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 14화
제5장. 불똥이 탁 튀면, 아, 성태 씨….
핏물이 가득한 눈에 손자국이 분명한 뺨을 한 연순동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 그래서? 나더러 합의서를 받아달라는 건 아니지?
앞뒤 정황을 듣고 난 고강준이 너무도 뻔뻔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어쩌랴. 고강준이 하늘 같은 윗사람이고, 눈 밖에 나면 변호사조차 해먹기 어려운 처지인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초침이 흘러갈수록 악마 같은 강성태가 정한 시한이 연순동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고검장님. 그렇다면 하루만이라도 여유를 더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 야, 인마. 몇 명이나 된다고 그걸 구걸해? 너 혹시 나한테 말한 거 말고 더 있어? 피해자가 수십 명 단위야?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다만, 피해자들끼리 연대한 것처럼 똑같은 답을 내놓으며 버티는 바람에 그렇습니다.”
- 참나. 그래, 피해자들이 똑같이 내놓는 답이 뭐야?
“이사장님께서 직접 사죄해야 한답니다.”
재미있다는 투로 웃는 고강준의 웃음이 스마트폰을 타고 넘어와 연순동의 귀를 후벼 팠고, 이어 심장을 찔렀다.
- 그럼 모시고 다니면서 사죄해. 그게 당당한 대한민국 검사의 모습 아냐? 그걸 하나 해결 못 해서 시간을 더 달라고 조르다니, 너 사건 한두 개 해결했어? 피해자들이 원하는 게 확실하면 그거 말고 답 없어. 몰라?
터질 듯한 울분을 삼키느라 연순동은 답을 하지 못했다.
- 그런데 이 새끼가 요즘 자주 불만을 드러내네? 너 정말 내가 이 사건 제대로 파볼까?
“아닙니다. 상처가 울려서 잠시 말을 못 했습니다.”
- 잘해라, 잘. 좀!
통화를 마친 연순동은 뜨거운 숨을 푹 내쉬었다. 더는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우선 피해자 중에서 두 명 정도를 만나보고 그들의 반응을 보며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
건물의 1층으로 내려온 조태완은 상체를 깊게 숙이는 이세종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뭐야, 이 새끼야?”
“예?”
대뜸 날아간 조태완의 욕에 이세종이 화들짝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야. 거기 창문 블라인드 좀 내려. 거기, 너는 가서 배트 하나 가져오고.”
덩치들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이세종은 그야말로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여기 있습니다, 형님.”
덩치 하나가 손잡이를 위로 해서 배트를 내밀자 조태완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예, 형님.”
이세종이 특히 무서워하는 김정훈이 고개를 깍듯하게 숙인 뒤에 배트를 붙들었다.
창을 가리는 것과 동시에 컴컴해진 실내, 빙 둘러싼 덩치들, 배트를 쥐고 눈빛을 빛내는 김정훈, 그 모든 이들을 눈짓, 손짓 하나로 거느리는 조태완.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과거 얻어맞았던 순간이 떠오른 이세종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매달렸다.
“너란 새끼가 주인을 안 가리는 건 알지만, 최소한 밥 주는 손은 물면 안 되지. 안 그러냐?”
“예, 형님.”
“이 새끼가 그래도 형님이라네? 내가 왜 네 형님이야, 이 개새끼야!”
조태완이 시선을 힐끔 돌린 순간이었다.
“이런 씨발 새끼가!”
부으응! 퍼윽!
“아구구!”
김정훈이 독한 눈으로 배트를 휘둘러 이세종의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를 갈겼다.
“아고! 아고고!”
차라리 그냥 맞았으면 좋았으련만, 손을 뒤로 돌렸다가 손가락까지 얻어맞은 이세종이 왼쪽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연달아 털어냈다.
“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조태완의 경고에 김정훈이 바싹 다가섰고, 이세종은 과장된 표정으로 입술을 꽉 붙였다.
쿡. 쿡.
