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16권 - 8화
제4장. 다 말씀드렸습니다!
이른 아침, 방지병원의 병실이었다.
강성태는 이병렬과 단둘이 육개장을 놓고 마주 앉았다.
원래 이병렬은 건더기를 건져 밥에 올려 먹었다. 그러나 불편한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숟가락을 쓰다보니 지금은 밥을 아예 말아 넣었다.
“아, 이 씨.”
왼손으로 국물을 뜨던 이병렬이 짜증을 쏟아냈다.
편하게 식사하라며 김진용과 최치곤에게 조봉진을 보낸 참이었다. 픽 웃은 강성태는 티슈를 뽑아 흘린 국물을 닦았다.
어색한 동작으로 숟가락을 놀려 육개장을 겨우 뜬 이병렬이 생각난 게 있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바쁘냐?”
“오늘은 고검장과 소 회장이 소개하는 건설사를 만나는 거 말고 없어. 혹시 오후에 노익이 형님이 추천하는 건설사를 만날지 모르고.”
“그게 아니라, 당장 급한 일 없으면 여기 깍두기 하나 올려주라.”
생각 못 했던 이병렬의 요청에 강성태는 웃음을 터트렸다. 곧바로 이병렬이 따라 웃었는데 그 바로 뒤에 똑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웃음과 고통이 순서대로 지난 뒤였다.
“광주 다녀오고 확실히 굳어졌어. 그러다가 못 돌아온다.”
숟가락을 놓고 상체를 세운 이병렬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에 서린 독기가 풀리지 않았어. 당장은 좋지. 동생들이나 숙소 식구들이 그 눈빛에 긴장할 테고, 어떤 조직이든 조심하면서 고개 숙일 테니까.”
그랬나?
강성태는 생각하지 못했던 조언이었다.
“물론 보스가 쉽게 심성을 잃지는 않겠지. 그렇더라도 계속 그렇게 지내면 한순간에 심성이 무너져.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그런 눈빛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만나는 의사 선생과도 헤어지라고 하고 싶다.”
잔인한 조언을 이병렬은 거침없고, 냉정하게 내놓았다.
“전에 그랬지? 어둠 속에 살지만, 빛을 향해 가는 그림자가 되고 싶다고.”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이병렬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어둠에 적응하려는 그림자 같다. 이대로 조금 더 지나면 빛을 불편해하고, 어느 순간 피하거나 외면할 것처럼 보여. 거기까지 가면 내가 아무리 말리고 조언해도 못 돌아온다. 힘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쉽고, 빠르고, 편하니까.”
“내가 그렇게 될까?”
“말했잖아. 쉽게 변하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 눈빛을 앞으로 계속 지닌다면 장담 못 하겠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동생 중 누가 사사건건 말리고 드는 나를 작업하겠다고 할 때, 잠시라도 고민하겠지.”
육개장 그릇에 얼음을 가득 담아서 정수리에 붓는 듯, 정신이 번쩍 드는 조언이었다.
신기한 건, 용병으로 살 때 아저씨가 주었던 조언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매일 벌어지는 교전, 죽음이 일상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처럼 심성을 잃어가고 있었나?
당시를 떠올렸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주저하지 않고 이런 충고를 해준 이병렬이 고맙다.
강성태가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순간이었다.
“깍두기.”
멋쩍은 인사 따위 집어치우라는 듯 숟가락으로 육개장을 뜬 이병렬이 짧은 요구를 내놓았다.
가볍게 웃은 강성태가 깍두기를 집어 올려주자 고개를 최대한 아래로 내린 이병렬이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깡치 형님은 어떻게 할 거냐?”
“일정이 꼬여. 우선 아르윈이 돌아오는 대로 들어보고 순서를 결정하려고.”
“아! 아르윈은 어디에 있는 거야? 심부름 보냈다고 하지 않았어?”
“필리핀에 먼저 들어갔다가, 마카오 들러서 오는 일정인데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육개장을 뜨기 위해 상체를 기울이던 이병렬이 놀란 듯 몸을 세웠다.
