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 - 4화 (296/513)

15권 - 4화

제2장. 대답 똑바로 해라.

조태완이 자리한 연회장은 마치 사건 본부와 같은 느낌이었다.

“민변 변호사가 경찰서를 방문 중이다. 서장하고, 고모라는 민원실장, 민원실 친구 년까지 직무가 정지돼서 예상보다는 쉽게 일이 진행되고 있지.”

김정훈을 돌아보았던 조태완이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정훈이가 애들을 풀어서 가해자 부모들 집 앞에 쭉 깔아뒀으니까 알아서들 하겠지.”

무슨 말인가 싶은 강성태가 이병렬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이병렬이 진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강성태의 시선과 표정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보스와 병렬이, 여기 덕진이가 가해자 놈들을 두들겼잖아. 어차피 대전 덕진이네 식구들이 무서워서라도 신고는 못 하겠지만, 만에 하나 신고하면 진짜 골로 갈 거라는 걸 보여주는 거지.”

조태완이 강성태를 가르치듯 나직한 음성으로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 눈도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습니까?”

“눈이 있으니까 더 그래야지. 이세종이 기자들 데리고 가해자 부모들 찾아가는 주변에 정훈이가 애들을 쫙 깔았거든. 여기에서 꼼수 피우면 진짜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그나마 대가리를 숙이지.”

이병렬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지만, 오래도록 태완이파를 이끌었던 조태완에게서도 배울 점은 많았다.

“여기 조 변이 애써줘서 밀동 경찰서는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해. 그 바람에 오늘 밤 밀동은 법이 죽은 세상이 됐지. 이럴 때 가르쳐주자고. 이 바닥에서 깝죽거리던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 건지.”

말을 하던 조태완의 눈이 전에 없이 독하게 빛났다.

“정훈이 식구들이 가해자 부모들을 시보레 태우고 있을 테니까 오늘 밤은 내게 맡겨줘.”

조철호 변호사, 이병렬, 김정훈, 조덕진이 있는 자리에서 조태완이 강성태의 허락을 구하고 나섰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오늘 밤 보여주시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우겠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답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왜 그런지 한순간, 눈이 왈칵 붉어진 조태완이 입술을 씰룩여가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 박노익 형님이 전화하셨습니다.”

조태완의 감정 변화를 알아챈 이병렬과 김정훈이 고개를 떨구고 있어서 강성태는 적당하게 화제를 바꿨다. 그런 뒤에 이선정이 박노익을 통해 했던 일들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정신 나간 년. 아가리를 찢어버려야겠네.”

“생각해 놓은 게 있어서 직접 만나볼까 합니다.”

“어쩌려고?”

“그래도 제가 신강남파 두목 아닙니까? 이럴 때 가진 걸 뺏어야죠.”

“뺏어? 뭘?”

“일단 만나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미심장한 강성태의 답에도 조태완은 더 파고들지 않았다.

“저는 잠시 남순이에게 가 있겠습니다.”

“거기 의사 선생도 있으니까 적당히 하고 먼저 서울로 가.”

“봐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보다는 병렬이가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먼저 올라가게 할까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 냄새가 고약해서 올려보낼 참이었다. 너는 그만 일어나서 얼른 병원으로 돌아가.”

“형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가라.”

단호하지만, 나직한 조태완의 지시를 이병렬은 거부하지 못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형님.”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이병렬이 깍듯하게 상체를 숙였다.

핑곗김에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

“치사하게 나만 올려보내?”

“오늘만 움직이고 말 거냐? 내가 다쳤을 때 병원에 가라고 가장 떠들던 사람이 너랑 치곤이야.”

말문이 막힌 모양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이병렬은 고개를 비틀었다. 관광호텔 주차장으로 내려온 강성태는 이병렬이 타고 갈 승용차로 함께 걸었다.

“그년이 진짜 연락하겠어?”

