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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 - 8화 (280/513)

14권 - 8화

피를 철철 흘리며 싸울 때는 견딜 만했던 몸뚱이가 치료를 마치고 나서는 끔찍한 통증을 뿌리며 움직임을 거부했다. 그런다고 멈추면 다음에는 고통이 예상되는 일을 피하는 소극적인 모습만 남는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움직인 강성태는 그대로 이병렬의 병실로 들어갔다.

김진용과 조봉진이 고개를 숙였는데 이병렬은 아까의 복장 그대로였고, 심지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뭐 해?”

그래놓고는 강성태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똑같은 환자끼리 왜 이래?”

강성태는 뻔뻔한 대꾸와 함께 이병렬의 맞은편에 앉았다. 강성태의 목덜미와 셔츠 와이자 부위에 붙인 거즈, 팔과 가슴에 감은 붕대를 바라보던 이병렬이 시선을 들었다.

“하루쯤 누워 있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이 있어?”

“지방에 말이 돌았다며? 어떻게 할 생각이야?”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이병렬이 확인처럼 최치곤을 돌아보았다. 그런 뒤에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강성태를 말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눈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진용이와 의논했는데 확실히 떠벌인 놈이 있는 모양이다. 잡아야지. 우선 밀려난 김종수, 광준이 형님 쪽을 파보고 다음으로 동재 주변도 뒤져보려고.”

잠시 말을 끊은 이병렬은 환자답지 않게 눈빛을 빛냈다.

“종환이와 섭우, 아르윈만 움직인 게 지랄이야. 대림동과 강서구 숙소에서 말이 나왔을 확률이 높으니까. 빨리 찾아서 확실하게 다져놔야 탈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뭔가 결심한 얼굴로 이병렬이 말을 이었다.

“내일부터 내가 움직이려고.”

“무슨 소리야? 그 몸으로 어쩌려고?”

“그러지 말고, 일단 들어. 대전 덕진이 형님 쪽도 하루 속히 다져야 하고, 안산, 안중의 정비도 급해. 여기 진용이랑 다닐 테니까 그렇게 하자.”

만류하는 강성태를 보고도 이병렬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긴, 목에 거즈, 가슴과 팔뚝을 붕대로 칭칭 감은 강성태도 날이 밝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봐서 광룡 놈들을 아예 밀어버릴 생각도 하고 있어. 그런 일이 생길 거 같으면 먼저 연락하겠지만, 상황 봐서 선방을 날릴 수도 있으니까 그 점만 허락해 주라.”

“이병렬이 허락을 받아?”

“왜 이래? 내가 이래도 보스에 대한 충성심은 죽인다니까!”

환자 둘이 앉아서 누가 더 멀쩡한 척하는지 내기하는 듯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조직 내부 다지는 거랑 주둥이 나불거린 놈 찾는 건 내가 맡는다.”

이런 순간에 이병렬만큼 의지 되는 사람은 없다. 또, 강남과 영등포의 숙소를 동시에 휘어잡을 인물을 꼽으라면 당연히 이병렬이 첫 번째였다.

강성태는 김진용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병렬이 잘 챙겨.”

“예, 형님.”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오전 11시에 이학의를 만나기로 한 내용을 털어놓았다.

“어떻게 하려고?”

“높은 놈들 두들기기로 했던 거 기억하지? 그런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어.”

이병렬의 대꾸는 재미있다는 느낌의 웃음이었다.

“나는 이제 키란에게 들러봐야겠으니까 쉬어.”

몸을 세우는 강성태를 따라 이병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필요 없다. 그러나 조직의 틀을 잡겠다며 나서는 이병렬이 보스에게 보이는 예의라 말릴 수는 없었다.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잘해.’

강성태가 당부의 시선을 건넸고,

‘이 손 많이 가는 보스야!’

이병렬이 특유의 표정으로 강성태를 배웅했다.

이병렬과 김진용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인 최치곤이 강성태를 따라 병실을 나섰다.

“너는 안 피곤해?”

“사채 이자 받으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마약을 막겠다는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조직의 일원으로 이런 힘겨움은 얼마든지 감당해.”

복도를 걸으며 강성태가 건넨 질문에 최치곤이 예상하지 못했던 답을 내놓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덩치 둘이 깊게 상체를 숙이고 있어서 다른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진중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탄 강성태는 문이 닫힌 직후에 최치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책 읽냐?”

“표시 나?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농담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데 최치곤은 커다란 칭찬을 받은 학생처럼 뿌듯한 표정이었다.

“식구들 꾸렸잖냐. 한가할 때 빈둥대는 게 양아치처럼 느껴져서 너처럼 이거로 책을 검색했었거든.”

최치곤이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이 새끼들이 존경심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는 거 아니냐? 책 읽으십니까, 형님? 하면서 감탄하는 바람에 그 뒤로 어쩔 수 없이 시간 나면 읽어. 당장 그만두기로 그렇고, 아주 미치겠다, 진짜.”

“대단하다, 너도 진짜.”

