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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 - 9화 (281/513)

14권 - 9화

오전 10시 40분에 강성태는 조소아의 병실에 들어섰다.

병실 침대에 앉은 조소아와 옆에 서 있던 부모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부은 눈, 턱 주변에 생긴 멍, 셔츠를 입었지만 감추지 못한 목덜미의 거즈, 손등과 팔목에 생긴 상처들, 강성태를 본 조소아와 부모가 놀란 눈으로 안다미를 돌아보았다.

이미 전화로 연락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긴장에 눌려있던 세 사람의 눈에 감추지 못한 두려움이 피어 있었다.

“기분은 어때?”

안다미의 질문을 받은 조소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수척해서 회복하는 육체와 달리 정신적인 고통이 여전히 그녀를 짓누르는 모양이었다.

거친 모습의 강성태를 돌아보는 조소아의 눈이 흔들렸다.

밀동의 오주환이 보였던 것처럼 고통을 준 상대를 만나는 순간이 두려운 눈치였다.

좋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이학의 이사장이 올 겁니다.”

강성태는 굳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조소아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친 역시 이학의란 이름을 듣는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지닌 권력, 뻔뻔한 태도, 그의 주변에 붙어서 편들던 인간들이 만들어낸 공포가 떠올라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원하는 걸 정확하게 말씀하세요.”

억지로 시선을 든 조소아를 향해 강성태는 말을 이었다.

“이학의를 마주할 용기가 없다면 내가 적당히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신 그렇게 하면 피해 본 금액은 찾겠지만, 이후는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판 결과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소아야.”

지켜보기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는 안다미를 향해 강성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다미처럼 강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지금 조소아는 살면서 한 번도 내보지 못했던 용기를 내야 할 순간이었다. 그리고 결정은 재촉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학의는 이런저런 힘에 눌려서 억지로 오는 겁니다. 마지못해 사과는 하지만, 절대 잘못을 인정할 인간은 아닙니다. 어쩌면 조소아 씨가 당할 때, 왜 소리 지르지 않았냐고 뻔뻔하게 나올지 모릅니다.”

이학의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다리를 덮은 모포를 조소아가 움켜쥐었다. 링거 바늘이 꽂힌 하얀 손등에 파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법정에 가서는 더 잔인한 질문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관계가 처음이었냐, 신체의 특정 부분을 기억하느냐, 혹시 쾌감을 느낀 순간은 없었냐? 왜 소리 지르지 않았냐? 거부하지 않을 걸 보면 사실은 원했던 관계 아니었냐?”

“성태 씨?”

강성태의 태도에 당황한 듯 안다미가 불렀다.

모친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는데 부친만은 참담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보고 있었다.

“결정은 조소아 씨의 몫입니다. 그걸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고요.”

안다미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소아에게 건넨 조언이기도 했다. 의미 있는 시선으로 안다미에게 말을 건넸던 강성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쪽 변호사는 끝까지 조소아 씨의 소극적인 행동을 물고 늘어질 겁니다. 사위가 검사라고 들었습니다. 이학의 나름으로 법조인도 많이 알 테고요. 검찰에서, 법정에서, 지금보다 더 불리하게 이학의와 맞서야 합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는 느낌으로 조소아가 시선을 들었다.

“지금 물러서면 법정에서도 그렇게 될 겁니다. 아니면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고 포기하든가요. 다는 몰라도 하소연조차 못 해 삶을 놓으려 했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치욕스러운 과거와 마주해야 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조소아의 눈을 들여다보며 강성태는 말을 이었다.

“물러나지 마세요. 피하지 말고요. 이학의란 미친개에게 물린 겁니다. 지워지지 않겠지만, 조소아 씨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강성태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조소아의 눈에서 거짓말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음을 터트린 딸을 바라보던 모친 역시 고개를 돌리며 눈시울을 훔쳤다.

“부정한 방법으로 선생이란 자리를 탐냈던 벌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우리 잘못이니까 인정합시다. 그렇다고 조소아 씨를 이렇게 한 미친개를 그대로 두면 다음번에 또 누군가를 뭅니다. 그것만은 막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서 조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소아의 반응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피해 봤다는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있었습니다. 뭐 해? 얼른 보여드려.”

지켜보고 있던 부친이 모친을 재촉했다.

무슨 일이지?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모친이 백을 열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스마트폰을 건네받은 조소아가 여전히 파란 핏줄이 도드라진 손을 움직여 문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강성태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고소까지 했었던 피해자들입니다. 검찰에서 일방적으로 기소하지 않는 바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피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최대한 돕겠습니다. 그러니 이학의 같은 인간 때문에 나쁜 선택을 하지 마세요.]

