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 - 11화 (303/513)

15권 - 11화

제4장. 강성태는 알아들을 거다.

신월동으로 돌아온 강성태는 최치곤과 함께 빌라에 들어갔다. 밀동의 일이 커서 그럴까. 하루 만에 돌아온 집이 무척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커튼을 연 최치곤이 잔뜩 부른 배를 매만질 때였다.

겉옷을 벗은 강성태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교통사고와 관련된 서류를 찍어 강선영에게 문자로 보냈고, 다음으로 편한 옷을 골라 나왔다.

“씻고 나올게.”

“아침에 샤워했잖아?”

“그냥 씻고 옷 갈아입으려고.”

“그러니까. 고작 밥 먹고 온 건데 뭘 또 씻어?”

같은 이야기를 자꾸 말해 뭐하겠나.

“저녁에 한잔할래?”

“진짜?”

강성태가 툭 던진 미끼를 최치곤이 덥석 물었다.

“오늘은 그냥 쉴 거니까 밖에 있는 식구들 보내. 밀동에서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거실을 돌아본 최치곤이 망설이는 얼굴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밖에 식구들이야 다른 조직의 눈을 의식해서 함께 다니는 거잖아. 막말로 일이 생기면 나하고 너, 둘이 있는 게 편하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알았어. 보낼게.”

최치곤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욕실에 들어섰다.

최치곤의 말대로 호텔에서 씻고 온 길이었다. 그런데 물이 다르다고 해야 할지, 어쩐지 찜찜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옷을 벗은 강성태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물 아래에 섰다.

오늘은 쉰다.

건설 공사는 내일 만나기로 한 건설사가 일정 수준의 자격을 갖췄다면, 그들을 중심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할 생각이었다.

아무렴, 소신영과 고강준이 추천한 그룹 건설사가 그 정도야 하지 않겠나.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한 강성태는 몸에 난 상처들을 돌아보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회복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상처가 생기는 바람에 붉게 올라온 흉터들이 가득했다.

이쯤에서 끝났으면 싶지만, 피하지 못할 싸움이 하나 더 남았다.

목덜미의 상처를 피해 물줄기를 맞으면서 강성태는 삼합회 부두목 섭충명을 떠올렸다.

그는 이미 용병, 원자춘, 다음으로 마윤을 보내 세 번이나 강성태와 주변 사람들의 목숨을 노렸다. 비록 세 번을 모두 막아내기는 했으나 강성태가 살아있는 동안은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안다미, 곤잘레스 이두안, 로라는 말할 것 없고, 이병렬과 조태완, 거실에 있는 최치곤이 언제 당할지 모를 위험을 두고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푸!”

얼굴을 타고 내려오는 물을 뱉어낸 강성태는 수건을 집어 몸을 닦았다. 물기를 닦고 나자 몸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개운했다.

**

곤잘레스 이두안은 책상에 서류를 올려놓은 비서를 날카롭게 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곳이 한국이다. 그러니 한국 돈으로 설명하지. 내가 비서진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1년에 지불하는 금액이 한화로 3백억 원쯤 된다. 그런데도 이런 서류를 내미는 건, 그만두고 싶다는 표현인가, 아니면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곤잘레스의 날카로운 추궁이 조용한 그의 집무실에 흐른 뒤였다. 책상 넘어 소파와 탁자에 있던 비서진들이 서류를 내려놓고 긴장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정 같습니다.”

“같습니다? 사업을 빼앗기거나 내 목숨이 걸린 일을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도 되나?”

“바르지오 만시니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움직임이었습니다. 보리스 파리오 회장과 삼합회가 손을 잡았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비책은?”

“레드 워터와 가페에 경호를 요청할까 합니다.”

보고를 들은 곤잘레스 이두안은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런 뒤에 상체를 의자에 묻듯이 기댔다.

“이렇게 일정이 급하면 절대 수준급의 용병을 얻기 어려워.”

“죄송합니다.”

마침내 잘못을 인정한 비서가 시선을 떨구었다.

시선을 돌린 곤잘레스는 조금 전에 들었던 서류를 천천히 넘기며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30분만 쉬기로 하지. 모두 거실로 나가서 커피를 즐기고 30분 뒤에 와주게. 그리고 존 보스만을 불러줘.”

곤잘레스 이두안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비서들이 조용하게 일어나 방을 나섰다.