“연락 없으면 연순동이 따귀 맞는 거지.”

걸음을 옮기던 이병렬이 확인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보스가 출발해야 내가 마음 편하게 가지.”

“그러지 말고 얼른 타.”

말만 건넨 게 아니라 강성태는 이병렬이 탈 승용차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보스가 문을 열어줘? 이런 법은 없어.’

이병렬이 얼빠진 듯한 얼굴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 힘든 몸으로 여기까지 와준 거. 그리고 어설펐을지 모를 마무리를 제대로 해준 거. 안산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준 것도. 앞으로도 계속 가르쳐주라. 열심히 배울 테니까.”

강성태를 들여다보던 이병렬이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웃었다.

“타, 얼른.”

“서울에 오면 알려줘.”

“오늘은 안 돼. 나도 개인 시간을 좀 가져야지.”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은 이병렬이 피가 배어 나온 셔츠를 아래로 내려 단정하게 한 뒤에 강성태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 숙였다.

이번엔 강성태가 이병렬을 흉내 내듯 웃었다.

**

평소라면 고요했을 밀동의 밤이었다.

“야, 이 씨발! 703호, 이 개새끼야! 어린 여자애가 네 새끼한테 짓밟혔는데 잠이 오냐, 잠이! 에라, 이 개새끼야! 내일부터 마누라하고 딸 잘 간수해, 이 씨발놈아!”

밀동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두 동짜리 아파트였다. 미끄럼틀 하나 달랑 있는 놀이터 근처에서 덩치 한 놈이 악을 고래고래 질러댔다.

소리를 지르는 놈의 뒤에서는 양손을 앞으로 잡은 넷이 살벌한 표정과 태도로 앞쪽 아파트 건물 7층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네가 그러고 사람이야? 4백만 원? 열세 놈이 4백만 원을 걷었으면, 한 놈당 4십만 원도 안 돼. 이 개잡놈아! 내가 그 돈 줄 테니까 너도 마누라랑 딸 내놔!”

가뜩이나 주변 소음이 없는 동네였고, 있어 봐야 논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가 전부인 장소라 덩치의 고함은 멀리까지 또렷하게 달려갔다.

“우리 보스 조카를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았어? 하여간 밤에 나오기만 해봐! 마누라고 딸년이고 문신 떠서 모조리 섬에 팔아버릴 거니까, 이 개새끼야!”

이제 겨우 10시가 넘어가고, 섬뜩한 고함을 꽥꽥 질러대고 있어서 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두 동짜리 아파트에 불 켠 집은 없었다.

“밀동, 이 씨발 것들아! 어린 애가 그렇게 당했으면 인터넷에 올리든, 신문사에 전화를 하든, 도와줬어야지! 이 개미 똥구멍만 한 동네에 무슨 체면이 있다고 그걸 쉬쉬해가면서 덮어? 그렇게라도 강간범 아버지 똥구멍 핥아가며 빌어먹고 싶든? 그러고도 너희가 사람 새끼야, 이 씨발 것들아!”

욕은 시원시원했다.

더는 참지 못한 누군가가 신고한 모양이었다. 아파트 입구로 순찰차가 달려왔다.

덩치들 앞에서 멈춘 순찰차의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경장과 순경이 내렸다.

“신고가 들어와서 그런데 혹시 고함지르는 사람 보셨습니까?”

한눈에도 욕한 사람이 분명한 덩치에게 경찰은 아니라는 답해달라는 바람이 담긴 질문을 건넸다.

“니미. 여학생이 집단 성폭행당한 건 잘도 덮더니 고함 좀 쳤다고 달려와? 내가 욕한 놈이니까 갑시다. 가서 조서 씁시다.”

“그게 아니라, 하아.”

뭔가를 말하려던 경찰이 답답한 한숨으로 뒷말을 삼켰다.

“조용히 한다고 하면 그냥 돌아갈 테니까 이쯤 하세요.”

