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 3화
짧게 움직인 강성태의 시선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왜 그래요?”
안다미가 계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강성태나 알아볼까, 그녀가 가볍게 던진 시선으로 삼합회 조직원을 알아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페에 오시는 손님인가 싶어서 잠깐 봤어요. 그보다는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모레 약속 때문에 안 하던 팩도 하는데 많이 이상해요?”
응급실에 있어서 그런지 안다미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성태는 가식 없어 보이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더 좋았다.
“어후, 눈부십니다.”
“짓궂어, 정말. 이거 응급실 식구들하고 잘 나눠 먹을게요. 오늘 끝나고 연락할게요.”
“모레 볼 거니까 굳이 마음 쓰지 마세요. 조금 일찍 만날 수 있죠?”
“오후 3시 이후에 프리예요.”
활짝 웃는 그녀의 묶은 머리채를 응급실 상황이 마구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들어가세요,”
더는 시간을 내지 못하는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안다미가 몸을 돌렸다.
그녀가 응급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강성태는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직전에 시선을 피하지 않던 놈들이라 혹시 아직 자리에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두 놈은 보이지 않았다.
뭐라 해도 삼합회고, 그 자존심에 원자춘이 느닷없이 사라졌으니 어떤 식으로든 체면을 세우겠다고 나설 거다.
급한 일은 바로 해결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 강성태는 바르지오 만시니의 번호를 눌렀다.
- 방송 일은 잘 처리했나?
바르지오의 음성에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는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 점은 고맙다. 그리고 원자춘의 일로 삼합회가 사람을 보낸 거 같은데, 그 정도 결정을 할 위치에 있는 인물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
- 미스터 강의 삶도 어지간히 바쁘구만.
가페와 스페츠나츠의 히트맨이 아니어서 그런지 바르지오의 대꾸는 여유로웠다.
- 이번에는 나도 부탁이 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하네. 말해.”
별장의 일도 있고 해서 강성태는 주저하지 않고, 그가 요구할 내용을 물었다.
- 곤잘레스 회장의 제안을 받아줘.
그러나 뜻밖의 요청이어서 우선 멈칫했고, 이어서 의아한 생각에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곤잘레스 회장의 제안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지?”
아직 응급실 앞이었다.
연신 들어서는 택시들이 승객을 내려준 뒤에 새로운 손님을 태우고 사라졌으며, 주차장으로 향하는 차량을 경광봉을 든 직원들이 분주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 건설사 지정 권한을 미스터 강에서 넘긴다는 제안으로 아는데? 내가 원하는 건 미스터 강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달라는 거다.
“그게 왜 화이트 테일의 부탁이 되지?”
- 내가 추천할 건설사가 있으니까.
바르지오는 절대 커미션을 먹자고 이런 요청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돈이 필요한 건 아닐 테고,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 제안을 받을 건가?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 화이트 테일이 자격도 안 되는 엉성한 업체를 추천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고.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른 채로 곤잘레스 회장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다.”
가페와 스페츠나츠 히트맨의 정보를 요구할 때는 곤잘레스 회장과 로라의 안전이 걸려 있었고, 별장 일에는 강성태의 구속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강성태 역시 이유조차 모른 채 움직이기는 어려웠다.
이유를 모르면 일을 마치고 나서 치러야 하는 대가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일을 부탁하며 지키는 한 가지, 바르지오는 이유를 대지 않은 채 잠시 침묵했다.
“화이트 테일. 어렵다면 나중에 다른 일을 부탁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사이에 규칙만 지켜진다면 돕겠다.”
바르지오의 침묵을 대신하듯 강성태는 먼저 생각을 내놓았다.
정 안 되면 광룡의 근거지에서 거꾸로 올라간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더디겠지만 말이다.
- 미스터 강. 이건 절대로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말인데….
“그럼 이야기하지 마.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중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지금 하려는 이야기를 떠들면, 우리 둘이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 지독하군. 좋아 솔직히 말하지. 보리스 파리오 회장이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사업에 투자하길 원해.
“그 정도는 직접 말해도 되잖아? 얼핏 듣기로도 외부 투자가 6, 70퍼센트 정도 된다고 하던데?”
존 보스만을 통해 경호를 제안한 것도 보리스 파리오였다. 그런 뒤에 화이트 테일이 건설업에 끼워줄 걸 부탁한 이유 역시 같은 인물 때문이었다.
무언가 숨겨진 다른 내막이 있겠다.
그것도 화이트 테일이 말을 돌릴 정도의 내막 말이다.
“화이트 테일. 진짜 그런 이유라면 곤잘레스 회장에게 솔직하게 내용을 말하는 게 도리야. 우리 두 사람 모두.”
- 그렇겠지? 확실히 미스터 강의 판단이 옳다. 보리스 파리오 회장의 일은 뒤로 미루자. 그리고 원하는 정보는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서 보내주겠다.
간단하리라 예상했던 통화가 복잡하고 어수선한 여운을 남기고 끝났다.
