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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권 - 5화 (297/513)

15권 - 5화

안다미 품에서 울먹이던 이남순이 빌라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몸을 돌리더니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사를 늦게 했다고 터럭만큼도 서운하지 않았다. 끔찍한 일을 당한 데다, 동생에게 주고 싶은 음식 탓에 마음이 급했을 테니까. 오히려 잊지 않고 몸을 돌린 이남순이 고마워서 강성태는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려주었다.

쭈뼛대던 이남순이 계단을 올라갔다.

“박중배.”

“예, 형님.”

“경찰서나 다른 조직이 누르려고 하면 조덕진을 찾아. 아니면 여기 최치곤이나 나한테 직접 연락하고. 무슨 일이든 책임질 테니까 남순이 반드시 지켜주고, 다시는 이런 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여기 양아치들 확실히 관리해.”

무겁게 전하는 강성태의 지시에 박중배는 상체를 깊게 숙여 답했다.

이어서 강성태는 최치곤을 돌아보았다.

“다미 씨와 있을 테니까 너는 우선 호텔로 가 있어. 서울에 가기 전에 들르거나 전화할게. 그때 함께 움직이자.”

안다미를 돌아본 최치곤이 고개를 숙였다.

“다미 씨. 우리는 먼저 출발하죠.”

덩치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할 안다미를 위한 배려였다.

최치곤에게 눈인사를 전한 안다미가 운전석에 올랐고, 곧바로 강성태가 조수석에 앉았다.

최치곤과 박중배, 덩치들의 인사를 받으며 출발한 승용차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군청으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섰다.

다시 돌아봐도 자전거를 타고 10분만 달리면 경찰서, 군청, 등기소 따위의 온갖 관공서를 모두 도는 작은 동네였다.

“어디로 가요?”

“조용한 곳에서 전화 통화를 먼저 해야 합니다.”

조수석의 강성태를 힐끔 본 안다미가 예상한 곳이 있다는 투로 도로를 달렸다. 군청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국도였다.

“서울로 가려고요?”

“조용하게 통화하기 적당한 장소요.”

국도를 5분쯤 달리던 안다미는 카페로 향하는 길을 달렸다. 그런 뒤에 도로 한쪽에 비어 있는 공간에 차를 세웠다.

“차라리 카페로 가죠?”

“여기 카페들은 원래 10시가 넘으면 문을 닫는대요. 그러니까 이곳에서 통화하세요. 사실은 저 하늘을 다시 보고 싶었어요.”

엔진을 끈 안다미가 앞유리 바깥의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어둠이 밀려날 정도로 선명하게 빛나는 별빛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로 밀동의 밤하늘은 장관이었다. 이런 곳에서 도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사는 건지.

“잠시만 내려서 통화할게요.”

안다미에게 양해를 구한 강성태는 조수석에서 내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습기가 오른 숲의 냄새가 강렬하게 강성태에게 달려들었다. 숨을 들이마시면 들어오는 공기가 폐를 청량하게 씻어주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조수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성태는 아까 통화했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연순동의 음성이 들렸다.

“결정했어?”

- 강성태 씨. 우리에게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정도에서 한번 넘어가 주면 안 되겠소?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어떤 종류든 내가 제대로 덮어드리겠소.

평소라면 픽 웃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아이를 들여보내고 온 길이어서 그런지 연순동의 제안이 강성태의 심장을 날카롭게 긁었다.

“어떤 종류든 제대로 덮어주겠다고? 법을 가장 공정하게 집행해야 하는 인간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약속을 그렇게 쉽게 내뱉어? 그러니까 학교 이사장이라는 늙은 놈이 그렇게 성폭행을 저지른 거 아냐?”

-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사람을 죽이라고 지시한 일은 별거 아닌데 이런 건 또 불편해? 참 편하게들 산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순동. 아무리 검사라고 해도 네 마음대로 법을 집행할 권한은 없어. 그걸 깨닫지 못하는 동안, 너는 회칼 대신 법전을 휘두르는 개 양아치인 거고. 내 전문이 양아치를 두들기는 거라면 이해하겠냐?”

- 흐음.

“자정까지라고 들었다. 내 앞에 와서 무릎 꿇든가, 끝까지 버텨보든가, 선택은 알아서 해. 그리고 무릎 꿇을 거 아니면 연락하지 말고.”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깔끔하게 종료버튼을 눌렀다.

더러운 인간과 통화하는 게 미안했을 정도로 별은 여전히 찬란했고, 폐로 들어오는 공기는 더할 수 없이 맑고 깨끗했다.

