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16권 - 5화
주황색 센서등이 비춰주는 계단을 오르며 최치곤은 독하게 눈매를 찌푸렸다.
3층이라고 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통증이 최치곤을 물어뜯어서 평소라면 훌쩍 뛰어서 올라갈 계단이 오늘은 한라산만큼이나 높게 느껴졌다.
한 계단, 한 계단, 혹시 몰라서 숙소 덩치들 셋과 함께 올라가는 길에서 최치곤은 속없이 강성태가 보고 싶었다.
고작 빌라를 오르는 걸음이 이렇게 힘든데, 광주에서 4개 조직을 상대하는 강성태는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견디고 있을까.
안다. 강성태 옆에 있으면 최치곤은 그저 모자라고 부족한 인간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이 걸음의 끝에서 언젠가는 강성태와 둘이 포장마차에 앉아 일대일로 탄 폭탄주 마시며 킬킬거릴 날이 있었으면 싶었다.
방향을 돌아 3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앞에 둔 최치곤은 위쪽에서 기다리던 이은주를 보았다.
얼른 인간 같지 않은 놈을 데리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깡패가 싫다는 이은주에게 칼에 찔리고 베인 꼴을 보이기 싫었고, 다음으로 위로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까 염려돼서였다.
최치곤을 본 이은주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숙소 식구 셋과 301호 앞에 도착한 최치곤은 애써 만든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데려갈 건데 괜히 얼굴 마주치면 불편해질지 몰라. 그러니까 들어가 있어.”
짧게 말을 던진 최치곤은 깡패란 사실을 내보이듯 뒤따라오던 숙소 덩치 셋에게 고개를 돌렸다.
“벨 눌러.”
“예, 형님.”
고개를 숙인 덩치가 301호 앞으로 움직여 벨을 눌렀다.
잘했어, 최치곤.
그저 깡패의 도움이 필요해서 부른 거니까 오바하지 말고 얼른 데리고 가자.
숙소 덩치가 다시 벨을 누른 뒤였다.
“누구세요?”
현관문이 조금 열리며 젊은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오늘은 됐으니까 상표 형님이 내려오랍니다.”
“예?”
최치곤은 벨을 누른 덩치의 곁을 지나 조금 열린 문을 옆으로 잡았다.
“상표 형님이 지금 내려오라고 했다니까. 문 열어.”
“누구신데요?”
뭔가 불안하다고 여겼는지 작은 틈만 허용하는 걸쇠를 걸어놓은 남자가 문을 열지 않고 버텼다.
시간은 자꾸 가고, 이은주는 보고 있고.
“야, 이거 뜯어.”
최치곤이 지시를 내린 순간이었다.
놀란 남자가 문을 닫으려 힘을 주었고, 최치곤은 또 그걸 막기 위해 양손을 옆으로 돌려 문을 붙들었다.
“이이익.”
어깨에 칼이 꼽혔던 최치곤이었다. 팔뚝과 등에도 갈라진 상처가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문을 붙들고 힘을 쓰다 보니 어쩌지 못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다행히 숙소 덩치들이 바로 문을 잡아주었고, 이어서 셋이 힘껏 당겨서 걸쇠를 부쉈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이를 악물며 거친 숨을 내쉬는 최치곤을 숙소 덩치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폈다.
이 새끼는 사람 곤란하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이를 악문 최치곤은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선생님. 우리 아들이 갚아야 할 돈이 얼마인지 말씀해 주시면 수일 내로 만들어서 찾아뵙겠습니다.”
땅땅한 체격에 키가 작은 아들보다 훨씬 더 작은 노파가 용서를 구하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비벼가며 최치곤에게 매달렸다. 말라비틀어진 눈가와 목덜미에 붉은 멍이 있는 것으로 봐서 조금 전까지 맞았던 모양이었다.
“돈은 됐어요. 그동안 너무 많이 갚은 거 같아서 정리하려고 그래요.”
“예?”
최치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노파가 반문할 때였다.
“상표 형님이 기다리신다니까! 오늘은 아무 일 없을 테니까 빨리 나와.”
최치곤은 이런 일이 귀찮다는 투로 남자를 재촉했다.
“아, 진짜! 얼른 가자!”
최치곤의 태도와 뒤에 선 세 명의 덩치에게 눌린 남자가 그제야 현관으로 움직였다.
“선생님. 우리 아들은 아무 일 없는 거지요?”
“예.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돈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시고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있는 바라보는 노파를 두고 최치곤은 301호를 나섰다.
이은주는 아직 301호와 302호의 중간에 서 있었다.
“간다!”