곤잘레스는 들고 있던 서류의 모서리로 책상을 일정하게 내리쳤다.

신의 축복을 연일 받은 것처럼 서울의 오후는 오늘도 화창했다. 녹색의 하늘 아래로 빌딩 숲이 이어졌고, 그 위를 뒤덮고 달려온 햇살이 창가에 앉은 곤잘레스의 하얀 셔츠를 더욱 빛내주었다.

“보리스 파리오.”

혼잣말로 이름을 부른 곤잘레스 이두안이 차갑게 눈빛을 가라앉힐 때였다.

문이 열리고 존 보스만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우선 이 초청장을 보고 나서 이야기하기로 하지.”

곤잘레스는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앞에 있는 존 보스만에게 내밀었다.

서류를 천천히 읽어내려가던 존 보스만이 유독 하얗게 보이는 눈을 들어 곤잘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일정을 봤나?”

“투자자 모임이 열흘 뒤로 되어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일정이지. 거기에 장소가 마카오라면 의도가 분명한 초청이고. 비서진이 함정이라고 판단했다면 이해가 쉽겠지?”

비스듬하게 앉아 있던 곤잘레스가 존 보스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노리는 거야 일상적인 일이니 넘어가세. 내가 궁금한 건 이걸 왜 바르지오 만시니가 몰랐는가 하는 점이지. 자네는 짐작하는 게 없나?”

“보리스 파리오 회장이 제게도 접촉한 사실이 있습니다.”

대꾸를 들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눈가를 날카롭게 좁혔다.

“미스터 강에게 경호를 당부하고 싶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론 미스터 강이 거절했습니다.”

“그 제안을 언제 건넸지?”

“마지막 방문에서였습니다.”

한숨을 내쉰 곤잘레스가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구석에 놓인 티 테이블로 향했다.

“커피?”

“괜찮습니다.”

커피를 따른 곤잘레스는 받침과 잔을 양손에 들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지?”

“보리스 파리오 회장이 진심으로 미스터 강을 원하는 거라고 여겨서 소개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 사업과 관련해서 회장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거라고 판단한 점도 있습니다.”

곤잘레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에 없던 외출을 하게 될지 모르니까 준비해 주게. 시간은 정해지는 대로 알려주지.”

눈인사에 가까울 만큼 짧게 고개 숙인 존 보스만이 집무실을 나섰다.

넓은 집무실에 곤잘레스 혼자 남았다.

탁자와 소파 테이블에는 비서진들이 들여다보던 서류가 얌전한 모습으로 검토를 기다렸는데 곤잘레스 이두안은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오후의 햇살과 커피를 잠시 즐겼다.

신기하게도 같은 커피인데도 오늘은 향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은 그는 책상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그가 번호를 누른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강성태의 음성이 건너왔다.

“요즘 바쁘다고 하던데 통화가 괜찮나?”

이 정도면 강성태는 알아들을 거다.

그가 강성태를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

- 커피를 마실 정도의 시간은 있습니다. 혹시 한국 술을 드실 의향이 있으시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역시!

강성태의 제안을 들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렇다면 자네가 사는 술을 마셔볼까?”

- 몇 시가 편하십니까?

“나는 지금도 괜찮네. 아! 이왕이면 시끌시끌한 한국의 정서를 느껴보고 싶은 바람도 있네.”

- 4시에 제가 운영하던 커피숍 어떠십니까?

“좋지. 그리로 가겠네.”

- 그때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곤잘레스 이두안은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식탁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뭔데 그래? 영어로 말하는 거 보니까 그 곤잘레스 회장이라는 사람 아냐?”

“맞아.”

“그런데 왜?”

“위험에 빠졌다는 신호를 보낸 거거든.”

“뭐?”

소파에 늘어져 있던 최치곤이 벌떡 상체를 세우고는 강성태의 설명을 바라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염려하는 법이 없는 양반이 통화 괜찮냐고 묻더라고. 사인인 거지. 뒤에 나눈 대화도 지금 도청당하는 느낌이다. 밖에서 만나 이야기하자. 그런 의미로 보면 적당해.”

“뭐 해? 그럼 얼른 가봐야지.”

“4시에 커피알리고에서 만나기로 했어.”

“뭐가 이렇게 숨 가쁘냐? 정말 쉴 틈을 안 주네, 진짜.”

