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 20화
집무실로 돌아온 고강준은 곧바로 연순동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연순동은 고강준의 충직한 부하요, 물라면 물고, 놓으라면 놓고, 짖으라면 짖는 한 마리 충견과 같았다.
거대한 책상과 으리으리한 의자에 앉은 개주인 고강준은 시선을 삐딱하게 들고서 가지고 있던 서류를 툭 책상 끝으로 던졌다.
함부로 들지도 못한다. 연순동은.
고강준이 보라는 지시를 줄 때까지.
서류를 내려다보았던 그가 궁금한 눈으로, 그러나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충견과 같이 빛나는 눈빛으로 고강준을 보았다.
‘봐.’
고강준이 턱짓으로 서류를 가리킨 다음이었다.
손을 뻗었던 연순동의 눈가에 놀라는 기색이 스쳤고, 이어 낯빛이 시커멓게 변했다.
“나는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검찰의 깃발을 높이 치켜세울 놈이라고 생각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고강준은 양손을 깍지 낀 뒤에 다리 위에 올렸다.
“내가 총장 물망에 오른다는 건 검찰 밥을 먹는 인간들은 다 알아. 그리고 내 뒤에 연순동 부장검사가 있다는 건 심지어 내 마누라도 알고.”
“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걸 누가 믿어줘?”
“고검장님!”
차가운 고강준의 시선과 대꾸에 연순동은 냅다 책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검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느라 처가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말 같은 소리를 해. 너. 처가에서 얻은 게 하나도 없어? 내가 한번 알아볼까?”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시면 개처럼 일하겠습니다.”
“내가 부르면 다들 개처럼 일해.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고, 심지어 집안도 깔끔해. 어느 정도여야 덮고 가지.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냐? 애들 먹이는 푼돈 빼돌린 건 그냥 돈 욕심이 나서 그렇다고 치자. 선생 자리 사고팔고. 거기에 돈까지 받아먹고서 왜 여선생들은 건드려, 건드리길?”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무슨 개새끼도 아니고. 나이를 그 정도나 처먹은 양반이 딸보다 어린 여선생들을 건드려서는? 야, 이 새끼야! 거기 적힌 자료 좀 다시 봐. 그동안 성폭행 고소가 한두 건이 아닌데 다 네놈이 덮었더구만?”
차마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연순동은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아, 그 새끼, 진짜. 저런 새끼 구하자고 내가 자리를 걸어야 하는 거야?”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바닥을 핥으라면 핥고, 목줄을 물라면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겠습니다.”
어딘가 여운이 있는 듯한 고강준의 말에 무릎을 꿇은 연순동은 더욱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렇게 하자. 내일 내가 정해주는 곳으로 장인 영감을 데려와.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일이 있든 간에 입 꼭 처 다물어. 그럼 적당하게 한 번 끝내 볼 테니까. 알았어?”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기회다. 무조건 나오라는 곳으로 나오고, 입 꼭 처닫고, 혹시 보상하라면 집을 팔아서라도 깨끗하게 보상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자료, 높은 곳에서 가져온 거야. 이우섭 부의장과 소신영 회장이 함께 막아주려고 애쓰고 있고. 알았어?”
“명심하겠습니다!”
“나가, 이 새끼야! 꼴도 보기 싫어.”
후다닥 일어선 연순동이 책상 아래로 내려갈 만큼 고개를 숙인 뒤에 몸을 돌렸다.
“야!”
문을 나서기 직전에 고강준은 연순동을 불러 세웠다.
“내일 약속한 장소에 못 나오겠다고 그러면, 너는 내일 어디로든 출국해라. 차마 내 손으로 너는 못 집어넣겠으니까.”
“절대 실망하시는 일 없도록 처리하겠습니다.”
고강준이 고개로 문을 가리키자 상체를 깊게 숙인 연순동이 방을 나섰다.
