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권 - 2화 (254/513)

13권 - 2화

황상열이 답을 기다리는데도 박배근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시방 동상들이 듣고 있어서 그런가?”

박배근의 눈치를 알아챈 황상열이 비웃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달았다.

“보소. 작업을 할라믄 동상들이 앞서야 하는디, 이렇게 숨기고, 저렇게 감춤사 어치케 아그들이 따라오것나? 그렇게 거시기하믄 그만하소. 나는 우리 아그들 믿네.”

이야기를 잘라낸 황상열이 열무 이파리에 비벼 놓은 밥을 올렸다. 한눈에도 금복주 황상열은 개발 사업 따위 관심 없다는 투였다.

“그래. 감출 게 뭐 있어?”

보리밥이 내키지 않았던 박배근은 핑곗김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게 개발 현장에 박아놓은 도끼를 뽑는 거거든. 그래야 건설사가 강성태 눈치를 안 보니까. 그래서 말인데.”

뒤에 앉은 덩치들을 돌아보았던 박배근이 시선을 가져왔다.

“상열이 자네, 나, 그리고 대전 덕진이까지 해서 세 군데 식구들이 단번에 밀어버리세.”

“그라믄, 토지와 주택은 어치케 산당가?”

“미아리 경일이가 지금 병원에 있어. 내가 경일이한테 찾아가서 해결할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커다랗게 싼 밥을 입에 넣고 우물대던 황상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먼저 병원에 있는 애기를 찾아가서 주택과 토지에 대해서 답을 듣소. 그라고 연락줌사 내가 우리 애기들 델꼬 올라갈라니까. 그람 되것지?”

“그게 건설사가 투자금을 줘야 토지와 땅을 산다니까.”

“그랑께. 자네가 먼저 주택과 토지를 판다는 확답을 들어 놈사, 내가 애기들 델꼬 가서 도끼 션하니 뽑아주라니까. 그라고 나믄 자네가 바로 건설사에서 투자금을 받지 않것는가?”

여기에서 다른 말 해봐야 황상열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다.

“알았어. 그럼 내가 경일이 만나서 쇼부칠 테니까 연락하는 대로 올라와.”

“셈은 어치케 하는가?”

“내가 40, 자네하고 대전 덕진이가 30씩. 어떤가?”

입술을 내밀며 잠시 고민하던 황상열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수익이 백억인디 심심사믄 나쁘지 않네. 이참에 나는 신호남파 덕진이 성님 당한 거 갚어불라니께, 잘 맹글어서 연락 주소.”

황상열의 다부진 답을 들은 뱁새 박배근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소신영을 보내고 온 최치곤은 룸에 들어오기 무섭게 소파에 척 늘어졌다.

“에고, 죽겠다.”

“어째 술이 준 거 같다?”

“어어? 뭔 소리야? 어제 그렇게 마시고 나니까 이렇게 버티는 거야, 나니까!”

“알았다. 알았어. 얼른 일어나. 콩나물국밥 먹으러 가자.”

소파에 늘어졌던 최치곤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방송국 회장을 그렇게 때리고 괜찮겠냐?”

“영상 내용 다 알면서 그래?”

“그래도 그렇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최치곤은 진심으로 염려되는 얼굴이었다.

“복수하겠답시고 설치다가 두 번이나 맞았기 때문에 네 사람을 염려할 건 없어. 그보다는 삼합회가 분명 움직이기는 할 텐데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그게 신경 쓰인다.”

“거, 네가 정보 얻는 그쪽에 부탁하면 어때?”

최치곤의 권유에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직후였다. 최치곤이 뭔가 재미있는 걸 떠올린 것처럼 웃었다.

“왜?”

“가뜩이나 왼쪽 뺨이 시커멓게 멍든 양반이 오른쪽 뺨에는 또 손자국이 선명하니까 엘리베이터에서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억지로 참느라 인상을 구겼거든. 그러니까 내 얼굴 보면서 또 겁먹은 눈을 하는 게 더 웃기는 거 있지.”