어떤 식으로든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일에 말리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를 품은 채 강성태는 키란의 병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올라간 강성태가 복도를 걸어 병실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침대에 앉아서 웃고 있던 아르윈이 몸을 일으키고는 강성태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여긴 어쩐 일이야?”
“키란이 심심할 거 같아서 왔습니다, 형님.”
길게 늘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피노로 살아야 했던 아르윈의 아픔이 배어 있는 듯한 답변이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상처를 후벼서 좋을 게 뭐 있겠나.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침대 옆에 앉았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지켜보는 키란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평소와 다르게 아르윈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르윈이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침대의 머리 쪽을 세워 앉은 키란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사를 건넸다.
“뭐야?”
이런 인사를 가르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강성태가 돌아보았을 때, 실제로 아르윈은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견딜 만합니다, 형님.”
발음과 억양, 무엇 하나 나무랄 구석이 없는 대꾸였다.
심심한 데다, 간절하게 우리말을 배우고 싶은 욕망이 더해져서 만들어낸 결과물로 보였다.
“또 뭐 익혔어?”
“이거저거 익혔습니다, 형님.”
“교재는?”
“예? 형님?”
“하하하하.”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로 강성태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키란과 10분쯤 대화를 나눈 강성태는 아르윈에게 시선을 돌렸다.
“프리 스테이션은?”
“봉진이가 따로 연락해서 내부랑 모두 살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말씀드리고 허락하시면 당장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할까 합니다, 형님.”
“병렬이는 뭐래?”
“한 달에 한 번, 영업 끝나고 아침까지 술 마실 권리를 달라는 조건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이병렬다운 조건이었다.
“그런데 형님. 병렬이 형님께서 권리금은 물론이고 보증금도 안 받겠다고 하십니다.”
“한 달에 한 번 마시는 술을 사. 아니다. 그러면 나중에 너무 손해가 크겠다.”
서달수와의 추억이 진하게 남은 장소를 돈을 받고 넘기기 싫은 이병렬의 심정쯤 충분히 짐작했다. 그렇다고 마냥 닫아놓고 있기는 더 싫었을 테고.
“병렬이 성격에 돈 받기 그랬을 거다. 나중에 기회 봐서 다른 방법으로 정리하게 할 테니까 지금은 그대로 받아. 그리고 작은 업장이지만, 제대로 일궈. 그게 병렬이한테는 보증금이나 권리금보다 더 반가울 거다.”
“예, 형님.”
강성태의 말뜻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것처럼 아르윈이 단단하게 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삼합회로 보이는 두 명을 병원 앞에서 봤다.”
“예? 형님?”
아르윈이 눈매를 매섭게 치켜뜰 때, 목덜미의 해적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었다.
“그쪽이 얌전히 묻고 지나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잖아. 우선 호텔에서 우리 도와줬던 직원들 안전 챙기고, 다니는 동안 주변을 조심해.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면 가장 먼저 노릴 사람이 누군지 짐작하지?”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키란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경고를 마친 강성태는 표정을 바꾸고 키란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아르윈, 키란이 최치곤과 함께 움직인다면 뒤가 정말 든든할 텐데, 거기에 이병렬이 제 몫을 해내면 신강남파의 내부 정리도 빠르게 끝날 테고.
“얼른 일어나. 일 많다.”
이병렬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요구를 강성태는 키란에게 전했다.
**
뱁새 박배근이 병실에 들어서자 점퍼 차림의 덩치들이 몸을 일으키고 상체를 깊게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종합병원 1인실이라고 해도 약간은 허술하고 좁은 병실이었다. 깨진 광대뼈를 철심으로 붙였다는 성경일은 누운 상태에서 양팔을 허벅지에 붙이고 부자연스러운 발음으로 인사했다.
“이 새끼들은 백정도 아니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잔인한 짓을 한 거로 따지면 철거 대상자들에게 장태섭과 성경일이 백배쯤 더 지독하지 않았을까. 그런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박배근은 성경일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투로 침대 옆에 앉았다.
“태섭이는?”
“동생들이 접견 다녀왔고, 변호사도 만나봤는데 아무래도 장타 같습니다, 형님.”
“너는 괜찮겠냐?”
박배근의 질문에 성경일은 퉁퉁 부은 얼굴에서 눈알만 돌려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몸을 피하는 게 좋기는 한데 상태가 이래서 그것도 힘듭니다, 형님.”
“그렇구나. 잠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애들 좀 물리지?”
성경일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무렴 내가 너 작업하러 왔겠냐? 그럴 마음이었다면, 동생들 시키지, 내가 직접 오겠어? 너 작업했다는 말 돌면 괜히 체면만 망가진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애들 좀 물려. 너한테 좋은 제안하러 온 거니까.”
망가진 개발 사업 말고 박배근이 제안할 게 없다. 순간적인 판단을 마친 성경일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나가들 있어.”
