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 1화
제1장. 좋은 생각이 있나?
키란과 처음하는 한국에서의 식사였다. 그러나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상황은 아니어서 강성태는 하나둘 계획을 세우고, 점검했다.
사실 밥을 먹으면서 의논하기에는 살벌한 주제였다. 그런데도 키란은 용병 출신답게 작전 나가기 전에 즐기는 저녁처럼 별달리 놀라지 않은 상태에서 식사를 마쳤다.
너무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키란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박노익의 사무실에서처럼 실력과 강단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몰라도, 저토록 선한 미소를 짓던 키란이 적을 향해 쿠크리를 들고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지금은 굵직한 국제회의의 경호부대로 선정되는 일이 잦고, 그 외에 활약이 워낙 뛰어나서 많이 줄기는 했지만, 아직도 외모만 보고 구르카 용병을 무시하는 인간들이 있는 세상이니까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식당을 나선 강성태는 아르윈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프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뒷좌석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 유섭우입니다, 형님.
번호를 누르기 무섭게 묵직한 유섭우의 음성이 건너왔다.
“일단 듣기만 해. 옆에 누가 있으면 조용한 곳으로 움직여. 이왕이면 서류 같은 거 찾는 척하는 게 좋아.”
- 예, 형님. 매출은 표를 봐야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누구보다 강성태에게 대한 충성심이 강한 유섭우가 적당한 핑계를 건넸고, 곧바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 혼자 있습니다, 형님.
“삼합회에서 보낸 여섯 놈의 행방을 모두 찾았다. 놈들 중 두 놈이 나를 따라붙은 상태라 프리 스테이션으로 움직이고 있거든.”
- 제가 동생들 데리고 가겠습니다, 형님. 어떤 놈들인지 찍어만 주십시오, 형님.
이를 지그시 깨물었는지 씹듯이 내놓은 유섭우의 음성이 바로 건너왔다.
“요란하게 했다가는 우리가 불리하니까, 조용하게 승합차나 트럭을 세 대쯤 준비해. 주차장에 세워놓은 놈들의 승용차를 다른 사람이 못 보게 막을 거니까 클수록 좋아. 그런 뒤에 프리 스테이션으로 건너와.”
- 예, 형님.
“적당하게 타락한 보스가 불러서 오는 거다. 술 먹고 오늘 수입 내놓으라는 보스. 놈들이 지켜볼 때는 그런 느낌이면 좋겠다.”
-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바로 이종환의 번호를 눌렀다.
- 이종환입니다, 형님.
강성태의 전화가 반가운 듯한 이종환의 대꾸가 있었다.
트럭이나 승합차를 준비할 것, 적당하게 타락한 보스를 챙기는 모습으로 프리 스테이션에 오는 것, 이종환에게 건넨 내용도 유섭우와 다르지 않았다.
- 알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신월동에서라도 마약을 막겠다며 이병렬을 찾아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틈에 신강남파의 보스가 되어 승용차 뒤에 앉아 있었다.
덩어리가 커진 만큼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삼합회와 같은 굵직한 조직과 맞붙는 데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삼합회고 지랄이고, 마약을 팔아먹고 싶으면, 넓은 땅에서 해. 이쪽은 넘보지 말고.
창밖을 보며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
조태완은 종일 뜻밖의 전화에 시달렸다.
알고 지내며 이런저런 청탁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하나둘 전화를 걸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법조계의 일을 봐주던 조철호 변호사까지 조태완을 찾았다.
- 거절하기 어려운 곳에서 부탁이 와서 그렇습니다. 한 번만 만나주시면 어떻습니까?
“그걸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 이쪽 건설사로 정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만나서 고려해보겠다는 말씀만 해주십시오. 이럴 때 베풀어야 나중에 아쉬운 소리 할 때 도움됩니다.
“어허, 참.”
갑갑한 느낌의 탄식을 쏟아냈지만, 조태완의 입가에는 미소가 달려있었다.
“일단 보스에게 부탁은 해볼 텐데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워낙 그런 자리를 싫어하는 데다 바쁘기도 하거든.”
- 강성태 회장이 직접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조 회장께서 고려해보겠다, 혹은 강성태 회장에게 말해보겠다, 정도로만 언질을 주시면 충분합니다.
“알았어. 내가 통화해 보고 연락드리지.”
- 감사합니다.
혹여 다른 소리를 할까 염려했는지 조철호는 아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바로 통화를 끝냈다.
“거참.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있네.”
통화를 마친 조태완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늘 청탁을 건네는 처지였다.