문자를 읽은 강성태는 결정을 바라는 눈으로 조소아를 들여다보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원하는 게 뭡니까?”

“죽도록 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 인간이 제 앞에 꿇어앉아서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걸 보고 싶어요. 그리고 여기 문자를 보낸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가서 똑같이 사과하고 받았던 돈을 돌려주었으면 싶고요.”

“뭘 그렇게….”

조소아를 말리던 모친이 뒷말을 삼켰다. 다른 피해자들까지 챙기는 조소아의 요구가 과하다고 여긴 눈치였다.

“이학의에게서 받고 싶은 피해 보상은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건지, 아니면 필요 없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조소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직후였다.

드르륵.

병실문이 열리며 처음 보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뒤에서 ‘저 인간이구나.’ 싶을 정도로 확신할 만한 예순 중반의 남자가 들어섰다.

“강성태 씨?”

앞서 들어온 마흔 정도의 남자는 강성태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어느 정도의 적대감, 강성태보다 위에 있다는 자신감도 표정에 드러났다.

“나 중앙지검 연순동입니다.”

너, 나 알지? 몰랐더라도 이제는 조심하는 게 좋아.

의도가 빤히 보이는 연순동의 소개에 강성태는 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거슬린 눈치였다.

연순동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거기에 그의 뒤에서 들어선 이학의는 비릿한 눈매로 조소아를 눈에 담고 있었다.

“내가 받았던 돈은 그대로 가져왔다. 이제 사과하면 되나?”

이학의가 조소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억울하지만 참는다는 눈빛이었다. 분한데 이번만은 한 번쯤 고개 숙여 준다는 거만함이 고스란히 보이는 태도였다.

그렇게 나와준다면 차라리 편하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미 씨. 저쪽으로 잠시만 옮겨주세요.”

‘어쩌려고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안다미는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소아의 부모 곁으로 움직였다.

강성태의 부탁과 안다미의 움직임을 이학의와 연순동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깡패 두목이라고 해도 우릴 어떻게 하겠냐?

두 사람을 보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우선 계산부터 하자.”

강성태의 반말을 들은 연순동의 눈매가 대번에 뒤틀렸다.

“너는 잠깐 빠져 있어.”

짧게 말을 던진 강성태는 단박에 오른손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쩌어어어억.

보통은 고개가 흔들리다가 뒤로 넘어진다. 그런데 연순동은 방심하고 있던 데다, 기초 체력이 부족했는지 맞는 순간 글자 그대로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뒤로 넘어졌다.

콰등! 철퍼덕!

문에 머리가 걸린 연순동이 비참한 몰골로 그 앞쪽에 널브러졌다.

“너 지금…?”

연순동에게서 시선을 든 이학의가 설마 하는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바닥에는 룰이 있어. 누군가를 죽이려 했다면 반대로 죽을 수 있다는 각오도 해야 하지. 마찬가지 아냐? 권력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과 삶을 짓밟았다면 너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지. 안 그래?”

“사과하러 왔잖냐. 보상도 할 거고. 아니다. 그걸 떠나서 아무리 높은 곳에서 비호한다고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중앙지검 형사부장을 때리고 무사할 거 같으냐?”

소신영, 고강준, 이우섭이 그렇게 높은 인간들인가?

강성태의 침묵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괜히 너를 비호하는 분을 다치게 하지 말고 이쯤에서 끝내.”

강성태를 꾸짖듯 엄한 태도로 말을 건넨 이학의가 재킷 안쪽에 손을 넣어 황색 봉투를 꺼냈다.

“받은 돈 여기 있다.”

강성태는 봉투를 내려다본 뒤에 시선을 들었다.

콰악.

그리고는 이학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거 같으냐?”

말이 통하지 않을 만큼 뻔뻔하게 나오는 이학의를 향해 강성태는 오른손을 세게 휘둘렀다.

쫘아아악. 짜아악. 짜아아악.

조소아와 그녀의 모친, 안다미까지 손으로 입을 가렸고, 부친은 고개가 불쑥 올라온 상태로 뺨을 때리는 강성태와 얻어맞는 이학의를 보았다.

돈 봉투를 떨어트린 이학의는 고작 따귀 세 대에 축 늘어졌다.

“이학의?”

막힌 코를 뚫으려는 것처럼 이학의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쫘아아악. 쫘아악! 짜아악! 짜아아악!

코에서 쭉 흘러내린 피가 터진 왼쪽 입술을 뒤덮은 뒤에 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강성태는 이학의의 멱살을 바싹 당겼다.

