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 19화
거친 선택을 말리려는 것처럼 여겨지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말려도 들을 생각이 없지만, 그렇더라도 전화는 받아봐야 했다.
“여보세요?”
- 저녁은?
“남순이와 함께 백숙 집에 와 있습니다.”
- 함께 있다면 듣기만 해. 조철호 변호사가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가해자 중 고모와 친구가 이곳 경찰서 직원이고, 가해자 부친 중에 군청 과장도 있어서 조직적으로 사건을 덮는 모양이다.
어쩐지 빌라에서 본 아주머니의 반응이 고약하더라니.
이남순을 안고 대화를 나누던 안다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성태를 살폈다.
- 그래서 말인데. 가해자 놈들을 두들기는 건 잠시 미루고, 아예 밀동을 뒤집는 게 가장 효과가 있을 거라는 조 변의 의견이 있었다.
밀동을 뒤집자고?
안다미를 향해 스마트폰을 가리킨 강성태는 곧바로 홀로 움직였다.
최치곤과 조덕진, 박중배, 덩치들이 몸을 세우며 강성태를 지켜보았다.
“부모들을 잡아서 두들기자는 말씀입니까?”
- 우리 보스가 어지간히 독이 오른 모양이구만. 그게 아니라 보스가 동원할 힘이 있잖아. 소신영 회장과 이세종을 이용해. 사건을 아예 특종으로 전국에 알리자는 거지.
조태완의 제안을 들으며 강성태는 지나치게 흥분했던 모습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폭력조직에 있다고 해서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던 모습을 말이다.
- 그런 뒤에 검찰이 움직이는 거지. 통화기록, 금전 거래 기록, CCTV 영상들을 살피면 가해자 가족과 부모들이 사건을 덮기 위해 손쓴 게 잡히지 않겠어? 특히 그 경찰서 고모와 군청 과장은 분명하게 뭔가 드러날 거 같은데?
조태완이 방법을 제시한 뒤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께서 전화 주시지 않았다면 무턱대고 가해자들을 잡아들일 뻔했습니다.”
- 무슨 소리야? 그럼 그 새끼들을 그냥 두려고?
“예?”
- 서울에서 달려오면 두 시간 안쪽이니까 먼저 방송에 터트려. 그리고 거기 조덕진 있지? 덕진이 시켜서 대전과 주변 소년원 출신 전부 불러들여. 보스가 손 쓰는 것보다 그놈들 서열대로 먼저 밟자고.
강성태가 시선을 돌리자 왼손에 붕대를 감은 조덕진이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숙였다.
- 마지막으로 부모들을 족치는 거지. 어때?
“나쁘지 않네요.”
- 소신영과 고강준이 얼마나 보스의 말을 잘 따를지가 관건이야.
“통화하고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 기다리지.
잔인한 기대를 한껏 품은 조태완의 답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마음은 바쁘지만 하나씩 순서대로 해결할 문제였다. 강성태는 곧장 소신영의 번호를 눌렀다.
**
연순동이 집으로 향한 뒤였다.
빈방으로 들어간 이선정은 스마트폰의 번호를 눌렀다.
- 예, 사모님.
“나예요. 아까 말했던 거 어떻게 됐어요?”
-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통화했습니다. 강남에서 꽤 유명한 조직 두목인데 상장사 거래도 하고 해서 돈도 제법 모은 깡패 두목입니다.
“그래요?”
- 무엇보다 지난번에 검찰에 잡혀갔다가 고작 이틀 만에 구속취소로 나올 만큼 배경도 든든한 조폭입니다.
어제와 오늘을 통틀어 이선정은 처음으로 사이다를 마신 듯 속이 조금이나마 후련했다.
“그 사람에게 강성태를 상대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 예, 사모님. 그랬더니 조용하게 처리할 테니까 이번 일을 꼭 맡겨달라고 했습니다.
아호, 살았다.
강성태, 이 개새끼. 너는 이제 죽었다.
영화에서처럼 스쳐 가면서 푹, 찌르면 강성태가 피를 흘리며 버둥대다가 평생 절뚝이며 살아갈 거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 아무래도 만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화로 하면 안 돼요?”
- 사모님. 앞으로 사모님께서 이사장 자리에 오르실 거라고 믿고 미래를 모두 걸었습니다. 이런 일을 전화로 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보시고, 직접 현찰을 건네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이선정은 결심한 듯 입술을 뒤틀었다.
“알았어요. 약속을 잡아주세요. 이사장님을 돌볼 사람을 불러야 하니까 한 시간 정도 뒤로 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려는 순간이었다.
“저기, 그런데 그 깡패 두목 이름이 어떻게 돼요?”
- 박노익이라고 강남 삼대장 중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힘 있는 깡패 두목입니다.
“알았어요.”