몸을 돌려 승용차로 다가섰던 강성태는 문을 열기 위해 내밀던 손을 멈추고 상체를 슬며시 기울였다.

운전석에 앉은 안다미는 자고 있었다.

아름답게 꾸미고 평소에 입지 않던 매력적인 복장을 하고서 오늘을 기대했을 텐데, 참담한 일을 당한 여자아이를 달랜 후에 승용차 운전석에 기대 잠에 빠져 있었다.

문을 열면 저 짧은 잠에서 깨어날 거란 생각에 강성태는 기울였던 몸을 세웠다. 그런 뒤에 스마트폰을 들어서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주무신 거 아니죠?”

장숙경의 음성에 묻은 반가움이 좋아서 강성태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 이 시간에 자겠니? 너는 어디야?

“잠깐 지방에 와 있어요. 오늘 저녁은 어떠셨어요?”

- 아버님이 대단하시더라. 나는 이제 네 걱정 다 놨다.

저녁 자리가 몹시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장숙경은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강성태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은 반응이었다.

- 성태야.

“예.”

저녁 자리가 잘 끝났다는 생각에 강성태가 편안하게 대답한 직후였다.

-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걸 알게 될까 봐 카페에도 안 갔고.

방심하던 강성태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듯한 장숙경의 말이 건너왔다.

- 아까 말한 대로 나는 너에 대한 걱정 놨다. 하지만, 네가 만나는 사람에게만은 모든 걸 있는 대로 말해.

“예. 그럴게요, 이모.”

육감으로 바퀴벌레를 잡는 장숙경에게 다른 소리 해봐야 답이 없다. 그래서 강성태는 순순히 답했다.

- 수술이 늦게 끝난다고 했다던데 전화라도 해줘.

“예.”

- 미안하다고 말하고.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또 육감으로 때려잡아서 강성태를 밀어붙이는 거야?

강성태는 대답조차 못 했다.

- 나중에 김치 가지러 와.

“김치찌개 먹고 싶어요. 돼지고기 굵직하게 썰어 넣은 거요.”

- 함께 와. 그러면 돼지고기 더 많이 넣어줄게.

장숙경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하늘에 박힌 별들과 맑은 공기가 몸에 담긴 더러움을 씻어주었다면 장숙경과의 통화는 거칠어진 마음을 달래준 느낌이었다.

강성태는 이모 장숙경을 떠올리며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

연순동은 모든 걸 포기한 얼굴이었다.

“강성태란 놈이 절대 그냥 못 넘어가겠단다. 그러니까 선택해. 어떤 거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밤이 깊어지면서 이선정은 눈에 띄게 불안한 기색을 보였고, 전에 없이 눈빛이 흔들렸다.

“나, 진짜 구속돼?”

“고검장님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보인 모습을 보면….”

말을 하던 연순동이 한숨을 내쉰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을 봤잖아? 심지어 내가 이렇게 당했는데도 고검장님이 그걸 덮었어. 그런데 당신 일이라고 다르겠냐?”

“나더러 따귀를 맞으라고?”

“그러니까 당신이 결정해. 정 강성태에게 못 가겠으면 내가 옷 벗고 변호사 사무실 개업할 테니까 당분간만 구치소에서 견뎌.”

“구치소에서 내가 어떻게 견뎌? 거기는 흉악한 사람들만 있는 곳이잖아. 그런 곳에 가면 나는 하루도 안 돼서 죽을 거야.”

“이렇게 시간 끌면 어차피 저쪽에서 움직인다. 그럼 구치소에 들어가는 거고.”

고개를 떨구었던 이선정이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나 대신 가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꼭 나더러 오라는 게 수상하잖아. 나를 때리면 어떻게 해?”

“그러게 왜 사람을 죽이라고 시켜?”

“그냥 칼로 찌르라고만 했지, 죽이라는 말은 안 했어.”

“하오.”

한숨을 푹 내쉰 연순동이 대책 없는 상황에 고개를 저을 때였다.

“그러지 말고 당신이 가.”

속 터지는 요구를 이선정이 또 내놓았다.

“내가 함께 가줄 테니까 일어나. 그게 지금은 최선이야.”

“때리면? 막아줄 수는 있어?”

차마 함께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답을 내놓지 못한 연순동이 버릇이 된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데려가는 게 중요하니까.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까 가자.”

“진짜 그럴 수 있어?”

질문을 던진 이선정이 손자국 선명한 연순동의 뺨에 시선을 주었다.

이선정을 바라보며 연순동은 마지막으로 저울을 움직였다.

