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권 - 12화 (284/513)

14권 - 12화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한 강성태는 JBC로 향했다.

“저기, 은주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도로를 달리는 길이었다.

한낮의 운전석 뒤에 앉은 최치곤이 이은주와의 통화 내용을 알려주었다.

“부모님을 때린다고? 그것도 나이 든 분을?”

“그러니까. 얼마나 지랄을 떨었으면 은주가 나한테 전화까지 했겠냐고.”

강성태는 기가 막힌 얼굴로 최치곤을 바라보았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곤 했다. 젖먹이 또는 네 살,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멍이 든 몸으로 학대를 견디지 못해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런 아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상태로 성장한 것도 아닐 테고, 설혹 그렇다고 쳐도 그건 치료를 받아야 할 문제이지, 그만 때리라는 늙은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해서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

“방송국 면담 끝나면 바로 가봐.”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는데?”

“오늘은 쉬려고. 그러니까 안심하고 가.”

“상견례라고 하지 않았어?”

“상처가 걸려서 다미 씨가 전화했단다. 수술이 밀려서 그렇다고 핑계 댔는데 대신 다미 씨 아버님하고 우리 이모네 식구들은 그냥 식사하기로 하셨대.”

“그게 뭐야?”

최치곤 역시 강성태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다미 씨 아버님이 지난 멕시코 일로 계속 미안해하셨잖아. 거기에 처음에 반대했던 게 미안해서 좀 더 적극적이신 거 같다.”

오후 5시의 약속을 말할까, 말까.

의미가 담긴 안다미의 시선을 생각하면 입을 다물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최치곤의 역할을 생각하면 일정을 속이기도 어려웠다. 당장 누군가 강성태의 위치를 물었을 때, 최치곤이 엉뚱한 답을 내놓게 된다면, 위치와 체면, 역할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치곤아. 어차피 상견례 한다고 시간 빼놨던 거잖아. 나보다는 다미 씨가 어렵게 만든 시간이니까 오후에 만나서 저녁 먹거나 바람 쐬러 갈지 몰라.”

최치곤이 설마 하는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왜?”

“알면서 그래?”

강성태의 질문에 최치곤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바람을 쐬러 어디로 갈 건데?”

“그걸 지금 어떻게 아냐? 저녁이나 먹을까 하는데 모처럼 시간이 나니까 이왕이면 분위기 괜찮은 곳으로 가볼까 하는 거지.”

“이왕이면 춘천 쪽이 좋아.”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최치곤이 조언을 건넸다.

“서쪽은 눈길도 주지 마라. 신강남파 보스가 인천에 떴다고 해 봐. 가뜩이나 사건도 많았는데 그쪽 벌컥 뒤집힐 거다.”

그럴 수도 있겠네.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쪽도 마찬가지야. 평택, 안중의 어디 포구라도 갔다가 그쪽 식구들이 알아보면 완전 비상이다. 그러니까 갈 거면 양평이나 가평, 춘천 쪽이 좋지. 고속도로 새로 뚫려서 속초까지 두 시간이면 간다니까 거기도 괜찮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다 아픔이 있는 조언 아니겠냐. 전에 은주한테 고백할 장소를 검색하면서 추려놨던 장소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조언을 건넨 최치곤이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그 인간들이 내일 오전까지 합의서 가져오겠냐?”

“어렵겠지.”

“뭐?”

“어려울 거라고. 그래서 내일 오전까지로 한 거고.”

궁금해하는 최치곤의 시선이 이유를 강요하고 있었다.

“다 못 가져오면 또 두들기려고 일부러 시간을 촉박하게 잡았다.”

피투성이던 이학의와 연순동을 떠올렸는지 최치곤이 잔인한 눈빛으로 웃었다.

“그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잘못을 깨닫지 못할 확률이 높아. 그저 육체적 관계 한 번 가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 한 번이 당한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죽여서 살아 숨 쉬는 동안 계속 고통스러울 거란 생각을 못 하니까.”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는 최치곤을 돌아보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 식구 중에 여자를 강제로 어떻게 했다는 놈이 나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러니까 철저히 관리해.”

“그건 걱정하지 마. 너한테 가기 전에 내 손으로 아예 거길 잘라버릴 거니까.”

독한 표정으로 최치곤이 대답했을 때였다.

승용차 앞쪽으로 ‘JBC’란 글자를 이마에 붙인 건물이 나타났다.

“혼자 가는 게 좋으니까 밑에서 기다려 주라.”

“별일 없겠지?”

“검찰이 기다리는 거면 함께 있어도 방법이 없고, 덩치들이 덤비는 거면 일단 튀어나올 테니까 그때 도와주면 되지.”

“오케이.”

방송국 건물 앞을 커다랗게 돈 승용차가 현관 앞에 멈췄다.

조수석에서 내린 덩치가 문을 열어주었고, 운전석 쪽으로 나간 최치곤이 강성태를 향해 섰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최치곤과 덩치가 동시에 인사한 직후였다.

