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 16화
점심을 먹은 강성태는 아르윈, 키란과 함께 방지병원으로 향했다.
“오늘 밤에 상대해야 하는 삼합회까지는 특별한 경우다. 평소에도 그렇게 깨놓으면 뒤처리가 곤란해. 권총을 지니지 않은 갱을 상대하는 느낌이라면 적당할 거야.”
가는 길에서 강성태는 키란에게 강도를 조절하라고 조언했다. 강성태를 말리던 조태완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나마 키란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서 망정이지, 강성태처럼 픽 웃으면서 머리를 창틀에 찍어댄다면 글자 그대로 갑갑할 일이었다.
“키란에게 강도를 정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운전석에 앉은 아르윈이 영어로 말을 건넸다. 키란이 알아들으라는 배려였다.
“삼합회처럼 제거하는 건 10, 오늘처럼 대놓고 부수는 건 5, 적당하게 보스를 보호하는 건 3, 이런 식으로 숫자를 정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형님.”
“좋은데? 이걸 지금 생각한 거야?”
“가디언스파에서 조직원들에게 지시할 때,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형님.”
키란이 고맙다는 눈으로 운전석에 앉은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외롭던 병실에서 우리말을 가르쳐준 데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아르윈이 꽤 의지가 되는 눈치였다.
“치곤이와 손발을 맞춰야 하니까 그때까지는 키란을 챙겨줘. 뭐하면 데리고 있으면서 나나 치곤이가 호출할 때 함께 움직이든가.”
“우선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이 답을 하고 나서 곧바로 승용차가 병원 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장에서 내린 강성태는 새삼스러운 심정으로 키란의 복장을 보았다. 체크무늬 셔츠에 진바지 차림이었다. 캐주얼한 복장이긴 한데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강성태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옷을 내려다본 키란이 고개를 들고는 순박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래. 아무렴 어떠냐.
이렇게 함께 있으면 그만이지.
옷이야 얼마든지 사면 되는 거고.
키란에게 눈짓을 던진 강성태는 로비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위로 올라가자 병원 특유의 심심한 음식 냄새가 복도에 가득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간 이병렬의 병실에서는 뜻밖에도 진한 갈비탕 냄새가 풍겼다.
“왔어?”
심지어 이병렬은 머리 쪽을 위로 들고 반쯤 앉은 자세로 있었다.
“벌써 이래도 돼?”
“언제까지 빌빌거리라고?”
조봉진의 인사를 받으며 침대에 앉은 강성태는 이병렬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빨리 일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통증을 억지로 버티는 느낌이었다. 그 증거로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점심으로 갈비탕을 먹은 것도 그 때문이고.
“저 친구는 뭐야?”
강성태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이병렬이 키란을 바라보았다.
“키란. 인사드려. 여기는 이병렬.”
“키란입니다, 형님.”
“전에 나랑 같이 용병했던 동생.”
뭔지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이병렬이 손을 뻗었다.
“이병렬이다. 반갑다.”
아직 몸이 성치 못해서 확실히 마음껏 뻗지 못했고, 그 바람에 구부정한 자세가 나왔다.
인사가 끝난 다음이었다.
강성태는 박노익의 사무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먼저 들려주었다.
“성북구 개발 사업은 완전히 끝난 거네.”
“누구한테 들었어?”
“왜?”
“반응이 그렇잖아. 알고 있는 눈치인데?”
강성태의 질문에 이병렬이 픽 웃었다.
“태완이 형님이 전화하셔서 보스가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얼마나 떠들었는지 아직도 귀가 얼얼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박노익 회장님이 완전히 몰려 있더라고. 그 순간에 회장님이라고 부르면 뭔가 주고받는 관계 같아서 형님이라고 했거든. 그래놓고 나니까 이번에는 고문님이 걸려서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멋지다. 잘했다.”
“내 인생에서 딱 두 명이다. 더는 없어.”
“그거야 뭐 보스가 알아서 할 일이고.”
다음으로 강성태는 소신영과 이학의 이사장의 일도 이병렬에게 전해주었다.
“그렇다니까. 그런 인간들은 이상하게 틈만 보이면 뒤를 노려. 이제 어떻게 할래?”
“만나보려고.”
대꾸를 내놓지 않은 이병렬이 시선으로 강성태의 뜻을 물었다.
“어나니머스가 준 정보로 압박해봐야 이미 한 번 당한 거라서 강도가 떨어질 거 같거든. 다른 방법을 쓰려고.”
“다른 방법이 뭔데?”
“가장 믿는 구석을 깨야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깡패들이 돈 받으러 갈 때 어디를 찾아가?”
“집?”
답을 한 이병렬이 고개를 뒤로 빼고 강성태를 빤히 바라보았다.
**
모서리가 부서진 책상, 뜯어낸 블라인드, 찍힌 자국이 역력한 문까지, 박노익은 거칠었던 오전의 흔적이 남은 사무실에서 박승양을 맞았다.
“어이구, 고생 많으셨네.”
“앉아요.”
뻔뻔한 얼굴로 사무실을 둘러본 박승양은 박노익이 권하는 의자에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앉았다.
