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 6화
제3장. 보스에게 먼저 연락해.
병실을 나선 안다미는 지친 얼굴이었다.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도 조소아를 위해 빼낸 시간만큼의 업무 부담이 그녀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당기고 있었다.
“사정을 알고 나서 지나치게 흥분했었나 봐요. 멘붕이라는 표현 말고는 없었어요.”
계단을 내려다보며 말하던 그녀가 마지막에 시선을 들었다.
“부담 준 거죠? 말도 안 되는 일 부탁해서 곤란하게 한 거죠?”
“내가 조직이라는 데 몸담은 이유를 말 안 했었나요? 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권력자들을 벌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물론 마약을 막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진짜 죽일 거예요?”
유섭우의 살벌한 음성과 대화를 들어서인지 안다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강성태는 대답 대신 잔잔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흘러내린 안다미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미안해요.”
강성태의 미소가 힘이 된 모양이었다. 지친 표정의 안다미가 따라 하듯 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지만, 이제는 아래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학의 이사장이란 사람이 조소아 씨를 지켜볼 확률이 높습니다. 더불어서 다미 씨도요. 당분간 퇴근할 때 혼자 걷는 일은 피하는 게 좋아요.”
계단을 내려가면서 강성태는 주변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전했다. 삼합회가 노린다는 현실보다 조소아를 망가트린 이사장을 피하라는 핑계가 안다미에게 좀 더 편할 거란 짧은 판단에서였다.
“또 나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나요?”
강성태의 배려를 안다미는 한눈에 알아챈 눈치였다. 질문을 던지는 그녀의 눈과 표정이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소아를 위해 애써주는 것처럼 성태 씨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요. 나도 당당하게 맞설게요. 그러니까 나를 노리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지 정확하게 알려주세요. 그래야 위급한 순간에 제대로 대처하죠.”
강한 여자였다. 그리고 현명했다.
“우리나라에 마약을 들여오겠다는 삼합회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병원 앞에서 삼합회 조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들을 봤습니다.”
숨을 들이마셨던 안다미가 각오를 세우는 것처럼 천천히 내쉬었다.
“팔고 싶으면 자기 나라에나 팔지, 그걸 왜 자꾸 들여오겠다고 그래요? 잘했어요, 성태 씨.”
강단 있게 대꾸하는 안다미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올라왔다.
“가봐야 해요.”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남긴 안다미가 응급실을 향해 걸었다. 하얀 가운 아래로 드러난 헐렁한 수술복 바지가 그녀의 걸음에 맞춰서 펄럭였다.
**
박배근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상열이? 나야, 박배근. 태섭이가 땅하고 집을 나한테 넘기기로 했으니까 올라와.”
- 확실헌가?
“변호사 통해서 위임장 받기로 했어. 건설사에서도 선투자해주기로 했고. 대신 강성태가 박아놓은 도끼를 먼저 뽑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지.”
- 느자구 없는 새끼덜. 그깟 도끼 뽑는 거시 뭐시 어렵다고. 내가 바로 올라갈라네. 아그들 한 스물 델꼬 갈라니까 묵을 곳 좀 알아봐 주소.
“깔끔한 비즈니스호텔로 준비할 테니까 숙소는 걱정하지 마. 그나저나 박노익 형님 쪽에서 건설사에 자꾸 고춧가루를 뿌리는 거 같은데, 올라오는 대로 그 형님 먼저 눌러놓는 게 어떨까?”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건설사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송도 상인이라고 거부할 수 없는 곳에서 압력이 들어오니까 일을 하려면 서두르라는 내용이었다.
- 낼 상경하는 대로 노익이 성님 먼저 보세. 그래놓고 도끼 뽑으러 감사 오히려 편치. 거시기한 일이 있음사, 배를 홇드끼 싹 긁어내야 탈이 읍써.
“그렇게 알고 대전 덕진이한테도 연락할게.”
- 그건 알아서 하소. 내일 보세.
통화를 마친 뱁새 박배근이 흐뭇한 얼굴로 다시 번호를 찾았다.
- 조덕진입니다, 형님.
“난데 광주 상열이가 내일 아침에 올라오기로 했다. 오는 대로 노익이 형님 찾아가서 조갈이 해놓고 도끼 뽑으러 갈 거니까 너도 올라와.”
- 상열이 형님이 정말 올라옵니까, 형님?
아파트의 거실이었다.
소파에 오른쪽 팔을 걸치고 다리를 꼰 박배근이 가소롭다는 투로 픽 웃었다.
“금복주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말은 먹어줘. 그건 그렇고, 태섭이 설득해서 땅하고 집 가져오는 거 하고, 건설사 투자는 내가 알아서 했고, 피는 상열이가 흘리는데, 30퍼센트는 너한테 넘기잖냐. 그러니까 내일 너도 뭔가 보여줘야지, 안 그래?”
- 지난번에 당한 거 제대로 갚겠습니다, 형님.
“잊지 마라. 나는 백억짜리 사업에서도 너 안 빼놨다.”