“삼합회?”
강성태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럼 나는 이광준 사장이 무슨 짓을 했던 건지 알아볼 테니까 필요하면 언제고 불러.”
“그건 유섭우에게 맡기기로 했다며? 그러니까 병원에 있어. 내가 출국하게 되면 일이 많아질지 몰라. 부산에서 그 틈을 노릴 수도 있고. 당장 오른팔도 제대로 못 움직이면서 뭘 하겠다고 그래?”
쩝, 소리가 나도록 입맛을 다신 이병렬이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왼손을 사용하는 이병렬에게 맞추느라 속도가 나질 않았다. 거기에 이런저런 일들을 의논하느라 식사는 더욱 길어졌다.
“건설사는 몇 시 약속이야?”
“오후 1시.”
“그럼 커피 마실 시간도 충분하구만.”
느려진 식사가 염려됐는지 질문을 던졌던 이병렬이 느긋하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배근이 형님과 통화했다. 다음 주까지 정리해 놓을 테니까 그때 내려오라더라. 거기 충일이라는 놈에게 일을 맡겨도 되겠냐고 묻기도 했었고.”
번거로워서 더 못 먹겠다는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래쪽 정리도 내가 알아서 해?”
“잘 아는 사람이 관리해야 하는 거 아냐?”
“2인자라는 소리하기 미안하니까 말 돌리기는. 알았습니다, 보스. 제가 알아서 하지요.”
장난처럼 강성태의 말을 받은 이병렬이 천천히 움직여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라앉는 그의 표정과 눈빛을 보며 다음에 나올 말을 강성태는 충분히 짐작했다.
“오늘 밤은 정훈이에게 가 있을 거다. 태완이 형님도 잠시 들른다고 하는데 신강남파 덩어리가 커진 만큼, 전국에서 몰려들 거다. 이 핑계로 깡치 형님 쪽 식구들도 올지 몰라.”
창을 잠시 돌아보았던 이병렬이 연장을 들기 직전의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보스가 참석 안 하면 그건 정훈이를 욕보이는 게 돼. 반대로 그 자리에 있게 되면 전국에서 온 깡패들과 인사해야 할 거고. 나이로 따지고 들어서 보스 씹으려고 하는 인간들이 나올 거니까 적당히 각오하고 와.”
“그런 인간은 어떻게 상대해?”
“보스께서 알아서 하셔야지. 조심스럽게 나오면 그렇게 대하는 거고, 거칠게 나오면 또 알아서 들이받는 거고. 어쩌면 정훈이가 마지막으로 보스를 위해 만들어준 자리인지 모른다.”
김정훈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이병렬이 숨을 내쉬었다.
“보스가 전국 조직에 데뷔하는 날이라고 보면 맞을 거야. 전에 달수 때는 아무래도 태완이 형님 그늘이 워낙 컸던 데다, 우리가 광주를 손에 넣기 전이었으니까.”
“사정이 있어서 인사는 다음에 하겠다고 하면?”
“그냥 돌아간 인간들이 무시당했다며 벼르겠지. 최악에는 깡치 형님이 내민 손을 잡을지 모르고. 그러니까 이번 장례식장은 지금껏 절대자로 군림했던 깡치에게 붙을 거냐, 새롭게 떠오른 신강남파 강성태를 선택하느냐의 시험장이라고 보는 게 좋아.”
“욕했다고 때리면 불편해지겠네.”
어깨를 들어 보이던 이병렬이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는 우리 편 있었냐? 나부터 시작해서 전부 두들겨 놓고 손 내밀었잖아. 아, 씨! 말하다 보니까 또 열 받네.”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일어나. 이제 가봐야지.”
“커피나 먹고 가자.”
“밤새 그 일 치르고 안 피곤하냐?”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이병렬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
꼭 필요한 조명만 켜놓은 강서구 나이트는 살벌한 분위기 그 자체였다. 쿵쿵거리는 음악조차 입구에 겨우 닿을 정도여서 아무리 안에서 고함을 지른다고 해도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을 염려는 없었다.
