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16권 - 1화
제1장. 어딜 가는지 모르지만, 같이 가자.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마셔서 그런가.
불쑥 날아든 강성태의 음성이 회칼처럼 귀를 파고들더니 최금식의 판단력을 싹둑 갈랐다.
분명 강성태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최금식은 대꾸조차 내놓지 못하고 볼록한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눈만 끔벅였다.
- 조덕진에게 매달린 모양인데.
또다시 날아온 강성태의 한 마디가 이번에는 최금식의 자존심을 깊게 찔렀다.
“매달렸다고? 내가?”
젠장! 차라리 솔직하게 인정할 것을!
빤히 박배근, 조덕진, 강성태 순으로 이야기가 전해진 건데 부인하는 바람에 자존심만 더 구겼다.
그건 그렇고, 통화가 이뤄진 거니까.
“뭐, 통화를 하고 싶기는 했지. 다른 건 아니고, 우리끼리 피 흘려봐야 반가워할 사람은 경찰하고 검찰밖에 없어. 죄 빵에 달려들어 가서 그 인간들 실적 올려줘서 뭐할 거야?”
강성태가 직접 전화하는 바람에 개망신을 당한 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라도 피바람을 피할 수만 있다면 밟힌 자존심쯤 술 몇 잔에 털어내면 될 일이었다.
“나랑 우리 광주 식구들은 상열이가 신호남파 도진이 형님 지분 찾아준다는 말에 혹했을 뿐이라니까.”
고민하는 모양인지 강성태의 대꾸는 없었다.
아무튼, 굳이 전화했다면 강성태 역시 이 싸움을 피할 명분을 찾는 게 아니겠나.
“사람이 그렇잖아. 병문안 갔더니 옛날 지분 찾아준다, 그러는데 굳이 싫다고 할 게 뭐 있어? 안 그래?”
마음 급한 최금식이 최선을 다해 변명을 늘어놓고 난 뒤였다.
- 최금식. 내가 출발한다. 좋게 해결하고 싶으면 광주에서 보자.
“뭐?”
예상하지 못한 강성태의 제안에 최금식은 어안이 벙벙했다.
강성태를 만나서 버틸 수 있을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강성태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국을 떠돌았다. 먼저 강남 삼대장을 잡아먹더니 그 뒤로 안산, 안중, 광룡, 대전, 심지어 강북까지 휩쓸어서 대놓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서울의 주인이 강성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조태완과 박노익이 보스라며 지닌 힘을 모조리 실어주는 데다, 이병렬이라는 미친 인간이 김진용과 함께 목숨을 내던지다시피 따르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종환과 유섭우, 이제는 죽었지만, 김정훈을 시작으로 강남 숙소 식구들도 강성태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 왜? 뒤에서 회칼 들이대는 건 하겠는데, 직접 보자는 건 못 나오겠어? 그래놓고 잘해보자는 네 말을 믿으라는 거냐?
“크흠.”
최금식은 헛기침을 뱉었다.
솔직히 말하자.
떼거리로 달려드는 싸움이라면 모를까, 맞다이로 붙으라면 최금식은 이종환 정도나 감당하지, 이병렬만 갖다 대도 개망신당할 게 분명했다.
- 최금식. 하나만 알아둬. 광주에 네 개 조직이라고 하던데 너 말고 다른 조직에서도 연락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밀어서 광주를 정리할 생각이거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 광주 잡아먹은 놈을 제외하고, 서울에 있는 광주 식구들의 업장을 모조리 밀어낼 건데 그때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똑똑히 들어주마. 알았냐? 너 정도는 내가 직접 정리하지 않아도 끝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아직 불이 들어와 있는 스마트폰의 액정을 내려다보며 최금식은 직전에 들었던 강성태의 말을 떠올렸다.
생활한 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통화한 강성태는 완벽하게 보스의 위용을 지니고 있었다.
‘가만?’
최금식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성태의 말이 헛소리만은 아니란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막말로 최금식도 강성태가 마음먹고 밀어준다면 광주를 움켜쥘 자신이 있었다.
지금껏 광주가 네 개로 쪼개져 균형이 이룬 건 먹고살 게 없어서 굳이 광주에서 치고받을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또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진출하지 않으면 조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이, 씨발. 제대로 걸렸네.”
강성태가 두려워서 안 나가면 네 개 조직 중 욕심부리는 놈이 나올 테고, 그렇다고 네 개 조직이 모조리 나가는 건 ‘우리 다 모였어요. 얼른 목을 쳐주세요.’ 하는 꼴이 된다.
“황상열, 이 개새끼!”
쇳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욕을 뱉어낸 최금식이 뜨거운 김을 쏟아냈다.