“예, 형님.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성경일과 박배근을 향해 차례로 상체를 숙인 덩치들이 조용하게 병실을 나섰다.
“시간이 그러니까 대가리, 꼬리 자르고 몸통만 말하마. 기존에 건설사가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태섭이가 가지고 있는 땅하고, 집을 압류하려는 모양이다.”
이미 알고 있었는지 성경일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아는 건설사 회장님과 작업해서 그 땅이랑 집을 살까 하거든. 사람이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야 하고, 떡을 만지면 콩고물이 묻는 게 세상 이치 아니냐?”
말을 마친 박배근이 입가를 혀로 닦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태섭이는 학교 가서 장타 맞게 생겼고, 너는 이 모양이니까 내가 건설사 회장에게 좀 더 끌어오마. 태섭이 땅이랑 집을 사게 되면 너한테 따로 3억 주고.”
3억이란 금액을 들은 성경일이 주둥이를 불만스럽게 뒤틀었다.
“야, 인마. 욕심이 목구멍 바깥으로 나오는 모양인데 이렇게 시간 끌다가 압류 걸리면 한 푼도 못 받고 끝나. 개털로 끝날 거 몸이라도 추스를 짜모 마련해 준다는 데 그게 못마땅해?”
“태섭이 형님은 얼마나 챙겨주십니까, 형님?”
“영치금이나 두둑이 넣어주는 거지 다른 게 있냐?”
“강남 노익이 형님이 변호사 보내서 매각 대금의 5퍼센트를 제시했습니다, 형님. 그러니 지금 말씀하신 조건이면 아마 그쪽으로 넘기실 겁니다, 형님.”
“노익이가? 주식쟁이가 왜 집이랑 땅을 사?”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형님.”
콧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숨을 푹 내쉰 뱁새 박배근이 입술을 뒤틀었다.
“그거 손대려면 강성태를 상대해야 하는데 노익이가 벌써 그쪽에 붙었나?”
“강성태 말씀이십니까, 형님?”
“그래! 그 새끼가 도끼 박아놓은 거 뽑아야 일 진행할 거 아니냐? 내가 광주 상열이랑 대전 덕진이 해서 땅하고 집만 해결되면 바로 도끼 뽑으러 갈 생각이었거든.”
강성태의 이름이 나온 뒤였다.
성경일이 고약하게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그럼 형님. 제가 동생들 보내서 태섭이 형님 설득하겠습니다, 형님. 대신 태섭이 형님 5억 주시고, 형님. 아까 말씀하신 3억 챙겨주십시오, 형님.”
“야. 너만 3억 챙겨주려던 거야. 거기에 5억이 더 붙으면 내가 상열이랑 덕진이한테 뭐라고 말해? 막말로 그 둘이서 내가 슈킹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잖아? 거기에 건설사에 추가로 손 벌려야 하는데 그 정도는 무리다.”
“성공하면 백억 이상 들어옵니다, 형님.”
“성공해야 들어오는 거지. 땅이랑 집 사고 신강남파 밀어내야 하는 데다, 그 뒤에 다시 버티는 악질들 철거시켜야 하잖아. 광주 상열이, 대전 덕진이랑 이익 나누면 나도 이거 해서 겨우 10억 먹어. 그중에 8억 떼면 뭐가 남냐?”
숨도 안 쉬고 내뱉는 박배근의 설명에 성경일이 입맛을 다셨다.
“내키지 않으면 관둬라. 나도 강성태한테 갚을 게 있어서 나선 길이라 그렇지, 동생들 데리고 개 피 봐야 하는데 고작 2억 바라고는 못 하겠다.”
말을 마친 박배근은 미련을 버렸다는 투로 무릎을 짚어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형님. 저, 1억만 챙겨주십시오, 형님.”
“후우. 너 시행사에서 보상비 슈킹친 거 소문 다 났어. 이미 먹을 만큼 먹어놓고 뭐 그렇게 욕심을 내?”
장태섭은 토지와 주택을 구입하느라 돈 퍼부었고, 성경일은 룸살롱 다니고 옷 사느라 남은 거 없다는 사실을 박배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잠시 성경일을 내려다보던 박배근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병원비도 필요할 테고, 내가 3천 주마. 그거 챙길 거면 나서고, 아니면 말아.”
“5천 주십시오, 형님.”
“아, 그 새끼, 짠하게. 4천.”
마른침을 삼키며 성경일은 또다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네가 나서겠다고 하면 오늘 중으로라도 노익이 찾아가서 담판 지어야 하니까, 얼른 결정해.”
“5천 주십시오, 형님.”
“관두자. 태섭이랑 잘해 봐라. 몸조리해.”
박배근이 몸을 돌리고는 바로 문을 향해 걸었다. 천만 원짜리 침묵이 병실을 진하게 누르는 상태에서 박배근이 문을 붙잡을 때였다.
“4천은 언제 주십니까, 형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성경일의 질문에 뱁새 박배근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