**
예상보다 호텔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
한강 빌라에 갈 여유가 사라진 터라 호텔을 나선 강성태는 이른 저녁을 먹기로 마음먹었다.
“나오셨습니까, 형님?”
“한강 빌라는 관두고 저녁을 먹으러 갈까 하는데, 키란? 갈비, 불고기? 어느 게 먹고 싶어?”
“형님이 정해주세요.”
하긴, 종류도 모르는 키란에게 메뉴를 정하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르윈. 일단 고깃집으로 가자. 오랜만에 병원에서 나왔는데 그래도 고기는 먹어야지?”
“정훈이에게 연락해서 식당을 추천받으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번거로워. 우리 셋이 밥 먹는데 괜히 숙소 식구들 달려와서 지켜보는 것도 불편하고. 편안하게 먹자.”
“예, 형님.”
키란 앞에서 강성태의 체면을 한껏 드높이려던 아르윈이 바로 뜻을 알아채고는 호텔 근처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식사하는 데 따로 인사하지 마. 그냥 회사원 셋, 아니면 다국적 모임 셋, 이렇게 식사하는 거로. 알았어?”
“예, 형님.”
키란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모처럼 영어로 주고받는 대화가 편해서인지 아르윈이 순순히 강성태의 뜻을 따랐다.
제법 규모가 있는 식당 주차장에 아르윈이 차를 세웠고, 발렛을 맡기면서 셋이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안 그런 척하지만, 키란은 식당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자리에 앉고 나서는 상을 가득 메울 만큼 나오는 반찬, 테이블 한가운데 들어오는 숯불, 심지어 환풍 시설까지, 모든 것이 신기한 눈치였다.
“키란. 잘 왔다.”
“감사합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서 술 대신 탄산음료를 따랐고, 셋이서 잔을 부딪쳐 한국에서의 첫 식사를 기념했다.
키란에게 음식을 설명하고, 먹는 방법을 알려주느라 10분쯤을 보내고서야 모처럼 고기를 굽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형님. 시간 되시면 안산을 한번 둘러봐 주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강성태 앞쪽에 고기를 놓아준 아르윈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새로 접수한 구역이라 아직 식구라는 유대감이 부족합니다. 전에 광룡이 있던 안중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님께 인사조차 못 드린 식구들이 많아서 소속감이 없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조태완이 비슷한 권유를 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클럽 네 곳을 돌기까지 했었다.
“안산도 그렇고, 이번에 대전 쪽도 마찬가지고. 병렬이와 함께 돌아다니며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 당장 아르윈이 데리고 있는 식구 중에도 병렬이 얼굴 모르는 숫자가 제법 되잖아.”
“예, 형님.”
이병렬에 대한 강성태의 마음을 이해한 모양으로 아르윈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면,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병실을 뛰쳐나온 키란처럼 이병렬 역시 갑갑한 심정은 다르지 않겠다. 오죽하면 식은땀을 흘리면서까지 침대 머리를 세워놨겠나.
“오늘 밤에 삼합회 해결하면 휠체어에 태워서 한 바퀴 돌까?”
“예? 형님?”
“재미있을 거 같은데? 치곤이가 꾸린 숙소 식구들 얼굴도 보여주고, 안산, 안중, 대전 돌아서 마지막에 바뀐 프리 스테이션에 들리면 어때?”
“준비하겠습니다, 형님.”
진중한 대답을 내놓는 아르윈의 표정에도 뭔가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삼합회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두 놈이 멀찍이 따라붙었고 고수부지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형님.”
아르윈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혹시 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먼저 둘러보았다.
“다미 씨가 퇴근하기 전까지는 그놈들이 그곳에 있을 테니까, 두 놈은 아예 고수부지에서 해결하자. 그게 다른 사람 눈에 안 띄고 더 좋아.”
“그쪽에도 사람들이 제법 있지 않겠습니까?”
“그놈들, 지금 차 안에 있을 거 아냐?”
