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16권 - 3화
제2장. 어떤 놈부터 할래?
박배근이 성북구 개발 사업을 먹자고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을 만큼 황상열은 근성, 독기로 똘똘 뭉친 광주 일빳다였다.
그런 그가 대뜸 무릎을 꿇고서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결국, 이 지랄을 떨걸,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설쳐서 조태완, 이병렬, 김진용을 위기에 몰아넣고, 애꿎은 김정훈의 숨을 끊었는지, 당장에라도 황상열의 목줄을 그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누르느라 강성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겉으로만 반성하는 놈의 특징이 있지.”
병실 밖은 어둠이었다.
그 바람에 거울처럼 변한 유리 속에서 무릎 꿇은 황상열을 향해 강성태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던지고 있었다.
“피해자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경찰, 검찰, 판사에게는 잘못했다고 빌어. 그렇게 겉으로만 반성하는 놈들은 또 기회만 된다면 언제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을 자른 강성태는 자세를 낮춰 무릎 꿇은 황상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노익이 형님을 노렸다가 이렇게 됐는데도 다시 병렬이와 진용이를 노렸고, 너의 그 더러운 욕심 때문에 태완이 형님이 죽을 뻔했고, 정훈이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얌전히 살아간다는 한마디에 용서하라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뭔가 말을 덧붙이려던 황상열이 강성태의 눈을 보고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몸을 일으킨 강성태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정영권. 이 인간 차에 실어서 이병렬에게 보내.”
“예, 형님. 야, 황상열이 끌어내.”
“형님! 성태 형니-임! 저기 배근이나 덕진이를 봐서라도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솔직히 정훈이는 제가 그런 게 아니라….”
다급한 황상열의 심정이야 이해한다. 그러나 김정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강성태는 애써 누르고 있던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예?”
“정훈이는 네가 그런 게 아니라고?”
“그게….”
짜아악! 짜아아악! 짜악!
양팔을 붙잡아 일으켰던 황상열의 고개가 좌우로 번갈아 돌아갔고, 곧바로 눈가와 입술 끝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 개새끼야! 정훈이를 허망하게 죽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에 올려?”
짜아아악! 짜아악! 짜아악!
강성태는 정말이지 있는 힘을 다해 황상열의 뺨을 갈겼다.
짜아아아악!
이가 부러지는 감각이 느껴진 직후였다.
“크륵.”
반쯤 의식을 잃어 흔들리는 황상열이 피를 토해냈다.
“형님!”
더는 위험하다고 여겼는지 정영권이 달려와 강성태를 안았다.
“후-.”
이럴 거 같았다.
한 번 손대면 정말 죽여버릴 거 같아서 참았었다.
참자, 지금은.
병렬이가 한풀이를 할 수 있게 하고, 다음으로 아르윈에게 맡겨서 처리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피범벅인 황상열은 축 늘어져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데려가, 얼른!”
정영권이 고갯짓을 던지기 무섭게 덩치 둘이 황상열을 끌다시피 해서 병실을 나섰다.
강성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아직 가라앉지 않는 화를 삭였다. 의식을 잃은 황상열이야 오히려 통증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당장 어깨와 등, 팔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잠시 틈이 필요했다.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난 다음이었다.
“시작하자.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놈이 누구야?”
“오장우가 가장 수월합니다, 형님.”
“어디에 있는데?”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형님.”
사람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도 박배근은 미리 약속해 두었던 사람처럼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서글프게도 사람은 먹어야 산다.
일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장례식, 심지어 중상을 입고 입원한 병실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올라온 김진용과 최치곤 역시 먹어야 사는 탓에 필리핀 조직원이 사 온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강성태와 이병렬은 지금도 쉬지 못하고 뛰고 있었다.
한가한 감상에 젖어, 식욕이 없다는 핑계로 밥을 거르는 건 김진용과 최치곤이 할 짓이 아니었다.
사실 최치곤이 뜨끈한 설렁탕을 권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김진용이 샌드위치를 선택했다.
코를 맴도는 약 냄새 탓에 입안은 쓰디쓰고, 3년 가뭄의 논바닥처럼 목 안이 쩍쩍 갈라지는데, 김진용과 최치곤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는 반드시 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듯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밀어 넣었다.
적당히 좀 사 오지.
샌드위치 가게를 모조리 털어온 듯 수북하게 쌓인 샌드위치를 반 넘게 먹고 나서야 김진용은 상체를 세웠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형님?”
질문을 던졌던 최치곤이 얼른 침을 삼켰다. 뱃속에 가득한 샌드위치가 이럴 바엔 밖으로 나가겠다며 목으로 치솟은 탓이었다.
“커피는 나중에 하자.”
짧은 답을 건넨 김진용은 반쯤 상체를 구부린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로 향했다.
저렇게 끙끙댈 거면서 또 조봉진을 악착같이 이병렬에게 보내는 충심이란.
