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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 - 2화 (274/513)

14권 - 2화

필리핀 악단이 연주하는 ‘리플렉션 오브 마이 라이프(Reflection of my life)’라는 곡이 방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좋았던 과거를 떠들며 함께 잔을 부딪치기 적당한 음악이었는데 강성태의 왼편에 앉은 이종환은 독한 눈빛이었다.

“괜히 시간 끌 게 아니라, 여기 와 있는 두 놈과 고수부지에 있는 놈들을 밀어버리시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뭔가 무릎을 탁 치게 할 묘수를 내놓을 것 같았던 이종환은 무식하기 그지없는 방법을 제안했다.

최치곤도 아니고, 강성태가 아는 이종환은 단순무식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뭔가 계획이 있을 텐데 급하게 말하다 보니 앞을 뚝 잘랐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왜 동시에 처리하려는 건지는 알지?”

“예, 형님.”

확인하기 위해 건넨 질문에 이종환은 숨도 쉬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저놈들이 시간을 정해놓고 연락할 걸 염려하시는 거 아닙니까, 형님? 그러니까 아예 네 놈을 밀어버리는 겁니다, 형님. 그럼 두 놈이 호텔을 나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나?

뭔가 아직 부족했다. 궁금한 점도 많았다. 그러나 강성태는 입을 꾹 다문 채 이종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이라도 영등포와 여의도의 호텔 주변에 숙소 동생들을 깔아놓겠습니다. 삼합회 아닙니까, 형님? 저놈들, 반드시 안내인이 있을 겁니다.”

“일부러 도주하게 해서 뒤를 쫓자?”

“삼합회 놈들이고, 형님을 노리러 왔다면, 안내인으로 일반인은 절대 쓰지 못합니다. 운전도 해야 하고, 형님도 따라다니려면 전에 광룡에 붙어 있던 놈들일 겁니다, 형님.”

광룡이라면 아무래도 이종환이 전문이었다.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그는 자신에 찬 눈빛이었다.

“급하면 중국으로 밀항해야 하니까 그 새끼들 도주하면 거의 안중일 겁니다. 거기에다 종환이 형님 식구들이 어지간한 광룡 놈들은 거의 다 압니다, 형님.”

“계속해 봐.”

“대림동 숙소 식구들을 안중에 적당하게 깔아놓고 진짜 그쪽으로 튀면 중간에 낚아채는 겁니다, 형님.”

“다른 쪽으로 튀면?”

“삼합회 놈들입니다, 형님. 호텔에서부터 대놓고 따라붙으면 마음 편하게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형님. 거기에 형님께 오토바이로 달려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형님? 놈들이 호텔에서 나오면 대놓고 오토바이 서너 대 붙이겠습니다, 형님.”

“오토바이를?”

“예, 형님. 오토바이를 따돌리려면 고속도로나 외곽도로를 타야 합니다. 급하게 중국으로 튀려 해도 당연하게 안중으로 향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이거 봐?

꿩 잡는 게 매라더니.

강성태는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조직을 꾸린다며 최치곤에게 숙소까지 만들게 해놓고, 정작 일이 생겼을 때, 조직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쓸데없이 보스의 권위를 누리지 않는 것과 적을 상대할 때 조직의 힘을 동원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도 말이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형님.”

강성태의 웃음을 오해했는지 이종환이 고개를 숙였다.

“어제 아르윈과 공연한 쇼를 했구나 싶어서 웃은 거니까 그럴 거 없어. 내 생각에는 괜찮은 거 같은데 다들 어때?”

“허락하시면 지금 숙소 동생들 동원하겠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질문에 이종환이 먼저 답을 내놓았고,

“마침 홀에 조직원들이 거의 다 와 있습니다, 형님. 오토바이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이 바로 뒤에서 기대하는 표정으로 뜻을 밝혔다.

“바로 준비해.”

“예, 형님.”

강성태가 지시하기 무섭게 이종환, 유섭우, 아르윈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

이학의는 입안에 송충이를 머금은 듯, 불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연순동이 건네주는 스마트폰을 받았다.

연순동의 부인이자, 그의 딸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여보세요?”

- 나 소신영이오. 오랜만입니다.

“고검장이 받으시는 줄 알았는데 함께 계신 모양입니다?”

- 이우섭 부의장도 자리하셨소.

“크음.”

연순동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나?

그를 향해 힐끔 눈알을 돌렸던 이학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게 뭐 서운한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치십시다. 그렇다면, 직접 말씀을 주실 일이지 사위 놈을 통해서 망신을 주시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

하오, 저 쓸데없는 자존심!

차마 대놓고 인상을 쓰지 못한 연순동이 얼굴을 우그러트리며 고개를 떨궜다.

- 이학의 이사장?

“말씀하십시오.”

- 여기 고검장과 부의장, 내가 낮에 회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에 또 모였소. 고검장이 그러시더구만. 부하 직원이 무릎까지 꿇고 매달리는 걸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고. 그런데 뭐, 망신을 주는 건 아닌 듯싶어?