“예. 가끔 번갈아가며 올라오기는 하는 모양인데 치곤이하고 숙소 식구들 눈치 때문에 병원 앞으로 다가오지는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유섭우나 이종환에게 연락해서 승합차나 트럭을 세 대쯤 보내. 그래서 주차장에 서 있는 놈들 차를 둘러싸. 그 안에서 해결하고, 뒤처리는 아르윈이 하는 거로.”
그런 방법이 있었네!
“알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답을 내놓았다.
“나를 쫓아다니는 놈들은 지난번 공항에서처럼 가디언스 식구들이 해결하는 거로 하고.”
“예, 형님.”
상추에 싼 고기를 입에 넣은 키란이 작전을 엿듣는 스파이처럼 눈을 좌우로 굴리며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은 클라리사와 호텔에 조금 일찍 들어가는 거로 하자. 만약 나를 노리는 놈이 호텔 주차장에 있으면 그 길로 한적한 곳으로 유인하고.”
탄산음료를 마시며 강성태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면 내가 룸에 들어가 있는 동안, 키란이 혼자 남은 다른 놈을 납치하거나 제거해. 그럼 놈이 당황해서 움직일 테니까 이번엔 우리가 거꾸로 추적할 수 있지.”
대강 계획을 설명한 강성태는 지금 말한 내용을 다시 한 번 키란에게 설명해주었다.
이미 아르윈에게 대강 들은 뒤여서 키란은 바로 알아들었다.
“다른 사람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여기 아르윈과 가디언스파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대신 나름 훈련한 놈들이라니까 조심하고.”
“형님을 노리는 놈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죽여도 됩니까?”
“가능하면 빠르고 정확하게.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답을 들은 키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
퇴근한 연순동은 곧장 압구정동 이학의의 집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왜 여기로 왔어요?”
문을 열어준 사람은 뜻밖에도 연순동의 부인이었다.
평소에도 늦게 퇴근하는 연순동을 핑계로 부인은 늘 처가에 자주 들렀었다.
“아버님 계셔?”
“거실에요. 무슨 일인데 이래요?”
처가의 도움을 많이 받은 연순동은 늘 부인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부인의 질문을 무시했고, 이어 굳은 표정으로 거실로 향했다.
“왔어?”
“예.”
소파에 앉아 시사잡지를 읽던 이학의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 같으면 “저녁 드셨습니까?”라든가, “건강은 어떠십니까?” 하는 인사를 내놓았을 연순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예.”라는 답만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거지같이 살던 놈을 돈으로 처발라서 사람 대접받게 키워놨더니 머리가 컸다고 불쾌한 감정을 내비쳐?
“흐음.”
눈매를 뒤튼 이학의가 읽던 잡지를 내려놓은 채 대놓고 연순동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께 태도가 왜 그래요?”
연순동의 곁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결국 타박을 쏟아냈다.
“가만있어 봐. 바깥일을 하다 보면 화날 때도 있고, 불편한 일도 생기고 하는 거지. 그래 무슨 일인데 그러는지 어디 들어나 보자. 앉아.”
이학의는 항소를 올리는 신하를 대하는 왕처럼 앉아 있는 오른쪽의 소파를 가리켰다.
“먼저 이걸 보십시오.”
자리에 앉은 연순동이 품에서 접어놓은 A4 용지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뭔데 그래? 어디서 사채라도 썼어?”
차용증을 가져왔나 싶은 이학의가 서류를 들어 펼치고는 시선을 내렸다.
“이게…? 이런 걸 어디에서 났어? 너, 내 뒷조사도 하냐?”
“고검장님께서 주신 자료입니다. 무릎까지 꿇고서 막기는 했는데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고검장? 고강준 고검장 말이냐?”
“예.”
“허! 그 인간이 내 뒤를 노려? 너를 그 인간 밑으로 넣은 게 나다! 나! 그 자리에 밀어 넣느라 처먹인 돈이 얼마인데 그 인간이 나를 노려!”
