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권 - 16화 (288/513)

14권 - 16화

무릎까지 오는 타이트스커트에 블라우스, 감색 정장을 입은 안다미는 머리를 풀어 끝을 안쪽으로 말아 넣은 모습이었다.

흰색 벤츠가 멈추고 그녀가 내릴 때 최치곤이 눈을 껌벅일 정도로 미모가 돋보였는데, 굳이 표현하라면 부유한 집에서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란 외동딸 느낌이었다.

최치곤을 향해 눈인사를 전한 안다미가 시선을 가져왔다.

“목적지를 어디로 정하면 돼요?”

“밀동 군청으로 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지금 출발하는 거죠?”

속초 바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가와 볼에 옅은 화장기가 올라와 있었다. 안다미 나름으로 제대로 하는 첫 데이트에 꽤 신경 쓴 것만은 분명했다.

“치곤아. 출발한다.”

“뒤따라 갈게.”

최치곤도 함께 가는 거냐는 투로 돌아보았던 안다미가 다른 말 하지 않고 운전석에 앉았다.

강성태가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는 동안, 안다미는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조수석을 붙잡고 상체를 뒤로 돌린 안다미가 능숙하게 차를 뺀 뒤에 왔던 길을 따라 큰 도로로 향했다.

의사를 그만둬도 충분히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안다미를 수렁으로 빠트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안했고, 그 탓에 강성태는 어쩐지 주눅 드는 느낌이었다.

“소아한테 계속 전화가 온대요.”

큰 도로에 들어선 안다미가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먼저 말을 건넸다.

“응급 수술을 받을 정도로 크게 다쳐서 도저히 못 움직인다고 매달렸다네요.”

“누가요?”

“연순동이라고 함께 왔던 검사가 나왔대요. 그래서 무릎 꿇고 하는 사과받으러 이학의 이사장 집으로 가기로 했다고요. 끝나는 대로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는데 별일 없겠죠?”

강성태를 돌아보았던 안다미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운전을 해야 하는 탓에 바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말하지 않은 다른 일 있어요?”

“그냥요. 모처럼 바다나 보러 갈까 했는데 이렇게 밀동에 가게 된 게 미안하기도 하고.”

“하고, 또 뭐요?”

“수술복, 청바지를 입을 때와 다르게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공주님을 넘보는 알라딘의 심정이 바로 이해됩니다.”

강성태의 말을 들은 안다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앞에 차요!”

강성태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앞차의 범퍼를 가볍게나마 들이받을 뻔했다. 그제야 시선을 앞으로 돌린 안다미가 재미있는 일을 떠올린 사람처럼 웃었다.

“바다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일찍 끝나면 둘이 서해 쪽이라도 돌아보고 오면 되죠.”

최치곤이 들으면 화들짝 놀랄 제안을 건넨 안다미가 핸들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내렸다. 그런 뒤에 강성태의 손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꽉 잡았다.

“이미 내 손에 이렇게 꽉 잡혔으니까 어설프게 빠져나가려는 생각은 버려요.”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강성태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고, 이어 안다미가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병실에서 확신했어요. 성태 씨가 다쳐 오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요. 마약을 막았든, 누군가 위급한 사람을 도왔든, 내게 당당할 수 있는 남자라고요. 확인하고 싶어서 내가 던졌던 질문에 그렇다고 답도 해줬고요.”

강성태의 손을 당긴 안다미가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팔을 뻗어야 하는 강성태의 자세가 조수석에서 운전석 쪽으로 기울었다. 게다가 손에 전해지는 감촉이 자극적이어서 강성태는 팔을 빼내려 슬며시 힘을 주었다.

“어허! 가만있어요.”

웃음이 터지는 안다미의 반응이 있었다.

“침대 옆에서 자는 것도 가만두더니 이건 못 견디겠어요?”

“뭔가 바뀐 거 아닙니까?”

“싸울 때는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로 강한 남자가 이런 면에서는 숙맥이니까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나서야지.”

장난처럼 말을 쏟아낸 안다미가 강성태의 손을 올려서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놓아주었다.

“우리끼리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의사들이요. 정신 건강도 건강이라고요. 실제로 스트레스가 병을 유발하는 첫 번째 요인이라는 논문도 많고요.”

안다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팔다리가 잘려 피를 흘리는 사람은 위독하다고 여기는데, 정신이 무너져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살피기는 어렵거든요. 내가 육체를 고친다면 성태 씨는 정신이 무너진 사람들을 고치는 거라고 믿어요.”

“너무 거창하지 않아요?”

