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권 - 18화 (290/513)

14권 - 18화

쭈뼛대며 다가오던 이남순이 서너 걸음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걸음을 멈췄다.

“주환이한테 말 들었지?”

답은 없었다.

“나는 성태 삼촌이고, 여기는 의사 선생님.”

강성태의 소개가 있고 나서 이남순의 야구모자 챙이 위로 슬며시 들렸다.

조용한 곳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저녁 먹이고, 아픈 상처를 천천히 들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막막해서 강성태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였다.

야구 심판처럼 몸을 구부린 안다미가 무릎에 양팔을 짚은 자세로 고개를 기울였다.

“눈이 참 예쁘네.”

부끄러웠을까, 아니면 거짓말이라고 여겼을까.

이남순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서울에서 오느라고 언니는 저녁 못 먹었어. 우리 밥 같이 먹자.”

“들어가 봐야 해요.”

“밥도 같이 안 먹어?”

“다 끝났다고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어요.”

“누가?”

“아빠가요.”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말소리였다. 답을 들은 안다미가 몸을 세웠다.

“누구라고 했지? 문자로 연락해 준 친구?”

“주환이요?”

“그래. 주환이. 주환이한테서 말 못 들었어? 여기 아저씨가 힘이 엄청 세.”

누구는 언니인데, 강성태는 아저씨라니?

모자챙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이남순이 강성태를 살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저씨가 된 강성태는 보기 좋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번엔 확실히 부끄러운 눈치였다. 강성태의 미소를 본 이남순이 고개를 떨궜다.

“아빠가 뭐라고 하시든, 남순이가 억울한 거 풀어줄게. 그러니까 여기 아저씨, 언니랑 밥 먹자.”

안다미가 이남순을 달래는 순간이었다.

빌라를 향해 다가온 오십 대 아주머니가 이남순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런 뒤에 빌라로 들어선 그녀가 강성태와 안다미를 돌아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뭐예요?”

“예?”

“기자분이면 괜히 동네 망신시키지 말고 그냥 가요.”

당차게 말을 던진 아주머니가 경멸하는 느낌의 시선으로 이남순을 돌아보았다.

“뭘 잘했다고 이렇게 나와 있어? 얼른 들어가!”

이남순의 고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강성태는 숨을 들이마셨다. 끔찍한 일을 당한 어린 여자아이를 주변에서는 저렇게 구박한 모양이었다.

“누구십니까?”

“뭐요? 나 빌라에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는 댁들은 누구예요?”

“남순이 삼촌입니다.”

“삼촌? 남순이가 삼촌이 어디 있어? 괜한 소리 말고 돌아가요.”

뽀글거리는 파마를 한 아주머니가 확인처럼 이남순을 돌아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남순이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주머니는 이만 올라가세요.”

“아니 그런데 이 양반이 진짜?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위아래가 없어?”

평소라면 나이 든 사람에게 일단 고개 숙였을 강성태였다. 게다가 일반인과는 사소한 시비도 사과하라고 지시했던 참이었다. 그러나 끔찍한 일을 당한 이남순을 멸시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니 그래도 거기 서 있네? 가라니까 뭐 해요? 그리고 남순이 너, 너는 이리와. 얼른!”

아주머니가 거칠게 손을 뻗자 안다미가 그보다 먼저 이남순을 뒤로 감췄다.

“남순이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뭔데? 뭔데 이남순을 마음대로 해?”

“내가 누구인지 알려드릴까요?”

강성태의 눈빛이 바뀌자 그나마 아주머니가 멈칫하고는 동작을 멈췄다.

강성태는 멀찍이 서 있는 승용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박중배! 너 이리 와!”

강성태가 고함을 지르자 무슨 일인가 싶은 최치곤과 조덕진, 그리고 박중배가 급하게 승용차에서 내렸다.

“박중배! 이리 오라고!”

강성태의 고함에 빌라 골목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고, 3층 창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박중배를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이 아주머니 알아?”

“모릅니다, 형님.”

아주머니는 그를 알아봤는데 박중배는 정말 그녀를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아주머니 집 알아둬. 아저씨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자식들이 있으면 어느 학교 다니는지 전부 확인해 놔.”

“예, 형님.”

고개 숙여 답하는 박중배 앞에서 강성태는 시선을 돌렸다. 당당하던 파마머리 아주머니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누구냐고? 그런 아주머니는 얼마나 잘나서 남순이한테 뭐라 하는 건데?”

“아니 그건, 내가 저기 몰라서 그런 건데….”

아주머니는 박중배를 말 한마디로 다루는 강성태가 이제야 켕기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지켜보는 참이었다.

