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16권 - 10화
호텔을 나선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왕 시작한 멕시코 건설 공사 건을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반가움을 담은 박노익의 음성이 들렸다.
“어디에 계십니까?”
- 사무실. 동생은 어디야?
넉넉하게 대꾸하는 박노익의 음성을 듣는 순간, 강성태는 턱없이 클럽에서 처음 보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광준과 김종수를 두들기는 앞에서 옷에 튄 안주를 물수건으로 닦아내던 모습이었다.
“그룹 건설사 회장단을 만나고 나오는 길입니다. 형님께서도 추천하고 싶은 건설사가 있다고 하셔서 잠시 들를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 동생.
성의를 담은 강성태의 제안이었는데 박노익은 뜻밖의 대꾸를 내놓았다.
- 동생을 곤란하게 만들면서까지 공사 따내고 싶지 않다. 그런 이유보다는 지나는 길에 내가 생각나서 차 한잔 달라는 게 더 반가워. 그런 마음으로 들러.
폭력조직의 선배가 아니라 정말 강성태를 좋아하는 인생의 선배로 다가서는 듯한 대꾸였다.
“맛있는 커피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형님.”
- 너무 어려운 주문이잖아?
가볍게 던진 농담조의 요청을 박노익이 유쾌하게 받았다. 둘이서 가볍게 웃은 다음이었다.
“지금 가는 길입니다. 20분쯤 걸립니다, 형님.”
강성태는 박노익과의 통화를 마쳤다.
혹시 회장단을 만난 일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이병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안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깡패야? 나!
약간은 흥분한 강선영의 음성이 강성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 너, 돌아가신 아버지 직업을 알고 있었어?
“이모한테 듣기로는 교수는 아니고, 강의하셨다던데, 왜?”
- 바보야. 선친이 무역업 하셨어. 그리고 이게 진짜인데.
강선영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고 서류를 들추는 것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 너의 아버지, 공익 신고자였어. 마약류 밀반입 신고를 한 건데, 당시에 공익 신고자를 보호하는 법이 아직 정립 안 됐을 때라 아마 여러 곳에서 위협을 받았을 거야.
강성태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익 신고자였었습니까?
그것도 마약류 밀반입을?
이렇게 마약을 막겠다며 사는 게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몸에 흐르는 피에 담긴 사명이었을까?
세상 참 우습다.
강성태가 옅게 웃을 때였다.
- 운전했던 기사는 출소하고 2년 뒤에 행불 처리됐어. 내가 말했던 노인네 있잖아. 밥 먹였다는. 그 노인네를 찾아와서 며칠 지냈는데 중국으로 건너간다고 하고 연락이 끊겼다더라고.
“당시에 사건 담당했던 경찰하고 검사는?”
- 담당 경찰은 은퇴해서 부산에서 살고, 검사는 서초동에서 변호사 개업했었는데 현재는 활동이 거의 없어. 이건 좀 더 알아봐야겠어.
강선영의 설명을 들을수록 강성태는 점점 더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본능이 잔인할 정도로 강렬하게 다른 사건 하나를 물고 늘어졌다.
“부탁이 하나 더 있어.”
- 뭔데?
“며칠 전에 비슷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어. 트럭을 이용해서 사고로 처리한 사건. 그거 한 번만 파줘. 연관성이 있는지.”
- 요즘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것만 해도 벌써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잖아.
“이것까지 알아봐 줘.”
- 알았어. 사건 내용을 문자로 보내줘.
강성태가 워낙 무거운 음성이어서 그런지, 멈칫했던 강선영이 다른 말 하지 않은 채 요구를 받았다.
“고맙다.”
통화를 마치기 직전이었다.
강성태가 나직하게 건넨 인사를 강선영이 한숨처럼 들리는 옅은 웃음으로 받았다.
스마트폰을 내린 강성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도심 사이로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20년이 넘는 과거의 일이었다.
세관, 경찰, 검찰, 모두 돈이 된다면 얼마든지 밀수에 손을 댈 정도로 썩었던 시절에서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었을까?
화물차 조합에도 가입돼 있지 않은 무보험 트럭에 받힌 사고, 적당하게 넘기는 경찰과 검찰, 더 나섰다가는 강성태마저 위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제야 장숙경의 반응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강성태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한 놈씩, 순서대로, 그리고 악착같이 갚아 주마.
지난 세월 외롭고 힘겨웠던 만큼,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한이 풀릴 만큼.
분위기에 눌린 조봉진이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핸들을 붙들고 있었다.
**
이병렬과 헤어진 유섭우는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강서구 나이트로 숙소 덩치들을 모두 불렀다.
집안에 행사가 있다고 해서 참석하지 않는 셋을 제외하고 모두 모여서 대략 50명 정도였다. 그들이 깨끗하게 정리한 나이트의 소파에 앉아 긴장한 표정으로 유섭우를 바라보았다.
“앞뒤 다 자르고 바로 말한다. 지금부터 중고차 시장 뒤지면 하우스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새끼가 문방했고, 누가 재떨이 했는지까지 다 나온다.”