“어떻게 뒤탈은 없겠어요?”
박승양이 넌지시 건넨 질문을 박노익은 같잖다는 투의 웃음으로 받았다.
“그렇겠지. 우리 박 회장이 나서고, 조태완 회장이 덮으면 이 정도야 뭐 가볍게 해결되겠지.”
능구렁이 박승양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온 모양이었다. 그래놓고, 아직 차도 나오지 않았는데 눈빛을 반짝였다.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그건 그렇고. 건설사들이 강성태 회장이란 분을 찾아요. 강성태 아시지? 강성태? 폭력 조직 세상에 삐리삐리비-, 하고 황야의 무법자처럼 홀연히 나타난 강성태.”
반응이 없는 박노익을 앞에 두고도 박승양은 입을 계속 놀렸다.
“주먹 한 방에 한 명씩 빡빡 쓰러트리며 강남을 평정하고 마약, 납치, 고리대금은 절대 안 된다며 부르짖는 이 시대의 참 깡패, 어둠의 세계를 아름답게 노래하는 조직계의 타고르. 캬흐. 아, 타고르는 아시나?”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에 여직원이 마침 커피를 가져왔다.
차를 놓아준 여직원이 나간 뒤였다.
“박 회장. 건설사들이 강성태를 만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어요. 우리가 짐작하기로는 이무기였는데, 이무기 아시나? 용이 되기 위해 꿈틀, 꿈틀하는 메기 닮은 괴물.”
“아, 거 좀!”
“이무기인 줄 알았더니 하늘을 나는 용이었던 거지. 그것도 이렇게 큰 여의주를 두 개나 든 용.”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요?”
“멕시코에 120조 원짜리 규모의 공사가 있어요. 그 공사를 맡을 건설사를 결정할 권리가 강성태에게 있습니다.”
돈에 관한 한, 그리고 눈빛을 빛낼 때의 박승양은 절대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멕시코의 거부 곤잘레스 이두안이란 양반이 한국에 와 있거든요. 그 양반이 전권을 강성태에게 넘겼다고 비공식적인 미팅에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내 입을 잠깐 보실까?”
박승양의 말에 빨려든 박노익은 무슨 소리인가 하는 심정에서 그가 검지로 가리킨 입을 향해 상체마저 기울였다.
“강. 성. 태. 이렇게 분명하게 이름을 말했다는 거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릴까? 강. 성. 태. 누가?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왜? 그건 나도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박승양은 피 냄새를 맡은 승냥이처럼 눈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공사비가 이미 확보된 상황이라 전 세계에서 이름 좀 있다는 건설사가 모두 달려들고 있어요. 아셨어요? 성북구 개발 사업? 그거? 120조 원짜리 공사를 맡긴다고 하면, 그냥도 해줄 겁니다.”
120조 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박노익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2조 원짜리 공사를 그냥 해줄 정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국민연금의 보유 지분가치가 대략 120조 원이라면 가늠이 되실까?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시오?”
박노익은 바보처럼 고개를 저었다.
더 무서운 게 뭔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 싶어서 저절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 공사를 맡게 되면 추가로 있을 200조 원짜리 공사를 따기에 유리한 위치에 서지요. 이 정도면 강성태란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줄 아시겠소?”
“후우-.”
“모르셨구만. 그냥 황야의 무법자 정도로 아셨던 거야.”
“그런 말을 전혀 안 해서.”
그렇기도 하겠다는 듯 박승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기 가져왔는데.”
그리고는 재킷 안쪽에서 네 겹으로 접은 A4 용지를 꺼냈다.
“이게 성북구 개발 사업을 하겠다며 나선 건설사 명단입니다. 아무 곳이나 하나 찍어요. 모두 선투자를 하겠다는데 그런데도 이익 조정은 않겠답니다. 무슨 소리냐? 박 회장이 돈 한 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크게 쓰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작은 글씨로 촘촘하게 건설사와 대표이사 이름, 그리고 대표이사의 이동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심지어 박노익이 놀라 시선을 들 정도로 대단한 건설회사 이름이 모두 있었다. 대표이사의 직통 연락처와 함께.
“이제 뭘 해야 하냐면 얼른 강성태에게 전화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잘하면 이번 공사를 위임하는 거로 박 회장이 늘 바라던 중국과 일본의 더러운 돈을 몇 년 동안은 깡그리 밀어낼 수도 있지요.”
말을 마친 박승양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
점심을 먹은 소신영은 책상 한쪽에 세워둔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 뒤에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이리저리 밀거나 당겼다.
한우의 위력은 대단해서 그사이 문신처럼 박혔던 손자국을 넓은 멍으로 바꾸었고, 몇 곳은 푸릇푸릇하니 변해서 하루 이틀이면 제 색을 찾을 정도였다.
조태완이 어떻게 나올까?
강욱이라면 어느 정도는 답을 얻어올 거 같은데?
혀로 볼을 밀어내 멍을 살피던 소신영은 눈 끝에 맺힌 피멍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런 수모를 당하는지, 원.
