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 12화
이병렬은 병실에 놓인 작은 테이블 앞에서 창을 향해 앉았다.
“달수 놈 말이다.”
“예? 형님?”
느닷없이 말을 거는 바람에 당황한 조봉진을 이병렬이 돌아보았다.
“안산에서 밀동까지 돌아다니면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졸라 서운해하겠지?”
김진용이라면 몰라도 아직 대꾸할 짬이 아닌 조봉진은 애꿎은 뒤통수를 매만졌다.
“날씨 존나리 좋네, 씨발. 거기 커피나 한잔 타봐라.”
“예, 형님.”
거친 감탄 끝에서 왜 느닷없이 커피가 마시고 싶은지는 모른다. 그러나 조봉진은 잠자코 구석으로 움직여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부었다.
“봉진아.”
“예, 형님.”
뜨거운 물을 받던 조봉진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태완이 형님부터 나, 너, 진용이, 하여간 우리는 보스를 만나 운빨 터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깡패 오래 해서 좋을 거 없다.”
생활 접으란 말은 아닐 테고, 오늘 이병렬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봉진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힐끔 시선을 돌린 이병렬은 종이컵을 들었다.
“너는 앞으로 뭐 하고 싶냐?”
“예? 형님?”
“뭐 하고 살고 싶냐고?”
“저는 형님 모시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형님.”
“지랄. 마흔 될 때까지 업장 하나 안 넘겨주면 회칼 갈아댈 거면서 헛소리는.”
“아닙니다, 형님.”
“혹시 말이다. 나 챙기지 않아도 되면 진용이 밑으로 가. 가서 엔터 일 배우며 살아.”
“저는 형님 모시겠습니다, 형님.”
조봉진이 꿋꿋하게 답을 낸 다음이었다.
이병렬이 거칠어진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일을 배우라고, 새끼야. 일. 아까 말했지? 깡패 오래 해서 좋을 거 없다고. 너는 눈썰미도 있고, 성격도 괜찮아서 그쪽 일 잘할 테니까 열심히 해 봐. 대신 이거 하나만 명심해라.”
“예, 형님.”
이병렬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아서 조봉진은 이어질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진용이랑 네 사이를 이간질하는 놈이 나오면 뒤가 어떻게 되든 그 자리에서 코뼈를 부숴놔. 농담이라도 다시는 그런 말 못 하게 해. 알았어?”
“예, 형님.”
답을 들은 이병렬이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창을 향해 앉은 이병렬이 왜 고독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는지 조봉진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
김진용은 대표이사 방으로 들어온 신부동과 덩치 한 명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어서 와. 오랜만이네.”
“어어구. 신수가 환하네. 그렇게 고생하더니 이렇게 한 자리 차지했구만.”
김진용과 인사를 나눈 신부동이 몸을 돌려 함께 들어온 덩치를 가리켰다.
“문섭이 알지? 달수 또래.”
“안녕하십니까, 형님? 조문섭입니다, 형님.”
“오랜만이다.”
조문섭에게 손을 뻗어 악수한 김진용이 상석에 앉았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조문섭이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비서실 직원이 들어와 차를 놓아주었다. 김진용이 권하면서 신부동과 조문섭이 차를 마셨다.
“무슨 일이야?”
“아! 이걸 전해주려고 그러지.”
깡패 특유의 몸짓으로 재킷을 젖힌 신부동이 안쪽에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봉투를 꺼냈다.
“우리 큰형님의 부모님 팔순이거든.”
김진용은 테이블에 내려놓은 봉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천안과 온양, 멀리는 아산까지 힘을 쓰는 천안 역전파의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집어 든 김진용은 대강 내용을 살폈다.
“병렬이 형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이왕이면 신강남파 보스가 와주면 더 좋지 않겠어?”
뭐지?
강성태를 불러서 천안 역전파의 위세를 보이겠다는 건가?
뜻밖의 요구에 김진용은 의아한 기색으로 눈가를 좁혔다.
새끼 깡패들이 행사를 통해 안면을 넓히는 거야 이 바닥의 룰이니 뭐라 할 게 없었다. 그러나 역전파 두목과 일면식도 없는 강성태가 이 행사에 가면 상황이 영 어색해진다.
막말로 나이로만 따지면 전국에서 온 깡패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강성태가 고개를 숙여야 하고, 거기에서 서로 으르렁거리게 되면 괜히 다른 조직의 행사장에 가서 깽판 친 꼴이 된다.
“내가 우리 형님께 말씀은 드리겠는데 워낙 일이 많으셔서 참석은 어려울 거야.”
김진용은 적당한 선에서 신부동의 요구를 정리했다.
초대장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김진용이 찻잔을 잡는 순간이었다.
“병렬이 형님도 그렇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려고 그래?”