그런 뒤에 사정하는 투로 덩치를 달랬다.

“그만하길 뭘 그만해! 야! 703호! 너 이 개새끼! 어디 두고 보자!”

“이 양반이 진짜. 그거 협박죄에 걸려요.”

“협박죄? 그래? 그럼 이왕 걸린 거 실컷 해야 후회가 없지. 야! 703호, 이 개새끼야! 너는 진짜 내가 가만 안 둔다! 너는 그냥 뒈진 거라고!”

“안 되겠네. 그만하시고 얼른 타세요.”

더는 지켜보기 어렵다는 듯 경찰이 마침내 단호하게 나섰다. 그런데도 같잖다는 듯 웃은 덩치는 뒤에 서 있는 네 명을 돌아보았다.

“경찰서에 가 있을 테니까 순서대로 저 개새끼 씹어주고 와.”

“예, 형님. 고생하십시오, 형님.”

답을 들은 덩치가 순찰차로 가서 뒷문을 붙잡았다.

“뭐 해요? 얼른 갑시다.”

워낙 다부진 덩치의 대응에 난처한 얼굴로 입맛만 다실 뿐, 경찰은 쉽게 운전석에 오르지 못했다.

**

때로는 순박한 웃음이 울음보다 슬퍼 보일 때가 있다.

카페를 찾아간 강성태는 그런 느낌으로 이남순을 보았고,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안다미가 지켜주고, 오주환이 함께 있는 데다, 백숙 두 마리, 또 카페에서 파는 빵까지 받은 이남순은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선한 미소를 지었다.

“저, 이제 집에 가면 안 돼요?”

“가면 되지. 피곤해?”

“그런 게 아니라요. 이거 얼른 동생 주고 싶어서 그래요.”

커다란 보물이라도 되는 양, 이남순은 백숙 포장과 빵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럼 지금 일어날래?”

확실히 지적 판단이 부족한 모양으로 일어나자는 순간에 이남순은 겁이 덜컥 난 표정을 지었다.

“남순아. 저기 삼촌들 봐.”

강성태는 커다란 창밖 주차장에 서 있는 박중배와 덩치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 삼촌.”

이남순의 시선이 강성태가 가리키는 최치곤에게 돌아갔다.

“저 삼촌들이 남순이 집 주변을 지킬 거거든. 그거 말고도 누가 뭐라고 하면 바로 주환이한테 연락해. 아니면 삼촌이나 여기 의사 선생님께 전화하든가. 그건 할 수 있지?”

“네.”

두렵기는 한데 백숙과 빵을 가져가고 싶고, 덩치들이 믿음직스럽기는 하나 강성태와 안다미가 끝까지 함께 있었으면 싶은 심정이 이남순의 눈빛과 표정에 온통 묻어났다.

“남순아. 나한테 전화해. 그럼 내가 삼촌께 바로 말씀드릴게. 나는 믿잖아.”

“응. 이제 갈래.”

망설임에 비해 너무도 쉽게 결심한 이남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다미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리와.”

안쓰러운 눈치였다. 이남순을 보며 가슴 한쪽이 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다미는 아픈 환자들을 상대했던 의사인 만큼 그런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표정의 안쪽으로 감췄다.

“힘들면 언제고 연락해. 좋은 일 있어도 그렇고.”

일어선 안다미에게 안긴 이남순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연락 안 할 거야?”

헤어지면 못 본다고 여겼을까?

이남순은 답을 하지 않았다.

엄마, 이모, 언니, 그동안 이남순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그 모든 존재를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베풀어준 안다미가 오늘 밤만이라도 함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어린 소녀의 눈에 가득했다.

백숙과 빵을 동생에게 주려면 이제 헤어져야 한다. 삼각별 승용차를 직접 운전할 정도로 잘난 안다미가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쯤 알지만, 서운한 건 또 서운한 거니까.

“왜 울어?”