“더 할 건데요? 억울하게 쓰러진 사람을 지켜주고, 이 사회에 썩은 부위를 도려내잖아요. 마약도 막고, 또 뭐가 있지? 아! 마약을 막기 위해 여자랑 호텔 룸에 들어가기도 하네요.”

확실히 강성태는 안다미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여자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올림픽 도로를 달린 승용차가 고속도로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움을 간절하게 바라는 여학생을 외면하고 나와 바닷가에 갔다면 정말 실망했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선택한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자랑스러워요.”

핸들을 잡은 안다미가 쭉 뻗은 도로를 향해 의지를 밝혔다.

**

스마트폰을 귀에 댄 조덕진은 표정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 동생들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손가락 잘랐으니 체면이 서지 않겠지. 그걸 만회해 보겠다며 동생들과 달려들지, 아니면 우리 보스 믿고 조직을 정비하든지, 결정은 네 몫이다.

조태완은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음성으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형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나라면 너를 따르는 놈들만이라도 데리고 오겠다. 따라나서는 놈이 한 명도 없으면 혼자라도 움직일 거고. 솔직하게 가자. 힘들면 힘들다고 보스에게 사정을 설명해.

조덕진의 질문에 조태완은 막힘이 없었다.

- 내가 아는 우리 보스는 너와 함께 달려가서 대전 조직 새롭게 꾸며줄 사람이지, 솔직하게 달려온 너를 구박하지는 않을 거다.

“흠.”

- 대전? 내가 태완이파 꾸리던 시절에도 너는 내 상대가 아니었어. 내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린다고 생각되면 동생들 데리고 또 달려들어 봐. 대신 뭘 선택하든 한 가지만 해라. 나처럼 보스를 따르며 살 건지, 되지도 않게 연장 들었다가 신호남파 문도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섬뜩한 경고를 끝으로 배경처럼 들려오던 승용차 달리는 소리가 끊겼다.

표정만큼이나 무겁게 숨을 내쉬던 조덕진은 손가락이 잘린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두껍게 붕대를 감아놓았는데 욱신대는 통증보다 간지러운 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것도 희한하게 잘린 손톱 부위가 가렵다는 느낌이어서 해결할 방법조차 없었다.

없어진 손톱처럼 헛된 꿈을 꿀 것이냐, 손가락이 잘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냐.

생각에 잠겼던 조덕진은 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숙소에 연락해서 애들 전부 불러. 정장에 연장 챙겨서 밀동으로 우선 출발하라고 하고, 너도 차에서 기다려.”

“예, 형님.”

앞에서 지켜보던 덩치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

연순동이 방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히익.”

비명을 지른 이학의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아버님?”

놀란 연순동이 다가갔을 때, 이학의는 완전히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이 악마야. 방에서 나가!”

“아버님, 제발 정신을 붙드세요.”

혼미한 이학의의 시선이 연순동을 향해 몇 차례 끔벅였다.

“문을 닫아. 아니다. 잠가라. 안 그러면 악마가 언제 들어와서 또 나를 때릴지 몰라.”

숨겨놓은 달러와 엔화를 가져오라며 이선정을 내보냈고, 사과를 받겠다며 피해자들이 도착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학의의 상태가 무릎을 꿇고 사과는커녕,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긴,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따귀를 맞았고, 쓰러진 뒤에 짓밟힌 데다, 마지막에는 조소아가 이마를 밟게 했으니, 연순동이 보기에도 강성태의 매질을 잔인했다.

‘지독한 새끼.’

마음속으로 욕을 하기는 했지만, 연순동도 강성태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검사실에 불려온 여자 중에는 발을 들이미는 순간에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잦았다. 그냥 검사실의 분위기와 연순동이 무서워 그런 건데, 내내 그런 반응을 통쾌해하기만 했지, 이렇게 실감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버님. 피해자들이 왔습니다. 사과하시고, 합의서만 받으면 앞으로 강성태를 만날 일이 절대 없습니다.”

“뭐라고? 강성태가 왔다고?”

“그게 아니고요. 피해자들에게 사과만 하면 다시는 못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악마가 다시는 못 온다고?”

“예. 대신 피해자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셔야 합니다.”

치매 걸린 노인을 대하듯 연순동이 내용을 설명했다. 시간을 두고 놀란 심정이 가라앉도록 다독이고 싶었는데 행여나 이선정이 도착하면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 서둘러야 했다.

“일으켜.”

정신이 돌아온 모양으로 이학의의 눈에 옅은 총기가 돌아왔다.

판다처럼 눈이 멍든 연순동이 수박처럼 얼굴 전체가 부어오른 이학의를 부축해 일으켰다. 차라리 전체가 동그라면 보기라도 나으련만 이마 위는 정상이어서 꼭지가 볼록 나온 배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학의를 힘겹게 부축한 연순동은 피해자들이 기다리는 거실로 나섰다.