“야, 이세종?”
배트 끝으로 명치와 목 아래를 찌르며 김정훈이 불렀고,
“예. 예.”
뒤로 밀리는 이세종이 비굴하게 답을 내놓았다.
“이 씨발놈아! 우리 형님께서 널 얼마나 챙기셨는지는 몰라? 나더러 조직 형님 모시듯 하라셔서 나부터 동생들까지 전부 그렇게 대했어. 알아, 이 개새끼야?”
“압니다.”
“아는 새끼가 형님 등에 칼을 꽂으려고 해!”
부응! 퍽! 부으응! 퍼윽!
“악! 아흑!”
옆구리를 빼내던 이세종이 허벅지를 연달아 얻어맞고는 껑충거리며 조태완 앞으로 튀었다.
“살려주십시오, 회장님! 시키시는 일은 뭐든 다하겠습니다!”
눈알을 부라리며 다가오는 김정훈을 조태완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런 뒤에 천천히 자세를 낮춰 눈물범벅인 이세종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야, 인마. 너 같은 놈도 한때는 동생으로 챙겼다고 기회를 주라더라. 누가? 우리 보스가.”
“무슨 일이든 시키시는 건 다 하겠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손가락 하나 자를 수 있겠어?
“예?”
“봐. 이 새끼는 항상 말뿐이야. 이래놓고 또 기회 되면 등 뒤에서 칼 들이대겠지.”
말을 마친 조태완은 무릎을 짚으며 몸을 세웠다.
“이 새끼가 또 보스 등에 칼 꽂는 꼴 보느니 내가 사과하고 끝낼 테니까 데려가서 묻어.”
“예, 형님.”
“자르겠습니다! 손가락!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늦었어, 이 새끼야!”
조태완이 다시 시선을 던졌다.
“에라, 이 개새끼야!”
부응! 퍼윽! 부으응! 퍽! 부으응! 퍼윽!
바닥에 몸을 동그랗게 만 이세종이 배트가 떨어질 때마다 움찔거리며 엉덩이를 안으로 비틀었다.
조태완이 다시 손을 들자 숨을 나직하게 내쉰 김정훈이 뒤로 물러나 재킷의 앞을 당겼다.
“이세종. 진짜 손가락 자를 수 있어?”
“자르겠습니다!”
“아, 그 새끼.”
조태완은 바닥에 다시 쪼그리고 앉아 콧물까지 줄줄 흘리는 이세종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보스가 말이다. 이왕 시작한 일이라고 성북구 개발 사업 그냥 너한테 맡기라는데 내가 또 속아야겠냐?”
“아닙니다, 형…, 회장님. 앞으로는 어떤 일을 시키시든지 모두 따르겠습니다.”
“하오.”
고개를 든 조태완은 턱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눈치를 알아차린 김정훈이 빠르게 움직여서 티슈케이스를 가져갔다.
“한때는 형님, 동생, 하던 사이가 이게 뭐냐? 왜 이렇게 만들어? 이 답답한 인간아.”
“죄송합니다-아.”
사죄를 내놓던 이세종이 말끝에 울음을 길게 달았다.
“눈물 닦아. 얼른.”
조심스럽게 티슈를 뽑은 이세종이 움켜쥔 채로 문지르듯 눈물과 콧물을 동시에 닦았다.
“더 뽑아. 코 아래랑 입도 닦고.”
고개 숙여 인사한 이세종이 이번에도 공손하게 한 장을 뽑아 코 아래와 입가까지 닦았다.
“일어나.”
조태완의 말에 몸을 일으키던 이세종이 왼쪽 엉덩이를 붙들고 절뚝였다.
“이리와 앉아.”
절뚝이며 걸어간 이세종이 조태완이 가리킨 맞은편에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개새끼가 끝까지?”
김정훈이 느닷없이 달려드는 바람에 이세종은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인사 몰라, 인사? 앉으라면 네 마음대로 앉는 거야?”