“지금부터 우리 남순이한테 한마디라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똑같이 갚아 줄 테니까 궁금한 사람은 어디 한 번 해봐!”

강성태는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과 빌라에서 고개를 내민 사람들이 모두 들을 정도로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이전에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강성태가 지르는 고함을 들은 최치곤과 조덕진이 덩치들을 이끌고 달려와 뒤를 받쳤다.

“돕고 살자, 좀! 너나 할 것 없이 어렵게 살지만,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으면 일단 품어주자고! 우리 남순이가 뭘 잘못했어? 사람이 개새끼한테 물렸으면 개를 때려야지, 왜 물린 아이한테 뭐라 하냐고!”

눈치를 살피며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던 아주머니가 강성태의 시선을 받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괜한 짓을 했나. 이남순이 놀랐을 텐데.

다행스럽게 놀란 이남순을 안다미가 품에 안고 있었다.

“박중배. 지난번에 내가 봤던 놈들 중 이번 사건에 끼어 있는 놈 있어?”

“예, 형님. 죄송합니다, 형님.”

“네 조카도 있어?”

“그놈은 다행히, 이번 일과 관련 없습니다, 형님.”

다행이다. 진짜 다행인 일이었다. 그 조카라는 놈과 박중배, 그리고 강성태에게 모두.

“조용하게 밥 먹을 장소가 필요해. 오래 앉아 있어도 되는 장소로.”

“백숙 집이 있습니다, 형님.”

“차 돌려서 그쪽으로 안내해.”

고개를 깊게 숙인 박중배가 몸을 돌렸고, 버릇처럼 상체를 숙인 조덕진과 최치곤이 덩치들을 이끌고 승용차로 향했다.

“봤지? 저 아저씨가 남순이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밥 먹으러 가자.”

이남순을 옆구리에 끼다시피 안은 안다미가 흰색 벤츠로 움직였다.

조수석을 연 안다미가 이남순을 그곳에 태웠다. 당연하게 강성태는 조수석 뒷자리에 올랐다.

가격을 알았다기보다는 그저 삼각별 승용차에 탔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이남순이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안다미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벨트 매야지.”

이남순은 순순히 벨트를 당겨 고리에 걸었다.

뒷좌석에 앉은 덕분에 벨트 고리를 향해 고개 숙인 이남순의 옆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동작, 멍한 표정과 눈빛, 부친이 지체장애가 있다더니 이남순 또한 비슷한 증상이 있는 눈치였다.

**

밀동의 덩치들이 얼이 빠질 정도로 움직인 덕분에 조태완과 조철호는 연회장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조태완과 조철호 변호사가 차를 마시는 사이, 숙소별로 호텔 바깥을 지키는 인원을 빼고는 모두 관광호텔 룸에 올라갔다.

둥그런 테이블 일곱 개가 빽빽하게 들어선 연회장 한가운데서 조철호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이건 우리가 힘쓰기 어렵겠습니다.”

“합의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아버지란 양반이 지체장애가 있으니까 협박했는지를 알아보자는데 뭘 그렇게 지레 발을 뻗어?”

“그게 아니라.”

주변을 돌아본 조철호가 조태완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가해자 중 한 명의 고모와 다른 가해자의 친구가 밀동 경찰서 직원으로 있습니다. 가해자 부친 중에 군청 과장도 있고 해서 지역 사회가 가해자를 지키려고 똘똘 뭉친 모양새입니다.”

커피를 머금고 있던 조태완이 꿀꺽 소리를 내며 삼키는 것으로 못마땅한 심정을 드러냈다.

“당장 알아낸 것만 이렇습니다.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한 다리 건너면 경찰서, 군청, 무슨 무슨 위원 해서 서로서로 얽혀 있을 겁니다.”

“그럼 자식새끼들 모조리 죽어야지.”

“회장님?”

놀라서 부르는 조철호를 향해 조태완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아이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건 알지? 그래서 전에 하지 않던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 내가 딸을 얻었는데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할까 하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어떻게 할 거 같소?”

조철호는 흔한 대꾸조차 내지 못했다.

“죽이겠지. 죽여도 곱게 죽이지는 못하지. 내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 발가락, 순서대로 다진 뒤에 거기를 잘라 입에 처넣고서 삼키는 거 보고 난 뒤에 죽일 거야.”

잔인한 눈빛과 표정으로 말을 뱉는 조태완에 질린 조철호 변호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돈을 쓰든, 연줄을 동원하든, 방법을 찾아. 정 안 되면 법정 최고형을 받을 방법이라도 만들어내. 안 그러면 우리 보스가 나서기 전에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알겠습니다.”