최치곤과 둘만 있을 때의 이 여유로움이 좋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잠시 조직의 격식에서 빠져나와 휴식을 취하는 느낌도 있었다.

둘이서 비슷하게 웃고 났을 때, 문이 열렸다.

이제부터 다시 조직의 틀에 들어서야 할 때였다.

강성태는 곧장 키란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대림동 덩치 둘과 필리핀 조직원 둘이 고개를 숙이고는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아르윈과 이종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는데 테이블에 올려진 김밥과 쫄면, 떡볶이와 튀김이 분식집 냄새를 팍팍 풍겨냈다.

키란은 튀김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퉁퉁 부은 키란의 입가에 기름에 번질거렸다.

“탕수육을 워낙 맛있게 먹길래 혹시 몰라 사 왔습니다.”

강성태의 시선을 확인한 이종환이 변명처럼 음식을 설명했다.

“잘했어. 갈비뼈가 나갔다니까 토하지 않을 정도로만 먹여.”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이종환을 다독인 강성태는 이어 키란에게 다가갔다.

“괜찮지?”

“행복합니다.”

어제 오후에는 최치곤이 저런 소리를 지껄이더니 이번에는 퉁퉁 부은 키란이 엉뚱한 소리를 내놓고 있었다.

“날 밝는 대로 서라대학병원으로 갈 거다. 그렇게 알아.”

“예, 형님.”

키란을 살핀 강성태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 뒤에 아르윈과 이종환, 최치곤을 주변에 앉혔다.

“병렬이가 내일부터 움직일 거다.”

그의 상태를 짐작하는 이종환이 놀란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종환이 네가 섭우랑 병렬이 챙겨. 우리 일이 밖으로 나간 것도 조사할 건데, 다른 생각하지 말고 따라.”

“예, 형님.”

상황의 심각함을 알고 있는 이종환이 듬직하게 답을 내놓았다.

“아르윈. 궁금한 게 있는데 마윤이란 놈의 말을 굳이 들어봐 달라고 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

강성태는 마지막으로 아르윈을 향해 품고 있던 질문을 내놓았다.

시뻘건 떡볶이, 습기를 먹어 끝이 너덜거리는 김밥, 불어터진 면발을 두고 나눌 대화는 아니었는데 지금 아니고는 딱히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형님.”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었냐고 묻는 거다.”

“그게, 형님.”

아르윈이 결심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싸우는 모습을 보며 탐이 났었습니다. 우는 걸 잘 다독여서 우리 쪽 히트맨으로 만들면 특히 삼합회 간부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형님.”

짧은 순간에 아르윈 딴에는 많은 계산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뒤에 형님이 하시는 말씀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괜히 사람 아닌 새끼를 거뒀다가 나중에 등에 칼 맞기 딱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형님.”

솔직한 답이었다.

아르윈을 함께 지켜보던 이종환과 최치곤 모두 충분히 이해한다는 눈빛이었다.

“그 정도면 됐어. 오늘 고생 많았어.”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삼합회가 보낸 히트맨이 정리됐다. 그 과정에서 남은 의문도 풀었고. 남은 건 조직을 완벽하게 정비하는 일이었다.

강성태는 아직 어둠에 물든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 있는 건물에서 피어난 불빛들이 외롭게 밤을 견디고 있었다.

아침이 와서 다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때, 어둠을 지키던 불빛들은 휴식을 위해 잠들어 다시 밤을 준비할 거다.

마치 어둠에서 활동하는 조직들처럼 말이다.

**

오전 9시 30분이었다.

JBC 방송국 회장실에서 소신영과 마주 앉은 이학의는 얼마나 이를 세게 깨물었는지 볼이 울퉁불퉁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학의만 그런 게 아니라 함께 온 연순동 역시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심정을 감추기 위해 입술에 힘을 꾹 주었는데 거칠어진 숨소리를 감추지는 못했다.

강성태를 만나라니?

혹시나 해서 건넨 연순동의 질문에 소신영은 그가 신강남파의 두목이라는 사실을 태연하게 인정했다.

정적을 깬 것은 분한 심정을 겨우 삼킨 이학의였다.

“소 회장.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거요?”

“기회를 달라고 한 건 이사장이셨소.”

숨도 안 쉬고 나온 소신영의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울컥 올라온 감정을 삭이는 것처럼 이학의는 말을 잠시 끊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니까, 나더러 깡패 두목을 만나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건데, 이 옆에 앉은 내 사위가 중앙지검 형사부장 검사요. 고검장까지 갈 것 없이 깡패 두목쯤 얼마든지 법의 심판을 받게 할 텐데 왜 내가 그곳에 가서 만나야 하냔 말이오.”

“싫으시면 돌아가시면 됩니다.”

“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이학의가 탄식을 뱉어낸 다음이었다.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 깡패 두목이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오. 나나 고검장, 부의장이 이렇게 할 때는 뭔가 있을 거란 생각쯤 안 하시오?”

“그 뭔가가 뭔지 알려달라고 이러는 겁니다, 지금.”