신부동이 빈정대는 투로 말을 던졌다.
멈칫했던 김진용은 한 번쯤 참는다는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전에 여기 문섭이가 달수를 찾아간 적이 있거든. 일식집에서 정종도 마시고 했다더구만.”
“행사 초대장 받았으니까 그만하고 가라.”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
날카롭게 던지는 김진용의 시선을 신부동은 피하지 않았다.
“병렬이 형님하고 진용이 자네 관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 하지만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잖아. 우리가 연금이 나와, 아니면 퇴직금이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지금까지 병렬이 형님 밑에서 잣 빠지게 충성했는데 여기 대표된 건 신강남파 보스 덕분인 것도 대한민국 깡패는 모두 알아.”
“신부동?”
“막말로 병렬이 형님이 챙겨준 자리가 아니라서 언제 대표이사에서 날아갈지 모르잖아. 그러면 또 병렬이 형님 밑으로 가서 꼬마가 해야 할 일 하는 거 아냐?”
“경고하는데 병렬이 형님 입에 담지 마라.”
김진용이 험악하게 경고하는데도 신부동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옆에 앉은 조문섭을 돌아보았다.
이쪽은 둘이 왔으니 어설프게 힘자랑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였다.
“좋은 자리에 앉았을 때 서로서로 좀 챙기자는 거야. 내가 천안 터미널 쪽에 업장 하나 만들 테니까 연예인 화끈하게 밀어줘. 그러면 매상에서 반을 뚝 떼서 챙겨줄게. 이렇게라도 퇴직금은 챙겨야지?”
“나는 그런 돈 욕심 없다.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가라.”
“이러다가 밀려나면 그때는 후회해도 늦는다니까 그래. 지금도 봐. 성북구 개발 사업에 병렬이 형님 지분이 있어? 아니면 업장 관리를 맡았어? 말이 좋아 부두목이지, 알짜는 전부 강남 정훈이네 식구들이 먹고 있잖아.”
“후-.”
김진용은 뜨거운 숨을 내쉬며 한 번 더 참았다.
신부동과 조문섭이 무서운 게 아니라, 가뜩이나 어수선한 상황에서 초대장을 가져온 천안 역전파와 일을 만들기 싫어서였다.
“진용이 자네까지 왜 그래?”
“뭘?”
“전에 여기 문섭이가 달수 찾아갔었다고 했잖아. 말도 꺼내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하더만. 그래서 달수가 지금 어떻게 됐어? 막말로 달수만 졸라리 억울하게 생목숨 잃고….”
콰자작!
이를 악문 김진용이 움켜쥔 찻잔을 휘둘러 신부동의 눈가를 세차게 찍었다.
“억!”
얼굴을 감싼 신부동이 몸을 구부리는 순간이었다.
콰악. 콰직!
숙이는 신부동의 머리를 움켜쥔 김진용이 또다시 주먹을 꽂아넣었고,
“이 씨발!”
몸을 세우며 달려든 조문섭이 김진용의 목을 팔로 감았다.
콰드등! 콰등!
조문섭의 팔에 목이 감긴 김진용이 테이블로 밀려 쓰러지면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나왔다.
퍼윽! 퍽! 퍼윽!
뒤에 매달린 조문섭이 악착같이 목을 조르는 바람에 얼굴이 붉게 물든 상태에서도 김진용은 신부동의 머리칼을 놓지 않았고, 주먹 또한 멈추지 않았다.
퍼윽! 퍽! 퍼으윽!
굵직한 김진용의 주먹이 연달아 꽂히면서 신부동의 얼굴이 온통 피범벅으로 변했다.
“끄으-아!”
독이 오른 김진용은 무서웠다.
이를 악문 상태에서 소파를 붙잡고서 몸을 세우자 뒤에서 목을 조르던 조문섭이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다.
소파를 벗어난 김진용은 벽으로 움직여 앞에 걸린 액자를 붙들었다.
휘익!
김진용이 거칠게 액자를 넓게 잡고서 뒤로 넘겼고,
콰작!
유리가 깨진 액자가 조문섭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 뒤통수에 걸렸다.
“이이익!”
그 상태에서 김진용은 액자를 힘껏 앞으로 당겼다.
“끄악!”
뒤통수가 액자의 깨진 유리에 갈린 조문섭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조문섭이 김진용의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콰악! 퍽! 퍼억!
쓰러진 조문섭의 가슴과 배를 김진용은 시원하게 걷어찼다. 그런 뒤에 소파로 움직여서 겨우 몸을 세우는 신부동의 멱살을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내 앞에서 병렬이 형님 입에 담지 말라고 했지?”
“알았다. 내가 미안하다.”