비록 이세종이 만든 보고서 때문에 따귀를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고서를 읽은 덕분에 조태완을 떠올렸고, 경찰청 정보과장을 동원해 일을 만들었으니 손해만 본 건 아니었다.
‘두고 보자.’
거울을 보며 눈빛을 빛낸 소신영은 팔을 뻗어 목초 먹여 키운 왕란을 집어 들었다.
멍을 빼는데 단계가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맞은 직후에는 한우 우둔살, 멍이 번진 다음에는 달걀을 문지르는 게 효과가 있단다. 도대체 얼마나 맞고 살아야 이런 걸 알아내는 건지, 발견한 사람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눈가에 달걀을 붙인 소신영이 빙글빙글 돌리며 노트북에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똑똑똑.
어쩐지 섬뜩하게 들리는 노크가 밖에서 들렸다.
“뭐야?”
고개를 돌린 소신영은 아차, 하는 얼굴로 달걀을 내렸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정보과장?”
“강성태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답을 들은 순간에 소신영은 그만 달걀을 놓치고 말았다.
다리 아래 떨어져 갈라진 달걀에서 흰자와 노른자가 넓게 퍼졌고, 티슈를 뽑은 장 비서가 급하게 몸을 숙여 양손으로 집어 들었다.
“내가 있다고 했어?”
“약속을 하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야, 이 답답한 인간아! 내가 왜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언제 약속을 했어? 그걸 왜 네가 판단해!”
“정보과장님 연락을 받았다는 말을 하길래 그런 줄 알았습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소신영은 잔뜩 겁이 오른 얼굴로 달걀을 두 손에 든 장 비서를 바라보았다.
**
아르윈과 키란을 기다리게 한 강성태는 소신영의 집으로 들어섰다.
정문부터 정원까지, 돈으로 처바른 집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서 짧게 돌아본 거실 역시 으리으리한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마주친 사람들은 목에 밧줄이라도 걸린 것처럼 전부 생기가 없었다.
똑똑똑.
장 비서라는 사람이 문을 두드린 후에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그 직후였다.
“들어와…요.”
어색하기 그지없는 소신영의 음성이 들렸다.
“마실 건 됐습니다. 짧게 의논하고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예.”
장 비서에게 말을 전한 강성태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잘 꾸민 서재의 책상에서 소신영이 엉거주춤한 태도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강성태가 문을 닫자 그는 습관이 된 것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그저 강성태가 또 얼마나 때릴지가 두려운 눈치였다.
이렇게 겁을 내면서 도대체 왜 잔머리를 굴릴까.
강성태는 책상 옆의 작은 원형 탁자로 움직여 이태리 장인이 직접 다듬은 듯한 의자에 앉았다.
“뭐 해? 앉아.”
주춤거리며 움직인 소신영이 강성태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뜻이 없었어. 그냥 이세종 보도국장을 잘라내려고 감사를 지시했는데 숨겨둔 영상을 찾았거든. 그래서 그걸 가지고….”
“소신영 회장.”
봇물 터지듯 변명을 늘어놓는 소신영을 강성태가 나직하게 불렀다.
“우리 바닥에서는 한 번 고개 숙이면 어지간해서 뒤를 노리지 않아. 소신영 회장이 그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해서 지난번 호텔에서도 적당하게 끝낸 거고.”
변명이 막힌 소신영이 고개를 떨군 채 강성태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맞는 게 두려운 모양이었다.
강성태와 이렇게 단둘이 상황이 무섭고.
다리에 올려놓은 그의 손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뒤를 노리면 둘 중 하나거든. 죽거나, 발목을 끊고 은퇴하거나.”
“나는 깡패가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그냥 따귀로 끝낸 거였지. 아니면 별장에서처럼 두들겼을 테고.”
한마디를 건네고 고개를 다시 떨군 소신영을 보며 강성태는 눈가를 검지로 긁었다.
“내가 쉽게 대해주니까 뭔가 오해한 모양인데 국세청이니 뭐니 따질 거 없이 그냥 행방불명으로 처리해 줄까? 그런다고 고검장이나 국회부의장이 그걸 파헤칠까? 증거가 없을 텐데? 반대로 나는 영상부터 그들이 당장 파멸할 정도의 자료들이 있는데?”
소신영은 흔한 변명 한마디 내놓지 못했다. 그 역시 강성태가 지금 한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경찰청이니 검찰청이니 소 회장이 꿈쩍만 해도, 아니 이 집에서 숨을 몇 번 쉬는지도 다 알게 된다니까.”
강성태는 마치 어나니머스를 통해 알게 된 것처럼 말을 던졌다. 그리고는 갑갑한 듯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죽고 싶은 거지?”
“아닙니다.”
고개를 들고 답했던 소신영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시선을 떨궜다.
“이걸 진짜 믿어야 돼?”
“다시는 신경 쓰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걸 뭐로 믿어?”
“따귀를….”
말을 하다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소신영이 뒷말을 잇지 못했다.
“좋아. 내가 기회를 한 번 줄 건데.”
소신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학의라고 지랄 같은 이사장 놈이 하나 있거든.”
“이학의요?”
어라?
소신영의 반응을 본 강성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