여덟 명의 손님들이 편하게 앉을 자리의 중앙에 혼자 앉은 유섭우는 다리를 꼰 상태에서 왼팔을 소파에 걸쳤다.
주변 테이블에 삼십여 명에 달하는 덩치들이 이쪽 테이블을 지켜보고 있어서 유섭우의 맞은편에 앉은 조성만과 문상표는 바싹 얼어있었다.
“문상표.”
“예, 형님.”
“내가 광준이 형님 모시고 강서구 닦은 게 이십 년이 넘어. 그동안 생활 접은 놈만 백 명이 넘고. 다른 놈들이 숙소에서 빈둥거리며 애들 괜히 빳따 칠 때 나는 여기 청소도 했었다.”
문상표는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떨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강서구에서 사채, 노름, 심지어 업소 마이낑 던진 것까지 마음만 먹으면 하루면 알아낸다. 내가 그렇게 알아내기 전에 그래도 함께 이 바닥 밥 먹었던 너한테 듣고 싶다.”
침묵하는 문상표를 바라보던 유섭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활 접겠다고 나간 놈이 옆에 반달도 아닌 양아치 새끼 끌고 다니면서 사채를 돌린 거지. 그나마 적당한 수준이라면 광준이 형님을 봐서라도 내가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을 텐데, 늙은 부모를 때리게 해가면서까지 이자를 땡겼고.”
말을 하다 한심하다는 듯이 유섭우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말로 내가 관리하는 구역에서 노름방 돌리고, 꽁지 돌린 데다, 그걸 고리로 뜯어내느라 노부모 때리는 곳까지 따라다닌 거 아니냐. 이건 성태 형님 말씀 이전에 내가 용서가 안 돼. 알았냐?”
“죄송합니다, 형님.”
몸에 딱 붙는 티셔츠, 배꼽까지 오는 바지, 짧은 머리스타일을 한 문상표가 겨우 사과를 내놓았다.
“전주가 누구야?”
유섭우가 나직하게 물은 말에 문상표는 답을 하지 않았다.
“에효, 이 새끼야. 왜 그러고 사냐?”
답답한 듯 혼잣말을 뱉어낸 유섭우가 고개를 들었다.
“가서 양주 한 병 가져와. 잔 두 개하고.”
유섭우의 지시에 따라 주방으로 달려간 덩치 한 명이 왼손에 맥주잔 두 개, 오른손에 국산 16년산 양주를 들고 왔다.
아예 조성만은 없는 사람처럼 유섭우와 문상표 앞에 잔을 놓아준 덩치가 양주를 뜯어서는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잠시 문상표를 바라보던 유섭우는 말없이 병을 들어 문상표 앞의 잔에 기울였다. 문상표가 얼른 손을 내밀어 잔을 잡았는데 맥주잔에 가득 술을 채우고서야 유섭우는 병을 세웠다.
다음으로 유섭우는 앞에 놓인 자신의 잔에도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탁, 요란한 소리가 나게 병을 내려놓고는 바로 잔을 잡았다.
“상표야. 그거 마시고 기분 좋게 가라.”
잔에 시선을 주었던 문상표가 놀란 듯 얼굴을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광준이 형님 입에 올리지 않아서 고맙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내가 알아낼 테니까 너는 그렇게 광준이 형님 모시는 마음 하나 가득 담고 가.”
말을 마친 유섭우는 미련없는 태도로 잔을 들었다.
“뭐 해? 마셔.”
“형님?”
“씨발놈이 묻는 말에도 입 다물고 개겼으면 끝까지 당당하게 가야지. 뭐 그런 얼굴을 해? 양주값 내가 내는 거니까 마음 편히 마셔.”
말을 마친 유섭우는 더 권하지도 않은 채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벌컥, 벌컥, 그는 심지어 한 방울의 술도 입가로 흘리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깔끔하게 술을 들이켰다.
저 술이 다 넘어가면 문상표는 죽는다.