‘배워야 해.’
최치곤이 심오한 표정으로 김진용을 바라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침대 위에 둔 그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받아, 그냥. 그 몸으로 어딜 나간다고 그래?”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고개를 숙인 최치곤은 통화버튼을 누르고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칼을 맞은 어깨와 팔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고작 스마트폰을 들었을 뿐인데 200킬로그램짜리 역기를 어깨에 걸친 느낌이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저예요, 은주. 통화 되세요?
“응. 무슨 일인데?”
- 지난번에 말했던 그 아들이 지금 집에 왔어요. 돈 내놓으라고 고함지르고 있는데 와줄 수 있어요?
“지금 말이지?”
질문을 던진 최치곤은 먼저 김진용을 살폈다.
“내가 5분 뒤에 전화할게.”
최치곤의 통화 따위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김진용은 잠자는 숲속의 덩치처럼 침대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저, 형님.”
지이이잉. 지이이잉.
최치곤이 부르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김진용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응. 나는 방지병원에 며칠 있을 거 같으니까 어지간한 일은 부사장과 의논해서 처리해. 결정하기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고 전화하고. 그래. 끊자.”
간결하고 짧게 통화를 마친 김진용이 눈을 감다 말고 최치곤을 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고 있어?”
“저기, 형님. 신월동에 나이 많은 노인네들을 때리는 아들놈이 있답니다. 신고를 해봐도 그때뿐이고, 또 부모가 자꾸 용서해 달라고 매달리는 바람에 고쳐지질 않는답니다, 형님.”
침대에 누운 김진용이 삐뚜름한 얼굴로 최치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잠시 다녀올까 합니다.”
“그 몸으로? 미쳤냐, 지금? 성태 형님과 병렬이 형님이 아등바등 조직을 위해 뛰고 계신데 걱정거리 될지 모를 일을 하겠다고?”
“죄송합니다, 형님.”
“생각 좀 하고 살자, 생각 좀! 보아 하니까 여자 전화라 정신이 팔린 모양인데, 네가 지금 그럴 때냐?”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고개를 떨군 최치곤의 어깨와 팔뚝, 배에 감긴 붕대를 본 김진용이 나직하게 숨을 토해냈다.
“전화 기다릴 테니까 일이 있어서 다음에 간다고 말이나 해줘.”
“예, 형님.”
“참나. 너한테도 그런 거 부탁하는 여자가 있어? 누구냐? 어디에서 만난 사람인데 그런 일을 부탁해?”
“커피 알리고의 여직원입니다, 형님.”
“뭐어?”
상체를 세웠던 김진용이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커피 알리고 카운터에 있는 그분? 성태 형님이 여동생 같다고 챙기는?”
“예, 형님.”
“야, 이 모자란 새끼야! 그럼 그렇다고 먼저 말을 했어야지! 가만, 신월동이라고 그랬지? 얼른 옷 갈아입어. 바로 출발하게. 대림동하고 강서구 비상 걸려서 인원이 부족할 테니까 여기 필리핀 조직원 전부 움직여 달라고 해.”
“저 혼자 다녀와도 됩니다, 형님.”
“나도 그렇게 보내주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돌아다닐 때가 아냐.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예, 형님.”
김진용과 최치곤은 인상을 찌푸려가며 옷을 갈아입었다.
“저기, 형님. 성태 형님 모시기 위해 숙소에 둔 동생들 열 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러. 지금은 조심하는 게 최고다.”
최치곤이 건넨 말을 김진용이 덥석 받았다.
**
오장우를 찾는 건 전화 두 통으로 끝났다.
광주가 좁기는 한 모양인지 S650이 어디에 있는지 전화 두 통으로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룸살롱?”
“예, 형님. 컨벤션센터 근처에 있는 유흥가라 여기에서 20분만 가면 됩니다.”
강성태가 내려온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차를 자랑하기 위해 룸살롱에 가는 배짱이라니.
강성태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최금식도 그렇고, 여기 애들은 형님께서 황상열만 처리하고 바로 올라가실 거라고 예상하는 눈치였습니다, 형님.”
“나하고 통화도 했었는데?”
“낮에 이곳 동생들하고 통화도 했었는데, 설마 광주에서 큰일이야 벌이겠어 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형님.”
방심하고 있다는데 고마우면 고마웠지, 더 무슨 말을 하겠나.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광주에 내려왔는데도 시내에서 술을 처먹는다는 걸 보면 오장우도 제대로 된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장우가 관리하는 숙소가 몇 개나 돼?”
“광주는 워낙 빤한 곳이라 숙소라고 할 게 몇 개 없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박배근이 빠르게 답을 냈다.
“조덕진. 내가 오장우를 만나는 동안, 영권이랑 둘이서 오장우가 관리하는 숙소 털어. 할 수 있겠어?”
“충분합니다, 형님.”
“출발하자.”
