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 15화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밀동 오주환인데?”
최치곤의 말을 듣는 순간, 강성태는 오후 5시에 보자던 안다미를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언제고 전화하라고 했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조금이라도 위태롭다고 느끼면 바로 연락하라고 당부했었다. 더구나 번호를 입력하고 처음 온 연락이어서 무조건 받아야 하는 전화였다.
“여보세요?”
- 삼촌. 저 주환인데요.
“그래. 주환아. 무슨 일이야? 혹시 애들이 너 건드려?”
의자에 앉아 있던 최치곤이 몸을 세우며 강성태의 통화를 지켜보았다.
- 삼촌. 그때 저더러 불러오라던 여자애 기억하세요? 이남순이요.
“알지. 네가 그거 거부했다가 당했던 거잖아? 왜?”
쭉 진행되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전화는 했는데 막상 내용을 말하려니 입이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주환아. 삼촌한테 말 못 할 일이 뭐가 있어? 왜? 또 그 여자애 데려오래?”
- 남순이가요. 여러 명한테….
강성태는 눈가를 좁히며 오주환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때 오주환을 괴롭히던 놈들이 이번에는 여자애 하나를 두들겼다는 건가? 아니면?
차마 떠올리기 싫은 상상에 강성태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주환아. 괜찮으니까 있는 대로 말해.”
- 여러 명이 나쁜 짓을 했어요. 그런데 자기 발로 찾아와서 했다고 우기면서 합의해달라고 하나 봐요. 사진이랑 동영상 찍은 거 퍼트린다고 협박하고요.
“경찰에 신고는 했어?”
- 저랑은 문자 하거든요.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 오히려 더 괴롭히나 봐요. 여동생이 있는데 데리고 함께 오지 않으면 영상 퍼트린다고 해서 차라리 죽으려고 한대요.
오주환은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 아빠하고 엄마는 제가 전화 드린 거 몰라요. 삼촌. 도와주세요.
강성태는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게 들어온 햇살이 안다미와의 약속 시각이 다 되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이남순하고 문자 한다고 했지? 내가 지금 내려간다고 알려주고 조금만 참으라고 설득해. 할 수 있지?”
통화를 지켜보던 최치곤이 ‘다미 씨는 어쩌려고?’ 하는 질문을 입 모양으로 던지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삼촌.
“지금 출발할 테니까 조금 뒤에 보자.”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착잡한 얼굴로 최치곤을 돌아보았다.
“밀동에 가려고? 다미 씨하고 약속은?”
“일이 크다. 언제고 연락하면 가기로 했었고.”
“무슨 일인데 그래? 그냥 내가 다녀올게.”
“너는 당연히 같이 가야지.”
안타까워하는 최치곤을 보며 강성태는 먼저 쓰게 웃었다.
“주환이는 알잖아? 그때 이남순이란 여자애를 불러오라는 걸 거절했다가 당했던 거. 그 여자애를 여러 명이 어떻게 했나 보다.”
“뭐? 걔들 지금 고등학생이잖아? 1학년?”
“그러니까 무조건 가봐야지.”
“이런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 진짜!”
강성태의 말을 들은 최치곤이 뜨거운 김을 뿜어냈다.
“밀동은 대전에서도 진짜 하부조직이거든. 그러지 말고 대전 덕진이 형님을 보내. 그쪽에는 대전 식구들이 저승사자야.”
“어린애가 삶을 포기할지 모를 고통에 시달려. 우리가 이러고 다니는 이유가 법의 바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거잖냐. 누가 뭐래도 나한테 도움을 청한 일이다.”
말을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찾았다.
“차 좀 준비해.”
“알았어.”
강성태의 의지를 확인한 최치곤이 무거운 얼굴로 빌라를 나섰다. 약속을 취소해야 하는 강성태를 지켜보기 어려워 자리를 피하는 느낌도 들었다.
안다미의 번호를 누른 다음이었다.
- 성태 씨. 아직 30분 남았는데 벌써 도착했어요?
묘한 설렘과 흥분이 담긴 안다미의 대꾸가 건너왔다.
“저기, 일이 좀 생겼어요.”
강성태는 먼저 오주환과의 인연과 이전에 했던 약속을 간단하게 설명했고, 이어 조금 전의 통화에 관해 들려주었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그런 아이가 끔찍한 고통에서 죽음을 떠올린다며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다미 씨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은 밀동에 가야 합니다.”
기껏 잡은 상견례는 상처 때문에 못 가고, 처음으로 제대로 하는 데이트는 도움 요청에 달려가느라 취소하는 꼴이었다.
