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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권 - 7화 (259/513)

13권 - 7화

섭충명을 처음 본 사람들 중에는 빼빼하고 마른 체형에 삭발까지 한 그를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러나 그의 능력과 잔인한 성품, 끝판왕 같은 이기적인 면을 알게 된다면 누구도 웃음을 달지 못했다.

원자춘이 아담한 공간에 책상을 놓고 벽에 액자, 스탠드 조명 등으로 서양풍 사무실을 꾸몄다면, 섭충명은 붉은 천에 금박으로 된 ‘복(福)’자가 즐비하게 늘어진 식당같이 넓은 공간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따질 것 없이 그의 개인적인 취향이었다.

그는 또 건물 내에 화장실이 있는 걸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집 안과 머리 쪽에 화장실이 있으면 우환이 생긴다는 말에 이상스레 집착한 탓이었다.

그 바람에 그가 거주하는 건물의 3층, 그리고 위쪽으로 4층과 5층은 우습게도 화장실이 없었다.

원자춘이 이용하던 식당처럼 넓은 집무실에서 섭충명은 책상에 올린 손을 이리저리 문질렀다.

잔인함을 한껏 표현한 삭발한 그의 머리와 이마, 그리고 좀 더 내려와서 눈썹과 눈매가 집무실 한중간을 바라보았다.

“방금 한국에서 연락이 왔었다. 강성태란 놈이 멀쩡하게 병원에 왔더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원자춘은 말할 것 없고, 함께 갔던 네 놈이 행방불명 됐는데 강성태는 멀쩡하다고. 그런데도 안내를 맡았던 너는 또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은 채로 내 앞에 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게 문제라니까.”

말이 안 통한다는 듯 상체를 바로 세운 섭충명이 자세를 틀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모르면 안 된다고. 알겠냐? 원자춘이 어디로 갔는지 너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그 바람에 내가 너를 의심하게 됐잖아. 강성태랑 짜고 원자춘을 팔아넘긴 건 아니냐?”

“저는 강성태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원자춘을 판 게 아니라면 강성태와 만나는 자리가 무서워서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돌아왔든가.”

“자춘 형님의 심부름을 했을 뿐입니다.”

픽 웃은 섭충명이 책상 한쪽에 있는 홍삼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걸 사러 보냈었다? 그것도 선물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30박스를?”

“정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섭충명이 이마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꿇어앉은 안내원 너머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안내원은 바로 알아챘다.

“기회를 주십시오! 어떡해서든 자춘 형님의 행방을 찾아내겠습니다!”

등 뒤에서 다가서는 조직원을 피하듯 안내원이 무릎걸음으로 버둥대며 책상으로 향했다.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콰악, 그러나 그는 머리칼을 조직원에게 잡혀서 원래 자리로 끌려갔다.

“원자춘은 어차피 제거할 놈이었다. 그러니 굳이 놈의 행방을 알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기회를 주십시오! 어떤 일이든 해내겠습니다!”

간절하게 매달리는 안내원이 안쓰럽다는 투로 섭충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아. 그렇다면 기회를 주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섭충명이 기회를?

안내원의 눈에 ‘진짜?’ 하는 반가움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섭충명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조직원이 망치로 붙들고 있던 안내원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퍼윽. 퍽. 퍼윽. 퍼윽.

두개골 깨지는 소리, 사방으로 퍼지는 피와 뇌수, 하얗게 뒤집힌 안내원의 눈,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섭충명이 손을 들자 조직원이 붙들고 있던 머리칼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머리 한쪽이 완전히 주저앉은 안내원이 무너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 정도에서 살아났으면 기회를 주려 했는데 그걸 못 견디네.”

다른 사람 같으면 치우라고 인상을 찌푸렸을 장면인데도 섭충명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에 연락해. 강성태를 먼저 해결해라. 죽이지는 못해도 삼합회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려줘.”

양팔로 책상을 짚은 섭충명이 몸을 일으켰다.

“멍청한 원자춘! 고작 가오리 빵즈와 협상을 하러 가다니. 그러니까 행방불명되지.”

죽은 안내원이 원자춘이라도 된다는 양, 조소를 날린 섭충명이 뒷짐을 진 자세로 집무실을 나섰다.

**

병원에서 나온 강성태는 느긋하게 걸어 빌라로 향했다.

시간이 났을 때, 커피 알리고에 들르고 싶었다. 그러나 조소아의 일을 비롯해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기껏 들른 커피 알리고에서 전화만 붙들고 있느니 아예 일을 마친 뒤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잘 지내나?

어떤 면에서 이은주도 참 대단하지.

최치곤을 통해 서달수의 죽음을 알고 나서부터였다.

바쁘리라 짐작했는지, 커피 알리고에 관한 문제는커녕 안부 문자조차 보내는 일이 없었다.

