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권 - 11화 (263/513)

13권 - 11화

아르윈은 나이만큼 눈치가 빨랐다.

대형 S500을 끌고 왔고, 삼합회가 노린다는 말에 따로 승용차와 승합차를 동원해 가디언스파에 속한 필리핀 조직원들을 뒤에 깔았다.

“인사드려. 박노익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르윈입니다, 형님.”

“박노익이다.”

굵직한 머리통, 목덜미의 해적 문신, 곱슬머리에 갈색 피부, 이국적인 눈매, 거기에 능숙한 우리말과 깊게 숙인 상체까지, 악수를 나눈 박노익이 정체를 묻는 시선을 던졌다.

“필리핀 가디언스파 수장입니다.”

“그래?”

뜻밖이라는 투로 박노익은 아르윈과 뒤에 선 필리핀 조직원들을 돌아보았다.

“하긴, 강남대장이라면 이 정도 능력은 있어야지.”

공손하나 묵직한 태도로 서 있는 아르윈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재킷 안으로 손을 넣은 박노익이 지갑을 꺼냈다.

“너 이리와.”

그는 아르윈을 불렀다.

“우리나라 조직도 아닌데 강남대장을 따르는 모습이 좋아서 내리는 거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군소리 말고 받아. 받아서 저기 동생들하고 야식 먹어.”

강성태를 돌아보았던 아르윈이 양손을 내밀고는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 그래야지! 흐하하하. 내가 오늘 여러모로 기분이 참 좋아.”

아르윈의 어깨를 다독인 박노익이 몸을 돌렸다.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강성태에게 말을 건넨 박노익이 승용차로 움직였다.

“다른 식구들은 없어?”

“평소에 저 혼자 모시고 다녔습니다.”

강성태의 질문에 문기주가 답을 내놓았다. 그런 그의 눈가에도 염려가 매달려 있었다.

“걱정할 거 없어.”

박노익은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느낌으로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지방의 조직이 노리는 상황에서 저렇게 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문기주 하나 달랑 있는 상태로 보내는 건 강성태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르윈. 이 차 따라와.”

“예, 형님.”

아르윈에게 지시한 강성태는 리무진의 운전석 쪽으로 가서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동생은 왜?”

“이렇게 가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댁까지 함께 가시죠.”

“어허! 그 정도는 아니니까 염려 마.”

“내일이면 끝납니다. 그때까지만 제 말대로 하십시오.”

만류하는 박노익을 다독인 강성태는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출발 준비를 마쳤다.

승용차가 부드럽게 움직인 다음이었다.

“동생이 이러니까 태완이 형님이 그러셨구만.”

알 듯 모를 듯한 감탄을 박노익이 내놓았다.

“태완이 형님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 우리 바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솔직히 나도 처음에는 안 믿었어. 언젠가 태완이 형님이 다시 조직을 움켜쥘 거라 생각했었지.”

물 위를 달리는 배에 앉은 것처럼 리무진은 출렁이는 느낌으로 도로를 달렸다.

“그 생각이 클럽에서 깨지더구만. 모사치는 이광준하고 김종수를 두들기는 모습을 보는데,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아, 이래서 태완이 형님이 그렇게 물러난 거구나, 싶더라고.”

붓끝을 뾰족하게 들어서 마감한 것처럼 쭉 찢어진 눈에 매부리코, 독한 입술을 한 박노익이 흐뭇한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나하고 송도 상인을 부려. 그래서 이 바닥에 들어와 있는 일본과 중국 돈을 쫓아내. 그거 못하면 앞으로 십 년 안에 코스닥 상장사의 5분지 1은 그놈들 손아귀에서 빨려서 버려질 거야.”

말을 마친 박노익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뒤에 그는 등받이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나는 이제 쉰다.

남은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단순한 동작이었는데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강성태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을 때였다.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왼팔을 넘긴 박노익이 강성태의 손을 툭툭툭, 다독였다.

다시 시선을 돌린 강성태 옆에서 박노익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소신영의 서재는 벽과 천장이 이어지는 구석까지 돈을 처발랐다. 테두리를 따라 박힌 나무가 미터 당 30만 원짜리 작품이라면 알아들을까.

거기까지는 애교였다.

벽지는 섬세하게 손으로 무늬를 찍어놓은 수제였고, 바닥 역시 사람이 매달려 깎아낸 원목을 끼워 넣었다.

천이백만 원짜리 책상, 검소하게 선택한 삼백육십만 원짜리 의자, 그 외에 금액을 말하면 입 아픈 책장, 스탠드, 창틀, 그 안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소신영은 눈 안쪽을 누르며 상체를 세웠다.

아들 소영천의 영상을 보고 난 뒤에, 두 번째 USB를 꽂았는데 그때부터 꼬박 책상에 앉아서 담긴 내용에 집중했다.

많이도 모았다, 진짜.