**
박노익과 이병렬이 강성태를 질렸다는 얼굴로 보았다.
“광주 네 개 조직을 통합하겠다는 거, 미리 계산했던 거 아니지?”
“대전 조덕진 통해서 세 개 조직이 전화했다기에 가장 나이 많은 최금식에게 말을 흘린 거다.”
“그러니까 전화 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이런 계획을 세웠다는 거잖아. 혹시라도 노파심에서 말하는 건데, 앞으로 보스를 열심히 따르겠지만,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그냥 때리고 끝내주라. 이렇게 피 말려서 죽이지 말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의 이병렬이 감탄을 대신해 엉뚱한 청을 내놓았다.
이런 말에 뭐라 대꾸하겠나.
힘겹게 웃어준 강성태가 병원 앞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검은색 승용차에 시선을 줄 때였다.
“태완이 형님 들이받은 놈, 경찰이나 검찰 쪽에 손을 써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지켜보고 있던 박노익이 가볍지 않은 질문을 건넸다.
“동생은 고검장과 직접 통하는 사이잖아? 그쪽에 연락해서 사건을 세심하게 살펴보라고 하면 어때?”
“지금은 그냥 두십시오.”
박노익이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고검장과 관계가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쪽에서도 어지간히 준비했을 거고요. 우선 사건 처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면서 어떻게 덮는지, 누가 돕는지를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동생은 진짜 무섭다.”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박노익은 오 년쯤 훌쩍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동생 나이 때 태완이 형님은 진짜 대단했지. 더 대단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때 동생이 있었다면 강남 삼대장이니 하는 간지러운 호칭은 아예 없었겠다.”
흘러간 지난 시절이 떠올랐는지 박노익이 병원 건물을 돌아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병원 앞에 도착한 승용차에서 광주에 함께 움직일 덩치들이 내려 정영권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사람 셋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정도의 길이었다.
왼쪽은 불길이 확확 피어나는 용암이 지옥을 연상시킬 정도로 흘렀는데, 오른쪽은 또 시커먼 물이 길 바로 아래까지 출렁였다.
“야, 이 새끼야!”
내내 끓어오르던 화가 폭발한 조태완은 마침내 욕을 쏟아냈다.
열 걸음쯤 앞에서 걷는 김정훈 때문이었다.
천하의 조태완마저 오싹할 만큼 음산한 태도였다. 그런 김정훈이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무언가에 홀린 듯 걸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주변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는데 김정훈이 입고 있는 옷은 또 알아보기 어려웠다.
“거기 서라니까!”
조태완이 또다시 고함을 버럭 지른 뒤였다.
컴컴한 하늘 아래로 뜨거운 바람이 훅 지나가면서 어둑한 안개를 흐트러트렸다.
‘젠장.’
그 직후에 조태완은 이를 악물었다.
길 오른쪽 물가에서 작은 나룻배가 보였고, 긴 삿대를 든 사람이 김정훈과 조태완을 돌아보았다.
‘염병들 떠네.’
솔직히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기 싫은 조태완은 이를 악물며 김정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뭐 하자는 건지, 나룻배 위에 서 있는 남자는 조선 시대 선비처럼 커다란 갓에 도포를 두르고 있었다.
배를 함께 타면 김정훈도 더는 조태완을 모른 척하기 어려울 거다.
빠르게 움직인 조태완이 배로 다가갈 때였다.
김정훈이 조태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놀랐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을 정도로.
조태완을 향해 돌아선 김정훈의 얼굴은 손으로 문지르면 하얀 가루가 묻어나올 것처럼 창백했다.
“돌아가십시오, 형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제대로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님.”
하얀 얼굴을 한 김정훈이 조태완을 향해 상체를 깊게 숙였다.
“왜 그래, 이 새끼야!”
깡패로 살면서 처음으로 인간적인 정을 준 사람이 오세아, 처음으로 인정하고 의지한 사람은 강성태, 처음으로 믿을 만한 놈이라고 받아들인 사람이 김정훈이었다.
“생겨 먹은 게 이래서 따뜻한 말 같은 거 못해. 그게 서운했다면…. 좋다! 내가 미안하다. 그러니까 어딜 가는지 모르지만, 같이 가자.”
“형님. 돌아가시면 기쁜 소식이 있을 겁니다. 저는 형님이 보여주신 이 모습과 그 기쁜 소식 품고 가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버럭 고함을 지른 조태완이 배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와락, 달려든 김정훈이 조태완을 반대편 절벽으로 밀었다.
“이익!”
김정훈의 목을 붙잡은 조태완이 있는 힘을 다했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끄윽. 끅. 야! 야, 이 새끼야!”
