!”
얼마나 억울한지 김종수가 악을 버럭 질렀다.
“지금까지 보인 실적이 좋아서 내일 오전에 5백억 들여오는 계약이 있어! 그냥은 못 들어와서 천안에 태양광 공장 설립 핑계로 돌렸다니까.”
“부산에서 만나도 되잖아?”
“답답하네, 진짜! 내가 연결한 돈줄이라고! 무조건 천안에서 해야 하는데 일본 쪽 전주가 천안 민병련 없으면 돈 못 준다고 연락하면 되잖아! 가뜩이나 건물 새로 인수해서 돈 아쉬운 깡치 형님이 5백억짜리 계약을 그냥 날릴 거 같아?”
고개를 갸웃했던 최치곤은 무릎에 양팔을 걸치는 자세로 쪼그려 앉았다.
“내가 통화 함께 들어도 되겠어?”
“나를 살려준다는 보장은 어떻게 할 건데?”
잔머리의 대가답게 김종수가 조건을 내걸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최치곤을 살폈다.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최치곤은 묘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