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권 - 11화 (323/513)

《323》16권 - 11화

제5장. 그 칼 이리 가져와.

환자들의 저녁 식사를 위해 밍밍한 된장국 냄새가 복도를 가득 채울 때였다.

이병렬의 병실 문을 열고 유섭우가 들어섰다.

침대 옆에서 김진용이 들어주는 재킷에 팔을 넣던 이병렬이 고개를 돌렸을 때, 유섭우가 문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따라 안으로 들어선 덩치 둘이 꾸벅, 상체를 깊숙하게 숙인 뒤에 고개를 떨궜다.

죄지은 듯한 동작, 앞으로 잡은 왼손 손가락에 감은 붕대, 덩치 둘을 돌아보았던 이병렬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기 두 놈이 광준이 형님을 도왔습니다, 형님. 전주 잡았으니까 한 몫 챙길 때까지만 도와달라는 말에 움직이기는 했는데 태완이 형님 작업은 몰랐답니다.”

문 앞에 선 두 명의 덩치에 관해 설명한 유섭우가 이병렬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가 손가락 하나 올리겠습니다, 형님. 대신 저 두 놈은 용서해 주십시오.”

당부와 각오를 전한 유섭우가 허리춤에서 회칼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김진용이 대뜸 이병렬의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뭐라 해도 강서구가 조태완을 작업하는 데 움직인 상황이어서 당장 유섭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충분히 서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섭우는 김진용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투로 고개를 숙인 뒤에 테이블에 왼손을 얹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깨를 찔린 상처 탓에 힘겹게 재킷을 당긴 이병렬이 쇳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유섭우를 말렸다.

“그 칼 이리 가져와.”

“형님? 저 두 놈은 용서해 주십시오.”

“칼 이리 내놓으라고.”

부상 탓에 낯빛이 좋지 않았지만, 이병렬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유섭우를 보며 김진용의 고개가 비틀렸다.

여기에서 더 버티면 당장 망치만 한 주먹을 날리거나, 탁자 옆에 놓인 물병으로 유섭우의 머리통을 찍을 게 분명했다.

김진용의 주먹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손을 내민 이병렬의 눈매를 거부할 수 없어서 유섭우는 회칼을 거꾸로 해서 내밀었다.

칼자루를 받은 이병렬은 먼저 회칼을 눈앞으로 들어 날을 살폈다. 그리고는 칼끝을 끄덕여 문 앞에 있는 두 놈을 불렀다.

주춤주춤, 두 놈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다음이었다.

“너희가 알았든, 몰랐든, 태완이 형님이 작업 당하셨고, 그 자리에서 정훈이를 잃었으니까 사실 너희는 울대를 끊었어야 맞지.”

이병렬의 말이 지닌 무게에 눌린 듯 덩치 둘의 고개가 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아끼는 숙소 동생은 말이다. 손가락 아니라 더한 걸 잘라주고서라도 지키고 싶다. 달수가 살아올 수만 있다면, 나 역시 팔 하나 당장 내놓을 거니까. 너희 둘을 지키겠다며,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나선 섭우의 마음을 알기는 하냐?”

“죄송합니다, 형님.”

덩치 한 명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사죄를 내놓았다.

“고개 들어 봐.”

그런 두 놈에게 이병렬이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지시했다.

“고개 들어보라고.”

두 번째로 이병렬이 말을 내고 나서야 덩치 둘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된 조직 한번 만들어보자고 싸우는 거 아니냐. 숙소에서 빌빌대다가 형님들 술자리에 불려가 병풍서고, 저녁이면 피시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개 양아치 말고 진짜 제대로 된 조직.”

이병렬은 덩치 둘의 눈을 파고들 듯이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보스 보면 모르겠냐? 일반인들 지켜가며 우리끼리 일어나서, 언젠가는 너희도 업장 하나씩 들고 독립하는 그런 조직 만들자고 이러는 거 몰라? 무슨 잔돈 벌겠다고 생활 접은 양반 꾐에 넘어가서 이 지랄들을 떨어?”

“잘못했습니다, 형님.”

“오늘 나는 섭우 손가락 하나 받은 거로 알겠다. 대신 강서구에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섭우 너는 생활 접어. 알았어?”

“알겠습니다, 형님.”

고개를 돌린 이병렬을 향해 유섭우가 깊게 상체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가 울컥 올라온 감정에 젖어 있어서 지켜보던 덩치 둘이 다시 고개를 떨궜다.

“오늘 장례식에 부산에서도 올라올지 모른다. 강서구가 앞마이 서. 지방에서 어떤 조직이 오든 꿀리지 마라.”

“맡겨주십시오, 형님. 감사합니다, 형님.”

비장하게 답을 하는 유섭우 곁에서 덩치 둘이 볼을 씰룩였다.

**

강성태는 제과점 하나를 털다시피 샌드위치와 빵, 그리고 과일 주스를 모조리 담았다. 그런 뒤에 서라대학병원으로 방향을 잡았고, 승용차가 움직이고 나서야 스마트폰을 꺼냈다.

