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 20화
복도가 빽빽할 정도로 서 있는 덩치들을 피하는 것처럼 의사는 강성태에게 시선을 주었다.
“상태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인사하실 분들은 지금이라도 하시는 게….”
“뭐, 이 씨…!”
거친 말을 뱉던 정영권이 강성태의 시선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다.
“가서 형수님 모셔와.”
“예, 형님.”
정영권에게 지시한 강성태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우리 세 사람과 사모님, 이렇게 네 명이 들어갔으면 합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오셔서 소독하세요.”
말을 마친 의사가 안도하는 얼굴로 동료와 함께 돌아섰다. 그리고 그 직후에 한쪽으로 비켜선 틈으로 정영권과 오세아가 다가왔다.
“병렬이는 아실 테고, 박노익 형님입니다. 함께 들어가서 태완이 형님을 뵐 겁니다.”
박노익에게 고개 숙인 오세아가 보호자를 따르는 것처럼 강성태가 가리킨 수술실로 향했다.
소독약이 뿜어지는 통로를 거친 강성태는 일회용이 분명한 가운과 덧신을 신고서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의 안내에 따랐다.
수술방 옆에 마련한 회복실인 모양이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썰렁하고 추운 방에서 조태완은 거대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숫자 위에서 번쩍이는 하트 모양과 위로 툭툭 튀어 오르는 그림이 아직 조태완이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강성태와 오세아가 조태완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침울한 표정의 박노익이 이병렬과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른쪽 이마, 눈가, 턱, 목에 갈라진 흔적이 있는 조태완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표정이었다.
“오빠….”
손으로 입을 가린 오세아의 한 마디가 그 어떤 울음보다 슬프게 조태완을 불렀다.
“오빠. 나 아직 오빠를 보낼 준비가 안 됐어요. 지금껏 오빠한테 바란 거 없었잖아요. 처음으로 부탁할게요. 오빠, 나 무서워요.”
억지로 말을 전한 오세아가 고개를 돌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강성태와 이병렬, 박노익을 위해 자리를 비키는 것처럼 옆으로 움직였다.
강성태는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조태완을 먹먹한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강성태입니다, 형님.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도와주셔야 할 일도 많고요. 잠시만 쉬고 계십시오. 제가 여기 노익이 형님, 병렬이와 일 바로잡고 오겠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형님.”
잠시 조태완을 더 내려다보던 강성태가 비켜주자, 이번에는 박노익과 이병렬이 앞으로 나섰다.
“노익이입니다, 형님. 보스 도와서….”
뭔가 독한 각오를 쏟아내려던 박노익이 오세아를 의식한 듯 뒷말을 삼켰다.
“쉬십시오, 형님.”
나이 차도 별로 없고, 한때는 강남 삼대장이라 꼽혔던 인물답게 평소 박노익은 조태완을 편하게 대했다. 그런 박노익이 지금은 상체를 깊숙하게 숙여 조태완에게 인사했다. 어쩌면 마지막 인사가 될지 모른다고 판단한 느낌이었다.
“쉬십시오, 형님.”
이병렬은 그답게 짧은 한마디를 건네고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끝났다.
강성태는 울음을 삼키고 있는 오세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가 있겠습니다. 태완이 형님과 편하게 계십시오.”
박노익, 이병렬을 돌아본 강성태는 그대로 회복실을 나섰다.
통로에서 일회용 가운과 덧신을 벗은 강성태가 자동문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덩치들이 서열에 따라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 조태완이……?
침울한 표정을 한 덩치들이 궁금한 얼굴로 강성태의 안색을 살피는 앞이었다.
“정영권.”
“예, 형님.”
강성태가 다부지게 부르자, 정영권이 고개를 숙이며 단단하게 답했다.
“황상열이 입원한 병원 알고 있어?”
“광주 전일병원입니다, 형님.”
박노익이 ‘어쩌려고?’ 하는 눈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강남 숙소 식구들 전부 병원으로 불러. 준비되는 대로 나랑 광주로 간다.”