무대 바로 앞에 선 유섭우는 분노를 넘어서 아예 참담한 얼굴이었다.
“내가 알아내면 그게 누구든 간에 울대 끊어 버릴 거니까, 자신 있는 새끼는 그전에 나한테 칼 박아. 하지만 하나만 명심해라. 나한테 칼질하면 그때부터 병렬이 형님이 나설 거고, 다음으로 우리 보스가 움직인다. 여기 병렬이 형님과 우리 보스 감당할 놈 있어?”
두 사람을 떠올렸는지 앉아 있던 덩치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게 앉아 있는 덩치들을 쭉 돌아본 유섭우가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생활했던 방식대로 광준이 형님 챙기다가 실수했다고 믿겠다.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나오면 내가 병렬이 형님께 손가락 잘라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준다. 여기까지다. 이 자리에서 안 나왔는데 내가 알아내면 그때는 울대 끊어야 끝난다.”
말을 마친 유섭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분통이 터지는 걸 억지로 누르는 숨소리였다.
“하우스 돌린 건 애들 장난이라고 쳐도, 태완이 형님 작업한 트럭 기사를 중고차 시장에서 섭외한 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냐. 그것 때문에 오늘 정훈이 장례식이 있다는 거 모르는 놈 있어? 그러니까 켕기는 놈은 나와. 지금.”
유섭우의 말에도 움직이는 덩치는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유섭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야! 그 새끼 데려와!”
유섭우의 지시가 떨어진 직후였다.
덩치 둘이 크레인으로 들어야 하는 마대자루를 질질 끌고 유섭우에게 다가왔다.
무대 앞까지 온 두 놈이 자루를 거꾸로 뒤집자 피투성이인 문상표가 쏟아져 나왔다. 팔은 뒤로 묶었고, 무릎과 발목, 입을 파란 테이프로 칭칭 감아서 꼼짝도 하지 못했는데,
“읍! 으읍!”
겁에 질린 눈알만은 빠르게 움직여 간절하고 애처롭게 유섭우에게 매달렸다.
“칼 줘.”
유섭우가 손을 내밀자 자루를 끌고 왔던 덩치가 품에서 회칼을 꺼내 칼자루를 내밀었다.
“읍! 읍! 으으읍!”
오른손에 회칼을 든 유섭우는 자세를 낮추고 피에 흠뻑 젖은 문상표의 머리칼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함께 움직였던 놈 털어놓으면 팔하고 다리 끊는 거로 끝내준다. 어떻게 할래?”
커륵, 하는 숨소리를 낸 문상표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누가 봐도 털어놓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픽 웃은 유섭우가 몸을 세우며 문상표의 머리칼을 위로 들었다.
“으으읍!”
자세를 세운 유섭우의 허리 앞에 머리칼이 붙들린 문상표의 머리가 있었다.
“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상표 이 새끼가 꽁지 받으려고 끌고 다녔던 놈을 최치곤이 데리고 있어! 그 어벙한 새끼 족치면 이중에 누가 함께 다녔는지 바로 알아내! 알았냐? 내가 미련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강서구 일은 우리끼리 해결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고!”
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른 유섭우가 독한 눈매로 이를 악물었다.
“병렬이 형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다! 우리 손으로 하우스 깨부수고, 광준이 형님과 종수 형님 잡아서 일을 바로잡자고 이러는 거라고!”
악을 쓴 유섭우가 회칼을 문상표의 목에 바싹 붙였다.
“돈 몇 푼 벌자고 식구 팔아먹는 바람에 정훈이가 죽었어! 그것도 민병련, 그 개새끼한테 붙어서! 이러고도 우리가 식구냐! 언제 누구 모사에 깨질지 모르면서 어떻게 한식구라고 연장 들고 나가겠냐고!”
다시 이를 악문 유섭우가 시선을 내린 뒤에 회칼을 깊게 눌렀고, 이어 길게 당겼다.
“이 씨발놈아! 고작 돈 몇 푼에 식구를 팔아! 그것도 태완이 형님 작업하는 걸 빤히 알면서!”
“크륵! 크르륵!”
문상표의 목에서 튄 피가 회칼을 당기는 유섭우의 손과 팔을 적셨고, 이어 바닥을 흥건하게 물들였다.
털썩.
바닥에 던진 문상표의 몸뚱이가 꿈틀대는 앞에서 유섭우는 피 묻은 회칼을 움켜쥐고, 앉아 있는 덩치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에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지 분명하게 보여준 이후라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무서웠다.
“조성만, 그 개새끼도 데려와.”
문상표가 함께 움직였던 놈을 털어놓겠다고 눈짓을 던졌다는 사실을 지켜보던 강서구 덩치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목이 갈라져 바닥에서 꿈틀대는 문상표를 보면 조성만은 아는 걸 모두 털어놓는다.
지시를 받은 덩치 둘이 주방 창고 쪽으로 움직일 때였다.
끄드등.