신호음이 네 번쯤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바쁜 와중에 반가움을 담은 안다미의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통화 괜찮아요?”

- 아직 해가 남았잖아요. 진짜 바쁜 건 8시 넘어야 돼요. 어디에요?

“지금 서라대학병원에 가는 길인데 대략 20분쯤 걸려요.”

- 진짜요?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긴 안다미의 반응이 강성태를 웃게 만들었다.

“샌드위치랑 빵 몇 가지 샀거든요. 응급실로 바로 갈게요.”

- 그럼 그거 핑계로 20분쯤 빼 볼게요.

허름한 수술복을 입은 안다미의 바쁜 모습이 훤히 그려지는 통화였다. 스마트폰을 내린 강성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시선을 떨궈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안다미를 안아도 될까?

밝은 미래를 꿈꾸는 그녀를 이런 식으로 강성태가 서 있는 어둠으로 끌어들여도 되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피 냄새에 언젠가는 안다미가 괴로워하지는 않을지, 상처가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올림픽 대로를 빠져나온 승용차가 순서를 기다리며 멈춰 섰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처음 보는 번호를 액정에 올린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잠시 번호를 확인한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낮에 회장님을 모셨던 은선곤입니다. 소 회장님께 연락처 받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전화였다. 그러나 기억하는 은선곤의 모습이 나쁘지 않아서 강성태는 먼저 가볍게 웃었다.

- 잠시 보고드릴 일이 있는데, 통화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죠?”

- 회장단에서 알려드리고자 하는 일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밀동 사건의 가해자 변호인단이 모두 사퇴했습니다, 회장님.

벌써? 과연 재벌의 힘은 대단하구나.

보고를 들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낮에 뵈었던 그룹 법무팀이 모두 움직였고, 고강준 고검장님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가해자 부모들 모두 정밀 세무조사 대상으로 지정돼서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게 됩니다. 당분간, 다른 변호인을 선임할 여유가 없을 겁니다, 회장님.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대단하군요.”

강성태가 감탄이 섞인 대꾸를 건넨 다음이었다.

- 회장님들을 모시며 많은 분들을 뵀지만, 강성태 회장님과 같은 요구를 주신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개인적으로 한 번쯤 뵙고 싶습니다.

막힘없이 건너오는 음성이었는데, 마지막 말을 하기 전에 은선곤에게 많은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죠.”

-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때, 마침 신호를 받은 조봉진이 응급실 방향으로 핸들을 꺾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전화할 테니까, 근처에서 밥 먹어. 상황이 안 좋으니까 한적한 곳에 가지 말고.”

“제가 응급실까지 들겠습니다, 형님.”

“이것만큼은 내가 들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놔둬.”

조봉진을 다독인 강성태는 샌드위치와 빵, 그리고 음료수가 가득 담긴 제과점 봉투를 양손에 들고 차에서 내렸다.

어깨와 팔뚝, 등이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고통을 뿌려댔는데 그렇다고 조봉진에게 들게 하는 건 안다미에게 보일 모습이 아니었다.

“안다미 선생을 만나러 왔는데요.”

응급실 입구에 선 직원은 강성태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고개를 반쯤 숙여 아는 체를 한 그는 버튼을 눌러 응급실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선 응급실은 여전했다.

침대에 누운 환자들과 근심을 가득 안은 보호자, 급하게 움직이거나 혹은 한쪽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수술복 차림의 스태프, 강성태는 그나마 안면이 있는 간호사를 향해 걸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이네요. 우선 이거 좀 받아주세요.”

강성태가 스테이션 너머로 넘겨주는 봉투를 간호사가 놀란 눈으로 받았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어요?”

“조금 있으면 교대 시간이잖아요.”

“우리 안 선생님, 정말 좋은 분 만나신 거 같아요.”

건네준 샌드위치와 빵만큼의 부러움을 간호사가 건넸을 때였다.

“이건 좀 과했다. 그렇죠?”

뒤편에서 수술복 차림의 안다미가 다가와 간호사에게 말을 건넸다.

“이 선생에게 이야기해뒀거든요. 20분만 나갔다 올게요.”

“좀 더 계셔도 될 거예요. 선생님, 이거요.”

간호사에게서 음료수 두 병을 받은 안마디가 몸을 돌려서 강성태는 눈인사만 던지고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응급실 안쪽의 문으로 나선 안다미는 어둑한 복도를 지나 진료가 끝나 조명을 반쯤 내린 로비로 향했다.

“20분이라고 해도 멀리 못 가요.”

“여기도 나쁘지 않은데요.”

강성태는 그녀가 들고 있던 음료수를 받아서 뚜껑을 열어 다시 건네주었다.

음료수를 받은 안다미가 강성태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목덜미나 손에 난 상처를 보아서일까?

왜 그렇게 다쳤냐고 하면 뭐라고 답할까?