찢어진 눈가와 코, 터진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리는 신부동이 급하게 사과를 내놓았다.
“달수 일도 마찬가지다. 또 한 번 그따위로 지껄이면 그때는 진짜 죽여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한 방을 더 날리려던 김진용이 이를 악문 뒤에 신부동을 힘껏 밀어냈다.
콰등! 철퍼덕!
뒤편에 다리가 걸린 신부동이 소파와 함께 커다랗게 넘어갔다.
“돼먹지 않은 놈 데리고 꺼져, 이 양아치 새끼야!”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신부동이 비틀거리면서 소파를 붙들었다.
찻잔과 받침, 깨진 유리와 부서진 액자가 여기저기 흐트러졌으며, 조문섭은 뒷머리가 흥건할 정도로 피에 젖어 꿈틀대고 있었다.
참았어야 했나?
강성태가 맡겨준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면 속이 썩어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회사를 위해 조용하게 저 둘을 보냈어야 하지 않을까.
피투성이가 돼서 겨우 몸을 세우는 조문섭을 보며 김진용은 이를 굳게 물었다.
**
모처럼 찾은 커피알리고였다.
최치곤과 함께 주차장에 들어선 강성태는 잠시 커피알리고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정장 차림이었다.
혹시 와 있을지 모를 여중생과 여고생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볼 테고, 그 외에 안면 있는 손님들이 저러고 다니느라 그동안 보이지 않았구나 싶어서 실망할 게 분명했다.
최치곤에게 커피를 부탁해도 될까?
강성태는 잠시 망설였다.
이은주를 만나야 하는 최치곤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식에게 얻어맞는다는 부모 일로 이미 통화했고, 그 일로 한 번은 만나야 해서 이 기회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치곤아. 나 2층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커피 좀 가져다주라.”
“모처럼 왔는데 잠깐이라도 들어가지?”
손 씻을 물을 가져다줄 정도로 강성태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최치곤이 지금의 심정을 모를 리 없었다. 어쩌면 너무 잘 알아서 잠깐이라도 들르라고 권했을 게 분명했다.
정장을 입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손님들의 시선쯤 감당할 자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눈빛과 더러워진 손으로 커피알리고에 들어서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럼없이 커피를 만들어서 내밀 수 있는 모습으로 커피알리고에 들어서고 싶었다.
“지금은 2층에 있을게.”
짧게 답한 강성태는 커피알리고의 왼편에 있는 계단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2층으로 올라가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의 창문, 그 앞의 책상, 다시 문과 책상 사이에 놓인 소파, 하루도 거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은주의 손길을 꼼꼼하게 받은 저렴한 소파는 윤기가 흘렀고, 테이블은 반짝였다. 시선을 들어 확인한 안쪽 작은 책상과 창문, 낡은 창문틀에도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연 강성태는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감정적으로는 아쉽지만, 아르윈을 만나고, 곤잘레스 이두안과 조용하게 대화하기에는 오히려 이곳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짧은 사이에 참 많은 일과 변화가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강성태가 사무실을 둘러볼 때였다.
똑똑똑.
“매니저님?”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캐리어를 든 이은주가 들어왔다. 그리웠던 커피 향이 여동생 느낌의 이은주와 함께 강성태에게 다가왔다.
강성태는 모처럼 보기 좋은 미소를 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 많이 힘들었죠?”
“성안이가 도와줘서 크게 어려울 건 없었어요.”
이은주가 손에 들고 있던 캐리어를 테이블에 놓았다.
“손님들이 매니저님을 많이 찾으세요. 특히 여학생들의 실망이 무척 커요.”
“지금은 이런 모습이라서요.”
정장 차림을 의미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들었을까?
“손님들은 매니저님의 복장에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이은주는 아쉽고 안타까운 미소를 그리며 강성태의 변명을 받았다.
“가볼게요. 커피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내가 만들 때보다 향이 더 좋은데요. 당분간 카페 부탁해요. 필요하면 한 명 더 고용해도 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아직은요. 필요하면 문자로라도 말씀드릴게요. 그럼 내려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이은주가 반쯤 열어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에 소파에 앉은 강성태는 캐리어에 담긴 두 개의 일회용 컵 중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왜 이제야 왔냐는 투정처럼 진한 커피 향이 훅 달려들었다.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강성태가 여운을 즐길 때였다.
문을 열고 최치곤이 들어왔다.
이은주 때문인지 어울리지 않게 어색하고 곤란한 표정이었다.
“앉아. 커피 마시자.”
강성태의 권유에 털썩 자리에 앉은 최치곤이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쏟아냈다.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지.”
“내가 뭘?”
툴툴댄 최치곤이 일회용 컵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강성태의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아르윈이 벌써 왔나?”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병렬이다. 일단 받아보고.”
강성태는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