- 감사합니다, 형님.
“금복주에게 얕보이지 않게 동생들 제대로 꾸려서 와. 내일 보자.”
흐뭇한 얼굴로 통화를 마친 박배근은 스마트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
“아흐, 씨발.”
개운하게 욕을 뱉은 박배근은 양팔을 위로 들며 기지개를 커다랗게 켰다.
수익은 확실히 나누기로 했다. 그러나 투자가 시작되는 순간 나오는 시행비는 모두 박배근의 몫이었다.
비즈니스호텔?
그깟 거,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원하는 대로 잡아준다고 해도 1억이 나오겠나, 2억이 들겠나.
당장 장태섭 명의의 토지와 주택을 받아오는 시점에서 받는 시행비가 10억 원이었다. 거기에 법인 카드, 매달 유지비 1억5천만 원은 별도였다.
“장태섭, 이 개새끼. 이런 꿀을 빨면서 나더러 얼마를 먹으라고? 에라. 이, 양아치 새끼야.”
더할 수 없이 만족한 웃음을 지은 박배근이 고개를 떨궈 바지와 벨트,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큰 사업을 하는데 초라해 보이는 건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겠나. 법인 카드를 받으면 우선 백화점에 가서 명품으로 위아래를 휘감을 수밖에.
명품 브랜드를 떠올린 박배근이 눈가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
이제나저제나, 이세종은 소신영 회장의 연락을 기다렸다.
일하다 보면 집중력이 높아질 때가 있고, 그런 순간에는 기대했던 것보다 월등히 높은 결과물을 받는 경우가 생긴다.
신강남파에 관한 기획서는 가히 이세종 인생의 역작이라 할 만했다.
칭찬, 마음껏 해보라는 격려, 그리고 두둑한 금일봉, 이세종의 상상은 끝을 모를 정도로 달려나갔다.
전화야, 어서 울려라.
이세종이 양손을 가슴 앞에 들고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흔들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정장을 입은 다섯 명이 줄줄이 들어왔다.
‘뭐지?’
자리에서 일어난 이세종은 책상 앞을 막아선 남자들과 그들의 가슴에 달린 패찰을 돌아보았다.
방송국에서 보도국의 위상은 그 어느 부서에도 뒤지지 않는다.
보도국장의 권위와 힘은 또 어떻고.
그런데 감사라니?
“뭐 하는 겁니까?”
책상에서 일어난 이세종이 앞을 막아선 무리를 향해 한마디를 던진 직후였다.
열린 문을 통해 이충동이 들어섰다.
‘감사실장이?’
이세종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세종 보도국장님. 감사실장 이충동입니다. 직무와 관련해 향응과 금품을 받았다는 제보에 따라 감사를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직무를 정지하고, 보도국장의 집무실을 비롯한 보도국의 모든 컴퓨터와 서류를 조사하겠습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직무를 정지한다고 했습니다. 옷걸이에 걸린 재킷만 들고 이 방을 나가시고, 조사를 위해 호출할 때까지 출근하지 마세요.”
이충동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감사실 직원들이 책장과 책상으로 움직였다.
“거기 안 서!”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들을 제지한 이세종이 스마트폰을 들고서 이충동을 노려보았다.
“어떤 놈이 감사실에 엉뚱한 제보를 한 모양인데, 회장님께 먼저 여쭤 봅시다. 그리고 말이오. 아무리 감사실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보도국을 건드린 적은 없어! 알아? 보도국은 보도국만의 룰대로 돌아간다고!”
이충동이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이세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장님과 통화할 테니까 나가요!”
“보는 앞에서 하십시오. 아니면 재킷만 들고 나가서 하시든가.”
“좋아. 어디 두고 봅시다.”
이세종은 어지간해서는 생각조차 못 했던 소신영의 번호를 눌렀다.
신강남파에 관해 조사하라고 지시한 회장이었다.
당연하게 별장을 노리던 강성태를 제대로 눌렀다고 여겼다. 거기에 역작이라 할 기획서까지 보냈으니 감사 따위 한마디로 눌러줄 게 분명했다.
이충동을 노려본 상태에서 신호음이 세 번쯤 울었다.
- 여보세요?
소신영은 무언가를 억누른 음성이었다.
“회장님. 보도국장 이세종입니다.”
대꾸 대신 뜨거운 숨소리가 건너왔다.
이건 좀 이상한데?
반응이 의심스러웠지만, 당장은 감사실장 이충동을 누르는 게 먼저였다.
“기획서는 보셨습니까, 회장님.”
- 봤지. 그 기획서.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또박또박.
기획서를 보고 강성태에 관한 분노가 폭발했을까?
이를 악문 상태에서 뱉어내는 답이 건너왔다.
“지금 감사실장이 직원들을 데리고 와서 저를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회장님.”
- 그래?
“자유로운 보도 환경을 조성하고, 성역 없는 취재를 하기 위해 보도국은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회장님.”