“예? 예, 형님.”
움찔했던 정영권이 덩치들에게 보이겠다는 투로 듬직하게 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조태완은 물론이고, 심지어 김종수까지 대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던 정영권이었다. 그렇게 부족한 인간 정영권이 강성태가 함께 움직인다는 말에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종환.”
“예, 형님.”
“병원과 형수님을 맡긴다. 혹시 형수님을 집으로 모시게 되면, 승용차의 앞과 뒤, 양옆을 우리 차로 둘러싸고, 그 인원 그대로 꼼짝도 하지 말고 집을 지켜.”
“무슨 일이 있어도 태완이 형님과 형수님을 모시겠습니다, 형님.”
이종환이 고개를 숙이자, 뒤에 있던 대림동 식구들이 서열에 따라 물결치듯 상체를 기울여 지시를 받았다.
“유섭우.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는 여기 노익이 형님과 병렬이를 따라 움직여. 영권이가 비운 클럽도 챙겨주고. 저쪽이 대놓고 시작한 싸움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더는 당하지 마라.”
“맡겨주십시오, 형님.”
유섭우가 고개를 숙이자, 이번에는 강서구 식구들이 서열에 따라 상체를 깊게 기울였다.
“어쩌려고 그래?”
“깡치라는 인간이 범인이라고 짐작하시잖습니까?”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박노익이 강렬한 눈빛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병련이 그쪽에 붙었다니까 먼저 황상열을 치는 겁니다.”
“뭐?”
잠시 멍했던 박노익의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황상열은 구실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래야 민병련을 잡으러 가는 명분이 섭니다. 깡치가 민병련을 내놓으면 일단 그 수준에서 정리하는 거고, 버티면 한꺼번에 깨부술 생각입니다.”
감탄 반, 얼이 빠진 느낌 반으로 바라보는 박노익 옆에서 이병렬은 더할 수 없이 만족한 미소를 삼키고 있었다.
“병렬아. 광주에 다녀와서 바로 경상도로 간다.”
“준비하고 있을게.”
이병렬이 당찬 대꾸를 내놓은 뒤였다.
“광주에서 4개 조직이 나선 거라며?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쪽이 먼저 시작한 싸움인 데다, 어차피 우리는 손 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태완이 형님이 당하셨는데 머뭇거리면 다음은 누가 될지 모릅니다. 오늘만 해도 병렬이와 진용이가 위태로웠으니까요.”
볼을 씰룩이며 숨을 길게 내쉰 박노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애들도 데려가.”
“태완이 형님이 저렇게 되셨는데 형님까지 안 계시면 신강남파는 어른을 모두 잃습니다. 답답하시겠지만, 당분간 태완이 형님 빈자리를 메워주십시오.”
분한 모양이었다.
이를 꽉 깨문 박노익이 자꾸만 볼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기 위해 눈시울마저 붉게 물들였던 박노익이 힘겨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힘이 돼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태완이 형님 빈자리를 메우기는 어렵겠지만, 동생 말대로 이곳을 지키고 있으마.”
“다녀오겠습니다.”
이를 악문 박노익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답을 내놓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박노익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강성태는 수술실 복도를 걸어 입구로 향했다.
잠시라도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병렬이 조용하게 강성태의 곁을 따라 움직였다. 슬쩍 돌아본 그의 이마에 아까보다 더 짙은 땀이 맺혀 있었다.
“힘들 텐데 들어가 있어.”
“사고 칠 것 같아서 그렇지.”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이병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훈이 아직 들여다보지 않았잖아. 광주하고 부산 들러서 정리해놓고 보려는 거 아니었어?”
강성태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이병렬의 말이 있었다.