나직하던 소신영의 말끝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 이무용 의원에 검사 사위가 있으니 큰소리치실 만도 하겠지. 내일 TV 뉴스 잘 보시면서 혹시 모르니 변호사와 연락해 두시는 게 좋을 거요.

기대하기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소신영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보세요? 소 회장…님?”

급하게 그를 불렀던 이학의가 얼이 빠진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려다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의 손안에서 ‘영감님’이라는 호칭을 올린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주십시오.”

죽은 할아비가 건 전화라도 된다는 양, 화들짝 놀란 연순동이 얼른 스마트폰을 가져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

- 야, 이 개새끼야!

이학의와 그의 딸이 움찔했을 정도로 거칠고 요란한 욕이 스마트폰을 뚫고 나와 거실을 울렸다.

- 무릎 꿇고 매달리는 꼴이 걸려서 기회를 줬더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이, 개자식! 너는 내일 사표 제출해! 아니면 연수원에 보내줄 테니까 근처 맛집을 찾아두던가! 에라, 이… 욕이 아깝다. 이 덜떨어진 새끼야!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과하시려던 참에 전화가 끊겨서….”

- 시끄러워, 이 개새끼야! 내일 영장 청구하는 대로 뉴스에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이무용 의원? 야, 이 개새끼야! 한통속인 증거 다 있어! 당에서 제명하는 것과 동시에 국회에서 성공학원 특검 추진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고검장님!”

애타는 음성으로 불렀으나 고강준 역시 바로 전화를 끊었다.

“후우.”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연순동은 대놓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뭐 해요? 얼른 전화 다시 해봐요.”

부인의 독촉을 받은 연순동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당신 아직도 몰라? 상급자가 이렇게 전화를 끊으면, 다시 전화해줄 때까지 하급자는 전화 못 해. 내가 먼저 전화하면 항명했다고 소문나서 전관예우는 관두고, 국선 변호인도 못 해 먹어.”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어요? 그동안 아빠가 당신을 어떻게 대했는데 이래요? 아파트부터 차, 생활비까지 아빠 도움 없이 우리가 밥이나 제대로 먹었을 거 같아요?”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이이가 진짜? 일을 이렇게 만들어놨으면 책임을 져야죠? 아빠가 뭘 잘못했어요?”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연순동은 아예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그런 뒤에 마음을 비웠다는 투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기 탁자에 적힌 내용이나 읽어봐. 증거가 워낙 확실해서 빼도 박도 못 해. 거기에 국회에서 특검하면 내가 덮었던 성폭행 사건까지 모두 드러나. 그전에 사표 써야 변호사라도 해먹는다고, 알아?”

아직도 부인은 연순동이 말하는 사태의 심각함보다 태도가 더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국세청이 나서면 성공학원 끝나. 그럼 내가 벌어들이는 변호사 수임료로 살아야 할 텐데, 그게 싫으면 양복 딱 두 벌만 가지고 나갈 테니까 그렇게 서류 정리하자.”

연순동이 차갑게 말을 내뱉은 다음이었다.

“앉아.”

내내 지켜보던 이학의가 씹듯이 말을 뱉었다.

“앉으라고.”

“예. 앉겠습니다. 앉았습니다.”

“하아.”

볼을 씰룩이던 이학의의 눈에서 서서히 독기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독기가 빠져버린 그의 눈에서 ‘특검, 국세청, 뉴스, 구속 영장’이라는 글자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너, 들어가서 VIP라고 돼 있는 명함첩 좀 뒤져봐. 거기에 소신영 회장 명함이 있을게다.”

“아빠? 그러지 말고 믿을 만한 제자들 찾아보세요. 너무 억울하잖아요?”

이학의가 눈을 부릅뜨자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딸이 몸을 일으켰다.

“하나만 묻자. 도대체 저 세 사람이 왜 이러는 거냐?”

“저도 모릅니다. 느닷없이 불려가서 그 자료를 받았고, 무릎 꿇고 매달린 게 전부입니다.”

“하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학의가 털썩 소리가 나도록 소파에 몸을 기댔다.

**

대림동과 강서구에서 트럭과 승합차를 준비했고, 또 호텔은 영등포와 여의도에 있었다. 더구나 어제부터 강성태가 비상을 걸어둔 탓에 전화 몇 통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호텔에 오토바이 도착했습니다, 형님.”

마침 프리 스테이션에 있던 필리핀 조직원들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연락을 주었고,

“영등포 호텔에 승용차 세 대, 승합차 두 대 깔았고. 안중으로도 승용차하고 승합차로 출발했습니다, 형님.”

이어 이종환이 대림동 숙소 덩치들의 도착을 알렸으며,

“여의도 호텔 포위했습니다, 형님.”

곧바로 유섭우가 강서구 숙소 덩치들의 준비를 알렸다.

프리 스테이션 바깥에 있는 두 놈은 아르윈의 조직원들이 멀찍이서 지켜보는 상태여서 남은 건 서라대학병원 맞은편에 트럭이 도착하는 일이었다.

살벌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홀에서 연주하는 ‘플라이 투 더 문’이라는 곡이 방안으로 파고들었다.

강성태가 탁자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을 말없이 바라볼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기다리던 이름을 올린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트럭 도착했다. 작업할게.