덩치 셋이 노파의 아들을 데리고 내려가고 있어서 최치곤은 짧은 한마디를 던지고 계단을 향해 걸었다.
“고마워요.”
뒤에서 이은주의 인사가 들렸을 때, 최치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오른손만 슬쩍 들었다.
‘잘한다, 잘하고 있다, 최치곤.’
계단을 내려서며 최치곤은 주문처럼 같은 말을 되뇌었다.
**
이병렬은 스마트폰을 들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문상표? 강서구 문상표 말이냐?”
- 예, 형님. 이광준 사장님과 함께 생활 접었던 상표를 붙잡았습니다. 전에 신월동에서 생활하겠다던 치곤이 고등학교 후배 조성만이랑 함께 노름빚 받으러 다닌 모양입니다, 형님.
“하, 참. 뭔 일이 이렇게 끝도 없이 생기냐? 장사하는 집이었으면 떼부자 됐겠다.”
툴툴거리면서도 이병렬은 뭔가 있다는 확신에 눈을 반짝였다.
“섭우에게 말해서 애들 보낼 테니까 두 놈 넘기고, 너랑 치곤이는 병원으로 가.”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이병렬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뒤에 앞에 서 있는 덩치를 손짓으로 불렀다.
“가서 섭우 좀 오라고 해.”
지시를 받은 덩치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이병렬은 병원 건물 위로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믿기지 않는 하루였다.
심지어 이병렬조차 이렇게 칼에 맞고도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 강성태는 벌써 황상열을 서울로 보냈고, 광주의 4대 조직 중 두 개를 무너트리고 세 번째로 향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러니 씨발, 내가 목숨 걸고 따를 수밖에 없지.”
이병렬이 혼잣말을 뱉었을 때였다.
병원에서 나온 유섭우가 이병렬의 앞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앉아 봐.”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자리에 앉은 유섭우에게 이병렬은 조금 전에 있었던 통화 내용을 알려주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나이트에 과일 남품하는 것으로 정리 끝냈다고 생각했고, 여태 문제없이 지내셔서 따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널 탓하는 게 아니라 전에 우리 일이 밖으로 새나간다고 한 거 있지? 어쩐지 이번 일이 그거랑 연관된 게 아닌가 싶어서 확인하라는 거고. 아흐, 씨….”
어깨의 통증을 견디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던 이병렬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노름빚이든, 사채든, 고리로 돈 굴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했는데 다른 곳도 아닌 신월동에서 그 짓을 했거든. 혹시 이광준 사장이 돈을 돌리기 위해 다른 조직 끄나풀을 했을지도 모르니까 그쪽을 살펴봐. 특히 중고차 쪽. 알았어?”
“알겠습니다, 형님.”
“강서구에서 생활 접은 놈이라 널 부른 거다. 괜히 옛날에 모셨다느니 하는 생각에 어설프게 손댈 거 같으면 미리 말해. 종환이 시키면 되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형님.”
“그럼 얼른 애들한테 연락해서 두 놈 받으라고 해. 그래야 진용이랑 치곤이가 병원에 가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형님.”
자리에서 일어선 유섭우가 고개를 숙이고는 급한 걸음으로 병원 건물로 향했다.
**
무등산에 있는 등산로 입구였다.
문을 닫은 카페, 식당, 그리고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은 강성태는 다리에 팔을 걸치고 앞으로 기울인 자세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장우를 비교적 손쉽게 정리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확실히 힘겨워서 최금식을 만나기 전에 잠시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산에서 피어난 안개가 어둠 속에 앉은 강성태의 지친 모습을 좀 더 짙게 감춰줄 때였다.
“저기 형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고, 최금식은 다음에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보기에 안타까웠을까, 뒤에 서 있던 정영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상체를 세운 강성태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덕진과 박배근 역시 같은 의견으로 보였다.
“지금 힘들어서 잠시 틈을 주면 또 정훈이처럼 허망하게 당하는 식구들이 나올지 몰라.”
주차장에 가득한 덩치들의 승용차를 보며 강성태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독하게 움직이면 앞으로 어떤 조직이든 우리 식구들을 건드릴 때 한 번은 고민한다. 그거면 돼. 그 한 번이 영권이 너를 구할지, 아니면 여기 조덕진과 박배근을 구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한 번 고민할 여유를 얻어서 누군가 더 당하지 않으면 그거로 돼.”
덤덤하게 의지를 전한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최금식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최금식은?”
“숙소 애들 모두 모아서 상무 쪽 업장에 있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질문에 박배근이 얼른 답을 내놓았다.
“형님. 덕진이는 밀동에서 모실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최금식이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형님.”
