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 8화
제3장. 자식 키우는 부모가 할 짓이냐?
길었던 밤을 밀쳐낸 태양이 밀동에 새로운 아침을 깔아놓았다.
“아후.”
침대 위에 거칠게 늘어졌던 최치곤이 상체를 비틀며 눈을 떴다가 벌떡 일어났다.
“언제 일어났냐?”
“조금 전에. 씻어.”
“너, 상처는 괜찮아?”
“그러게. 너무 빨리 아무니까 이제 무섭다.”
샤워한 강성태를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던 최치곤이 침대 앞쪽에 틀어놓은 TV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부터 모든 방송에서 이곳 사건이 나온다. 경찰청이 밀동 경찰서에서 벌어진 비리 사실을 감찰한다는 내용 하고, 검찰이 가해자 전원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게 가장 커.”
강성태의 설명을 들으며 최치곤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야! 제발 그렇게 긁지 좀 마.”
“왜 이래? 땀이 차서 그런 건데.”
뻔뻔스럽게 사타구니를 긁어댄 최치곤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앉아서 볼일 보고!”
“아휴, 저 시어머니!”
화장실 안에서 달려 나오는 최치곤의 투정을 들으며 강성태는 픽 웃었다. 그래도 최치곤이 있어서 한 번씩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강성태가 연회장으로 내려갔을 때, 조태완과 조철호, 김정훈, 조덕진, 박중배가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덩치들의 인사를 받은 강성태는 조태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얼른 와.”
여기저기 얼룩진 카펫, 오래된 벽지, 테두리가 변색된 창문까지, 낡은 모습에 어울리는 헤진 식탁보 위로 여러 종류의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거기 앉으면 돼.”
뷔페식으로 차린 모양인데 조태완은 테이블의 한 자리를 가리켰다. 조태완과 조철호, 강성태, 셋만 앉았고, 조덕진과 박중배까지 모두 서 있었다.
조직의 뷔페는 이런 식인가?
강성태가 앉기 무섭게 덩치들이 움직여 모든 종류의 음식을 접시에 수북하게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덩치들이 뒤로 물러나 테이블을 빙 둘러쌌다.
이럴 거면 뭐하러 뷔페식으로 차렸는지 원.
“어서 들어.”
조태완의 권유에 강성태는 뒤를 돌아보았다.
“동생들은 아래층에서 따로 먹어. 반은 식사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럼 조덕진과 박중배, 정훈이까지는 함께하시죠?”
“그래?”
강성태의 의견이라면 일단 받아들이고 보겠다는 투로 조태완이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너희 셋은 함께 식사하자.”
“아닙니다, 형님.”
“두 번 말하게 할래?”
사양했던 조덕진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테이블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김정훈까지는 몰랐는데 박중배는 엄청나게 긴장한 얼굴로 테이블에 앉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밥 한번 먹는 데도 인사를 몇 번이나 한 세 사람이 마침내 젓가락을 들었다.
“참! 가해자 부모들이 박중배를 통해서 연락했는데 말이지. 보스를 만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
잡채를 입에 넣은 참이라 강성태는 시선만 들었다.
“믿고 있던 밀동 경찰서가 쑥대밭이 된 데다, 구속영장 청구한다는 말이 돌고, 새벽에 몇 개 방송국에서 더 달려오는 걸 봤으니까 지금껏 거들먹거리던 게 말짱 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지.”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뜬 조태완이 생각난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바라던 대로 일이 커진 건 좋은데 대신 이제부터는 JBC 외에 다른 방송국에 걸릴 위험이 있어. 특히 부모들은 더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부모들은 때리지 말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지.”
밥을 씹느라 조태완의 볼이 씰룩였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눈이 독하게 보였다가 풀어지곤 했다.
“오늘 오후 1시에 조철호 변호사가 이선정을 만나기로 했어. 그년이 부이사장이더구만. 정관하고 또 뭐더라?”
“내부 규정입니다.”
조태완의 시선을 받은 조철호가 얼른 답을 내놓았다.
“그 간단한 게 왜 생각이 안 나지? 하여간, 규정. 그거 받기로 했고, 3년 뒤에 운영권리를 돌려주는 계약을 그쪽 변호사와 만나서 의논하기로 했어.”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뭐. 이선정인가 하는 년, 때렸어?”
“약속을 어기면 따귀를 열 대라고 말하고서 계약금으로 먼저 한 대를 때렸습니다.”