집 떠난 이순신 장군도 아니고, 커피 알리고를 지나가며 아메리카노 한잔 얻어 마시는 거로 카페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게 생겼다.

최치곤과 잘됐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남자가 보는 최치곤은 90점에 가까운 매력 덩어리였으나 여자, 그 중에도 이은주가 내린 평가는 알 길이 없었다.

강성태가 커피 알리고의 아메리카노 맛을 떠올릴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스마트폰을 꺼낸 강성태가 통화버튼을 누를 때, 옆을 지나던 여자들 사이에서 “광고 모델 같지 않니?” 하는 말이 들렸다.

“강성태입니다.”

- 통화 괜찮아?

아무렴, 광고 모델이 전 태완이파 보스 조태완과 통화하겠나.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 장태섭이 구속되면서 뱁새 박배근이 움직인 거 같다. 광주 금복주라는 황상열 하고, 전에 병실에서 봤던 대전 조덕진이 식구들 데리고 올라온단다.

“개발 사업 때문입니까?”

- 그거 말고 있나. 식구들 데려오는 것도 보스가 박아놓은 도끼를 뽑기 위해서라고 봐야지.

염병할, 개발 사업.

강성태는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면 찾아가 의논할 이병렬이 있었다.

“지금 올라와 있습니까?”

- 내일 아침에 올라온다네.

“그럼 아침에 유섭우와 함께 현장에 가보겠습니다. 그쪽에서 하는 거 보고 판단하죠. 그리고 혹시나 고문님을 찾아갈지 모르니까 정훈이 어디 보내지 마십시오.”

- 걱정되면 직접 들여다보든가.

예상하지 못했던 조태완의 대꾸였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모양인데, 그가 강성태를 믿고 의지하면서부터는 아예 곁에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 이런 일에는 웃지 좀 마. 아! 내가 따로 당부할 게 있는데, 우리 바닥에서 개새끼나, 씨발놈 하는 건, 굿모닝 하는 인사 같은 거야. 욕 몇 마디 했다고 바로 두들겨 버리면 당하는 놈들에게는 그만큼 억울한 일도 없어.

“알겠습니다. 내일까지는 외출하지 말고 계십시오. 봐서 들르든가 하겠습니다.”

조태완과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신월동 오거리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직장인인 듯한 여자들이 많았고, 그런 만큼 강성태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잦았다. 이런 날이 있으면, 저런 날이 있는 게 산다는 거니까.

우우우웅. 우우우웅.

오늘은 전화가 잦은 날이었다.

“강성태입니다.”

- 나야. 통화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잔잔한 음성의 박노익을 강성태는 편안하게 대했다.

- 내가 성북동 개발 사업을 따로 알아봤다. 동생 뒤통수를 치려던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런 오해 안 합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 내 딴에는 검찰에서 빼내 준 게 고마워서 개발 사업을 동생에게 선물하고 싶었거든. 먼저 제대로 공사할 시공사 섭외하고, 다음으로 장태섭이 가진 토지와 주택을 사들일 생각이었다.

“광주하고, 대전에서 움직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동생도 알고 있었어?

강성태의 말을 박노익이 반갑게 받았다.

- 변호사를 장태섭에게 보냈었는데 그놈이 아무래도 다른 건설사에 넘기려는 거 같다. 내가 아는 사채업자를 통해서 압력을 넣고 있는데 쉽지 않네.

“내일 오전에 올라온다고 해서 성북구에 나가볼까 하고 있습니다.”

신호가 바뀌어서 강성태는 도로를 건너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부아아-앙.

거친 엔진 소리가 왼편에서 터졌다.

젠장!

고개를 돌린 강성태를 향해 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모터사이클이 달려들었다.

“어어?”

굳어버린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내는 찰나였다.

이를 악문 강성태는 도로 중앙을 향해 뛰었다.

부아앙-.

방향을 틀었다. 분명하게.

속도가 엄청나서 반걸음 만에 모터사이클이 앞에 있었다.

강성태는 헬멧만 봤다.

모터사이클은 날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순간에 전문가들은 앞바퀴를 든다.

‘와! 와봐!’

부아앙!

자세를 낮춘 강성태를 향해 모터사이클의 앞바퀴가 들렸다.

후욱.

강성태는 높이뛰기 선수처럼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달려드는 모터사이클 위의 헬멧을 잡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부아앙! 콰드득.

염병할!

헬멧을 잡기는 했으나 하필 왼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어서 제대로 낚아채지는 못했다.

강성태의 의도를 알았는지 모터사이클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방향을 틀었다.

털썩.

강성태가 도로 중앙에 떨어졌고,

부아아아아-앙!

모터사이클이 굉음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쳤나 봐!”

