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권 - 9화 (321/513)

《321》16권 - 9화

약속 장소는 강남 특급 호텔의 11층 라운지였다.

이병렬의 권유에 따라 강성태는 조봉진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움직였다.

호텔 입구에서 내린 강성태가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 단정한 복장의 남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강성태 회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회장단 비서 은선곤입니다. 모시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은선곤이 강성태를 안내하듯 반보 앞에서 걸었다.

서른 중반으로 보였다.

단정하게 만진 머리, 세련된 느낌의 검은 안경, 튀지 않는 회색 정장을 입은 은선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에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뒤에 문이 열리자 강성태가 타기를 기다렸다.

공손했지만 비굴하지 않은 동작이었다.

강성태가 안으로 들어서자 버튼 앞으로 움직인 은선곤이 카드키를 이용해 11층 버튼을 눌렀다.

번쩍이는 황동으로 처리된 엘리베이터 안쪽 벽이 강성태와 은선곤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많이 배운 사람, 그리고 앞으로 그룹 기획실 이사 정도는 얼마든지 올라가고, 잘하면 부회장쯤 할 수 있는 인재, 강성태가 보기에 은선곤은 그런 모습이었다.

저런 사람에게 강성태는 어떤 느낌으로 보일까?

기회를 잘 잡은 깡패 두목?

아니면 건설 공사를 따내기 위해 스치고 지나가는 그저 그런 사람?

강성태가 은선곤의 뒷모습을 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도착했다.

문을 손으로 막듯이 팔을 뻗은 은선곤이 시선을 밖으로 두었다.

세련된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동작을 보는 순간,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이 강성태의 머리에 떠올랐다.

능력을 인정받아 이런 자리에 비서로 선발된 은선곤이 과연 소신영과 고강준의 추악한 취향을 모르고 있을까?

어쩌면 승진과 성공을 위해 심심치 않게 보도에 나올 재벌 2세, 3세들의 비리를 모른 척하거나, 최소한 그와 관련한 지시를 따르지는 않을까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나선 강성태는 은선곤이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걸리지 마라. 아니, 그런 일에 관련되지 마라.

모처럼 좋은 인상을 받은 네가 추악한 심부름에 연루돼서 마주하게 된다면 더 심하게 대할 것 같으니까.

강성태의 생각을 모르는 은선곤이 복도 왼편을 돌아 첫 번째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을 연 그가 강성태가 들어서기를 기다렸다.

그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준 강성태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전면에 강남의 도심이 가득 담긴 창이 보였고, 그 앞으로 간단한 다과와 음료, 커피를 올린 테이블, 소파와 회의용 탁자가 있었다.

“어서 오시오.”

예상과 달리 모두 다과 테이블 주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소신영이 약간은 과장된 반응으로 강성태를 맞았다.

커피를 들고 있던 회장단이 잔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으며, 고강준 또한 오래도록 알고 지내던 사람을 맞이하듯 강성태에게 다가왔다.

확실히 사업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구석이 있어서, 강성태의 얼굴과 목덜미에 난 상처를 보았을 텐데도 누구 한 사람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말씀드렸던 강성태 회장입니다.”

소신영이 나서서 다섯 명에게 강성태를 소개했다.

“차를 드시겠소?”

“커피나 할까요?”

소신영의 권유를 받은 강성태는 다과 테이블로 움직여 커피를 직접 따랐다.

이래서 커피 서빙을 위한 직원들을 두지 않았을까?

말을 하지 않았지만, 회장단은 강성태의 행동을 보며 성품이나 성격, 삶의 수준을 알아보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지금부터 하려는 대화가 밖으로 나갈 것을 염려해서 직원을 두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커피를 따른 강성태가 몸을 돌린 다음이었다.

“앉읍시다.”

소신영이 소파와 테이블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가 편하냐는 투였다.

“편한 자리에서 말씀하시죠.”

강성태가 시선으로 소파를 가리키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일행이 모두 움직였다.

둥근 테이블에 1인용 소파가 넉넉하게 놓여서 상석을 가리지 않는 게 좋았다. 자리에 앉은 강성태는 소개와 함께 받았던 다섯 명의 명함을 일렬로 늘어놓고서 그 아래로 커피잔을 놓았다.

“오시는 길이 막히지는 않았습니까?”