“푸훗!”
하필 볶음밥을 먹고 있던 터라서 조태완의 입에서 튀어나온 밥알이 그쪽 테이블 절반을 뒤덮었다.
“미안해. 야! 이거 좀 얼른 바꿔라.”
“예, 형님.”
젓가락을 내려놓은 조태완이 물을 마시다가 또 바보처럼 키득거렸다.
“계약금으로 따귀를 때리다니? 흐흐흐흐. 흐하하하.”
그게 저렇게나 웃을 일인가?
다행히 밥알이 테이블의 절반을 넘어오지 않아서 강성태는 접시에 담아놓은 음식을 다시 입에 넣었다.
“어쩐지 너무 순순히 나오더라고. 거기에 계약서 작성은 양쪽 모두 변호사가 처리하자고 애원하더라고. 계약금 탓이었네. 계약금.”
오늘 새벽녘에 재단 운영권을 가져오기로 했다는 내용과 연순동, 이선정의 전화번호를 받았던 조태완은 이제야 상황을 모두 이해했다는 얼굴로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재단은 왜 가져와?”
“조철호 변호사님이 이곳에 적당한 학교를 하나 설립했으면 싶어서 그랬습니다.”
“학교를?”
조태완은 궁금한 얼굴이었는데 조철호는 밥풀을 연타로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밀동과 대전만 해도 학교를 포기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소년원 나와서 껄렁대는 아이들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니까 남순이 같은 피해자가 생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만들자?”
“성북구 건설사업으로 수익도 생길 테고, 멕시코 건설 공사에서 공식적인 리베이트도 상당할 거고요. 껄렁대는 애들을 모아볼까 합니다.”
“그놈들을 모은다고 치자. 학교에서도 잘리는 놈들이 여기 조 변이나 선생들의 말을 듣겠어?”
덩치들이 음식을 모두 바꿔 놓았는데도 조태완은 식사를 잊은 것처럼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거칠 게 나오면 병렬이, 정훈이, 치곤이와 숙소 식구들이 나서게 할 생각입니다.”
“흐음.”
답을 들은 조태완이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생각했던 내용이라 세부적인 건 여기 조 변호사님과 의논한 뒤에 결정하겠습니다. 또, 이번 기회에 이남순처럼 어려운 아이들이 살길도 마련해 보고 싶습니다.”
내내 듣고만 있던 조철호가 이번만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재단을 가져오겠다고 계획한 건, 이학의나 이선정이 개인적인 착복을 못 하게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겁니다. 식비를 빼돌릴 정도면 학생들 처우가 오죽할까 싶기도 했고요.”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던 조철호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재단이 아니라 우리가 버는 돈으로 껄렁대는 놈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일진이나 따돌림이 없고, 남순이처럼 부족한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학교는 그 뒤에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하아. 나는 정말 우리 보스를 따라갈 방법이 없다. 이런 말은 뭐한데 진짜 존경스럽다.”
빈정대는 말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으로 들렸다.
“식사 다 하셨습니까?”
“아! 얼른 들자고.”
손으로 음식을 가리켰던 조태완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런 뒤에 확인처럼 강성태를 눈에 담았다.
**
연순동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검찰이라는 집단과 사람에 대해 혐오하는 감정이 생겼다.
- 뭔데 응급수술을 받아?
“죄송합니다.”
- 그러게 내가 처가와 재단 일 말끔하게 정리하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 이 새끼가 그런데? 죄송합니다라는 말 말고는 몰라? 너 지금 반항하는 거야?
그동안 연순동이 피의자들에게 수도 없이 던지던 질문이었다. 순간, 연순동은 피가 머리로 너무 쏠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살자. 살고 보자.
연순동은 통증을 이겨가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가 부러진 바람에 말을 길게 하기 어려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검장님.”
- 지금은 잘하잖아?
이렇게 빈정대는 말투도 연순동이 피의자들에게 단골로 써먹던 질문이었다.
- 아무튼, 다 끝난 거지?
“예.”
- 일주일이면 되겠어?
“충분합니다.”
- 그럼 수술 잘 받고 일주일 뒤에 나와.
통화를 마친 연순동은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하고 고개를 떨궜다.
사람이 입을 계속 벌리고 있으면 침을 삼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또, 이가 부러지면 침 삼키는 동작조차 고통스럽다는 사실 역시 이번에 새롭게 알았다.