“그거야 우리 이사장께서 직접 알아보셔야지.”

“허허허.”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온다. 지금 흘러나온 이학의의 웃음이 그랬다.

“우리 형사부장께서도 많이 언짢으신 모양인데, 그렇게 불편하시면 이만 돌아가시오. 나도 아침부터 불쾌한 얼굴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까.”

상석에 앉은 소신영이 서늘한 음성으로 이학의를 빗대 연순동의 태도를 꼬집었다.

중앙지검 형사부장? 너 같은 거 내겐 별거 아냐.

소파에 기댄 자세,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소신영의 표정과 말투에서 뿜어진 자신감이 연순동을 짓눌렀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소신영이 전화 한 통만 넣으면 당장 고강준이 길길이 날뛰면서 이학의를 잡아넣을 테고, 연순동을 한적한 자리로 밀쳐낼 거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에 당황해서 표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연순동은 얼른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조아렸다.

잠시 연순동을 지켜보던 소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한 번은 봐준다는 투였다.

“고검장이나 부의장도 그렇지만, 이런 일에 끼어들어서 내가 얻는 게 있을 것 같소?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사장이 꼼짝없이 죽게 생겼기에 나섰을 뿐이오.”

뻔뻔한 소신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이학의나 연순동은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칼자루를 소신영이 쥐고 있는데.

‘야비한 인간.’

깐깐한 눈매에 분한 기색을 가득 담았으나 이학의는 속마음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고검장이 말하길, 부하 직원이 걸려 있는 일인데 어떻게 모른 척하겠냐, 무슨 일이 있어도 이사장이 거론되는 걸 막아야 한다, 그러는 바람에 나와 부의장이 나서게 된 거요.”

“예.”

이미 한 번 기가 꺾인 연순동이 마지못해 추임새처럼 짧은 답을 내놓았다.

“못할 말로 이사장이 좀 과하셨지. 뭘 드셨길래 그 연세에 그리 힘이 뻗치셨나, 그래? 좋은 게 있으면 좀 나눠 드시기도 하고 그럽시다?”

살면서 권력과 힘에 이토록 눌려본 적이 없는 이학의였다.

비참하기도 하고, 서글프고.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소 회장. 내가 강성태란 깡패 두목을 만나서 하라는 대로 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이 일이 문제 되지 않는 건 확실합니까?”

“이 소신영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그럼 그 약속을 믿고 이만 병원으로 가보겠소. 가서 강성태란 사람을 만나 시키는 대로 하지요.”

말을 마친 이학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한 행동에 연순동이 재빨리 따라 몸을 세웠는데 소신영은 느긋했다.

“그럼 알아서 잘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손가락만 겨우 닿는 형식적인 악수를 나눈 이학의가 몸을 돌렸고, 깍듯하게 고개 숙인 연순동이 그 뒤를 따랐다.

JBC 회장실을 나선 두 사람은 곧바로 방송국 앞에 대기하던 승용차에 올랐다.

“서라대학병원으로 가자.”

기사에게 지시한 이학의가 시선을 돌렸다.

“강성태란 놈이 깡패 두목이 확실하냐?”

“지난번에 서울에서 활동하는 폭력조직의 두목 두 명을 검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사전 조사했던 놈입니다.”

꼬장꼬장한 표정으로 이학의는 다음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은 어릴 적부터 조직에 몸담아야 보스까지 오르는데 강성태는 좀 느닷없이 튀어나온 놈입니다.”

“느닷없다니?”

“이전에는 전혀 계보에 없었던 놈이 갑자기 영등포를 손에 넣었고 이어 강남의 태완이파, 다시 신호남파를 통합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안산까지 활동폭을 넓힌 특이한 놈입니다.”

“혹시 윗선에서 돌보는 놈 아니냐?”

연순동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놈을 그대로 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더불어서 박노익이라고 강남 폭력조직 두목을 풀어주라는 지시도 있었고요.”

“흐음.”

이학의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소신영, 고강준, 이우섭이 나서야 할 만큼 높은 곳이 대한민국에는 한 곳밖에 없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조소아라는 기간제 교사가 강성태와 줄이 닿은 거고.

“이제 좀 이해가 가는구만.”

재수가 없으려니까 더럽게 걸린 꼴이었다.

“사람이 수모를 참아야 할 때도 있지. 오늘은 이를 악물고 참자. 참는데….”

말을 잠시 멈춘 이학의는 운전기사를 슬며시 살핀 뒤에 상체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정권이 바뀌거나 고검장이 날아가면 그때 이 억울함을 갚아 주자. 그러니 너는 어떡해서든 높은 곳으로 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마.”

“감사합니다.”

속삭이듯 말을 건넨 이학의가 몸을 세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신영의 약점을 알아봐.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반항하지 못하게 목줄을 물어뜯어. 내가 그 인간 구속됐다는 기사를 봐야 이 억울함이 풀리겠다.”

“예, 아버님.”

연순동의 답을 들은 뒤에야 이학의는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착잡한 눈매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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