“지역마다 주인이 있어. 평소에는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리지만, 외부에서 밀고 들어와 그 주인을 깨부수려고 하면 힘을 합하는 게 이 바닥 생리다. 그거 알지? 외계인이 침공하면 지구인들끼리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
계단을 내려서자 어둑한 병원 로비에 서 있던 덩치들이 강성태와 이병렬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광주는 무등산을 중심으로 열십자를 그어. 그렇게 네 개 조직이 호남을 이끈다고 보면 돼. 광주에서는 먹을 게 별로 없어서 호남 조직은 주로 수도권으로 몰린다. 그래서 따로 주인이라고 부를 양반이 없이 네 개 조직이 공생하는 거지.”
덩치 한 명이 열어주는 현관문을 통해 강성태와 이병렬은 밖으로 나왔다.
밤이었다.
맞은편 건물의 불빛을 불러들인 병원 간판이 대낮처럼 현관 앞을 밝히는 동안, 안에서 느끼지 못했던 후련한 바람이 달려들었다가 피 냄새에 놀란 것처럼 휘몰아치며 달아났다.
“부산은 달라. 그쪽은 자체적으로 먹을 게 많거든. 언제 등에 칼을 맞을지 모를 이 바닥에서 깡치 형님은 지금껏 부산항을 움켜쥐며 군림했고, 그래서 부산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 거지.”
강성태는 이병렬의 셔츠로 시선을 내렸다.
아르윈이 구해온 셔츠였다.
강성태와 함께 입을 때는 세련된 하늘색 셔츠였는데, 목덜미, 어깨, 명치, 옆구리까지, 핏물이 얼마나 올라왔는지 마치 얼룩무늬를 입은 사람처럼 보였다.
강성태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봤던 이병렬이 핏물만큼이나 진해 보이는 눈빛으로 시선을 들었다.
“깡치 형님은 방심하고 있을 거다. 설마하니 부산의 주인인 조강치에게 달려들겠나 싶겠지. 최근 십 년 이상 그런 적이 없으니까. 딱 한 번이다. 만약 경상도가 주인을 위해 뭉치면 키란과 둘이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일이 너무 커져. 그 정도로 달려들 테니까.”
이병렬의 말뜻을 알아들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에 깡치 형님을 해결하게 되면 뒤는 노익이 형님께 맡겨. 알지? 대가리 무너지면 그 자리 차지하려고 서로 피 터지는 거. 깡치 형님이 사라지면 앞으로 몇 년은 경상도, 특히 부산에서 피바람이 그칠 날이 없을 거다. 그걸 다독일 가장 유력한 분이 노익이 형님이다.”
말을 마친 이병렬이 누군가 부른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하늘로 시선을 들었다.
“씨발. 김정훈. 이 개새끼야. 술 한번 꼭 모시고 싶다고 염병을 떨어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가냐.”
밀동에서 쏟아질 것처럼 빛나던 별들이 분명 저 하늘에 그대로 있을 텐데 도심의 화려함에 밀려난 바람에 이병렬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어둑하기만 했다.
화려한 밤을 사는 대신, 별조차 허락하지 않는 어둠에서 지내야 하는 벌을 받는 건가 싶었다.
빛을 향해 달릴수록 더 진한 어둠으로 끌려가는 그림자, 마약을 막아보겠다며 나선 길의 끝에서 다시는 빛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완벽한 그림자가 되는 건 아닌지, 이병렬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강성태는 서글프게 웃었다.
**
광주의 가장 오래된 호텔 뒷골목은 유명한 먹자골목으로 최금식이 지배하는 장소였다. 그곳에 있는 룸살롱 특실에 앉아 술을 마시던 최금식은 대번에 술이 깬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는 덩치를 바라보았다.
“확실해?”
“예, 형님. 태완이 형님 보고 나오더니 눈이 완전히 뒤집혔답니다, 형님. 정영권이 아시잖습니까, 형님. 그놈이 강남 숙소 털다시피 해서 병원으로 모으고 있답니다, 형님. 모이는 대로 출발한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와, 씨발!”
스트레이트 잔을 내려놓은 최금식은 온더록스 잔을 끌어와 양주를 콸콸 부었다. 그런 뒤에 적지 않은 양의 양주를 단숨에 마셨다.