쇳소리 가득한 최치곤의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홍길동이 아닌 이상, 서너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은 조직을 믿어야 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최치곤이 다치지 않을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지는 건 아닌지 염려돼서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강성태의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 성태야. 내가 부탁한 일이었잖아. 맡겨주라.

오히려 강성태를 다독이는 듯한 최치곤의 음성이 다시 넘어왔다.

“너도 그렇지만, 식구들 다치지 않게 조심해. 다른 사람들 시선 신경 쓰고.”

- 앞쪽은 언덕이라 가렸고, 트렁크 쪽에 트럭이 바싹 붙으면 맞은편 아파트에서도 안 보여. 그건 그렇고, 뒤처리 말인데, 정말 필리핀 식구들 믿어도 되겠어?

“전에도 경험 있으니까 잘할 거다.”

- 알았어. 끝나는 대로 전화할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유섭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밖에 있는 두 놈 시작해.”

“예, 형님.”

단단하게 답을 한 유섭우가 아르윈과 함께 몸을 세웠다.

**

고수부지 쪽 인도에서 통화를 마친 최치곤은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런 뒤에 고개를 돌려 고수부지의 주차장을 돌아보았다.

병원을 살피던 두 놈은 둔덕처럼 앞이 막힌 곳에 머리를 처박은 승용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든 채 뭔가를 떠들고 있었다.

강성태는 분명 걱정하는 음성이었다.

옆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제발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을 텐데, 애타는 심정을 ‘너도 그렇지만, 식구들 다치지 않게 조심해.’란 말 한마디로 대신했다.

‘이 숫자를 데리고 다치면 안 되지.’

독한 눈을 한 최치곤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묵직하게 끄덕였다.

도로에 서 있던 트럭 세 대가 순서대로 움직였다.

‘준비해.’

이번에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린 최치곤이 새로 꾸린 숙소 식구들에게 눈빛을 던졌다.

카르르릉.

짐칸에 적재함을 높다랗게 올린 트럭이 천천히 방향을 틀어 고수부지 주차장을 향해 내려갔고, 마지막에 필리핀 조직원이 탄 승합차 한 대가 뒤따랐다.

최치곤은 곧장 승합차를 따라 걸었다.

그를 시작으로 숙소 조직원 여덟 명이 주변을 살피며 움직였다.

최치곤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갈 때였다.

주차장 안에서 방향을 튼 트럭 두 대가 승용차의 좌우에 딱 붙었고, 이어 나머지 한 대가 뒤를 가렸다.

“가자!”

그 직후에 최치곤이 달렸고, 여덟 명이 뒤따랐다.

계단을 날 듯이 내려선 최치곤은 곧장 승용차를 향해 뛰었다.

놀란 두 놈 중 운전석에 앉은 놈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최치곤은 뒤춤에 넣고 있던 짧은 쇠파이프를 뽑았다.

콰작! 콰자작!

운전석 유리를 때릴 때마다 손이 울렸지만, 최치곤은 독기 가득한 눈으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승용차를 둘러싼 여덟 명이 조수석과 뒷문 유리를 사정없이 부수고 있었다.

운전석에 있는 놈이 품에서 회칼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퍼서석!

마침내 운전석 유리가 깨졌다.

“이 개새끼가 누굴 노려!”

퍽! 퍼억! 퍽! 퍽!

최치곤은 운전석에 앉은 놈의 머리와 목덜미, 어깨를 향해 짧은 쇠파이프를 연신 휘둘렀다.

조수석 유리를 깬 숙소 덩치가 역시나 살벌하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사이, 깨진 창문으로 팔을 넣은 덩치 한 명이 뒷문을 열었다.

뒷문을 통해 들어간 덩치 두 놈이 망치를 휘두르자, 운전석과 조수석에 탄 놈들은 머리를 감쌀 뿐, 반항은 전혀 하지 못했다.

쇠파이프를 내린 최치곤은 손을 넣어서 운전석 고리를 풀었다. 그리고는 운전석에 앉은 놈의 어깨를 잡아채 밖으로 끌어냈다.

털썩.

문 옆에 떨어진 놈은 머리와 이마가 깨져서 이미 피범벅이었다.

마음 같으면 짓밟아서 떡을 만들겠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띄는 게 가장 중요했다.

“뭐 해? 실어!”

최치곤이 소리치자 승용차의 앞쪽을 막고 있던 필리핀 조직원들이 달려들었다.

숙소 덩치 여덟 명과 필리핀 조직원들이 동시에 두 놈을 들어서 옆에 세워두었던 승합차에 실었다.

“출발하겠습니다, 형님.”

“부탁한다.”

“예, 형님.”

고개 숙여 인사한 필리핀 조직원이 빠르게 뒷문으로 올라타자 승합차가 바로 출발했다.

“후.”

숨을 길게 내쉰 최치곤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 유리창을 내린 승용차를 영등포 공장으로 끌고 가면 이쪽은 정리가 끝난다.

“씨발.”

다른 조직도 아니고, 삼합회인데 너무 쉽게 끝난 거 아냐?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승합차를 보며 최치곤은 히죽 웃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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