살인 교사 영상이 터지면 연순동은 무조건 옷을 벗어야 했다. 이선정은 구속, 엔화까지 터지면 재단까지 온통 뒤집힐지 모른다.

막말로 검찰이라는 방패 안에 있을 때만 기자들이 한편인 거지, 버려진 게 확실해지면 연순동은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먹잇감일 뿐이었다.

강성태에게 가면, 한 대 맞은 뒤부터는 혼이 빠질 정도로 고통스럽기는 한데 대신 지금 누리는 것들을 지킬 수는 있다. 솔직히 가는 게 어렵지, 한 번 맞기 시작하면 얼이 빠져서 반항조차 못 한다. 그리고 집에 와서야 대강 정신이 돌아온다.

막말로 맞는 건 한순간이지만, 이익은 영원하다지 않던가.

연순동은 이를 굳게 깨물며 마음을 굳혔다.

“내가 얼굴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이 맞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가서 만나보자. 정 안 되면 옷 벗을 각오하고, 부하 검사들 부르지 뭐.”

“지금 불러서 함께 가면 더 좋잖아.”

“아, 진짜! 전화해서 뭐라고 해? 당신이 살인 교사한 게 있어서 깡패 만나러 간다고 떠들 수는 없잖아. 정 그렇게 싫으면 하지 마. 그냥 당신 구속되고, 재단 탈탈 털리는 거로 해. 하나만 알아둬라. 내가 검찰에서 밀려나면 기자들이 정말 벌떼처럼 달려들 거다.”

기자라는 말에 이선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연순동은 검사다. 이선정의 짧은 변화를 분명하게 알았다.

“재단에서 당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얼마를 가져갔는지, 차는 뭘 타고, 수영장, 피부과, 하다못해 백화점에서 한 달에 얼마를 썼는지까지 모두 쓸 텐데 그래도 되겠냐?”

연순동은 잡아챈 약점을 강하게 물고 늘어졌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

그리고 마침내 이선정의 답을 받아냈다.

**

어쩌면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통화가 끝난 강성태가 차에 탈 거고, 그때 깰 거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서늘해지는 밤기운을 밀쳐낸 강성태는 승용차에 기대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첫 번째로는 한 시간 만이라도 잠들게 지켜주고 싶었고, 두 번째로는 연순동이라는 인간이 반드시 다시 전화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학의, 이선정, 연순동 같은 부류는 죽는 일만 아니라면, 아니 죽는 한이 있어도 손에 쥔 걸 쉽게 놓지 못한다. 그런데 집안이 풍비박산 나게 생긴 상황에서 버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길게 갈 것도 없었다.

이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아서라도 가진 걸 지키려던 이학의가 답이었다.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시간을 보았다.

밤 11시 10분이었다.

서울에 올라가면 처음으로 안다미에게 오늘 함께 있자고 말해볼까 했었다. 그런데 말조차 못 해본 그 행복을 이선정이 날뛰어 부수고 있었다.

‘참 어렵네.’

정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강성태가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서 잠든 안다미를 눈에 담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에 든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연순동이오. 어디로 가면 되겠소?

강성태가 예상했던 질문이 바로 넘어왔다. 강성태의 생각이 바뀔 것을 염려한 것처럼 어쩐지 연순동은 서두르는 느낌도 있었다.

“대전 옆에 밀동이라고 있어. 군청 앞에 공용주차장에 도착해서 전화해. 지금 시간이면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해.”

- 서울에서 보면 안 되겠소?

“거참, 귀찮게 하네.”

- 알았소. 지금 출발하겠소. 시간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여보세요?

“난데, 서울에서 이선정이 내려온단다. 박노익 형님이 말했던 연순동 검사 부인 알지? 밀동 군청에 도착해서 전화하기로 했으니까 박중배 찾아서 적당한 장소 좀 알아놔.”

- 적당한 장소? 굳이 그걸 찾을 필요 있겠냐? 아까 가해자 놈들 두들긴 자리 좋던데? 어때?

강성태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순동 검사와 부인, 그렇게 둘만 올지, 사람들을 끌고 올지는 모르겠는데 연락 오면 알려줄 테니까 네가 둘만 데리고 와.”

- 안 된다고 하면?

“그냥 가라고 해.”

- 알았어. 우리 식구만 데려간다.

“그 정도가 좋아.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께는 내가 전화할게.”

통화를 대강 마무리할 때였다.

운전석 문이 열리며 안다미가 나왔다.

“끊는다.”

짧은 한마디를 전한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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