물론 부탁받는 일이 있기는 했는데, 클럽에 놀러 갈 거니까 신경 써 달라거나, 콘도나 해외여행을 가는데 알아서 해달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조직원들 보내서 적당하게 압력을 넣어달라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거절하기 어려운 곳에서 전화가 들어와 건설사 회장 혹은 임원들과 한 번만 만나달라는 요청이었다. 그것도 지금 조철호 변호사처럼 간절한 음성으로 말이다.
‘나쁘지 않은데?’
조태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또다시 스마트폰이 울었다.
“대단들 하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조태완은 습관처럼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같잖다는 투로 웃었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형님?
고작 인사였다. 그런데도 이세종의 음성은 비굴함을 넘어서 간절함에 푹 절여놓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전화 끊어.”
- 시키시는 일은 뭐든 하겠습니다, 형님.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형님.
울먹이는 이세종의 음성이 건너온 다음이었다.
“세종아.”
- 예, 형님.
조태완이 나직하게 불렀고, 이세종이 더할 수 없이 공손하게 답했다.
“식구들 꾸리고 살다 보면 온갖 험한 꼴을 당할 때가 많아. 그중에서도 연장을 들고 맞서는 순간이 특히 그렇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면 데리고 있는 놈들의 속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 형님?
“연장이 날아오는 앞을 막는 놈이 있고, 뒤로 빠지는 놈이 있지. 심지어 온다고 해놓고 안 오는 놈도 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다들 너하고 똑같이 말해. 잘못했다. 다음에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다. 기회를 달라. 그런데 말이다.”
조태완이 건네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이세종은 “예, 형님.”이라는 흔한 대꾸조차 내놓지 못했다.
“한 번 그랬던 놈은 거짓말처럼 다음번에도 똑같이 행동해.”
게다가 뭐라고 말 붙일 틈조차 없을 만큼 조태완의 말끝은 냉정했다.
“깡패? 조직? 말이 좋아 그렇지, 우리는 어둠 속에 하나둘 쌓이는 쓰레기처럼 밝은 곳에서는 절대 내비치지 못할 더러운 욕망을 주워 먹고 사는 괴물이다. 너는 그런 괴물들 틈에서조차 신뢰를 지키지 못한 벌레고. 그러니까 벌레답게 살아.”
스마트폰을 내리던 조태완이 독한 눈빛으로 다시 얼굴에 붙였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파란 잎이 풍성한 세상에서 살았을 뿐이니까 내가 널 유혹해서 망쳤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이파리 말라붙는 가을과 겨울에 적응해. 알았냐? 내가 아니었어도 너는 반드시 망가질 놈이었어.”
입을 한 번 뒤튼 다음에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종료버튼을 눌렀다.
스마트폰을 내려놓던 그는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왔는지 오세아가 침울한 얼굴로 조태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스를 만나고 깨달은 일들이다. 당장은 어렵지만, 하나둘 바르게 살아보려고 생각 중이다. 말한 대로 지금까지는 괴물로 살았는데 보스 따라서 이제는 청소부가 돼보려고. 그러고 나니까 아이를 가져보고 싶었다.”
아프게 웃은 오세아가 조태완에게 다가와 등 뒤에서 그의 목을 안았다.
“네가 돈 욕심, 명품 욕심 안 내는 거 알지. 나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이러는 것도 알고. 그냥 고맙다.”
왼손을 든 조태완이 오세아의 가냘픈 팔을 다독였다.
**
아르윈은 아예 프리 스테이션 앞에 차를 세웠다.
눈치를 살핀 키란이 재빠르게 조수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었다.
VIP를 경호하는 듯한 훈련받은 행동이었다.
“적들을 방심하게 해야 해. 어설프게. 알지? 동선 무시해.”
강성태가 몸을 돌리자 키란은 두 손으로 뒷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아르윈에게 다가갔다.
잘한다, 키란.
키란을 슬쩍 돌아본 강성태는 답답하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저으며 프리 스테이션의 입구로 움직였다.
손님이 하나둘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내부 공사 중입니다. 조만간 새롭게 찾아뵙겠습니다.’
어제까지 못 보았던 간판이 입구 좌우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복도를 내려서자 초저녁인 데도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이 강성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르윈과 키란이 급하게 계단을 내려왔으나 강성태가 더 빨랐다.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서자,
“오셨습니까, 형님.”
뜻밖에도 서늘한 표정으로 서 있던 필리핀 조직원들이 강성태를 향해 깊게 상체를 숙였다.
강성태는 시선만 아르윈에게 돌렸다.