반쯤 내려진 조명 아래에서 안다미는 강성태의 고민을 읽은 듯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강성태의 눈을 바라보던 안다미가 수술복 상의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액정을 만져서 사진 한 장을 올려 내밀었다.

강성태는 그녀가 내민 스마트폰을 받아서 시선을 내렸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게 웃고 있는 이남순이었다.

강성태가 사진을 내려다보는 상태에서 검지를 뻗은 안다미가 화면을 왼편으로 넘겼다. 이번에는 오주환 가족과 함께 웃고 있는 이남순의 모습이었다.

“소아는 기억하죠? 성태 씨가 도와줬던 내 친구 조소아.”

시선을 든 강성태를 향해 안다미가 또렷하게 말을 건넸다.

“장애아를 대상으로 한 대안학교 선생 자리가 있어서 신청했대요. 어제부터 나가고는 있는데 학생들 눈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기쁜 소식을 전한 안다미가 강성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성태 씨가 아니었다면, 여기 주환이나 남순이, 소아는 아직 불행한 삶에 빠져 있었을 거예요. 물론 다른 방법이 있기는 했겠죠. 하지만, 성태 씨가 해준 것처럼 확실하고 분명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강성태의 눈빛을 통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안다미가 말을 이었다.

“성태 씨가 보고 싶어서 스마트폰을 들었다가도 내려놓곤 했어요. 목덜미에, 손에 새로 생긴 상처들을 감당하면서 또 다른 주환이나 남순이, 소아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어서요. 혹시 그런 성태 씨를 방해할까 봐서요.”

당차게 질문을 건넸던 안다미가 몸을 세웠다. 그리고 강성태의 앞으로 움직여 머리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힘들면 언제고 돌아와요. 까짓거, 내가 먹여 살리면 되지 뭐.”

안다미의 마지막 말에 웃음이 나온 강성태가 픽 웃은 뒤였다.

“어허! 여자가 말하는데 어디 남자가 함부로 웃고 그래요? 혼나 볼래요?”

“병원 스태프들이 보면 어쩌려고요?”

“왜요? 의사는 좋아하는 남자 좀 안으면 안 돼요? 그리고 여자가 안아주면 다소곳이 있어야지, 어디 남자가 남들 눈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지?”

또다시 웃음이 터진 강성태를 안다미가 비슷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기운 낼 거죠?”

응급실 입구로 나왔던 병원 스태프가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앞으로도 어려운 사람 도와줄 거고, 마약 막아낼 거죠?”

강성태의 눈을 보며 답을 얻은 안다미가 상체를 숙였다. 혹시 모를 시선 때문인지 안다미는 강성태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남겨주었다.

“목적을 잃으면 돌아와요. 하지만 방향이 옳다고 믿으면 흔들리지 마세요. 내가 선택한 남자는 그런 모습이었어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강성태는 팔을 들어 안다미의 허리를 안았다.

**

강남의 초대형 병원 영안실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2층 영안실을 모두 사용하고 있어서 좌우로 검은 정장 차림의 덩치들이 가득했는데 입구 왼편은 신강남파 강남 숙소, 오른쪽은 대림동 숙소 덩치들이 줄줄이 서 있어서 분위기는 살벌함, 그 자체였다.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왼편에 정영권, 오른쪽에 김진용을 세우고 문상 온 전국의 덩치들을 맞이했다.

거기에 입구에서는 이종환과 유섭우가 무거운 얼굴로 서서 전국 덩치들을 먼저 맞았고, 문상을 마친 이들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잠시 한가한 틈이었다.

박배근이 유충일과 함께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형님?”

“고생 많다. 여기 인사해. 광주 새롭게 맡은 유충일.”

“유충일입니다,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고개를 돌리는 이종환을 향해 유충일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이어 유충일은 유섭우와도 인사를 마쳤다.

“혹시 몰라서 광주 동생들 50명을 데려왔습니다, 형님. 문상 마치고 밖에 있겠습니다.”

“먼저 성태 형님부터 뵙고 와. 남은 이야기는 그때 하자.”

“예, 형님.”

지시를 받은 유충일이 먼저 안쪽으로 움직였다.

“태완이 형님하고, 노익이 형님은?”

“안쪽 2호실에 계십니다, 형님.”

“부산은?”

“아직입니다, 형님.”

박배근이 긴장을 풀지 못하는 얼굴로 에스컬레이터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부산 조강치는 조태완이나 박노익이 상대하는 게 현명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전국의 모든 조직이 모인 자리에서 강성태가 피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또 그만큼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민병련, 이 개새끼.”

모든 게 민병련이 일을 꼬아버린 탓이란 생각에 박배근이 욕을 뱉은 직후였다.

에스컬레이터를 지키던 덩치들이 물결치듯 서열에 따라 줄줄이 상체를 숙였다.

뭐야?

긴장한 표정으로 박배근과 이종환, 유섭우가 지켜보는 앞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무리의 덩치들이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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