“압니다.”
김정훈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린 이세종이 조태완을 향해 깊숙하게 상체를 숙였다.
눈치를 엄청나게 살피며 이세종이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세종아.”
“예. 흐으으. 흐으.”
조태완이 부드럽게 부르는 음성에 이세종은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보스가 검다면 그냥 검은 거고, 하얗다면 그냥 하얀 거야. 거기에서 네 판단은 필요 없어. 알았냐?”
“예에.”
“보도국장 자리에 다시 넣어줄 건데 해볼래?”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든 이세종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지막 기회다. 내 이름을 걸고 곱게 보내줄 테니까 보스를 따를 자신 없으면 그냥 나가. 대신 기껏 보도국장 자리에 앉혀주고 성북구 개발 사업까지 밀어줬는데 또 잔머리 굴리면….”
조태완은 뒷말 대신 김정훈을 돌아보았다.
**
형사부장 자리에 오르는 동안, 수도 없이 조서를 받았던 연순동의 핏빛 눈알이 꿈틀했다.
피해자가 연순동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거기에 입술을 움찔했고, 마지막에는 손으로 코를 문질렀다.
이학의의 상황을 알지만, 합의할 수 없다는 의미였고, 누군가와 의논한 대로 답을 해야 하는 곤란한 심정,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해서라도 합의를 피하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난 행동이었다.
“나는 이사장님이 오셔서 직접 고개 숙이지 않는 한 절대 합의 못 해요.”
두 번째 피해자 역시 겉보기에는 당차게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장님’이라는 호칭이나 ‘오셔서’라는 표현, 그리고 겁이 올라온 시선을 보면 눈앞의 여자 역시 앞에 본 피해자와 같이 연순동과 이학의를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그년이 연락했구나.’
강성태가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 심정이란 게 이상해서 만만한 조소아에게 독기가 뻗쳤다.
연순동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이사장님은 응급 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마음 같으면 아버지, 어머니, 자매, 남매, 안 되면 본가, 외가, 통틀어서 집안을 아예 박살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싶었다.
‘당신 집안 주저앉히는 거, 나한테는 일도 아냐.’
검사실에 마주 앉혀 놓고 눈 한번 부릅뜨면 저런 피해자는 벌벌 떨면서 연순동 앞에 두 손을 싹싹 빌 텐데, 상황이 이러니 당장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검사님도 그때는 무죄라고 하셨잖아요?”
‘이년이 진짜…. 너는 이번 일 넘기고 다시 보자.’
마음과 달리 연순동은 올라오는 고함을 마른침과 함께 삼켰다.
녹취를 조심하자.
의도적인 질문에 쉽게 대답해서 하자 걸리지 말자.
“도의적인 책임을 지려고 이럽니다. 형사가 아닌 인간적인 잘못을 바로잡으려고요.”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드셨어요?”
당차게 질문을 건넸던 피해자가 연순동이 든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궜다.
핏물이 올라와 독기 가득한 눈 때문인지, 검사라는 직책이 줄 후폭풍이 두려워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니까 이사장님을 직접 뵈면 합의하겠다는 건데, 지금 응급 수술을 앞둬서 도저히 외출할 상황이 아닙니다. 집으로 가서 직접 만나시면 어떻습니까?”
“네?”
걸렸어, 이 쌍년아.
“피해자들끼리 연락할 거 아닙니까? 혼자 오기 뭐하실 테니 다른 분들에게 연락해서 함께 오면 어떻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거만하게 집으로 오라는 게 아니라 어떡해서라도 사죄하고 합의하고자 하는데 도저히 움직일 상황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건….”
봐. 이것들 서로 연락했지. 조소아란 그년까지.
“아니면 대표로 한 분이나, 몇 분을 보내주세요. 솔직하게 우리 사정 짐작할 거 아닙니까? 대표분이 사과받는 거로 하고, 합의금을 정해주면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망설이는 피해자를 보며 연순동은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억지로 눌렀다.