의자를 밀치고 일어난 덩치가 앞으로 나와 유섭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광준이 형님께서 부르셔서….”
“너 혼자야?”
분노를 누르기 위해 이를 악문 유섭우가 덩치를 향해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끄등.
또 다른 놈이 일어나 다가와서는 유섭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완이 형님 작업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 전주 한 명 잡았는데 중고차 돌릴 자금 만들 때까지만 눈감아 달라셔서 도왔습니다, 형님.”
거친 숨을 토해낸 유섭우가 두 놈을 향해 회칼을 던졌다.
“손가락 하나씩 끊는 거로 끝낸다. 대신 광준이 형님하고 김종수 사장 어디 있는지 잡아내. 고영주라는 년 하고 같이.”
“감사합니다, 형님.”
무릎 꿇은 두 놈이 마른침을 삼키며 피에 절은 회칼을 집어 들었다.
**
사무실에 들어서는 강성태를 보자 박노익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서 와.”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끌어서 소파에 앉혔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거 같습니다.”
“하기는. 광주에서 올라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러고 다니는 건데 오죽하겠어?”
그가 강성태를 다독일 때 직원이 들어와서 테이블에 차를 놓아주었다.
“차 들어. 동생 입에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 딴에는 애써 구한 커피야.”
박노익이 차를 권하는 앞에서 강성태는 먼저 곤잘레스 이두안의 비서 번호를 문자로 보냈다.
지이잉.
“뭐야, 이게?”
“추천하는 건설사 담당자에게 그 번호를 주시고 연락하라고 하면 됩니다. 건설사 회장단에게도 제가 추천하는 회사 한두 개가 컨소시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양해 구해뒀습니다.”
“이게 뭐가 급하다고 그래?”
번호를 확인한 박노익이 스마트폰을 내리고는 다시 커피를 권했다.
기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박노익 앞에서 강성태는 잔을 들었다. 먼저 향을 맡았고, 이어 맛을 음미했는데, 사무실에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제대로 맛을 낸 커피였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렇지? 괜찮지?”
“물 온도도 그렇고, 천천히 부어서 커피 향을 제대로 냈는데요? 혹시 바리스타를 고용하셨습니까?”
“아무리 동생이 좋아도 어쩌다가 들르는 데 그렇게까지 할 수야 있나? 아래층에 커피에 미친 인간이 하나 있어서 부탁했지. 이거 꽤 귀한 커피라던데?”
박노익이 최선을 다해 대접하는 커피였다.
그의 정성에 향과 맛이 제대로 잡힌 커피를 마시며 강성태는 모처럼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정말 좋습니다.”
강성태의 반응을 본 박노익이 더할 수 없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형님.”
흐뭇해하는 박노익의 시선을 강성태가 나직하게 붙들었다.
“성북구 개발 사업 말입니다. 형님께서 맡아서 진행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2조 원짜리잖아? 이미 시행사 다 짜졌고, 시공사가 서로 달려드는 공사를 왜 나한테 넘겨?”
“제가 그런 일을 잘 모르잖습니까? 형님이라면 시행사나 시공사에 휘둘리지 않고 보상비 제대로 지급해주실 테고, 또 잔돈 몇 푼에 흔들리지 않으실 거 같아서 그렇습니다.”
“관리만 해달라는 거지?”
“지금부터라도 정당하게 보상하고, 제대로 지었으면 싶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특별한 보스를 모셨어. 내가.”
강성태의 바람을 들은 박노익이 옅게 웃었다.
훈훈한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강성태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는 사이 눌러두었던 묵직한 화제가 바람에 휘날린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오늘 정훈이 장례식에 부산에서 올라올 모양이다. 들었어?”
“대강 듣기는 했습니다.”
“어떻게 할 거야?”
강성태는 박노익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광주를 손에 넣었다는 말 때문에 전국에서 다 올라오는 모양인데 그 자리에서 민병련과 화해하면 어떠냐는 제안이 있을 수도 있어. 곤란할 거 같으면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것도 좋아.”
강성태를 살피듯 바라보며 박노익이 말을 이었다.
“아마 광주 삼킨 거 인정할 테니 그 정도에서 서로 좋게 지내자고 하겠지. 그 자리에서 보스가 대놓고 들이받으면 부산 깡치 형님이 명분을 얻을 테고, 그렇다고 받아들이면 민병련을 용서해야 하지.”
설마하니 민병련과 화해해서 받아들이라고 하지는 않을 테고. 강성태는 먼저 박노익의 의견이 궁금했다.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
잠시 입술을 오므렸던 박노익이 다부진 눈빛으로 시선을 들었다.
“나라면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바닥은 모든 걸 보스가 결정하는 거니까, 보스가 어떤 버튼을 누르든 간에 그쪽에 맞춰 움직여야지. 깡패들 뭐 있어? 보스가 붙으라고 하면 부산하고 한판하는 거지, 뭐.”
예상보다 강렬한 답이었다.
잠시 박노익을 바라보던 강성태가 차갑게 웃었고, 박노익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비슷한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