절벽에 떨어지기 직전에 조태완은 시선을 들었다.
김정훈이 아프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조태완은 절벽으로 떨어졌다.
“야, 이 개새끼야!”
욕을 버럭 뱉어낸 조태완을 향해 눈 부신 빛이 달려들었다.
“오빠? 오빠! 오빠!”
조태완이 힘겹게 돌아본 곳에 눈이 부은 오세아가 있었다.
“정훈이는…?”
쭈뼛거리는 오세아를 보며 조태완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그 직후였다.
문이 열리며 의사 한 명과 간호사 두 명이 조태완에게 달려들었다.
**
광주로 출발할 준비가 막 끝났을 때였다.
병원 건물에서 유섭우가 급하게 달려 나왔다.
“형님! 태완이 형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놀라고 반가워서 급하게 일어났던 강성태와 이병렬은 상처가 울리는 바람에 비슷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을 찾으십니다, 형님.”
답을 할 여유 따위 없었다.
그 길로 병원 건물로 들어간 강성태와 이병렬, 박노익은 또다시 소독과 일회용 가운을 걸치고 조태완을 찾았다.
“형님?”
병실로 들어서는 순간, 박노익과 이병렬이 고개를 숙였는데 그 순간에 조태완은 강성태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훈이가 죽었어?”
“죄송합니다.”
기력이 부족한 얼굴을 하고도 조태완은 볼을 씰룩였다.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트럭 운전했던 놈은?”
“괜히 지금 나섰다가는 더 조심할 것 같아서 일부러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적당하게 마무리되면 그때 누가 도왔는지 알아볼 생각입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조태완이 메마른 입술을 다시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어?”
“뭘 말입니까?”
“차를 세우라고 소리까지 질렀잖아. 그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나도 피할 방법이 없었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안 거야?”
“경호원을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특별한 감이 올 때가 있습니다.”
“두 번이나 보스 덕분에 살았는데 내가 그럴 가치가 있나 싶다.”
확실히 조태완은 기력이 완전히 빠진 노인처럼 보였다. 거기에 김정훈을 잃었다는 충격이 더해진 탓인지 그는 평소 그답지 않은 탄식마저 쏟아냈다.
“기운 내십시오, 형님.”
보다 못한 박노익이 나직하게 말을 건넨 뒤였다.
“누워 계신 동안 대전 조덕진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강성태는 조덕진의 전화, 이후 최금식과의 통화를 들려주었다.
“먼저 광주에 다녀오겠습니다. 그쪽 정리하고, 다음으로 민병련을 잡겠습니다. 깡치라는 인간이 민병련을 안 내놓으면 그 핑계로 부산까지 밀어버릴 생각입니다.”
“민병련을 내놓으면?”
“광주까지 정리한 상황이니까 서울, 충청도, 호남, 안산, 다 끌고 내려가서 깡치 잡아야죠.”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어?”
힘겨운 얼굴로 조태완이 물었다. 어렵다는 걸 아는 만큼, 반대로 강성태가 자신 있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형님이 계시잖습니까? 노익이 형님도 계시고, 병렬이 있고, 종환이, 섭우, 정신 차린 영권이도 있습니다.”
강성태의 말에 따라 조태완이 박노익과 이병렬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다음에 판사든, 검사든, 국회의원이든, 교통사고 덮는 데 도움 준 인간들을 모조리 두들길 겁니다. 원래 하려던 일이 그거였으니까요.”
말을 다 들은 조태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스를 만나서 청소부가 된 거였지. 그걸 다하고 오라고 정훈이가 그랬었나 보네.”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남긴 조태완이 얼마 되지 않는 힘을 눈에 끌어올렸다.
“그 몸으로 괜찮겠어?”
“지금 안 가면 일이 또 꼬일지 모릅니다. 부산 깡치가 민병련 통해서 먼저 손을 뻗을 수도 있고요.”
강성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던 조태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이병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병렬아. 천안 민병련과 광주 황상열이 손잡는 과정에 분명 옛날 신호남파 식구들이 끼어있을 거다. 그 새끼를 찾아.”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신강남파 2인자라는 놈이 언제까지 안산이나 휘젓고 다닐 거야? 강남 숙소도 들여다보고, 클럽, 카지노도 수시로 들어가서 기강도 잡고, 애들도 다독이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살아났네, 조태완.
박노익이 오묘한 눈빛으로 강성태를 힐끔 보았다.
“죄송합니다, 형님. 앞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른 내부 단속해. 보스가 광주 정리하면 깡치, 이 개새끼는 내 손으로 잡아 죽일 거니까.”
고개 숙이는 이병렬을 향해 조태완이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독기를 악착같이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