피가 진하게 밴 침을 티슈로 닦으며 연순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였다.
달칵.
뒤편에서 들리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연순동이 홱 고개를 돌렸다.
“아윽!”
서러운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동작에도 왼쪽 광대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달려드는 것은.
“검사님. 차 준비됐답니다.”
응급수술을 위해 출발할 시간이었다.
“집사람은요?”
“부이사장님께서는 조금 전에 잠드셨습니다.”
미친 여자처럼 넋이 나가 수시로 울던 이선정은 변호사에게 일을 떠넘긴 이후로 겨우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연순동 역시 그렇게라도 해서 강성태를 다시는 안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세상에 폭력조직 두목을 두려워하는 형사부장 검사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아니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놀란 연순동은 통증을 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검찰이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진 지금, 연순동은 무슨 짓을 해도 강성태의 따귀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 팔 좀 잡아줘요.”
“예, 검사님.”
연순동이 내민 팔을 가사도우미가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끝났다. 모두. 이제 수술로 이를 치료하고 나면 다시는 강성태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
얼굴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는 연순동을 위해 가사도우미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신발을 신기 위해 발을 내디디던 연순동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시선을 들었다.
어어? 강성태? 강성태가 왜?
“아악! 아아악!”
“검사님? 검사님?”
현관 앞에 주저앉은 연순동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강성태로 알았던 사람은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던 운전기사였다.
“흐이! 왜 거기 있어 가지고, 이 씨….”
“죄송합니다, 검사님.”
“흐으. 흐으으.”
연순동은 이학의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
경찰서에 근무한다는 가해자의 부친과 고모는 주변을 의식해서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외에 박중배가 데려온 가해자의 부모들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촬영에 대비해서 이쪽에서는 강성태와 조태완, 조철호 변호사만 의자에 앉았고, 심부름을 위해 김정훈과 최치곤, 숙소 덩치 셋이 있었다.
“이분이 남순이 삼촌 되시는 분입니다.”
“강성태입니다. 앉으십시오.”
박중배의 소개에 강성태는 고개조차 숙이지 않은 인사를 한 뒤에 자리를 권했다.
연회장 중앙에 긴 탁자를 놓았고, 오른쪽에 강성태, 조태완, 조철호가, 맞은편에 가해자의 부모들이 앉았다.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게, 조카분인 줄 모르고 그만 저희가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내 조카가 아니었으면 이런 식으로 끝내도 됩니까?”
“그런 게 아니라, 자식이라고 있는 게 못된 친구와 어울려서 한순간 실수를 저질렀는데, 부모라는 사람이 어떻게 지켜만 보겠습니까? 그래서 그만….”
대표로 나선 모양이었다. 밀동에서 한자리해 먹게 생긴 남자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변명을 내놓은 직후였다.
“못된 친구라는 놈이 누구야?”
조태완이 쇳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말대로라면 그놈이 문제라는 건데 내가 다시는 함께 어울리지 못하게 해줄 테니까 이름만 대. 누구야? 그 못된 친구라는 놈이?”
“예?”
가해자 부모들이 원망 어린 눈초리로 대표로 나선 남자를 힐끔거렸다.
“사고를 친 거야 애새끼들이라고 치자. 당한 여자아이를 또다시 짓밟은 건 당신들 아냐? 4백으로 합의했지? 양심이라는 게 있기는 하냐? 이게 4백으로 해결될 일이야? 그래?”
쇳소리 가득한 음성, 독기 오른 눈빛, 오랜 조직 생활에서 묻어 나오는 강압적인 태도까지, 조태완은 정말 무서워 보였다.
“조 회장님. 말씀을 아끼십시오.”
보다 못한 조철호 변호사가 나직하게 조언하고 나섰다.
“이런 사건이 밀동에서만 있는 건 아냐. 알아. 하지만, 당한 여자아이 짓밟고, 4백만 원 던져준 건 동네가 어디라도 욕 처먹을 짓이야. 그게 자식 키우는 부모가 할 짓이냐? 당신들 자식이 그렇게 당했다면 4백만 원으로 합의하겠냐고?”
조철호의 만류에도 조태완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혹시나 지금 쏟아내는 말이 약점이 될까 걱정된 조철호가 말려달라는 눈짓을 보내는 데도 강성태는 묵묵하게 조태완을 지켜보았다.
강성태가 아는 조태완은 반드시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몰아붙일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