서운한 심정은 강성태도 안다미 못지않았다. 그래서인지 강성태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 지금 어딘데요?
“빌라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 그럼 내가 지금 빌라로 갈게요. 함께 가요.
“예?”
- 어린애가 지금 얼마나 두렵고 겁나겠어요? 여학생이니까 내가 도움될 거예요. 그러니까 함께 가요. 조금 뒤에 봐요.
말릴 틈도 없이 통화가 끝났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강성태는 어린 깡패들을 떠올렸다.
이병렬이 나서서 개 패듯 두들긴 덕분에 오주환은 별일 없이 지냈다. 하지만, 그때 불러내라던 이남순을 향했던 탐욕을 끝내 멈추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린놈들이었다.
어쩌면 매가 약이 돼서 반성할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한번 미쳐버린 개새끼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미친 개새끼로 남는 모양이었다.
왜 사람의 영혼을 짓밟는 일이 이토록 쉽게 일어날까?
추악한 짓을 하고도 별 탈 없이 지내는 이학의 같은 놈들의 사례를 보면서 어린놈들마저 지역 사회라는 얄팍한 테두리에 숨어 온갖 추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하나 또 배웠다.
당시에 이병렬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라는 교훈을 밀동의 어린 깡패들이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죽고 싶어?
그럼 죽어야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이병렬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어디냐?”
- 안산. 왜? 여기 오려고?
“일단 들어.”
오주환을 알고 있는 이병렬이라 상황을 설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이런 개 씨발 새끼들! 내가 갈게. 낫으로 가운데를 죄 잘라서 개한테 먹여 버리고 올 테니까 그냥 있어.
“이건 내가 한다. 그러니까 안산하고 안중 정리하는 데 신경 쓰고, 대신 대전 조덕진 전화번호 좀 알려줘.”
- 할 수 있겠어?
“지난번에 배웠잖아. 알아서 할 테니까 맡겨둬.”
- 동네에 무슨 더러운 수맥이 흐르나? 애새끼들이 왜 그렇게 악질이야? 하여간 긴장 타고 있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전화 줘.
“알았다. 번호 보내줘.”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종료버튼을 누를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이번에는 조태완의 번호가 액정에 올라왔다.
“강성태입니다.”
- 통화돼?
“말씀하세요.”
- 이세종이 말이야. 조금 전에 보냈다. 확실하게 단도리는 했는데 신뢰라는 게 없이 태어난 놈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속초에는 언제 출발해?
“못 갈 거 같습니다.”
- 왜? 다른 곳에 가려고?
본의 아니게 강성태는 밀동의 일을 조태완에게까지 설명했다. 그사이 이병렬이 보낸 문자가 들어오는지 스마트폰이 짧게 한 번 울었다.
- 그걸 왜 보스가 직접 가?
“약속했던 일입니다. 혹시 다음에 기회 되면 부탁드릴 테니까 그때도 이번처럼 예약 도와주세요.”
- 예약이 문제야? 가만? 밀동이면 대전 근처 아냐?
“그렇지 않아도 병렬이한테서 조덕진의 번호를 받았습니다.”
- 그 새끼. 아직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을 텐데? 아랫놈들이 엉뚱한 짓을 할지도 모르고. 일단 알았어. 몸조심해.
“다녀와서 전화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현관을 향해 움직였다.
최치곤에게 변한 내용을 설명한 뒤에 안다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
통화를 마친 조태완은 잠시 눈가를 좁히며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잠시 고민한 다음이었다.
스마트폰을 든 그는 바로 번호를 눌렀다.
“나요. 밀동에서 고등학생 한 명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있나 본데, 그거 제대로 엮으려고 하거든. 지금 그리 갈 건데 시간 되시나? 아무래도 조 변이 직접 나서주면 고소 진행에 도움이 되겠지. 그렇지. 어떻게? 내가 그리 가? 아니면 알아서 출발할 거야?”
조철호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 조태완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출발해요. 나도 지금 갈 테니까.”
통화를 마친 조태완은 현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그가 고함을 버럭 지르자 현관이 열리며 김정훈이 들어섰고, 안쪽에서 오세아가 놀란 얼굴로 황급하게 나왔다.
“연락 돌려서 강남 쪽 숙소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인원 전부 밀동으로 출발하라고 해. 모이는 장소는 가면서 알려준다고 하고. 보스가 직접 나선 일이니까 너도 내려가서 차 준비해.”
“예, 형님.”
급하게 고개를 숙인 김정훈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몸을 일으키는 조태완을 오세아가 겁먹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내가 말했지? 옛날에는 괴물로 살았는데 이제는 더러운 걸 치우는 청소부가 돼보겠다고. 밀동에서 여자애 하나가 집단 성폭행을 당한 모양이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는 오세아를 조태완이 조심스럽게 당겨 안았다.