눈빛을 번들거리는 조태완에게 조철호는 다급하게 답을 내놓았다.

**

연순동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힘겨운 하루였다.

“당신이 그러고도 검사야! 그러고도 사위고, 내 남편이냐고!”

피해자들이 집에 들러 합의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선정이 엔화와 달러 뭉치를 던지며 고함을 질러댔다.

“내가 이 집에 더러운 년들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이사장님이 그년들 못 만나게 하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맘대로 해라.

합의서를 받은 이후로 진이 쪽 빠진 연순동은 마누라가 아무리 짖어도 아침은 온다는 심정으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하! 우리 이사장님 불쌍해서 어떻게 해?”

한탄하던 이선정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시선을 들었다.

“당신은 집에 가.”

가뜩이나 자리를 피하고 싶던 연순동이었다. 심지어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두고 봐. 내가 강성태란 놈을 어떻게 하는지.”

그러나 현관으로 걷던 연순동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왜? 내가 못 할 거 같아?”

“후-.”

“한숨이 나와, 지금? 이사장님이 당신 승진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안다면…. 아니다, 알면 그년들을 집으로 불렀겠냐?”

연순동은 이선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선정은.

그와 동시에 조만간 손자국을 선명하게 뺨에 찍은 이선정이 악마가 어쩌느니, 문을 잠그라느니, 하며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볼 거 같다는 나쁜 상상을 떠올렸다.

그래서였을까, 연순동의 왼쪽 눈과 볼이 갑자기 욱신거렸다.

**

밥을 먹으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남순은 착했다. 그리고 순박했다.

정신지체, 어려운 가정 형편,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착하고 선한 성품을 지니며 성장한 아이였다.

백숙을 앞에 두고 자기가 안 먹을 테니 동생을 위해 싸주면 안 되냐는 질문을 건넬 때, 꿈 같은 거 없다며 부끄러워할 때, 지금 당장 소원 하나가 이뤄진다면 동생 옷을 사주고 싶다고 말할 때, 강성태는 아프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치하지만 말이다.

강성태가 강할수록, 그리고 강한 삼촌이 생겼다는 사실을 확인할수록 이남순은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쭙잖은 보스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백숙 두 마리만 포장해 놔.”

“예, 형님.”

“두 마리나요?”

“왜? 부족해?”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이 개새끼들.

이런 아이를 그렇게 짓밟으면서 죄책감이란 게 없었냐? 있었다면 어떻게 통화하라고 만든 스마트폰으로 녹화까지 할 수 있었던 거냐.

책상 아래로 내린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강성태가 분노를 삭일 때였다.

“남순이는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저는요. 그냥 아프지 않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이남순의 답을 들은 안다미가 강성태를 아프게 바라보았다.

“동생이 많이 울 거잖아.”

“오빠들이 동생도 자꾸 데려오라고 문자 해요. 데려오면 2만 원 줄 거고, 아니면 가만 안 두겠대요.”

“여기 아저씨가 남순이랑 동생 지켜줄 거니까 절대 부른다고 가면 안 돼. 알았지?”

고개를 떨군 이남순이 느닷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안다미가 팔을 뻗어 안아주자 이남순은 고개를 기울인 채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슬프다기보다는 뭔가 더 무서운 일이 있는 눈치였다.

뭐가 더 있나?

“괜찮아. 아저씨가 지켜줄 거야.”

안다미가 다독이고도 한참을 더 울고 난 뒤였다.

코를 훌쩍인 이남순이 상체를 세웠다.

“언니. 나 생리가 없어요.”

“그래? 예정일이 언제인데?”

강성태를 앞에 두고 오갈 대화는 아니었다. 그만큼 이남순의 심리 상태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고, 이렇게 의지할 여자 어른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강성태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비웃는 거 아니다. 워낙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그냥 나온 웃음이었다. 혹시 웃는 얼굴을 이남순이 볼까 걱정돼 방 바깥의 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손님들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들어온 가게였다.

강성태 앞에서 떠들 간 큰 사람이 없는 탓에 가게 안이 조용했고, 그 덕분에 홀에 있는 최치곤, 조덕진, 박중배, 덩치들이 이남순과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특히 최치곤은 정말이지 살인마와 같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강성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냥 나한테 잡아오라고 시켜.’

조태완이 괜찮겠냐고 질문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최치곤을 내보내면 분명 사고 터진다. 그런데 말이다. 더 참다가는 심장이 터져 죽을지 모르니까 살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마음을 굳힌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액정에 조태완의 이름이 올라왔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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