마흔 후반으로 보이는 그룹의 회장이 넉넉한 음성으로 강성태에게 말을 건넸다.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제가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곤잘레스 회장을 경호하며 이런 자리에서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보고 배운 게 있었다.

강성태는 여유 있는 태도로, 그러나 앉아 있는 이들을 존중한다는 자세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에 관해서는 이미 알아보셨으리라 짐작합니다. 또, 저에 대해서도 알아보셨을 테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만, 건설에 관해 저는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시선을 마주칠 법도 한데 회장단은 표정이나 태도의 변화 없이 강성태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신영 회장과 고강준 고검장께서 추천하신 분들입니다. 또, 문외한인 제가 듣기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기업을 책임지신 분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거면 됩니다.”

강성태는 힘을 실어준다는 의미로 소신영과 고강준을 차례로 돌아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곤잘레스 회장의 비서실 번호를 드리겠습니다. 그쪽 담당자와 직접 의논하셔서 컨소시엄을 구성하면 됩니다. 다만, 제가 부탁드리는 업체 한두 곳이 더 추가될 수 있습니다. 그 점만 양해 부탁합니다.”

이제부터 강성태의 요구가 나오겠지?

과연 무얼 바랄까?

정적이 흐르는 11층의 라운지에서 회장단은 강성태가 내놓을 다음 말을 묵묵하게 기다렸다.

“중국이 이 건설 공사를 노리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보리스 파리오 회장을 앞세웠고, 뒤편에서는 삼합회가 움직입니다.”

처음으로 회장단의 두 명이 시선을 마주쳤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기는 한데, 강성태가 이렇게 대놓고 드러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혹시 이걸 빌미로 너무 큰 걸 요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회장단의 시선 속에 스쳤다.

“일주일 뒤에 마카오에서 투자자 회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일이 없다면 공사는 여러분이 구성하는 컨소시엄이 맡게 될 겁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는 2차로 예정된 공사도 여러분이 계속 이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삼합회와 보리스 파리오 회장의 말까지 나온 마당이었다.

이제 요구조건이 나오나?

강성태는 빤한 의문을 얼굴에 담은 회장단을 돌아본 뒤에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공사와 관련한 업무는 곤잘레스 회장의 비서진과 직접 상의하시면 되고,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강성태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마치 한 사람당 1조쯤 내놓으란 조건을 들은 것처럼 회장단은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우리 강 회장이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강성태는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답을 건넸다.

“보리스 파리오 회장과 삼합회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을 텐데 괜찮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었으면 합니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강성태가 상대하는 삼합회와 심지어 보리스 파리오 회장에 관해서도.

“개인적인 부탁이 있기는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럼 그렇지.

회장단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밀동에서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그룹 차원에서 법무팀을 운영하고 계시고, 그만큼 힘을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건의 가해자들이 법정 최고형을 받을 수 있도록 공식, 비공식적으로 도움을 주십시오.”

법정 최고형을 받게 해달라고?

내내 태연하던 회장단이 처음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소신영과 고강준을 돌아보았다.

“다음으로 여러분의 자제분들과 친지, 친척분들이 마약, 성폭행과 관련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단속해 주십시오. 그런 문제로 저를 보게 된다면 불편할 수 있습니다.”

“혹시 강 회장이 요구하면 언제고 컨소시엄에서 제외된다는 조건을 제시한 게 그런 이유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흐음.”

엄청난 숙제를 안은 것처럼 질문했던 회장이 신음을 흘렸다.

“질문이 있으신가요?”

자리를 마치겠다는 통보였다.

이렇게 일찍 대화를 끝낼 줄은 예상하지 못해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기는 곤잘레스 회장을 경호하면서 이런 순간을 여러 차례 보았지만, 상대방은 대개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강 회장.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정말 이 공사를 우리에게 맡기면서 따로 바라는 게 없습니까?”

“2차 사업을 가져올 수 있도록 완벽하게 공사해 줄 것, 가족과 친척 등, 여러분과 관련된 분이 마약에 손대거나 성폭행과 관련된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

이미 들려주었던 조건이었다.

“밀동에서 일어난 집단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들이 법정 최고형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 이게 제가 드리는 부탁입니다.”

강성태가 똑같은 조건을 내놓자 회장단 사이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강 회장님. 밀동 사건을 알아보기는 하겠는데 법정 최고형이라는 게 법전에 나와 있는 수준에서 말인가요?”