“혹시 바깥에서 기다리다가 삼합회 놈들 눈에 띌까 봐, 안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형님.”
삼합회가 기습할 것을 염려했던 모양이었다. 거기에 잠시 뒤에 놈들을 상대할 때 함께 움직일 계획도 있었을 테고. 그렇더라도 홀 안쪽 복도가 가득 차도록 조직원들을 부른 건 좀 과하지 않은가 싶었다.
무대에서는 5인조 밴드가 강성태와 아르윈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신나는 곡을 연주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묘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
특실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합회 놈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연주할 필요가 있었고, 그 바람에 홀에서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는 곤란했다.
강성태는 아르윈과 조직원 한 명이 안내하는 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룸에 들어와서 그럴까?
문을 닫자 홀에서 달려오던 소리가 반쯤 잘렸고, 그 순간에 자연스럽게 이병렬과 서달수가 저절로 떠올랐다.
어제 왔었던 장소인데도 감정이 이런 데, 병원을 나서 프리 스테이션에 들어설 이병렬은 도대체 어떤 심정일까?
내부를 둘러보며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병렬이 아르윈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인 건, 추억의 장소를 놓지는 못하지만, 서달수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지워두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강성태의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형님?”
“그게 좋겠지?”
잠시 뜸을 들였던 아르윈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강성태의 시선을 붙들었다.
“커피로 준비해.”
아르윈이 조직원을 돌아볼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조직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유섭우 형님이란 분이 오셨습니다.”
조직원이 몸을 비켜서자 안으로 들어온 유섭우가 상체를 깊게 숙였다.
강성태는 그의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보며 눈가를 좁혔다.
“나이트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형님. 전에 광준이 형님께서 이런 자리에 부르실 때면 꼭 한 명이나 두 명쯤 데려오라고 하셔서 일단 함께 왔습니다, 형님.”
확실히 나이트를 운영하는 유섭우는 이런 쪽으로 눈치가 있었다.
이런 방법도 있었네?
누가 봐도 강성태가 이 여자, 저 여자 불려대는 꼴이어서 삼합회 놈들이 보기에 나쁘지 않겠다.
어깨까지 닿은 머리, 한 줄기 웨이브, 보라색 눈화장, 짙은 입술, 어쩐지 퇴폐적으로 보이는 매력을 지닌 여자가 다시 한 번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보스 맞아요?’
그래놓고 강성태의 외모에 놀란 눈으로 유섭우를 돌아보았다.
“다른 방에서 편하게 있으라고 하고 와서 앉아.”
“예, 형님.”
답을 한 유섭우가 여직원에게 고개를 돌리고 바깥을 가리켰다.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유섭우가 데려온 여직원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녀가 방을 나섰고, 유섭우가 앉은 다음이었다.
아직 키란과 인사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이종환이 들어섰다. 다행인지, 눈치가 부족한 건지는 몰라도 그는 혼자였다.
“인사해. 여기는 키란. 키란, 이종환, 유섭우. 두 사람 모두 형님 된다.”
강성태는 먼저 두 사람에게 키란을 소개했다. 이왕 인사를 나눈 참이었다.
“아르윈. 밖에 있는 조직원들 불러서 인사시켜.”
강성태는 아르윈에게 지시해서 필리핀 조직원들을 불렀다.
문 앞에 와서 둘씩 이름을 말하며 상체를 깊게 숙이는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이 있었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르윈을 한식구로 받아들였다면, 그가 데리고 있는 조직원들 또한 기회가 있을 때 인사시키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을 마친 뒤에 마침내 자리에 앉았고, 이어 커피도 나왔다.
홀에서는 아직 연주가 계속 이어졌는데, 강성태와 안쪽의 분위기를 생각해서인지 감미로운 곡 위주여서 대화를 나누기에 훨씬 좋았다.
“오늘 밤에 삼합회를 정리할 생각이다.”
강성태는 전화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젯밤과 지금의 상황을 이종환과 유섭우에게 먼저 들려주었다.
“트럭이나 승합차는?”
“혹시 몰라서 둘 다 준비했습니다, 형님.”
이종환과 유섭우 모두 답은 같았다.
“그럼 형님. 고수부지에 있는 놈들과 형님을 쫓아온 두 놈은 트럭으로 막아서 해결하는데, 따로 있는 두 놈을 해결할 장소가 문제 되는 거 아닙니까, 형님?”
“그렇지.”
좋은 생각이 있나?
강성태의 의견을 들은 이종환이 바깥을 바라보는 느낌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