근처에 모여 있던 여학생들이 혹시 연예인인가 싶은 눈으로 강성태를 빠르게 살폈다.

여학생들을 피하듯 현관에 들어선 강성태는 곧장 안내데스크로 움직였다.

뒤편에 사각으로 된 틀이 촘촘하게 있었고, 그 안에 출입을 위해 맡긴 신분증이 줄줄이 담겨 있었다.

“소신영 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강성태의 말에 안내 직원들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강성태 회장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 직원과 유니폼 차림의 여직원이 동시에 데스크를 나와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복도 형태로 되어 있는 공간으로 움직여 ‘고층 전용’이라고 적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두 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 강성태는 한숨처럼 나직하게 웃었다.

로비와 꼭대기 층만 멈추게 설정해 둔 걸 보면, 말이 고층 전용이지 소신영을 위해 비워둔 엘리베이터 느낌이었다.

종일 방송국에 있다고 해도 소신영이 몇 번이나 이용한다고 이 요란을 떠는 건지, 이런 특별 대우가 몸에 배면 결국 다른 평범한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변질된다는 것쯤 모르지 않을 텐데, 정말이지 이런 특권을 놓는 건 어려운 모양이었다.

따귀를 두어 대 때려서 이 엘리베이터를 공용으로 바꿔줄까?

강성태가 반짝이는 문에 비친 남녀 직원을 바라볼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안내데스크에서 연락한 모양이었다.

색과 모양이 다른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여직원이 입구에서 강성태를 맞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두꺼운 철판을 깔았고, 그 위에 얇은 대리석 판을 붙인 듯한 복도를 걸은 여직원이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마법의 성처럼 거대해 보이는 문이었다.

어쩐지 저 문을 열면 고약한 눈매를 지닌 괴물이 불쑥 머리를 내밀 것 같았다. 물론 강성태에게 따귀를 연달아 맞고 쿠크리에 머리가 뎅겅 잘려서 죽겠지만, 아무튼 느낌은 그랬다.

“강성태 회장님 모셨습니다.”

연출한 모습이 분명한 태도로 소신영이 서류에서 고개를 든 뒤에 책상에서 일어섰다.

커다란 물건에 집착하는 성향인지 책상, 의자, 소파, 하다못해 소품을 올려둔 도자기까지 모두 컸다.

“앉으시오.”

강성태에게 왼편을 가리킨 소신영이 품격을 잃지 않는 태도로 상석에 앉았다.

은은한 멍을 가리기 위해 비비크림을 얼마나 짙게 발랐는지 밀랍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점심은 드셨소?”

형식적인 질문을 건넨 소신영이 얼핏 문가를 살폈다.

여직원이 차를 가져오기 전에 반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망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

에효, 이 불쌍한 인간아.

강성태는 옅게 웃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소신영이 애타게 기다리던 여직원이 들어와 한방차를 놓아주고 문을 닫았다.

“다치신 모양인데, 이사장이 그랬을 리는 없고….”

“적당히 해. 다리도 좀 오므리고.”

“크흠. 예.”

강성태의 지적을 받은 소신영이 거만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차를 드시면서….”

“할 말 없으면 일어나고.”

문을 돌아보았던 소신영이 급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었다.

“우리 강성태 회장이 멕시코의 건설 공사를 좌지우지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뭔가 아쉬운 음성으로 매달리더니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던진 미끼가 돌고 돌아 소신영 앞까지 흘러든 모양이었다. 물론 소신영은 앞뒤도 안 가리고 덥석 문 꼴이고.

“이우섭 부회장, 고강준 고검장, 그리고 내가 추천하는 건설사를 포함해주시면 어떻소? 아니, 일단 그쪽 회장들을 먼저 만나주시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될 텐데, 그 정도는 크게 부담 없는 거 아니오?”

묵묵하게 바라보는 강성태의 반응에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짧게 입맛을 다신 소신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계 5위 안에 드는 건설사라 우리 강 회장의 체면에 손상 가지는 않을 거요. 이 정도는 들어줘야 고검장이 이사장을 누르지 않겠소?”

이우섭과 고강준에게 어떤 큰소리를 쳤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소신영은 속이 타는 눈치였다.

“이학의 이사장 말이오. 이우섭 부의장이 나서서 국정 감사를 내세웠고, 고검장은 냉정하게 수사할 거라고 압박했소. 거기에 내가 특별 편성으로 보도할 거라고도 했고. 솔직히 이 정도면 우리도 할 만큼 한 거잖소?”

강성태는 매달리는 소신영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재계 5위라면 능력으로 얼마든지 컨소시엄에 참여할 수 있지 않나?”

“에이!”

상체를 세우며 한마디를 뱉어냈던 소신영이 화들짝 놀랐다.

“이거 욕 아닙니다.”

“알았어. 한 번은 봐줄 테니까 하려던 말이나 해 봐.”