그리고는 조덕진과 정영권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볼 정도로 뜻밖의 청을 덧붙였다.
세 개 조직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동안, 뭔가 생각한 게 있었던 눈치였다. 아니면 조금 전에 강성태의 의지를 듣고 깨달은 게 있던가.
“최금식이는 동생들 숫자도 제법 돼서 지금까지와 달리 일이 커질 수 있습니다, 형님. 제가 앞쪽에서 그쪽 동생들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처음 어색해하던 것과 달리 박배근의 입에서 형님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강성태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형님.”
정말이지 간곡한 청을 하며 박배근이 상체를 숙였다.
고개를 든 박배근의 눈을 강성태는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였다.
“정영권, 조덕진.”
“예, 형님.”
“박배근이 앞장서기로 하고, 여기 식구들 전부 함께 간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정영권과 조덕진이 고개를 숙여 답했고,
“감사합니다, 형님.”
박배근이 더욱 깊게 상체를 숙였다.
**
최금식은 술이 완전히 깬 얼굴로 방금 들어선 덩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애들은?”
“연장 채워서 깔았습니다, 형님.”
원하는 답이었다. 그런데도 최금식은 뭔가 세상이 온통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세 개 조직이 한 명에게 박살 난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거야?”
“숙소는 덕진이 형님과 서울 영권이 형님이 그쪽 식구들 데리고 움직였습니다, 형님.”
“야, 이 새끼야! 연장 들고 전쟁하는데 형님은 씨발, 뭐 얼어 죽을 형님이야?”
“죄송합니다, 형님.”
고개 숙이는 덩치를 노려보던 최금식이 한심하다는 투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강성태가 여기까지 오면 신고해.”
“예? 형님?”
“이 새끼가 귀가 먹었나? 여기가 우리 업장 아냐? 괜히 서울에서 내려와 여기저기 행패 부리고 다닌다고 신고하라고.”
“예, 형님.”
답을 하기는 했으나 어쩐지 맥이 빠지는 데다, 감추지 못한 서운함도 담겨 있었다.
“너 이 새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예? 형님?”
“하, 이 새끼가 진짜?”
최금식은 독이 바짝 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테이블을 비켜서 문앞으로 움직였다.
“야, 이 개새끼야?”
짜아악! 짜아악!
두꺼운 최금식의 손에 따귀를 얻어맞은 덩치의 뺨이 곧바로 붉게 물들었다.
“이 새끼가 오냐, 오냐 해주니까 사랑방에서 만난 형 동생인 줄 아나? 너는 이 새끼야, 오늘 밤에 빠따 하나 준비해서 기다려. 알았어?”
“예, 형님.”
작정한 모양으로 따귀를 맞았는데도 덩치의 답은 곱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씨발 새끼가?”
짜아악! 짜악! 짜아악! 짜아악!
연달아 네 번의 따귀를 때린 뒤였다.
문이 열리고 새로 들어선 덩치가 움찔했다가 최금식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뭐야?”
“신강남파가 움직인답니다, 형님.”
“뭐?”
내내 따르던 덩치의 따귀를 때릴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밖에 애들은?”
“모두 자리에 있습니다, 형님.”
“내가 지시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 알았어?”
차마 경찰에 신고할지 모른다는 말을 덧붙이지 못한 최금식이 얼굴이 벌겋게 돼 서 있는 덩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서 애들 챙겨, 이 새끼야!”
최금식이 거칠게 지시한 다음이었다.
따귀를 맞은 덩치는 “예, 형님.”이란 말도 없이 고개만 숙인 뒤에 룸을 나섰다.
“하여간 이 새끼고, 저 새끼고, 빠따를 거르면 대가리 큰 줄 알고 설치니, 원. 내가 씨발, 인복은 더럽게 없어. 그냥 나만큼만 하는 놈 하나만 있어도 이런 꼴 안 당하는 건데.”
덩치가 나간 문을 돌아보며 최금식은 과할 정도로 분통을 터트렸다.
물론 이런 순간에 경찰에 신고해서 도움을 받으면 앞으로 최금식과 숙소 덩치들은 두고두고 깡패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된다.
최금식이라고 어디 그러고 싶겠나.
마음이야 동생들 보는 앞에서 멋지게 달려나가 통쾌하게 쓰러트리고 싶지. 하지만, 세 개 조직의 대가리를 혼자 깨부수고 달려오는 강성태를 맞설 능력과 자신이 최금식에게는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당장 경찰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위기를 넘겨야지.
“씨발! 강성태같이 똘똘한 동생 하나만 있었어도….”
갑갑한 심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최금식은 엉뚱한 소망을 뱉어내며 문 쪽 소파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