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 14화
주차장으로 내려간 강성태는 아르윈을 불렀다.
“곤잘레스 회장이 도착하면 함께 천안으로 갈 거니까 조직원들과 함께 따라와.”
“예, 형님.”
천안에 어떤 일이 있는지 빤히 아는 아르윈이 의아한 기색을 누르고 답을 내놓았다.
이미 전화로 곤잘레스에게 말해두었다.
천안으로 향하기 위해 최치곤이 승용차 옆에 서 있었고, 한쪽에 필리핀 조직원 네 명이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타고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을 살핀 끝에서 강성태는 옆에 서 있는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이병렬과 마찬가지로 늘 곁에서 애써주었는데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지 못했고, 아쉬운 점은 없는지 제대로 살펴주지 못했다.
“아르윈. 늘 고마워.”
조직원들을 확인하던 아르윈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로 얼른 시선을 주었다.
“왜 그래? 고맙다는데?”
“형님 그늘에 들어와서 필리핀 가수들의 업소 출연이 뚫렸고, 대우도 제대로 받습니다. 또, 제가 꿈꾸던 업소도 생겼습니다. 한국에 온 이후로 요즘처럼 행복한 적 없습니다, 형님.”
좋은 의도에서 건넨 감사의 인사를 아르윈은 자세를 바싹 낮춰 받았다.
이병렬이라면 어땠을까?
“뭐라는 거야?”라며 툴툴거리지 않았을까?
강성태가 이병렬을 떠올리며 픽 웃었을 때였다.
주차장으로 승용차 세 대가 들어왔다.
가운데 차량 조수석에서 내린 존 보스만이 강성태를 향해 눈인사를 건넨 뒤에 뒷문으로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본 그가 문을 열자 곤잘레스 이두안이 승용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커피알리고의 정면이 아니어서 강성태는 좀 더 여유로운 심정으로 곤잘레스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나와서 기다리는 줄은 몰랐네. 그나저나 갑자기 드라이브라니? 무슨 일인가?”
“천안이라는 곳에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어디?”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입니다. 시선이 집중되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드라이브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말의 끝에서 강성태는 최치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쪽에 있는 승용차로 모실 텐데 운전은 앞에 서 있는 친구가 할 겁니다.”
“존 보스만과 다른 경호원은?”
“지금처럼 뒤따라 오면 됩니다. 그리고 이쪽에 보이는 승용차 두 대도 함께 움직일 겁니다.”
“흐음.”
곤잘레스 이두안이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얼굴로 필리핀 조직원이 탄 승용차를 돌아보았다.
늘 생명을 위협받는 사람 특유의 반응이었다.
강성태를 믿고 의지해서 한국으로 왔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는 고용한 경호원과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저들은 한국인이 아닌 듯한데 왜 함께 움직이는 건가?”
“권총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곤잘레스가 의아한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구입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국적도 다른 조직원들을 불렀습니다. 회장님의 안전을 위해서 내린 조치인데 불편하시면 돌려보내겠습니다.”
“그 정도로 내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건가?”
“굳이 카페로 오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준비한 일입니다.”
강성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곤잘레스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존.”
그가 부르자 존 보스만이 다가왔다.
“미스터 강과 저 앞의 승용차로 이동할 거니까 뒤따라 오게.”
경호 책임자에게 이런 돌발 상황은 불편하다. 그래서인지 확인처럼 최치곤과 승용차를 돌아보았던 존 보스만이 따지듯 강성태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천안으로 출발하는 게 급했다.
“여기 두 대도 함께 움직일 거니까 참고해. 우선 천안 터미널로 방향을 정하는 거로 하지.”
“그렇게 알겠습니다. 장소가 익숙하지 않아서 확인하겠습니다. 어디라고 했습니까?”
“운전하는 한국인 경호원을 불러줘.”
존 보스만이 손짓하자 단단하게 생긴 한국 경호원이 다가왔다.
“천안 터미널로 방향을 잡아주세요. 가는 길에 장소가 변하면 존 보스만을 통해 연락하겠습니다.”
강성태가 말을 건넸을 때, 커피알리고에서 두 명의 손님이 나와 신기한 듯 이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단골은 아니어서 낯이 익지는 않았다.
“출발하셔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
아르윈에게 눈짓을 던진 강성태는 곤잘레스와 함께 승용차로 움직였다. 그를 먼저 태운 강성태가 트렁크를 돌아 운전석 뒷자리에 올랐다.
“치곤아. 천안 터미널. 뒤에 차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여유를 줘.”
“알겠습니다, 형님.”