호화롭기 그지없는 서재에서 소신영은 헐벗은 남자와 여자가 뒤엉킨 동영상을 밤이 깊도록 모두 보았다.

평소 같으면 말이다. 영상을 보며 일어난 욕구를 풀기 위해 나섰겠지만, 지금은 강성태가 두려워서 감히 서재를 벗어날 생각조차 못 했다.

헐벗은 영상은 영상이고.

책상에 앉은 소신영은 노트북 너머로 시선을 주며 조태완을 떠올렸다.

이세종이 작성한 기획서에 따르면 조태완은 강성태에게 묵사발 나고, 그의 기반을 모두 뺏긴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강성태를 밀어주어서 보스를 만들었단다.

조태완이 다른 사람을 키워줘?

눈빛을 가라앉힌 소신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뱃속에 칼을 품으면 품었지, 그가 아는 조태완은 절대로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고개 숙일 인간이 아니었다.

“뭔가 여기에 답이 있는 거 같은데?”

무너진 조태완에게 힘을 실어줘서 강성태를 제거해?

생각을 떠올리던 소신영은 오싹하는 느낌에 홱 뒤를 돌아보았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강성태가 “엉뚱한 생각을 한 죄로 따귀 여섯 대.” 하며 머리칼을 움켜쥘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아, 참. 나 원.”

어쩌다가 이렇게 소심해졌을까?

짜증을 털어낸 소신영은 엄지와 검지로 콧날을 긁어가며 다시금 눈가를 좁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사람이 즐기기도 하고, 권력도 누리고 살아야 하는데 지금은 부처님 손바닥에 잡힌 원숭이처럼 꼼짝없이 바른 생활 회장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문제는 강성태가 절대 만만치 않다는 데 있었다.

어나니머스까지 동원하는 능력이라면, 통화, 문자는 물론이고, 소신영의 행보를 모두 지켜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뭐냐? 뭐지?’

이세종, 조태완, 강성태, 이 셋 사이를 교묘하게 헤집으면 뭔가 답이 있을 것만 같다.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함정에 빠진 강성태가 회칼에 심장을 찔리고는 “크헉!” 하는 비명과 함께 가슴을 움켜쥐며 죽는 기회가 세 사람 사이에 있지 않을까?

‘그래. 결심했어.’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돌아본 소신영은 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어나니머스를 피하기 위해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는 몸을 일으켜 서재 바깥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장 비서! 야! 장 비서!”

그가 고함을 지르고 난 뒤였다.

피곤한 기색을 삼킨 장 비서가 급하게 걸쳐 뒤틀린 재킷 차림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강욱 과장 알지? 내가 사정이 있어서 그렇다고, 조용하게 보았으면 싶다고 연락해. 당분간 집에 있을 테니까 여기에서 보자고. 알았지?”

“예?”

“이런 답답한 인간아! 경찰청….”

분통을 터트리던 소신영이 곧바로 고함을 삼켰다.

“경찰청 정보과 강욱 과장에게 연락하라고. 내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집으로 와달라고. 절대 내 번호로 전화하지 말고, 혹시 연락할 일이 있으면 장 비서 번호를 통하라고 말해. 그러면 알아들을 거야.”

“예, 회장님.”

소신영이 고갯짓을 하자 장 비서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

박노익과 헤어진 강성태는 잠실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궁금할 수도 있는데 아르윈은 군말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고강준이 따귀를 시원하게 맞은 자리였다.

주차장에서 내린 강성태는 강 쪽으로 걸어 벤치에 앉았다.

“앉아.”

“뭐 좀 드시겠습니까, 형님?”

“커피나 한잔 마실까?”

벤치 뒤를 향해 눈짓을 건넨 아르윈이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하고는 옆자리에 앉았다.

“주변 돌아보지 말고 들어. 낮에 나를 노릴 정도면 지금 어딘가에서 삼합회 놈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보는 게 좋아.”

“예, 형님.”

강성태가 말을 건넸고, 아르윈이 답을 한 직후였다.

필리핀 조직원이 커피를 전해주고는 적당히 떨어져 벤치 뒤에 섰다.

대개 동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을 보면 무시하는 시선을 던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르윈도 그렇고,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온 조직원 역시 인상이 사나워서 벤치 근처에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삼합회 말이지.”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아르윈의 번호로 문자를 전송해 주었다.

“영등포에 네 놈, 강남에 두 놈이 묶고 있다. 오늘 밤부터 그곳을 지키다가 내일부터는 아예 한 놈씩 철저하게 따라붙었으면 좋겠는데. 내일 밤 자정부터 모레 새벽 사이에 해치울 생각이다.”

문자를 확인한 아르윈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 밤부터 애들 붙여서 철저하게 따르겠습니다, 형님.”

“지난번 공항에서 처리한 놈들보다는 쉽겠지만, 이번에는 동시에 쳐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 그래서 치곤이에게 한 명 정도 넘겨줄 생각이다.”