손을 든 안다미가 엄지로 눈물을 지워내듯 이남순의 눈가를 닦았다.

“언니가 힘들 때는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

“좋은 생각 하라고요.”

“남순이에게 좋은 일은 뭐야?”

“동생이랑 행복하게 사는 거요.”

부드럽게 웃어준 안다미가 이남순의 머리와 등을 꼭 안았다.

대략 5분쯤 지나서 이남순은 감정을 추스른, 그러나 못내 서운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삼촌이라니까?”

“예.”

빌라에서 고함을 지르던 강성태의 모습을 기억해서 강한 사람은 일단 아저씨로 정해놓은 느낌이었다.

“오 사장님. 함께 가시죠?”

“매번 염치가 없습니다.”

강성태는 오민상, 오주환 부자, 이남순, 안다미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현관을 나선 강성태는 먼저 오민상, 오주환을 보냈다. 그런 뒤에 안다미의 승용차로 움직여 이남순을 조수석에 태웠다.

아무리 시골 동네라고 해도 카페까지 구불구불 온 길을 안다미가 모두 알기는 어려웠다.

“박중배. 앞에서 남순이 집으로 움직여. 따라갈 테니까.”

강성태가 지시했고,

“뒤따르겠습니다, 형님.”

차 문을 잡아준 최치곤이 나직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지켜보던 덩치들이 차례로 상체를 숙였다. 그 모습이 겁나면서도 인사받는 강성태가 한편이라는 사실이 이남순에게 위로가 되는 눈치였다.

카페는 밀동의 외곽에 있었다. 그래 봐야 승용차로 10분쯤 달리면 다시 국도에 들어서는 짧은 거리지만 말이다.

국도가 보이고, 멀리 밀동에서 몇 개 되지 않는 아파트 건물이 보일 때 강성태는 조수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밀동, 이 개 같은 인간들아.

끔찍한 일을 당한 여자아이가 백숙과 빵을 소중하게 품고 있는 게 정상이냐?

저렇게 티없는 아이를, 나쁜 생각이라고는 터럭만큼도 못 하는 아이를 지켜주고 살펴주지는 못할망정, 그걸 짓밟고, 개만도 못한 놈들을 감싸느라고 저 아이에게 손가락질을 해?

생각의 끝에서 분통이 다시 올라온 강성태는 앞에서 들리지 않도록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럴 때 누군가가 어설프게 달려들면 괜히 더 심하게 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묘한 느낌의 웃음마저 나왔다.

강성태가 밀동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 담긴 스마트폰이 울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 나 연순동이오.

연순동의 음성을 듣는 순간, 독이 확 치솟아서 강성태는 눈빛을 가리기 위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해.”

- 합의서는 다 받았소. 그리고 안사람이 잠깐 잘못 판단해서 실수를 했는데….

“연순동.”

강성태는 안다미와 이남순이 함께 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연순동의 말을 잘랐다.

“너는 실수한 거로 해. 나는 나대로 할 테니까.”

- 꼭 그렇게 해야겠소?

연순동이 받아치는 순간, 다행히 차가 이남순이 사는 빌라 앞에 도착했다.

‘잠시만요.’

눈짓을 건넨 강성태는 승용차에서 내려 얼른 걸음을 옮겼다.

- 장인어른이 치매에 걸린 분처럼 정신마저 온전치 못한 상태로 응급수술에 들어갔소. 그런 모습을 본 딸이 순간적으로 분노할 수 있는 거 아니오?

“그래? 그 정도면 순간적으로 나를 죽이라고 시켜도 되는 거야? 그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분노해서 이선정을 죽이라고 지시해도 되냐? 잠시 뒤에 다시 전화할 테니까 대답 똑바로 해라. 그 대답에 따라서 결정할 거니까.”

차갑게 웃은 강성태는 그대로 종료버튼을 눌렀다. 당장 이남순이 빌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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