독이 잔뜩 올라 몸을 일으키는 강성태를 위로하는 것처럼 젊은 여자들의 비난이 먼저 달려들었다.

횡단보도의 파란 신호가 걸린 상태였다.

도로를 건너기 위해 걷던 사람들, 멈춰선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이 강성태를 향해 다가왔다.

강성태는 눈빛을 감추기 위해 손바닥과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영화에 나왔던 적 있죠? 본 거 같은데?”

엉뚱한 질문들과 함께 속없이 하트를 그린 여자들의 시선이 달려들었다.

“이거 혹시 몰래카메라? 그런 겁니까?”

속 터지는 질문에 강성태는 고개만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시선을 많이 받는 날이라 생각했더니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아예 영화의 주인공이 된 꼴이었다.

액정에는 아직 박노익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고, 통화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빠르게 걸으며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 무슨 일이야, 동생? 괜찮아?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오토바이가 달려들었습니다.”

- 이런 개새끼들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박노익이 거칠게 욕을 뱉어냈다.

강성태에게 이럴 정도로 달려들 놈들이라면 삼합회일 확률이 높았다.

사람 일은 또 몰라서, 만에 하나, 광주나 대전에서 보낸 놈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위험한 상태고. 특히, 성북구 개발 사업을 직접 손댄 박노익은 말할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어디십니까?”

- 대치동 사무실.

“나를 노렸다면 회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에 동생들 있습니까?”

빌라 골목으로 들어서며 강성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솔직하게 방심했다.

한국이어서, 신월동이고 횡단보도를 건넌다는 생각에 터무니없을 정도로 마음을 놓았다.

- 나야 뭐 식구라고 해도 문기주랑 한 열 명이 전부니까 평소에 두 명 정도 데리고 있지.

“그러지 마시고, 열 명 모두 데리고 계세요.”

- 알았다. 동생은? 동생은 괜찮겠어?

“조심하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삼합회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중국에 있으면 안전할 거 같지?

어떤 놈이 시켰는지 모르지만, 강성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놈이겠다. 알고도 저런 짓을 시켰다면 죽고 싶어 몸부림치는 걸 테고.

멕시코에서, 그리고 가페와 러시아 히트맨을 상대로, 마지막에 원자춘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면 밤에 좀 불안할 거다.

빌라에 들어서며 강성태는 김정훈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 김정훈입니다, 형님.

“지금 거기 몇 명 있어?”

- 스물입니다, 형님.

“숙소 전부 털어도 되니까, 아예 건물 둘러싸.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50명 아래로 내려가는 일 없도록 해.”

- 알겠습니다, 형님.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싶은 욕심을 누른 김정훈의 답이 있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계단을 오르며 유섭우의 번호를 눌렀다.

- 유섭우입니다, 형님.

“지방 조직인지, 중국 삼합회인지는 모르겠는데 저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환이한테 연락해서 조심하라고 말하고, 병렬이 병원, 클럽 전부 긴장하라고 전해. 숙소 식구들 전부 대기하고.”

- 혹시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형님?

“나는 괜찮으니까 엉뚱하게 당하는 일 없게 신경 써.”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한 명 남았다.

함께 움직여서 삼합회의 표적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 강성태는 아르윈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이세종의 간절한 바람은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서랍에 담긴 필기구, 클립, 메모장들을 전부 책상에 올려놓았는데도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서랍보다 무게가 더 나갔고, 책상에서 빠지지 않는 점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여기, 이거 좀 잡아줘.”

감사실 직원 한 명이 동료를 불러 함께 서랍에 매달렸다.

“뭐야?”

“서랍이 안 빠지는데 안에 뭔가 있는 거 같습니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안 되면 부숴.”

책장과 아래 서류파일을 살피던 이충동이 다가와 단박에 거친 지시를 내렸다.

감사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다.

이렇게 특별한 공간을 놓칠 리도 없을뿐더러, 소신영의 특별 지시로 하는 감사라 없는 공간도 만들어야 할 형국이었다.

“잠깐 비켜 봐.”

책상에 발을 걸친 직원이 서랍을 꽉 붙들고는 힘껏 잡아챘다.

콰드득.

마침내 서랍이 나왔다.

안쪽을 확인한 직원이 시선을 들었고, 지켜보던 이충동이 묘한 미소를 그렸다. 레일의 끝을 우그러트려서 서랍이 빠지는 걸 막아두었다.

“여기 보십시오.”

거기에 서랍의 안쪽 면 너머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두었다.

가릴 거 없는 상황이라 직원이 드라이버를 밀어 넣어 덧붙인 공간을 뜯어냈다.

나온 건 두 개의 USB였다.

“이세종 이 인간?”

확신에 찬 표정의 이충동이 책상 한쪽에 있던 노트북을 당겼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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