“크흑.”
이가 드러나도록 인상을 찌푸렸던 최금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 애들 전부 연장 채워서 대기시켜.”
“예, 형님.”
고개 숙인 덩치가 나간 뒤였다. 또다시 병을 집어 든 최금식은 역시나 온더록스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잔을 붙잡았던 최금식은 멈칫한 뒤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시간을 끌던 그는 잔을 놓고는 테이블 한쪽에 두었던 스마트폰을 들었다.
번호를 누른 뒤였다.
- 안녕하십니까, 형님?
“배근이냐? 나 광주 남식이다.”
- 예, 형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형님.
“그래. 너 소문 들었냐?”
- 천안 병련이 말씀이십니까?
“그러지. 우리가 상열이 좀 도우려다가 입장 잣 같아졌어요. 아닌 말로 꿈에서 떡 본 것도 아니고, 만져보지도 못한 도진이 형님 지분 챙기겠답시고 나섰다가 개 피 보게 생겼거든.”
통화를 하다 갑갑했는지 최금식은 잔을 들어 따라놓은 술을 벌컥거리며 들이마셨다.
“크흐. 민병련이 이 개 양아치 새끼가 우리 죄 끌어들여 놓고 깡치 형님한테 달려가는 바람에 강성태를 주저앉힌다고 해도 부산하고 또 붙어야 하는 꼴이거든. 씨발! 이게 개밥 주다가 잣 물린 거 하고 뭐가 달라. 안 그러냐?”
분통을 터트렸던 최금식은 “후우.” 하며 숨을 골랐다.
“듣고 있냐?”
- 말씀하십시오, 형님.
“그래서 말인데, 네가 거시기, 성태하고 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냐?”
- 예? 형님?
“힘 실어달라는 게 아니니까 놀랄 거 없어. 대신, 거 성태한테 연락 좀 해서 우리는 발 뺄라니까 상열이를 알아서 정리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면 어떻겠냐고 말이나 한번 해주면 어쩔까?”
속을 보인 최금식이 삐뚜름한 눈으로 답을 기다릴 때였다.
- 저는 아직 그럴 관계가 아니라 곤란하고, 형님. 대전 덕진이는 지난번에 밀동에 식구들 데려갈 정도로 친분이 두텁습니다, 형님.
“그러니까 나더러 덕진이한테 전화해라?”
- 제가 덕진이한테 전화해서 형님께 연락드리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그런 거면 모양새가 나쁘지 않지. 그럼 그렇게 수고 좀 해 줘.”
통화를 마친 최금식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씨발, 홍길동이도 아니고, 저녁나절에 천안에서 50명과 칼질했는데 밤에 또 광주에 나타나? 이건 뭐 씨발. 나이라도 많아야 형님이라고 부르고 끝내지.”
혼잣말을 뱉어낸 최금식은 침묵하는 스마트폰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개박살 난 황상열을 보았고, 강성태와 동남아 놈이 어떻게 날뛰었는지 들어서 켕기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신강남파와 붙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다만, 붙어서 이긴다 해도 얻을 게 전혀 없는 싸움인 데다, 만에 하나 깨지기라도 하면 근간 다 날아가는 꼴이라 나서기 께름칙한 게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씨발. 이 새끼는 왜 전화를 안 해? 연락이 안 됐으면 안 됐다고 말이라도 해야지!”
술이 불콰하게 오른 최금식이 갑갑한 속을 혼잣말로 토해낼 때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스마트폰이 애절하게 최금식을 찾았다.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스마트폰의 액정을 본 최금식은 눈을 찌푸리며 번호를 확인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밤이니까. 그리고 깡패들은 어지간해서 그러지 않지만, 혹시 조덕진이 번호를 바꿨을 수도 있으니까.
최금식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가 쇳소리를 섞어 거만하게 답을 한 직후였다.
- 신강남파 강성태다.
불쑥 날아온 대꾸에 최금식의 목이 화들짝 위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