시뻘겋게 충혈된 이학의의 왼쪽 눈에 처음으로 공포가 담겨 있었다.

“이학의?”

“네….”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예.”

에라, 이 개새끼야.

짜아아악! 짜악! 짜아아악! 짜악!

연달아 네 대의 따귀를 때린 강성태는 다시 이학의의 멱살을 바싹 당겼다.

“맞는 게 싫으면 주먹을 날리거나 소리를 질러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아닙니다.”

“그럼 네가 원해서 맞는 거냐? 그런 거야?”

옅게 웃은 강성태는 이학의를 슬며시 떨어트린 뒤에 독하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쫘아아악! 쫘아아악! 쫘아아악! 쫘아아악!

이미 부어오른 이학의의 왼쪽 눈 끝과 볼살이 찢어져서 군데군데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성태는 순서에 따르는 사람처럼 이학의를 바싹 당겼다.

“더러운 욕망을 품을 수는 있다. 양심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죄가 되겠지만,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걸 실행하는 순간 돌이키지 못해. 무슨 말인지 알아?”

“예.”

반사적으로 나온 답이었다.

강성태는 팔을 밀어 적당한 거리를 만들었다.

쫘아아악! 쫘아아악! 쫘아아악! 쫘아아악!

마지막 두 번의 따귀에서 이학의의 이 몇 개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증거로 다시 당긴 그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함께 살자. 너처럼 가진 놈들은 특히 더. 학생들을 가르치는 놈들은 더더욱 더. 법을 집행해야 하는 놈들은 목숨을 걸 정도로 공정하게 좀 살자. 알았어?”

“네에.”

이학의를 밀쳐낸 강성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도로 오른손을 휘둘렀다.

짜아아악!

“억울해?”

“아니…. 아닙니다.”

쫘아아아악!

어금니가 부러지는 감촉이 확실하게 느껴졌을 만큼 매서운 따귀였다.

“얼굴 뼈가 부러져도 너한테 당한 사람들의 억울하고 분한 심정이 다 안 풀려. 알았어?”

답을 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학의는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렸다.

“내 앞에서는 대답 똑바로 해.”

쫘아아아악!

고개가 휙 꺾인 이학의의 몸이 축 늘어지는 바람에 강성태는 이를 악물며 붙든 멱살을 당겼다.

“정말 죽고 싶어?”

삶에 대한 애착인지, 강성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가물가물하던 이학의의 눈이 억지로 열렸다.

“일을 바로잡은 마지막 기회다. 저기 조소아 씨에게 사과하고 용서한다는 답을 받아. 5분 준다. 그 안에 용서한다는 말이 없으면 너하고 저기 형사부장이란 놈은 나와 조용한 곳에 가야 해.”

강성태가 경고한 직후였다.

“끄으.”

쓰러져 있던 연순동이 신음과 함께 비척거렸다.

연순동의 반응을 무시한 강성태는 이학의를 끌고 침대 앞으로 움직였다.

“알아서 해.”

쥐고 있던 왼손을 놓자 몸이 풀린 이학의가 침대를 붙들며 버텼고, 겨우 고개를 든 연순동이 저게 무슨 상황이지 하는 눈으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학의를 놓은 강성태는 곧장 연순동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부하검사를 성추행하려던 형사부장 검사. 그게 너지? 그래놓고 다시 부하검사가 성폭행당할 걸 알면서 그곳에 불러놓고 자리 피한 놈도 너고?”

그걸 어떻게?

연순동의 눈이 흔들리는 순간 강성태는 오른 주먹을 세차게 뻗었다.

쩌어어어억.

조소아를 비롯해 그녀의 부모, 안다미가 몸을 움찔할 정도로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연순동이 또다시 축 늘어졌다.

털썩.

붙잡고 있던 연순동을 내던진 강성태가 몸을 돌리자 이쪽을 보고 있던 이학의가 다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사과하기 싫으면 그냥 나가고.”

강성태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용서해주십시오.”

침대 앞에 무릎 꿇은 이학의가 떨리는 음성으로 사과를 내놓았다.

모포를 당긴 조소아가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울었고, 모친은 눈가를 훔쳤으며, 부친은 입술을 굳게 다문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용서해주십시오.”

이학의가 두 번째로 사과할 때, 강성태는 안다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이런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실망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조직에 몸담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강성태의 눈을 바라본 안다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왜 그런지 강성태는 알지 못했다.

그 직후였다.

천천히 다가온 안다미가 강성태의 곁에 서서 이학의의 뒷모습과 조소아를 지켜보았다.

강성태의 지금 모습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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