대화가 끝난 마당이었다.

일어서려는 강성태를 향해 확인처럼 회장단의 중년 남자가 질문을 건넸다.

“피해자의 부친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합의했습니다. 거기에 가해자 부모들이 밀동의 유지라 해서 나름 힘을 쓰는 모양입니다. 법정 최고형 이상으로 그들을 처벌할 방법이 있다면 조언이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고강준을 돌아보았던 중년 남자가 다시 강성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사건에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질문을 받은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회장님.”

“예, 말씀하십시오.”

그런 뒤에 강성태가 나직하게 불렀고, 중년 남자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대꾸를 주었다.

“여기 계신 분들이 고용한 직원들의 숫자가 엄청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계신 거고요.”

그거야 뭐.

회장단 중 세 명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서 직원분들이 여러분의 소유라는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밀동 사건은 좀 더 가졌다는 이유로 가해자의 부모와 가족이 피해자를 또다시 짓밟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더 힘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다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다른 질문이 없으시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강성태가 돌아보았으나 누구도 질문을 내지는 않았다.

팔걸이를 붙든 강성태가 일어서자 소신영과 고강준, 그리고 회장단이 함께 몸을 일으켰다.

“좋은 기회를 주신 점에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라 꼽히는 기업이 참여하게 된 점에 감사합니다.”

회장단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강성태는 몸을 돌려 소신영, 고강준과도 악수를 나눴다.

“우리는 따로 봅시다.”

절대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눈빛을 하고도 소신영이 손을 내밀었고, 고강준은 그 흔한 인사말조차 없이 손만 잡았다.

문을 열고 나서자 바깥에 서 있던 은선곤이 당연하다는 듯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왔다.

“내려가는 층은 카드키가 없어도 되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그럼 여기에서 인사합시다.”

강성태는 열린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은선곤에게 손을 내밀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모시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은선곤 씨.”

“예, 회장님.”

강성태는 검은 안경테 안쪽에서 빛나는 은선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어둠에서 살아가지만, 은선곤 씨가 서 있는 빛이 있는 세상에 나가기를 늘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둠에 깔린 탐욕에 발 디디지 마세요. 밝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에도 존경할 사람이 있었으면 싶으니까요.”

의아한 기색으로 바라보는 은선곤을 두고 강성태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시선을 내려 1층을 누른 다음이었다.

고개를 든 강성태를 향해 은선곤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문이 닫히는 동안 은선곤은 강성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양쪽 문이 닫히며 빛에서 살아가는 은선곤과 어둠으로 돌아가는 강성태를 갈랐다.

**

방지병원의 병실에 들어선 유섭우는 문상표에게 들었던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병렬은 내용을 다 듣고 나서도 잠시 말이 없었다.

“담배 있냐?”

“예, 형님.”

병실이었다. 그러나 어지간해서는 담배를 찾지 않는 이병렬의 요구여서 유섭우는 재킷 안쪽에 있던 담배를 꺼내 이병렬에게 건넸다.

유섭우가 켜준 라이터에 몸을 기울였던 이병렬이 상체를 다시 세우고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너, 이광준 사장님하고 함께 지낸 게 십오 년쯤 되지?”

“예, 형님.”

질문 하나를 던진 이병렬이 다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간 뒤에 갑갑한 속만큼이나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다른 건 다 떠나서 태완이 형님 노린 트럭 기사를 섭외했다는 건 용서가 안 되는데 어떻게 생각해?”

“죄송합니다, 형님.”

“어떻게 생각하냐고?”

“제게 맡겨주십시오, 형님.”

유섭우가 고개를 숙이며 묵직하게 내놓은 청이었다.

“문상표를 달아왔으니까 이광준 사장도 대강 분위기 눈치챘을 거다. 거기에 강서구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네가 여태 몰랐다면 숙소 식구 중에 동조한 놈이 한둘 분명히 있을 테고. 자칫하다가는 그놈 칼이 네 등을 찌른다.”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잠시 유섭우를 바라보던 이병렬은 테이블에 놓인 종이컵에 담배를 툭 던졌다.

“조용하게 처리해. 고영주란 년은 문신 떠서 섬으로 넘겨버리고. 보스에게는 그 뒤에 보고하자.”

“감사합니다, 형님.”

이병렬이 내린 섬뜩한 결정을 유섭우가 고개 숙이며 받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