또다시 뜨거운 숨소리가 넘어온 다음이었다.
- 그래서?
어금니로 씹어서 뱉어낸 듯한 질문이 건너왔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이세종은 음성을 좀 더 공손하게 바꿨다.
“감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해주십시오, 회장님.”
그가 요구사항을 내놓은 직후였다.
- 보도국장이면 클럽에 가서 공짜 술을 처마셔도 되나? 다른 사람의 돈을 받아먹고, 회사 경비를 사적으로 유용해도 돼? 그거 정말 편하네. 그럼 나도 내일부터 회장 때려치우고 보도국장이나 해볼까?
“회장님?”
- 마음 같으면 당신을 갈아 마셔도 시원찮아. 깔고 앉아서 죽을 때까지 뺨을 갈기고 싶은데, 그나마 방송국이란 틀을 생각해서 참는 거니까 더 추한 꼴 보이지 말고 감사실장의 지시에 따라.
당황한 이세종의 표정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지켜보던 이충동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틀며 좀 더 진한 비웃음을 눈가에 달았다.
“회장님? 기획서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 내 손으로 목을 졸라 죽이기 전에 감사를 얌전히 받아.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더 매달리기도 전에 연결이 끊겼다.
“이제 재킷을 들고 나가십시오. 계속 감사를 방해하면 경위를 불러 강제로 내보내고, 업무방해죄로 고발하겠습니다.”
“저기….”
“감사 업무를 무마할 의도라면 한마디도 안 꺼내는 게 좋습니다.”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이충동의 반응은 뻑뻑했다.
기자들이 무섭지 않냐는 협박이 남았다.
너희들과 가족들을 취재해서 누가 더 다치는지 보자는 최후의 경고도 있었고. 그러나 조금 전 통화했던 소신영 회장의 반응이 이세종을 눌렀다.
“후우.”
이세종은 책상과 뒤편을 둘러보았다.
“좋아. 내가 나가는데, 취재에 관한 USB 하나는 가져갑시다.”
“안 된다는 거 아실 텐데요?”
“취재원을 보호해야 해서 그래! 그게 밖으로 나가면 방송국 전체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다고!”
“감사실에서 정보가 나간다면 그건 내가 책임질 일입니다. 그러니 이만 나가십시오. 계속 이러면 경위를 부르게 됩니다.”
어쩌지?
고영주에게 마약을 주사하던 소영천의 영상을 책상 안쪽 비밀 공간에 감춰두어서 이세종은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경위 불러.”
더는 못 참는다는 듯 고개를 돌린 이충동이 지시했고,
“나간다. 나가.”
이를 악문 이세종이 재킷을 들고서 보도국장실을 나섰다.
‘신이시여!’
그저 바라는 게 있다면, 감사실 직원들이 비밀 공간을 발견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
조태완은 3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푹 잤다.
묘하게 불안한 심정, 날카로운 칼날을 베개 옆에 박아놓은 것처럼 날이 바짝 서서 옅게 드는 잠,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한두 시간에 한 번씩 깨는 밤.
그 모든 걸 잊고 동화 속 초원에서 잠들었던 것처럼 깊게 잤다.
깨어났을 때의 개운함은 또 어떻고.
지난 30년의 피로가 완전히 씻겨 나간 것처럼 개운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는데 눈에 남아 있던 독기마저 풀려나갔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조태완이었으나 최근에는 그나마 일찍 일어나 버릇했었다.
“무슨 일이세요?”
“뭐가?”
“코를 얼마나 고는지 밤에 옆방에 갔었어요. 그런데도 모르시더라고요.”
“그랬어?”
오세아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조태완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소리 하기도 멋쩍어서 조태완은 몸을 일으키고 거실로 나왔다.
오세아가 홍삼 달인 물을 앞에 놓아주고는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누군가 지켜준다는 믿음이 이런 건가?
조태완은 시선을 돌려 주방 앞에 있는 오세아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주는 행복이 그녀의 어깨와 등에 매달려 있었다.
점심을 먹은 조태완은 반나절을 꼬박 TV를 보며 오세아와 보냈다.
“저녁은 밖에 나가서 먹을까?”
함께 식사하는 걸 늘 조심했던 조태완의 제안이었다.
놀라고 당황하고, 한편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오세아를 보며 조태완이 잔잔하게 웃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김정훈입니다, 형님. 편히 쉬셨습니까, 형님?
“무슨 일이냐?”
- 광주 상열이 형님하고, 대전 덕진이 형님이 식구들 꾸려서 서울로 올라온답니다, 형님. 성북구 개발 사업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님.
이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조태완이 강성태를 흉내 내듯 픽 웃었다.
“죽고 싶으면 뭔 짓 못 해? 보스에게 연락했냐?”
- 먼저 형님께 전화 드렸습니다, 형님.
“그럼 보스에게는 내가 연락하마.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보스에게 먼저 연락해. 그게 신강남파를 바로 잡는 일이다. 알았냐?”
-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조태완을 오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보고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