통화를 마친 이선정은 위장약 광고의 모델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강성태 같은 깡패를 고검장이 왜 감싸고 도는지 모른다. 어쩌면 피해자라 우기는 년들 중에 어찌어찌 연줄이 닿았을지 모르고, 아니라면 집을 팔아서 만든 돈으로 로비를 먼저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강성태를 주저앉혀야 잠을 자도 자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될 것만은 분명했다.
잘못되면?
이선정이 직접 찌른 것도 아니고, 연순동이 검사 그만두는 조건으로 덮어달라고 매달리면 그깟 깡패가 칼에 찔린 사건쯤 조용하게 넘어갈 거다. 물론 합의금도 공탁할 거고.
“후.”
숨을 길게 내쉰 이선정은 다시 스마트폰을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건설사에 다니는 연줄이었다.
- 여보세요?
어쩐지 이선정의 전화가 반가운 음성이었다.
“나예요. 혹시 깡패 두목 중에 박노익이라고 알아요?”
- 박노익이면 혹시 강남 삼대장 중 한 명이라는 사람 말씀이십니까?
맞구나! 그럼 됐지.
- 사모님. 무슨 일로 박노익이란 사람을 알아보십니까? 그 사람이 지금은….
“됐어요. 그냥 이름을 들어서 확인하려고 한 거예요.”
혹시나 뒤탈이 있을까 봐 이선정은 상대방의 말을 바로 잘랐다.
- 박노익 회장까지 아시는 걸 보면 확실히 강성태 회장과 연결되시는가 본데 사모님, 제가 한 번만 만날 수 있도록 자리 좀 부탁드립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해?
강성태는 조만간 병원에 입원할 테니까 문병이나 가시지.
이선정은 비릿하게 흘러나오는 잔인한 웃음을 꿀꺽 삼켰다.
“바쁠 텐데 자꾸 전화해서 미안해요. 그럼 이만 끊어요.”
통화를 마친 이선정은 2리터짜리 사이다를 단숨에 들이켠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
확실히 소신영은 이익을 두고 잔머리를 굴리는 한결같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 감사 결과가 나와서 발표만 남은 이세종을 복직시키라면 나는 두 가지나 양보하는 거 아니오? 이면계약 조건을 없애주면 안 되겠소?
강성태는 소신영이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픽 웃었다.
“당신은 3년이 아니라 하루도 함께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여기까지만 하자. 내 말에 안 따르면 어떻게 망가지는지 고강준, 이우섭, 선중일에게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단호하게 말을 건넨 강성태는 바로 종료버튼을 눌렀다.
하여간 얍삽하기는.
이 인간이 열을 세기 전에 다시 전화한다는 데 5만 원 걸 수 있….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은 소신영의 이름이 액정에 올라왔다.
“여보세요?”
- 통화하는 중에 일방적으로 끊지 좀 마시오.
“계속해서 뺨이 간질거리는 모양인데 따르려면 확실하게 따르고, 아니면 분명하게 말해.”
- 크흠.
어떡해서든 체면을 지키고 싶은 소신영의 헛기침이 먼저 넘어왔다.
- 어디로 보내라고 했소?
“밀동. 대전 근처다.”
- 내가 지금 이세종 국장에게 전화해서 용서하고, 바로 보도진을 내려보내겠소. 그런데 말이오. 이면계약은 내가 양보할 테니까 대신 추천하는 건설사 경영진을 좀 만나주는 건 어려울까요?
느닷없이 말투마저 바꿔가며 매달리는 소신영의 끈질김에 강성태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일 이후로 언제고 약속을 정해.”
- 정말 내일 이후로 언제고 되겠소? 괜히 약속했는데 안 나오면 내 사회적 체면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알았으니까 약속 잡아. 그리고 고검장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 고검장이 추천하는 건설사를 만나준다고 약속하면 훨씬 일이 쉬울 듯한데, 그건 어떻소?
“알았다. 그렇게 해.”
- 약속한 거요.
혹시나 강성태가 말 바꿀 것을 염려한 것처럼 통화가 툭 끊겼다.
강성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선 하나는 됐다. 그럼 다음 단계로 진행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덕진. 대전이나 주변에서 여기 밀동 양아치들을 누를 만한 애들이 있나?”
“예? 형님?”
“가해자 놈들 절반이 고등학생이고, 나이가 가장 많은 놈이 스물다섯 살이라잖아. 그걸 우리가 직접 나서는 건 망신스러우니까 가해자 놈들을 다부지게 다룰 만한 소년원 선배나 뭐 그런 애들.”
강성태의 설명을 듣던 조덕진이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밀동 양아치 새끼들이 숨도 못 쉴 놈들을 부르겠습니다. 몇 명이나 부르면 되겠습니까, 형님?”
“최대한 많이 부르면 몇 명이나 돼?”
“여유만 주시면 백 명쯤 부를 수 있습니다, 형님.”
대전 근처에 유독 사고 치는 놈들이 많은 건지, 아니면 도시마다 문제 일으키는 놈들이 그렇게 많은 건지 알 길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중 문제였다.