긴장한 얼굴로 소파 주변에 있던 피해자들이 이학의를 보고는 대부분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가 잘못했소. 제발 합의만 해주시오.”

피해자들을 본 이학의는 연순동의 손을 놓으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피해 금액을 돌려드리겠습니다. 합의금도 드리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합의해주시오.”

참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연순동, 큰절을 올리듯 바닥에 숙인 이학의, 그리고 이가 부러져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그의 사죄가 피해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만하라고 그렇게 사정했는데 왜 그랬어요?”

“내가 잘못했소.”

“선생 자리 싫다고, 그냥 보내달라며 매달리는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요!”

“내가 잘못했소.”

약속대로 무릎 꿇었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는 게 의아했지만, 엉망이 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도 내놓았다.

“들어서 알겠지만, 보다시피 너무 심하게 당하셔서 정신까지 혼미하십니다. 이 정도에서 합의를 부탁합니다.”

손수건을 움켜쥔 채 우는 피해자,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피해자, 그동안 억울했던 심정 탓에 눈에 파랗게 독기가 피어난 피해자, 반응은 모두 달랐다.

“합의서 주세요.”

그러나 연순동과의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다.

연순동이 이미 문자로 보내주었던 합의서 출력본을 내놓았다. 꼼꼼하게 내용을 살핀 피해자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순서대로 이름을 적었고, 사인과 지장까지 찍었다.

“합의금은 오늘 중으로 약속한 계좌로 입금하겠습니다.”

입금증이 없으면 어차피 합의서는 무효라고 적어놓아서 피해자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합의서를 모두 걷은 연순동이 길었던 하루만큼이나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서해주시오.”

넋이 반쯤 나간 이학의는 아직도 바닥에 엎드려 피해자들을 향해 인형처럼 고개를 조아리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연순동에게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이 피해자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눈치였다. 더럽다는 시선으로 이학의를 돌아보던 피해자들이 마침내 집을 나섰다.

“용서해주시오.”

“아버님.”

“흐익. 저리 가! 시키는 대로 사과하는데 왜 나한테 이래?”

“다 끝났습니다. 합의서 전부 받았으니까 이제 진짜로 강성태를 만날 일이 없습니다.”

연순동이 쏟아낸 말을 들은 이학의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하는 사람들마저 모두 내보낸 상황이었다. 이학의의 상체를 끌어올린 연순동은 낑낑대며 움직여 그를 침대에 눕혔다.

“후우-.”

응급 수술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 몸이야 낫겠지만, 나이 든 이학의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게 사람을 죽인 거랑 뭐가 달라?”

아직 남은 분한 심정에 혼잣말을 내뱉던 연순동은 거실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사님이 나를 또 죽이는 거예요. 성폭행당했던 그날 죽은 나를 검사님이 또 죽이는 거라고요.”

언젠가 무혐의로 사건을 종결하자 연순동을 향해 피해자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

밀동에 들어선 건 오후 6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군청으로 차를 몰던 안다미가 로터리 형태로 서 있는 도로 중앙의 커다란 나무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많이 불렀어요?”

조직에 어느 정도 적응했던 안다미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밀동 군청 앞과 왼편에 마련한 공영주차장에 검은색 승용차와 회색 승합차들이 가득했고, 짙은 색 정장을 입은 덩치들이 글자 그대로 새카맣게 서 있었다.

안다미가 운전하는 흰색 벤츠를 따라 똑같이 움직이던 고개가 공영주차장 앞쪽에서 멈췄다. 다들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는데 선팅 탓에 강성태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뒤편에 비슷하게 멈춰 선 최치곤이 빠르게 다가와 조수석의 문을 붙들었다.

“먼저 내릴게요.”

“나는 차에 있을게요.”

안다미가 답을 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강성태가 차 밖으로 나간 순간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앞쪽에 있던 덩치들이 먼저 상체를 기울였고, 이어 물결치듯 뒤편의 덩치들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대전의 조덕진이었다. 왼손 끝에 붕대를 한 그가 충직한 부하처럼 강성태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태완이 형님께서 연락 주셨습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조덕진을 향해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독일제 대형 세단과 국산 대형 승용차, 승합차들이 줄줄이 도로 중앙의 나무를 돌아 공용주차장으로 다가왔다.

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김정훈이었다. 그 뒤에서 덩치들이 줄줄이 내려 강성태를 향해 섰다.

“늦었습니다, 형님.”

김정훈이 고개 숙인 뒤로 덩치들이 서열에 따라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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