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 17화
소신영의 반응으로 봐서 이학의와 안면이 있는 게 확실했다.
“아는 사람이야?”
“그게….”
“말하기 곤란하면 관둬.”
강성태는 더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막았다.
필요해서, 다시는 뒤통수를 치지 못하게 굳히려고, 몰아붙이고는 있지만, 차라리 따귀를 죽어라 때리고 말지 이렇게 조이는 건 정말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생각이 달려가자 강성태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 바람에 갑갑한 심정을 대신해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움켜쥐었는데, 소신영이 움찔했다.
에효, 이 한심한 인간아.
그 정도로 겁을 내면서 뭐 그렇게 뒤통수를 노려?
아무튼, 멀리 보고 나선 길이었다.
“소신영 회장.”
“예.”
“정보과 강욱 과장의 일 때문에 따귀를 30대쯤 때리려고 했었다.”
사색이 된 소신영이 초점을 잃은 눈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소 회장은 반성의 기미가 있어서 좋게 지내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돼서 많이 아쉬워.”
“잘못했습니다.”
잠시 소신영을 노려보던 강성태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 내가 이학의를 죽여버리려고 했거든. 그런데 다른 일도 있고, 소 회장의 의지도 알고 싶어서 그러니까 그 인간을 맡아.”
지옥의 문 앞에서 살아날 기회를 받은 사람처럼 소신영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성공학원이라는 재단과 이학의의 개인 비리를 알려줄 테니까 그 인간을 붙들어서 나한테 데려와.”
“이학의를요?”
“아니면 따귀 30대를 맞든가.”
“이학의의 비리를 주십시오.”
강성태가 얼떨떨할 정도로 소신영의 답은 빨리 나왔다.
“이번에도 내 뒤를 노리면, 사람들 틈에 빙빙 둘러싸여 있어도 소 회장은 죽어. 결과가 궁금하면 한 번 더 해 봐.”
카르텔의 악질 조직원을 바라보는 느낌으로 강성태는 소신영을 매섭게 보았다.
“소 회장, 고검장, 부의장, 부장판사, 그리고 이번에 사학재단 이사장까지 원하는 인간과 그 가족들, 일가친척의 비리 정도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어.”
소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성태의 말을 받았다.
“약점이 많은 인간들이 소 회장의 실종을 어디까지 파헤칠지 궁금하기도 한데 선택은 소 회장의 몫이니까 뭐, 알아서 해.”
“이학의를 제가 잡겠습니다.”
옅게 웃은 강성태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번호를 알려줘. 24시간 언제고 내가 전화할 수 있는 번호, 다른 사람이 아니라 소 회장이 직접 받는 번호.”
눈알을 굴리던 소신영이 의자를 빙글 돌려 책상 서랍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번호를 받은 강성태는 문자를 소신영이 불러준 번호로 전달했다.
지이잉.
짧은 진동이 울리자 소신영이 검지를 놀렸다.
“오-.”
내용을 위로 올려가던 소신영이 속없이 탄성을 뱉어냈다.
“이 정도면 아예 패가망신 수준입니다.”
말을 하다가 본인의 처지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큼큼, 거린 소신영이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까지 내용을 훑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지정한 장소로 데려와. 따귀를 때려줄 생각이거든.”
“그래야죠. 죄를 지었으면 따귀를 맞아야지요.”
이학의가 따귀를 맞는 게 어쩐지 통쾌한 느낌으로 소신영이 답을 내놓았다.
“지금 내 번호 입력해 놔.”
“아, 예.”
스마트폰을 왼손에 든 소신영이 오른손 검지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 어쩐지 이름을 입력하는 소신여의 표정이 묘했다.
이 인간이 혹시?
“입력했습니다.”
“뭐라고 넣었어?”
“예?”
“이리 내놔 봐.”
난처해하는 소신영의 스마트폰을 낚아챈 강성태는 액정에 시선을 내렸다. 그런 뒤에 문자 표시를 누르자 가장 최근에 온 문자의 이름에 ‘강 조폭’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말 일관성 하나는 끝내준다.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가 막힌 웃음이 나왔다.
“고치겠습니다.”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강성태’라는 글자를 입력한 소신영이 액정을 보여준 뒤에 얼른 스마트폰을 내렸다.
“하루다. 내일까지 결과를 알려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힌 뒤였다.