“잠깐 나가서 전화하고 올 테니 연락 좀 해주시겠어요?”
“아니에요. 내가 나가서 전화하고 올게요.”
“그럼 부탁합니다.”
몸을 일으켜 커피전문점 밖으로 나가는 피해자를 보며 연순동은 입술을 씰룩였다.
**
소신영과 헤어진 강성태는 최치곤과 함께 신월동의 빌라로 향했다.
더러운 인간들을 연속해서 상대한 하루였다.
몸과 마음에 악취처럼 밴 이학의와 소신영의 추악함을 씻고 싶었는데 상처 탓에 무리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겨우 씻고 나왔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노익이 형님이다.”
식탁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이 울었고, 액정을 들여다본 최치곤이 전화 건 상대방을 알려주었다.
수건을 의자에 건 강성태는 얼른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 통화 괜찮아, 동생?
“괜찮습니다, 형님.”
최치곤이 흐뭇한 시선으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 태완이 형님과 통화하던 중에 동생이 내 체면까지 챙겨준다는 말을 들었지. 바쁠 거 알지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전화했다.
“구속되셨을 때부터 광주 황상열 건, 또 지난번 저녁 사주신 것까지 뭔가 해드리고 싶었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강성태의 말이 건너간 뒤였다.
- 그걸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흐뭇해하는 박노익의 답이 건너왔다.
“제가 태완이 형님께 연락처를 드렸습니다. 추천하는 건설사 담당에게 그 연락처를 건네주시면 됩니다. 혹시 자격이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보강할 수 있도록 도움 줄 겁니다.”
- 성북구 개발 사업 정리한 것도 그렇고, 무서운 동생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엄청난 공사까지 손에 쥘 줄은 몰랐다. 아무튼, 제대로 신세 졌다.
“아직 결정 난 게 없는데요. 혹시 추천하신 건설사에 기쁜 소식이 있으면 식사 한번 하시죠. 그때는 제가 사겠습니다.”
- 이런 걸 부탁했으니까 밥은 내가 사야지. 고맙다, 동생. 쉬어.
“들어가십시오.”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강성태의 옆에서 식탁에 앉은 최치곤이 “캬하!” 하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또 뭐?”
“어떻게 된 게 벌써 관록이 보이냐? 진짜 대단하다.”
웃음으로 대꾸한 강성태는 방으로 들어갔다.
옷이라고 몇 벌 없다. 옷걸이를 하나씩 넘겨봐도 최근 새로 마련한 정장 외에는 전에 입던 캐주얼한 옷들이 전부였다.
처음 제대로 하는 데이트라 성의 있게 입고 싶은데 도대체 어떻게 걸쳐야 할지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정장 입어.”
강성태의 심정을 이해한 것처럼 거실에서 최치곤의 느긋한 조언이 방으로 달려들었다.
“태완이 형님께서 호텔이랑 소개해 주셨다면서? 첫 데이트잖냐. 정장에 셔츠 정도는 입어주는 성의를 보여줘. 그렇게 입는 게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린다고 내가 말했었냐?”
능청맞은 음성이었다.
“호텔 꼭대기에서 속초 바다를 내려다보며 스테이크에 와인 마시다가, 성태 씨 멋져요. 다미 씨 눈이 빛나네요, 하는 대화를 나눈 뒤에 불똥이 탁 튀면, 아, 성태 씨…. 캬흐.”
셔츠를 입은 강성태는 기가 막힌 심정의 웃음을 터트리며 재킷을 집어 들었다.
“태완이 형님께서 또 오죽 준비해주셨을 거야. 레이스 가득한 커튼, 파도 소리, 아후, 부럽다.”
최치곤의 감탄을 들으며 강성태가 거실로 향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식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울었다.
어쩐지 덜컥 걸리는 느낌에 서둘러 나간 강성태를 향해 액정을 들여다본 최치곤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