필요한 숫자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강성태의 계획을 들은 아르윈이 벤치 뒤에 서 있는 조직원을 돌아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형님께서 두 놈, 제가 두 놈, 치곤이가 한 놈, 그렇게 해도 한 명이 빕니다, 형님.”

강남의 중급 호텔 룸에 두 놈, 영등포 중급 호텔 룸에 다시 두 놈,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남은 두 놈이 각각 여의도와 영등포의 중급 호텔에 따로 머물고 있었다.

조직원들이 달려가 대놓고 칼질할 거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숫자를 헤아릴 필요 없었다. 문제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완벽하고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있었다.

누굴 시키지?

강성태가 입맛을 다실 때였다.

“저기, 형님. 남은 한 명을 키란에게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아르윈이 나직하게 질문을 건넸다.

무슨 소리냐는 투로 강성태는 시선만 돌렸다.

“지금 갑갑해 죽습니다. 아마 형님께서 당부하시지 않았다면 저라도 키란을 데리고 나가 서울 구경을 시켜줬을 겁니다, 형님.”

“그 정도야?”

“말씀은 못 드렸는데 병실에서 푸시업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도 그럭저럭 밥 사 먹을 정도는 합니다, 형님.”

병실에서 “예? 형님?” 하던 키란이 떠올라 강성태는 픽 웃었다.

“키란이 형님 걱정을 많이 합니다. 이럴 때 손발 맞춰두면 나중에 치곤이와 함께 형님 모실 때도 크게 도움될 겁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건너편의 빌딩을 품고 흐르는 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르윈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르카 용병인 키란에게 병실에만 있으라고 하는 건 정말이지 갑갑한 일이었다.

병원에서 빼냈다가 만에 하나 다쳐서 돌아가면 안다미가 많이 뭐라고 하겠지?

강성태가 엉뚱한 문제로 고민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나야, 민재. 통화 괜찮아?

김민재는 꽤 흥분한 음성이었다. 그러면서도 맹가네 가족과 함께 있는지 그걸 억지로 누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뭔데? 오늘 오디션 본다고 하지 않았어?”

- 그거 때문에 전화했어. 아버님하고 어머님이 이렇게 배려해준 고마움 절대 잊지 않겠다고 백 번쯤 말씀하신 거 같아. 요선 씨도 고맙다고 하고.

“결과는?”

- 2차 오디션을 봐서 통과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면접이 있다나 봐.

“연습생 되는 게 쉽지 않구나?”

- 소개해 준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냐?

장난기 가득한 볼멘소리에 강성태는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 고마워. 진짜.

김민재가 진심을 담아 전하는 인사였다. 이런 식의 인사를 받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된 일이기도 했다.

“민재야. 어울리지 않게 그러지 말고, 하던 대로 해, 그냥.”

강성태의 말에 흐느끼는 듯한 김민재의 웃음이 건너왔다.

- 오늘은 늦었고, 내일 다시 연락할게. 요선 씨 부모님께서 자리 한 번 꼭 마련해 달라고 하셨어.

“그래. 나중에.”

김민재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만나는 아가씨가 확신을 안 준다며 툴툴거리더니 지금은 아예 사위처럼 행동하는 느낌이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연결돼 있던 평범한 일상이 종료버튼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민재라고 내 사촌. 그건 그렇고 삼합회 놈들 감시는 되겠어?”

“동생들이 잘할 겁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형님.”

“여기 호텔들 동선 좀 알아봐.”

“영등포 쪽이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식구들이 더 많이 깔렸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호텔에서 나오는 걸 노리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번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강성태는 아르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삼합회 놈들이 새벽에 나올 이유가 있으면 더 좋겠지? 필리핀 출신 가수 중에 미모가 뛰어난 여자 가수가 있을까? 내가 밤에 함께 있을 정도로?”

“예? 형님?”

설마 강성태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아르윈이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으로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빛냈다.

“준비하겠습니다, 형님.”

“내일 아침에 키란이 움직여도 되겠어?”

“지금이라도 연락하면 달려서라도 올 겁니다, 형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 술을 많이 마신 거거든. 술을 좀 더 마실 건데 여자 가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면 될까?”

“프리 스테이션에서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형님.”

“공사 중이라며?”

“홀은 크게 손댈 게 없었습니다.”

강성태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아들은 아르윈이 원하던 답을 내놓았다. 그런 뒤에 그는 뒤에 서 있는 조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클라리사를 프리 스테이션으로 불러.”

아르윈을 향해 고개를 깊숙하게 숙인 조직원이 몸을 돌려 스마트폰을 꺼냈다.

강성태는 천천히 한강 공원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선가 놈들이 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따라붙을 거고.

최치곤이 안다미를 지킨다.

그러니까 계속 나를 직접 노려라.

오토바이가 실패했으니까 이번엔 술에 취해 여자와 나오는 순간을 노려.

어둠을 향해 강성태가 옅게 웃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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