털썩.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은 소신영은 “하아.” 하는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그 직후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소신영은 화들짝 문을 바라보았다.
“뭐야?”
“접니다, 회장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장 비서였다.
“또 뭐? 이번엔 누구냐?”
“이우섭 부의장께서 전화를 다섯 번이나 하셨습니다. 꼭 통화해야 한다는 전갈입니다.”
“부의장이?”
장 비서를 바라보던 소신영은 손을 들어 벌레를 쫓아내듯 바깥으로 휘저었다.
이번엔 또 뭘까?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이우섭이 다섯 번이나 전화했다면 연락해 보는 게 좋았다. 몸을 돌려 평소에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꺼낸 소신영이 번호를 누르고는 답을 기다렸다.
- 여보세요?
“소신영입니다. 급하게 찾으셨다고요?”
- 소 회장. 혹시 강성태 회장과 함께 있었소?
“예? 강성태… 회장이라니요?”
- 장 비서가 강성태란 분과 면담 중이라고 하던데, 아니었소?
이런 죽일 인간이!
이를 깨물었으나 소신영은 조용하게 숨을 내쉬며 분노를 조절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 그게 말이오. 정부 차원에서 나서야 한다며 내게 협조 요청이 들어온 일이 있는데.
이우섭은 먼저 멕시코 건설과 관련된 강성태의 권한을 소상하게 먼저 전했고, 이어 건설사들의 반응을 알려주었다.
이게 말이 돼?
소신영은 스마트폰을 내려서 이우섭의 이름을 확인했다.
꿈속인가 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들리는 이우섭의 음성은 현실이었다.
- 소 회장. 이건 건설사 한두 곳이 삼킬 공사가 아니오. 그러니 너무 욕심내지 말고 내가 추천하는 두 곳이 참여하게 도움을 주시오.
욕심을 내기는.
따귀를 맞지 않으려면 어떡해서든 이학의를 제물로 내놓아야 할 상황이었다.
“말씀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조금 뒤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 소 회장? 그러지 말고 오늘이라도 봅시다.
“연락드린다니까요.”
깡패가 120조 원 규모의 공사를 결정하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믿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우섭이 이렇게 매달린다면 결코 허투루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소신영은 바로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나다. 혹시 멕시코에서 120조 원 규모의 공사가 있다는 말 들어봤냐?”
- 예, 회장님. 아침에 퍼진 말인데 지금 그 건 때문에 10위 안에 드는 건설사 전체가 비상입니다.
소신영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 처음에는 간혹 있는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룹 총괄 비서실이 직접 나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정적이라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 강성태 회장이라는데 깡패 두목이라는 말도 있고, 성북구 개발 사업을 하는 시행사 회장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회장님.
진짜였구나!
소신영은 얼이 반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 회장님. 혹시 연결되십니까? 되시면 저희도….
“알았다니까.”
통화를 마친 소신영은 먼저 강성태를 떠올렸다.
“그래도 소 회장은 반성의 기미가 있어서 좋게 지내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돼서 많이 아쉬워.”
그가 했던 말도 분명하게 기억한다.
얼른 집어 든 스마트폰에는 강성태란 이름도 확실하게 입력돼 있었다. 24시간, 언제고 연결되는 번호라고 했다. 물론 전화야 강성태가 걸겠지만 말이다.
돈이 아쉽지는 않다. 하지만, 만에 하나 재계서열 1위부터 5위까지의 건설사에 강성태를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게 소신영이라면, 얻을 게 엄청났다.
숨을 두어 번 고른 소신영은 스마트폰에 담긴 이학의의 비리를 천천히 확인했다.
우선 이 인간을 잡아야 그 핑계로 연락을 한다.
“이학의.”
액정을 바라보는 소신영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도움을 달라면 이우섭은 무조건 달려올 테고, 고검장까지 나서면, 이학의쯤 찜쪄서 뼈만 남길 수도 있었다.
**
소신영의 집에서 나선 강성태는 기다리던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형님?”
원래 계획은 이럴 때 이용하기 위해 커피알리고의 2층을 비워두었던 건데, 당장 아르윈, 키란과 함께 가기는 어려웠다.
이래서 전에 조태완이 한강 빌라를 두고도 아우라 호텔을 사용했나 싶었다.
“한강 빌라로 가.”