꿩 잡는 게 매라니까.
“대략 오십 명에서 칠십 명 불러. 그래서 밀동 가해자 놈들 전부 불러내.”
“예, 형님.”
조덕진이 시원하게 고개를 숙일 때였다.
대전 주변의 문제아들을 부르는 건데 박중배의 눈과 표정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
이세종은 죽었다가 깨어난 심정이었다.
- 서운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이번 일을 계기로 청렴한 보도국장이 돼서 편견과 사심 없이 사실만을 보도하는 보도국을 만들어 봐.
“예, 회장님.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공정한 보도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족한 제게 기회를 주신 점, 다음 생까지 회장님을 모시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피를 토하듯 이세종이 의지를 내세운 다음이었다.
- 그래서 말인데 밀동에서 집단 성폭행이 있었던 모양이야. 가해자 고모가 그곳 경찰이고, 부모는 또 군청 과장으로 있어서 조직적으로 덮는 거 같고.
이건 무슨 사인이지?
스마트폰을 귀에 댄 이세종은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습니다, 회장님.”
- 피해자 부친이 하필 또 지체장애가 있어서 협박에 못 이겨 4백만 원에 합의한 모양이지? 그래서 말인데, 그걸 검찰에서 나서서 조사할 수 있도록 확실한 보도가 있어야겠어.
“확실한 보도라면 이 이세종이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회장님.”
- 그렇지. 검찰이 조사에 나설 수밖에 없는 보도, 알지? 사회적으로 문제가 일어나면 시민단체에서 검찰에 고발하겠지? 그럼 검찰이 나서기도 쉬울 테고?
소신영이 바라는 과정을 이해한 이세종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고발할 시민단체까지 섭외하겠습니다.”
- 그렇지. 내가 전화 끊는 대로 국장을 다시 복직시킬 테니까 지금 바로 움직여. 아! 그곳에 강성태 회장이라고 있어.
“예에?”
- 왜 그렇게 놀라?
“아닙니다, 회장님.”
이래서 아침에 조태완이 그렇게 다그친 거구나.
한순간 이세종은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성북구 개발 사업을 다시 맡기려 한다는 조태완의 말은 그냥 던진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모두 이번 범죄에 분노할 보도를 반드시 만들어내겠습니다, 회장님.”
- 내가 자정 전까지는 우리 보도를 지켜볼 테니까 어디 능력을 발휘해 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세종은 멍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돌아왔다, 법인카드가.
되찾았다, 보도국장 자리를.
이런 걸 얻었다면 오전에 맞은 건 아예 꿀 수준이었다.
눈알을 굴리던 이세종은 조심스럽게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회장님. 저 이세종입니다.”
- 연락받았지?
넉넉한 강성태의 음성을 듣자 이세종은 이상하게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 태완이 형님께서 기회를 주자고 워낙 말씀하셔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얼굴 본다.
“지금 혹시 밀동에 계십니까? 제가 두 시간 안에 도착합니다.”
- 우리끼리 할 이야기는 나중에 서울에서 해도 되니까, 나를 찾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보도부터 확실하게 해.
“예, 회장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우리끼리 할 이야기라고 했다. 우리끼리.
성북구 개발 사업 말고 따로 할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이세종의 눈에서 거짓말처럼 광채가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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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익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호텔 라운지에 들어섰다.
“이쪽입니다!”
기흥구는 기업형 암달러 환전상이며, 상장사 주가 조작에도 관여하는 인물이라 박노익과 친분이 깊었다.
안쪽에서 어색한 얼굴로 손을 드는 기흥구를 향해 박노익은 걸음을 옮겼다.
“인사부터 하십시오. 이분은 성공학원 이학의 이사장님의 영애로 현재 재단의 모든 실무를 맡고 계신 이선정 부이사장님.”
박노익은 그러냐는 얼굴로 이선정을 본 뒤에 자리에 앉았다.
“박노익이오.”
그런 뒤에 기흥구가 소개하기도 전에 이름을 밝혔다. 뒤통수를 만지며 입맛을 다신 기흥구가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직원이 다가와서 박노익은 커피를 주문했다.
“아시다시피 내가 직선으로만 살았습니다. 이사장님 일을 제대로 해드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나오긴 했는데 강성태라면 만만치 않습니다.”
기흥구가 화들짝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이선정은 그깟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였다.
“어느 선까지 원하십니까?”
“어험. 제가 급히 전화할 일이 있어서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박노익이 대놓고 위험한 내용으로 화제를 이끌자 기흥구가 다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우리 남편이 중앙지검 형사부장이에요.”
“중앙지검 형사부장이라면, 혹시 연순동 부장검사님이십니까?”
“맞아요. 아시네요?”
이를 지그시 깨문 박노익이 잔인하게 웃었는데 영문 모르는 이선정은 그런 미소가 매우 흡족한 눈치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