곤잘레스를 의식했는지 최치곤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최치곤이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곤잘레스의 경호 차량 세 대가 움직였고, 이어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이 탄 두 대의 승용차가 뒤따랐다.
“내 차로 움직이지 않아서 존 보스만이 몹시 언짢아하겠군. 이렇게 차를 준비한 이유가 있나?”
“다른 사람의 귀를 염려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알아주었군.
의미가 분명한 미소를 그린 곤잘레스가 안심되는 얼굴로 뒷좌석에 등을 기댔다.
“보리스 파리오의 제안을 들은 것으로 알고 있네. 물론 거절했다는 말도 들었지. 그가 이런 자리를 만들었네.”
나직하게 말을 건넨 곤잘레스가 재킷 안쪽에서 접어놓은 서류를 꺼냈다.
어지간해서는 비서를 통해 서류를 전달하는 곤잘레스답지 않은 방식이었다.
강성태는 받은 서류를 펼쳐 천천히 읽었다.
투자자 총회를 개최한다는 안내문이었다. 장소는 마카오, 일정은 열흘 뒤였다.
내용을 읽고 고개를 드는 강성태를 곤잘레스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게 전혀 의논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정된 총회일세. 이런 일에 대비해 고용한 바르지오 만시니가 어떤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았지.”
곤잘레스의 한 마디로 강성태는 그가 왜 이런 자리를 원했는지를 짐작했다.
“가실 겁니까?”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사업의 진행이나 투자에 불안감을 느끼는 투자자가 나와. 그런 분위기를 이용해 보리스가 다른 투자자들의 지분을 확보하려고 들겠지.”
“투자는 이미 확정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한가한 시간이라 올림픽 도로에 들어선 승용차가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곤잘레스 쪽의 창문으로 아르윈이 탄 승용차가 바싹 붙어 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투자 지분을 처분하는 것까지 관여하기는 어렵지. 또 하나, 보리스는 어떡해서든 공사를 맡을 업체를 선택하고 싶어 하지. 사실 이번 공사를 넘기라며 엄청난 로비와 압력을 행사한 곳이 있다네.”
강성태를 살핀 곤잘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중국이 다방면으로 접근했었네. 솔깃한 제안과 더불어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협박도 있었고. 나는 그들이 보리스 회장을 앞세운 거라고 판단하고 있네.”
“마카오의 투자자 총회에서 회장님을 노릴 거라고 보십니까?”
“나보다는 자네를 노리겠지. 그것도 삼합회가.”
빌어먹을 삼합회.
눈가를 좁히는 강성태를 보며 곤잘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건설사를 정할 권한이 자네에게 있지 않나? 자네를 제거하는 게 내게 강력한 경고가 될 테고, 또 건설사 선정이 멈출 테니 이만한 기회가 없겠지.”
“제가 마카오에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당하겠지.”
강성태의 질문에 답한 그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답변, 뒤를 돌아보는 시선으로 보아 곤잘레스는 바리지오 만시니를 포함해 존 보스만, 심지어 비서들마저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중국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짐작하십니까?”
“세계 곳곳에 거점을 만들고자 하는 중국의 욕심이야 이미 알려진 일 아닌가. 건설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을 모두 중국에서 조달하겠다는 조건을 보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지.”
고속도로에 들어선 최치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잠시 앞을 돌아본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카오 총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공사가 중국으로 넘어간다. 강성태가 함께 가지 않아서 곤잘레스 회장이 암살당한다면 결과는 같다.
누군가 강성태의 삶을 움켜쥐고서 이리저리 비튼 것만큼이나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는데 해결책은 지금처럼 일직선으로 달리는 방법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섭충명을 제거하기로 한 터라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을 굳힌 강성태는 오히려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경호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비용이 많이 비싸지지 않았다면 괜찮네.”
터무니없는 곤잘레스의 농담을 강성태는 보기 좋은 미소로 받았다.
“준비해야 할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당장 안전은 어떠십니까?”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내가 한국에서 갑자기 일을 당하면 사업의 권한이 자네에게 넘어가네.”
“예?”
“그러니 저들은 나를 마카오에서 제거해야겠지. 총회에서 지분 소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한다고 규정을 바꿔야 할 테니까.”
당황하는 강성태의 반응에도 곤잘레스 회장은 뻔뻔스러울 만큼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럼 출국하면서부터 경호를 담당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바르지오 만시니, 존 보스만에게 통보하는 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야 경호 책임자가 결정할 문제일세. 다만, 통화나 호텔에서의 대화를 조심해 주게.”