서류를 테이블에 던진 이학의가 소파의 팔걸이를 잡은 채 불같이 화를 쏟아냈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고 해! 내가 키워낸 제자 중에 판검사가 하나둘인 줄 알아? 그것뿐이냐? 장학금에, 유학비용에, 그렇게 키워서 정부부처의 사무관 이상으로 활동하는 제자만 수십 명이다. 언론, 의료, 정계, 사법, 없는 곳이 없어! 어디에서 고검장 나부랭이가 나를 노려!”
부끄러운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학의는 필요 이상으로 얼굴을 붉힌 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너는 뭐 하는 놈이야! 고검장이 그렇게 나오면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맞서 싸웠어야지! 그깟 검사 월급으로 지금 사는 집 한 달 관리비나 되는 줄 알아? 차라리 옷을 벗고 변호사를 해! 내가 서초동에 사무실을 제대로 꾸며줄 테니까!”
버럭 고함을 지른 이학의가 잡아먹을 듯이 연순동을 노려보았다.
“뭐 해요? 얼른 잘못했다고 말씀드려요.”
이학의의 침묵을 알아챈 부인이 연순동을 재촉했다.
“끝까지 이렇게 나오시면 지금껏 제가 덮어드린 성폭행 사건까지 전부 재조사하게 됩니다.”
“어허! 야, 이 모자란 사람아. 제 손으로 옷을 벗은 게 성폭행이야? 선생 자리 달라고, 그것도 내 사무실에서 옷을 벗었어. 성폭행이라고 그랬냐? 옆방에 비서부터 직원들이 바글바글한 내 집무실이었어. 소리만 지르면 되는 걸 입 다물고 얌전히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성폭행이야?”
“조서를 제가 받았기 때문에 그런 변명이 통한 겁니다. 피해자가 열 명이 넘고, DNA 검사까지 마친 자료도 있습니다. 이게 진짜 조용하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참, 나.”
말문이 막힌 이학의는 오히려 기가 막혀 그런다는 투로 시선을 모로 틀었다. 더 기가 막히는 건 이학의의 성폭행 이야기를 들은 그의 딸조차 별일 아니란 투로 연순동을 노려본다는 점이었다.
“여기 이 사람과 처남, 처남댁 급여 나간 거야 차라리 적당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급식비 횡령, 선생 자리 대가로 금품 수수, 성폭행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제자들이 나서도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놔두라고! 놔둬!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그 잘난 검사나 계속하라고!”
버럭 고함을 지르는 이학의를 연순동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껏 이런 일은 없었다.
맞받은 정도가 아니라 파렴치한 범인을 눈앞에 둔 냉혈한 검사의 눈빛이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검사가 우습게 보이시는 모양인데 알겠습니다. 고검장님께 지금 그대로 보고드릴 테니 어디 한 번 해보십시오.”
“당신, 지금 그게 아버님께 무슨 말버릇이에요?”
“말버릇?”
“이이 좀 봐? 사람이 왜 그렇게 은혜를 몰라요?”
“은혜를 아니까 오늘 무릎 꿇고 매달렸다가 온 거잖아! 이거 고검장만 나선 게 아니야! 이우섭 국회부의장에 소신영 JBC 회장이 함께 나선 거라고! 그 사람들 몰라? 야비하기로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양반들이야!”
연순동이 쏟아내는 말에 이학의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버님이 아무리 제자를 많이 키워냈어도 그 양반들에 비하면 마이너야. JBC 소신영 회장만 해도 그래. 그 양반이 마음만 먹으면 이 집안의 속사정을 온 국민이 다 알게 돼. 거기에 이우섭 부의장이 나서면 사학 특검도 가능하다고.”
연순동의 다부진 대꾸에 부인은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이학의는 흔들리는 눈을 하고 뜨거운 숨을 연달아 내쉬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