한때는 데리고 있던 동생을 버려야 하는 유섭우는 어쩌지 못한 아쉬움과 미련, 동정을 맥주잔을 가득 채운 술에 담아 삼키고 있었다.
“크흐.”
앞니가 드러나도록 숨을 토해낸 유섭우가 잔을 내려놓았다.
“못 마시겠어? 그럼 내 마음만 받는 거로 하자.”
술을 마신 직후에 나오는 유섭우의 음성에는 정말이지 미련 따위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야! 여기 두 새끼, 안산에 데려가. 가서 깔끔하게 갈아서 바다에 버려.”
“예, 형님.”
어둑한 홀 안에 덩치들의 대답이 묵직하게 울린 다음이었다.
유섭우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직후였다.
콰드등.
“형님! 성태 형님이나 치곤이 형님께 전화 한 번만 하게 해주십시오!”
여덟 명 자리라고 해도 팔걸이조차 없는 1인용 소파를 이어붙인 형태였다. 앉아 있던 소파를 뒤로 밀어낸 조성만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유섭우에게 애원했다.
소파를 벗어났던 유섭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야, 이 개새끼야! 깡패는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이런 잣 같은 바닥에도 최소한의 상도의가 있어. 그런 쫄티 쳐입고 돌아다니니까 어깨에 힘주고 그랬으면 대가도 치러야지.”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투로 유섭우가 다시 몸을 돌렸다.
지켜보던 덩치 한 명이 고갯짓을 던지자 주변에 있던 다른 덩치들이 우르르 소파로 몰려들었다.
이미 독하게 마음먹은 행동이었다.
심지어 반항할 것을 염려했는지 머리를 때리기 위해 배트를 든 덩치가 둘, 커다란 자루를 든 덩치도 둘 있었다.
한 번쯤 돌아볼 줄 알았던 유섭우는 벌써 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덩치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배트를 든 덩치 둘이 뒤로 다가선 직후였다.
“저는 여기 상표 형님이 불러서 심부름만 했지, 아는 게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겁에 질린 조성만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는데 아직 소파에 앉았던 문상표의 손이 그때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형니-임! 형님!”
조성만의 간절한 고함을 짓밟으며 덩치들이 두 사람을 완벽하게 에워싼 다음이었다.
정면에 있는 덩치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상표의 뒤에 있던 덩치가 배트를 치켜들었다.
“종수 형님입니다! 종수 형님이 일본에서 돈을 구해와서 풀었습니다!”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문상표가 말을 쏟아냈다.
배트를 멈춘 덩치가 어떻게 하냐는 투로 시선을 들자, 맞은편에 있던 덩치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섭우는 반쯤 연 홀의 문 앞에 있었다.
복도를 거치며 깎여버린 옅은 빛줄기가 그의 모습을 아련한 실루엣으로 보여주었는데 망설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콰드등.
문상표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조성만처럼 소파를 밀치고 바닥에 꿇어앉았다.
“중고차 시장을 중심으로 노름방을 돌렸습니다. 고영주라고 옛날 탤런트 했다는 년이 호구들 작업해 오면 그쪽에서 큰 손님 돌렸고, 그 외에 자질구레한 호구들은 제가 관리했습니다, 형님!”
유섭우가 천천히 고개를 몸을 돌렸다.
뒤에서 달려오는 빛이 그의 얼굴을 검게 만들었는데 이상하게 눈빛만큼은 분명하게 보였다.
“광준이 형님이 손잡은 조직은?”
차마 이번 대답은 꺼내지 못하겠는지 문상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개새끼. 끝까지 골사발을 돌려?”
차가운 한마디였다.
이제 돌아서면 이런 기회조차 없다.
“천안 병련이 형님과 손잡으셨습니다. 태완이 형님 작업한 트럭 기사도 여기 중고차 시장에서 섭외하셨습니다, 형님.”
마침내 마지막 비밀을 털어낸 문상표가 급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형님!”
어둠을 등진 유섭우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엄청난 분노를 억지로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지켜보는 덩치들 모두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