최치곤이 투덜거리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술을 마시기로 했던 계획이 취소된 것이 못마땅하다기보다는 강성태가 쉬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눈치였다.

투덜대는 최치곤 앞에서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려고?”

“아니. 쿠크리를 챙기려고.”

강성태가 어떤 심정으로 움직이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쿠크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최치곤이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방으로 들어간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

병실에 들어선 아르윈을 보며 키란은 반갑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키란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르윈의 뒤에서 처음 보는 아가씨가 들어오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습니다.”

늘 주고받던 대화였다.

그 대화의 끝에서 키란은 누구냐는 표정으로 뒤따라 들어온 아가씨를 다시금 보았다. 필리핀 출신으로 보였다.

“인사해. 제니퍼라고 25살이고, 한국에 온 지 3년 됐다.”

“안녕하세요? 제니퍼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예. 키란입니다.”

활달하게 인사하는 제니퍼에 비해 키란은 쑥스러운 얼굴이었다.

“소개시켜 달라면서?”

“그렇더라도 이렇게 병원에서, 갑자기 할 줄은 몰라서….”

어색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선한 눈매에 미소를 담은 제니퍼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키란을 살피고 있었다.

“키란. 불편하면 제니퍼는 보내도 돼.”

“아닙니다. 전혀요.”

아르윈이 던진 질문에 키란이 고개마저 저으며 답을 내놓았다.

“그럼 함께 김밥 먹어도 되지?”

아르윈이 창문 쪽의 테이블을 가리키자 제니퍼가 들고 온 김밥과 음료수를 올려놓았다.

‘마음에 들어?’

침대에 붙어선 아르윈이 시선으로 물었는데 키란은 부끄럽게 웃기만 했다.

“얼른 내려와.”

침대에서 발을 내린 키란이 테이블로 움직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르윈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아르윈은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르윈입니다, 형님.”

아르윈이 이렇게 전화 받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그 사실을 아는 키란과 아르윈의 진지한 모습에 눌린 제니퍼가 비슷한 표정으로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아르윈.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 문제로 도움이 필요한데 오늘 시간 어때?

“지금 키란 병원에 있습니다. 오후에 공사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형님.”

- 권총 가진 게 있어?

“프리 스테이션 근처 차에 두었습니다, 형님.”

- 그럼 네 명에게 권총을 준비해서 3시 30분까지 커피알리고 주차장에서 보자. 가능하면 차는 두 대를 준비했으면 싶은데 당장 구하기 어려우면 내가 숙소에 전화하고.

“승용차까지 제가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아르윈은 시간을 확인했다.

“전화 한 통만 하고 올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성태 형님입니까?”

병실을 나서려는 아르윈에게 키란이 건넨 질문이었다.

평소 순박해 보이는 키란의 얼굴이 바뀔 때가 있다. 어떤 유혹을 던져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우직함, 아무리 힘겨운 지시라도 무조건 따르겠다는 강직함이 보이는 표정이었는데, 강성태의 일에 관한 한 키란은 늘 이런 식이었다.

거짓말을 하거나 속일 이유가 전혀 없는 질문이었다.

“맞아. 3시 30분까지 커피알리고에서 보자고 하셔서 우리 조직원들에게 전화하려는 거야. 걱정할 거 없으니까 편하게 김밥 먹어.”

키란을 다독인 아르윈이 병실을 나선 뒤였다.

“드세요.”

제니퍼가 김밥을 펼치며 키란의 시선을 끌었다.

**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옷장 안쪽에 두었던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천에 감겨 잠들어 있던 쿠크리가 갑작스럽게 달려든 빛에 적응하려는 듯 얌전히 누워 있었다.

강성태는 천천히 쿠크리를 꺼내 손에 들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도청을 염려할 정도인데 바르지오 만시니의 연락이 없었다. 누군가 중간에 이간질을 했든가, 아니면 바르지오 만시니가 팔렸다는 의미였다.

존 보스만은 아직 괜찮다.

만약 그까지 팔렸다면 곤잘레스 이두안은 전화를 걸기 전에 이미 죽었을 거다.

“곤잘레스 회장을 지켜야 하고, 중국 삼합회 부두목을 제거할 생각이다.”

쿠크리의 손잡이를 잡은 강성태는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내놓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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