강성태의 지시에 따라 아르윈이 차를 움직였다. 그 직후였다.
“호텔에 있던 삼합회 놈들이 형님께서 묵었던 호텔에 도착했답니다.”
룸미러를 슬쩍 들여다본 아르윈이 뜻밖의 보고를 내놓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강성태는 창밖을 보며 옅게 웃었다.
“내가 클라리사와 나올 때의 동선을 확인하는 건지 몰라. 그냥 지켜봐. 다른 놈들은?”
“500미터 뒤에 승용차와 오토바이로 따라오고 있습니다.”
“병원 앞에 있는 놈들도 여전하고?”
“예, 형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삼합회가 대단한 조직이라고 해도, 확실히 가페나 러시아의 히트맨과 비교해서 어딘가 허술한 부분이 있었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잠시 쉬고, 오늘 밤에 해결한다. 그 전에 방심한 모습을 보여주면 더 좋은데, 뭐 방법이 없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부분에는 아무래도 최치곤이 한 수 위가 아닐까?
강성태가 고개를 입맛을 다실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액정에 올라온 이름은 박노익이었다.
“여보세요?”
- 나다. 동생. 통화가 되나?
“괜찮습니다.”
- 동생이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뒤가 든든한 줄은 몰랐다.
창을 바라보던 강성태가 ‘뭔 소리야?’ 할 감탄이 먼저 넘어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흐하하. 역시 동생다워. 다 알고 있다니까. 이 바닥에 소문이 쫙 돌았어.
“무슨 일인지 우선 말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침묵하는 강성태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 진짜 모르고 있어?
놀람과 당황한 기색이 섞인 질문이 건너왔다.
- 멕시코에서 발주하는 120조 원 규모의 공사 말이야. 그 공사의 건설사를 정할 권리가 동생에게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지금 사방에서 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난리인데, 정말 몰랐어?
“후-.”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을 떠올린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 빌어먹을 자존심,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어쩐지 바르지오 만시니가 추천하던 보리스 파리오 회장까지 얽힌 소용돌이에 발목이 잠긴 느낌이었다.
- 진짜 몰랐어?
“짐작 가는 건 있습니다만, 지금 처음 듣습니다.”
- 하, 거참. 이런 일이 정말 있구만. 멕시코 거부라는 양반과 친분이 있는 건 맞나?
“예.”
이번에는 박노익이 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느낌의 웃음을 토해낸 그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우선 좀 알아보고 정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러세.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차를 잠깐만 세워.”
그런 뒤에 강성태는 바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쯤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내용을 짐작할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전화를 받은 이두안 회장의 음성이 넘어왔다.
“강성태입니다. 잠깐 시간 되십니까?”
-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들어야지. 언제쯤이 좋은가?
“지금 출발하면…, 30분 안에 도착합니다.”
- 급하기는 하군. 오게. 기다리지.
“그럼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종료 버튼을 누른 강성태는 아르윈에게 곤잘레스 회장이 묵는 호텔을 알려주었다.
차가 출발한 다음이었다.
이번에는 조태완의 전화가 있었다.
내용은 박노익과 거의 비슷했다.
이런 건 좋지 않다.
강성태에게 시선이 몰리게 되는 게 가장 큰 문제였고, 다음으로 삼합회의 조직원들을 해결하고자 벼르는 상황인 것도 걸렸다.
그림자를 빛으로 던지면 견딜 방법이 없다.
소신영, 고검장, 부의장, 약점을 잡아서 어둠 속에서 두들기는 건 무조건 그림자가 유리한 싸움이지만, 반대로 강성태를 무대 위로 끌어올려 조명을 비추면 싫든, 좋든 뒤가 드러나게 된다.
대중의 눈은 무서워서 그때부터 강성태는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렵다.
아무리 마약을 막겠답시고 설쳐도 폭력 조직의 보스가 대중에게 환영받거나 환대받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의도가 어떻든 무대 위에서 주연과 함께 설치는 경호원이 된 꼴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보리스 파리오 회장과 얽히는 일도 사양하고 싶었다.
강성태가 창밖을 보며 고민하는 사이, 승용차가 호텔 입구로 들어섰다.
“한 시간쯤 걸려. 혹시 삼합회 놈들이 이상하게 움직이면 걱정하지 말고 바로 전화해.”
당부를 전한 강성태는 바로 승용차에서 내렸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