“우리 보스가 그곳에 간단다. 그것도 사랑하는 의사 선생과의 첫 번째 데이트까지 포기하고서. 그러니까 나도 가야지. 가서 진짜 청소부 역할을 해야지.”
고개를 뒤로 뺀 조태완이 오세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다고 과거에 내 손에 묻혔던 피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 보스를 따르다 보면 애가 생길 때는 피 냄새가 조금이나마 덜하지 않을까 싶다. 다녀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
오세아의 등을 다독여준 조태완이 몸을 돌렸다.
**
이선정은 머리꼭지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나올 것처럼 분통을 터트렸다.
“당신 미쳤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더러운 년들을 불러요, 부르기를?”
“그럼 어떻게 해? 그것들이 단체로 연락하면서 아예 딱 선을 정해놨는데.”
“합의하기 싫으면 관두라고 해요. 선생질하겠다고 몸 로비한 것들이 감히 어딜 들어와요?”
“합의 안 하면?”
“내가 지금 지방에 있는 깡패들 알아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는 좀 나가 있어.”
분통을 터트리는 이선정을 향해 이학의가 파리 쫓듯 손등을 바깥으로 저었다.
“이사장님!”
“나가 있으라고.”
아버지는 이사장, 남편은 검사님으로 부르던 이선정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입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학의가 눈알을 옆으로 굴리자 어쩌지 못하고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남들 눈이 있어서 자정에 응급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전에 끝낼 수는 있겠냐?”
연순동이 나갔다 온 사이에 감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이학의는 기가 완전히 부러진 모습으로 질문을 내놓았다.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아버님께서 무릎 꿇고 사죄하시면 합의하겠답니다.”
말을 들은 이학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젊은 여선생들에게 나쁜 짓을 할 정도로 팔팔하던 이학의가 갑자기 여성 호르몬이 많아진 건 아닐 테고.
참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연순동 앞에서 이학의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아니, 닦을 정신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까 너 나간 사이에 의사가 놓아준 주사 때문인지 깜박 잠이 들었는데 10분 만에 깼다. 지금도 저 문을 열고 강성태란 놈이 들이닥칠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버님?”
“끝내자.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고개를 조아리라면 조아릴 테니까, 어떡해서든 합의만 해라.”
그토록 에너지 넘치던 이학의는 어디 가고, 지금은 완전히 기운이 빠진 늙은 남자가 누워 있었다.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다.”
한 마디를 더한 이학의가 또다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무릎 꿇는 거 보면 피해자들 머리끄덩이라도 잡겠다며 달려들지 모르니까 선정이를 먼저 어디로 보내. 아니면 그 여자들을 이 방으로 데려오든가.”
“저 사람은 제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럼 불러와. 내가 심부름을 시킬 테니까. 몇 시에 온다고 했냐?”
연순동은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 뒤에 도착할 겁니다. 앞에 와서 전화하기로 했습니다.”
“녹취는 몰라도 카메라로 찍는 건 막아.”
“그건 안 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됐다. 어흐흑. 어흐으.”
상황을 확인한 이학의가 느닷없이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입을 제대로 놀리지 못해서 더욱 비참하게 들리는 울음이었다.
“저 문으로 강성태가 들어올까 봐 무서워. 어흐으.”
“아버님. 기운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따귀를 맞을 때 세상이 아득아득했는데, 흐으으. 이가 부러진 자리가 아플 때마다 그 순간이 떠올라.”
고문을 심하게 당한 사람들이 평생 폭력의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리고, 또 인간성이 짓밟힌 순간을 잊지 못해 고통받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연순동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있는 데다, 평생 물려받은 재단과 재산으로 호령만 하던 이학의라 심하게 맞고 난 뒤의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하오.”
연순동은 답답한 심정에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검사였다. 그것도 형사부장의 직책을 달고서 깡패에게 개 맞듯 맞았다. 그런데도 구속해서 엄벌에 처하기는커녕,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연순동도 누군가 가슴에 손을 넣어 심장을 꽉 움켜쥔 것처럼 뻑뻑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어서,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건 아닌가 걱정마저 할 정도였다.
“이제 나가서 선정이를 불러와.”
울음을 수습한 이학의의 지시에 연순동은 몸을 일으켰다. 그 직후에 정신이 어찔해서 비틀하고는 몸을 휘청였다.
몸을 바로 세운 연순동은 억지로 숨을 들이마신 뒤에 걸음을 옮겼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지옥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