원하던 결과를 얻은 곤잘레스 회장이 도청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전한 뒤에 여유로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국의 발전은 방송을 통해 보았지. 놀라운 점이 참 많아. 부럽기도 하고.”
곤잘레스 이두안이 지켜보는 사이, 승용차는 수원을 지나고 있었다.
“전화 좀 사용하겠습니다.”
“편하게 하게.”
곤잘레스 회장에게 양해를 구한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조태완의 이름이 액정에 올라왔다.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 호남 쪽이 움직인 게 분명한 거 같다. 천안 쪽은 모두 연락을 받지 않고. 이건 작업이라고 봐야 해.
“병원은 알아보셨습니까?”
- 천안 돈암 병원. 혹시 지금 어디야?
“천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강성태의 말을 들은 조태완이 맥빠진 듯한 웃음을 들려주었다.
- 보스가 가만히 기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병렬이와는 통화했어?
“그냥 가는 길입니다.”
- 어쩌려고? 혹시 연락 안 했으면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병렬이에게 돌아오라고 해. 충분히 의논한 뒤에 움직이자고.
“태완이 형님.”
나직한 음성에 형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서 그런지 조태완은 대꾸가 없었다.
“일반인이 깡패를 욕하거나 심지어 잘 죽었다고 해도 그건 받아들여야 할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강성태의 말이 뜻밖이라 여겼는지 최치곤이 룸미러를 힐끔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역전파는 폭력조직입니다. 그런데도 서달수를 함부로 입에 담았다면 용서할 마음이 없습니다.”
- 보스의 결정이 확고하다면 신강남파 식구들이 전부 내려가야지.
어떤 결정이든 강성태의 뜻을 따르겠다는 조태완의 답이었다. 조직의 보스란 이런 존재인가, 강성태는 짧은 대화에서 또 하나 배운 느낌이었다. 아니면, ‘태완이 형님’이란 호칭이 만들어낸 효과일 수도 있었다.
“천안 역전파가 판을 깔아서 우리를 함정에 넣으려 했던 거니까 치곤이와 둘이 가겠습니다.”
- 어떻게 하려고?
“신부동이란 놈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 그쪽이 가만있겠어?
“제게 달려들면 그때는 신강남파가 움직일 명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 하아.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반응을 보인 다음이었다.
- 다치지 않을 자신 있어? 보스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조태완의 질문이 건너왔다.
“천안 깔끔하게 정리하고, 병렬이와 진용이 데리고 올라가겠습니다. 참. 내일 오후 3시에 소신영과 고강준이 소개하는 건설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 속도 편하다. 지금 그게 중요해?
말끝에 조태완은 허탈하게 웃음을 달았다.
- 보스 뜻대로 하는데 혹시 모르니까 정훈이 통해서 강남 쪽만 조용하게 비상 걸어둘게.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연락해.
“감사합니다, 형님.”
짧은 웃음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한 통만 더 하겠습니다.”
“나는 상관없네. 모처럼 한가하게 움직이는 거라 경치를 보는 즐거움이 나쁘지 않네.”
곤잘레스 이두안에게 다시 양해를 구한 강성태는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별일 없다는 느낌을 전하려 애쓰는 이병렬의 대꾸가 들렸다.
“어디야?”
- 여기? 고속도로. 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님을 모시고 있거든.”
- 카페에서 만난다고 했었잖아. 무슨 일이 있어?
“중요한 약속이라 변경할 수가 없었어.”
- 그렇겠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뭔데? 내가 가?
고맙다. 이병렬의 이런 반응은.
“병렬아. 신부동이란 놈이 달수 함부로 말했다고 했었지? 가서 사과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뒤집어.”
- 뭐?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던 가면이 단번에 부서진 듯 이병렬은 멍한 느낌의 질문을 토해냈다.
“사과하지 말라고. 네가 사과하면 달수는 말할 것 없고, 진용이는 또 뭐가 돼? 그냥 뒤집어. 그럴 자신 없으면 그냥 돌아오고.”
워낙 예상 밖의 요구였는지 이병렬은 대꾸조차 없었다.
“달수를 함부로 말한 놈에게 이병렬이 사과한다고? 그건 내가 못 참아. 그러니까 사과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이병렬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라. 네가 당하면 내가 신강남파 전부 끌고 가서 천안을 완전히 엎어놓을 테니까 뒤는 걱정하지 말고.”
최치곤이 또다시 룸미러로 힐끔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 맡겨주라.
감췄던 독기를 잔뜩 끌어올린 이병렬의 요구가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