지시를 마친 강성태는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광주 대가리 넷은 이렇게 황상열만 두들긴 뒤에 서울로 갈 거라 기대한다는 말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조덕진과 정영권이 고개를 숙인 뒤에 각자 데려온 숙소 덩치들을 이끌고 출발했다.
강성태는 기다리고 있던 승용차의 뒷좌석에 오르자, 반대편으로 돌아간 박배근이 운전석 뒤로 몸을 실었다.
오장우를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은데 오장우를 두들긴 이후에 남은 셋이 머리를 감출 게 걱정이었다.
“최금식이 머리를 감추면 어떻게 하지?”
“전화 한 통이면 바로 찾아냅니다, 형님.”
강성태의 염려를 빤히 알 텐데도 박배근은 더할 수 없이 자신에 찬 답을 내놓았다.
하기는 오장우도 전화 두 통 만에 찾아냈으니까.
침묵 속에서 20분쯤 달렸다.
창가를 통해 광주 시내를 바라보는 박배근의 얼굴에서 어색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몇 번 더 함께 움직이고 나면 지금 같은 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텐데, 아직 그 단계는 아니어서 억지로 하는 대화보다 솔직한 침묵이 훨씬 더 편했다.
도로를 따라 길게 달리던 승용차가 신호를 받고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왼편으로는 높고 커다란 오피스 빌딩이 줄줄이 늘어섰는데 맞은편은 또 온갖 이름의 모텔이 빼곡하게 들어찬 희한한 느낌의 거리가 펼쳐졌다.
“저기 보이는 곳입니다, 형님.”
편의점을 끼고 모텔촌으로 돌기 무섭게 아치 형태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룸살롱이 보였다. 그리고 룸살롱 앞에는 억대가 넘는 가격의 수입 스포츠카, 독일제 최고급 승용차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땀 흘려 돈을 번 사람은 절대 저런 차를 끌고 이런 곳에 술 마시러 오지 않는다. 그리고 저런 짓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또, 생각이 짧은 놈들을 현혹하기 가장 좋은 모습이기도 했다.
손가락질받으면 어때?
일진으로 이름 날리다가 제대로 된 조직에 들어가면 언젠가는 저런 차 끌고 다니면서 매일 화려한 술집에 다닐 텐데.
손에 묻혀야 하는 피와 눈물, 그러고도 천 명 중 한 놈이나 저렇게 될까, 나머지는 평생 교도소나 뺑뺑이 돌다가 인생 망가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얼치기들에게 먹힐 만한 유치하고 추한 모습이었다.
“저 앞에 세워.”
박배근이 손으로 가리키자 운전하는 덩치가 네온사인 바로 아래에 차를 세웠다.
곧바로 조수석에서 내린 박배근이 뒷문을 열어줄 때, 따라왔던 승용차들이 줄줄이 뒤에 늘어섰다.
“괜히 소란 떨 거 없이 둘이 들어가자.”
여기를? 달랑 둘이서?
저렇게 숙소 애들을 다 데려왔는데?
보스란 원래 숙소 덩치들 밀어 넣고 차에서 기다리는 건데!
멈칫했던 박배근이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는 뒤편의 숙소 덩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들어갔다 올 테니까 여기에서 기다려.”
“예, 형님.”
덩치들에게 지시한 박배근이 각오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그는 빠르게 움직여 네온사인 아래의 유리문을 열었다. 그런 뒤에 강성태를 안내하듯 능숙하게 붉은색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끝은 다시 유리문이었다.
이곳에 들렀던 경험이 수차례 있는 모양으로 박배근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진열장을 뒤에 둔 카운터가 먼저 나왔고, 좌우로 난 복도를 따라 롬이 들어서 있는 구조였다. 바쁘게 오가는 웨이터, 아가씨들, 길게 이어진 방에서 나오는 노랫소리, 안쪽은 유리문 바깥과 다른 세상이었다.
“어머! 오셨어요? 왜 이렇게 오랜만이세요?”
서른 후반의 여자가 박배근에게 반갑게 다가선 뒤에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성형한 흔적이 역력한 얼굴에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전반적인 느낌은 퇴폐 그 자체였다.
“장우 있지?”
“오 회장님이요, 안쪽 특실에요.”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놈의 특실은 진짜.
“그런데 이분은 누구세요? 정말 잘생기셨다. 혹시 연예인…?”
“나중에 보자.”
질척거리는 여자를 한마디로 잘라낸 박배근이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카운터를 지나 왼편 복도에 들어선 직후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복도 안쪽에 서 있던 덩치들이 경계하는 눈빛과 태도로 박배근에게 인사하고는 강성태를 날카롭게 살폈다.
“가장 안쪽 방이지?”
“예, 형님.”
“그럼 여기 있어.”
박배근을 세운 강성태는 곧장 덩치들을 향해 걸었다.
어깨와 팔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끔찍해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는데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