“컨소시엄의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격조건이 달라집니다. 재무 건전성 몇 점, 건설 경력 몇 점, 기술력 몇 점, 이렇게 정해야 하는데 이걸 우리 쪽에 맞출 수 있다면 누군들 공사를 탐내지 않겠소?”

그렇게 되는 건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소신영과 이우섭, 고강준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이러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에서 나온 의문이었다.

“우선 하나씩 짚읍시다. 공사업체를 정할 권한이 실제로 있소?”

“거절해서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강성태의 대답에 소신영이 정말이지 화들짝 놀란 반응을 내놓았다.

“거절하다니? 거절이라니? 그걸 왜?”

“말이 짧아지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거절하셨다니까 놀라서 그랬지요. 그러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가서 그 뭐라더라? 곤, 곤, 곤자….”

“곤잘레스 이두안.”

메모를 해두었는지 책상을 돌아보았던 소신영의 고개가 누군가 손을 돌린 것처럼 빠르게 돌아왔다.

“이 공사를 내가 연결해준다고 치자. 소 회장이나 고검장, 부의장이 얻는 게 뭐야?”

“그거야 대한민국 건설 발전과 국가 수익을….”

“뺨이 간질간질해?”

딸꾹질이 나온 사람처럼 소신영이 입을 얼른 다물었다.

“헛소리 지껄일 거면 이만 일어날 테니까 솔직하게 말할 각오가 서면 다시 연락해.”

강성태가 팔걸이를 손으로 짚는 순간이었다.

“고검장과 부의장이 원하는 자리에 앉는 데 필요합니다.”

소신영이 비명처럼 이유를 내놓았다.

강성태는 이유를 말하라는 투로 시선만 돌렸다.

“검찰총장과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재벌가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이번 공사를 연결해주면 두 사람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꿈들 참 야무지네.

강성태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그 정도 힘을 지니면 강 회장님이 어떤 일을 하든 큰 도움이 되지 않겠소?”

“솔직히 말하자. 언제 뒤통수칠지 모르는 세 사람을 어떻게 믿어? 지금이야 힘이 부족하니까 이렇게 고개 숙이지만, 총리나 검찰총장이 되면 지난번처럼 폭력조직 검거를 지시할 거 아냐? 그동안 소 회장이 방송가 점령해 놓을 거고. 아니야?”

“그, 그건. 그럼 이건 어떻소? 건설사와 이면계약을 하는 거요. 3년 안에 어떤 이유에서든 강 회장이 결정하면 지금까지 공사한 수준에서 군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이면계약을 체결합시다. 우리가 배신하면 건설사 지정을 취소하면 되지 않겠소?”

이거 봐?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소신영은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그때까지 공사한 공사대금까지 포기할 수 있어?”

“그것까지는 말을 해봐야 알지요. 하지만, 공사를 마친 대금까지는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스스로 약점을 내놓은 소신영의 말끝이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흠.”

강성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이학의 같은 인간들은 계속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뒤를 염려하기보다는 지금처럼 방송국 회장과 고검장, 국회 부의장, 잘하면 고법 부장판사까지를 손에 넣고 가는 게 효과적이기는 했다.

강성태가 어떤 답을 내릴까.

소신영이 초조하게 바라볼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몸은 좀 어때?

“지금 JBC 방송국에 와 있습니다.”

- JBC? 이세종이 있던 곳이잖아? 거길 뭐하러 가?

“그냥 일이 좀 있어서요. 하실 말씀이 따로 있으십니까?”

- 그게 아니라 오후에 시간 좀 어떨까 해서 그렇지.

어쩐지 조태완의 음성에 담긴 감정이 소신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건설사를 추천하시려는 건 아니죠?”

- 어?

시선 앞의 소신영과 스마트폰 너머의 조태완이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 저기, 부담되겠지만, 나도 그렇고, 노익이도 마찬가지고. 거절하기 어려운 곳에서 연락이 너무 많아서. 아! 그런데 말이야. 보스가 멕시코 공사의 건설사를 지정할 권한이 있는 거야? 아니라면 확실하게 말을 해주는 게 좋아서 묻는 거야.

“그런 제안을 받은 건 있는데 거절해서 지금은 어떨지 모릅니다.”

- 아니, 그걸 왜 거절해? 왜?

화염방사기를 정통으로 얻어맞아 단숨에 속이 새카맣게 타버린 듯한 조태완의 반응이 넘어왔다.

조태완에 박노익의 체면을 세워주고 눈앞의 소식영은 물론, 그와 한덩어리인 고강준, 이우섭, 선중일 부장판사를 손에 쥘 기회가 강성태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우선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과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다음에 말씀하시죠.”

- 뭐?

화들짝 놀라는 반응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고, 이어 ‘나는?’ 하는 눈으로 소신영이 상체를 들이밀었다.

“곤란하시다면서요. 그러니까 연락해 봐야죠. 적어도 형님과 노익이 형님 체면은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흐하하하하!

스마트폰을 귀에 뗄 정도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와 조용한 소신영의 사무실에 울렸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