이유를 설명한 최치곤이 흐느끼듯 웃었다. 그렇게 잠시 웃은 최치곤이 커다랗게 숨을 내쉬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밥 먹고 나는 숙소 만드는 일 보러 갈 거다.”

“알아서 해. 당분간은 고문님이 준 빌라에 있는 거로 하자.”

“그럼 더 좋지.”

이야기를 끝낸 강성태가 몸을 일으킬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진용인데? 잠깐 받아보고 나가자.”

강성태는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김진용입니다, 형님. 아침은 드셨습니까, 형님?

“치곤이랑 먹으려고. 무슨 일이야?”

- 저기, 병렬이 형님께서는 저더러 알아서 움직이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형님께 말씀드리는 게 옳은 것 같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형님.

“뭔데?”

이병렬이 알아서 하란 일을 김진용이 굳이 전화했다면 대강 강성태와 관계되었거나, 아니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강성태는 눈가를 좁히며 김진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지난번에 형님, 이모님 아드님이 만나던 여자분의 여동생이 있잖습니까, 형님?

염병.

족보가 워낙 복잡해서 강성태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이모 아들이면 민재고, 만나던 여자는 맹요선이고, 여동생이면 맹인선, 그거 말하는 거 맞아?”

- 예, 형님. 병렬이 형님께서는 만약 사촌분이 아직 그 여자분 만나고 있으면 여동생을 우리 엔터테인먼트에서 키워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잠시 탁자를 내려다보며 김민재와 맹인선, 그리고 맹요선을 떠올렸다.

“실력이 있어서 스카우트하는 거면 모를까, 괜히 불렀다가 잘못되면 아예 부르지 않은 것만 못해. 그건 그냥 둬.”

- 병렬이 형님 말씀도 있고 해서 그런데 일단 불러서 테스트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테스트?”

- 예, 형님. 이쪽에 노래와 댄스 강사들 수준이 상당합니다, 형님. 냉정하게 평가해서 결과를 보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형님.

최치곤이 궁금하고 배고픈 얼굴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내가 민재랑 통화해서 그쪽 의견을 들어볼 테니까 그 뒤에 결정하자. 저쪽하고 어떤 관계인지도 아직 모르잖아.”

- 알겠습니다, 형님. 쉬십시오, 형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가자.”

최치곤과 함께 객실을 나선 강성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내려가는 동안, 김진용과의 통화에 관해 최치곤에게 알려주었다.

“민재가 좋아하겠네. 점수도 왕창 딸 테고. 테스트받는 것까지는 크게 문제없잖아?”

“그렇기는 한데 쓸데없는 기대할까 봐 그게 걸려서 그렇지. 일단 밥 먹고 민재하고 통화해 볼게.”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유섭우와 덩치 다섯 명이 상체를 깊게 숙이며 강성태를 맞았다.

“아침부터 고생했다.”

“객실 하나 준비한 겁니다, 형님. 아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형님?”

“치곤이랑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해결할게.”

적당하게 둘러댄 강성태는 최치곤이 가져온 승용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변호사 접견실이었다.

접견실에 들어선 장태섭은 아크릴판으로 막아놓은 3번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접견을 기다리던 덩치 둘이 급하게 몸을 일으켜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는데 장태섭은 시선만 주고 다시 3번 공간을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변호사였다. 게다가 눈매와 턱선이 날카로운 게 변호사라기보다는 빚 독촉하러 온 냉혈한 회계사의 느낌이었다.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 수임하기 위해 도장을 받으러 온 변호사만 변호사 접견이 허락된다.

얼굴을 모르는 변호사가 이렇게 왔다면 추가 사건이 있다는 뜻이거나, 밖에서 따로 변호사를 더 선임할 만큼 일이 꼬인다는 의미여서 어쨌든 장태섭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온 사람이니까 일단 만나보고.

아크릴로 막은 공간으로 들어간 장태섭은 자리에 앉은 뒤에 다리를 팔로 짚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보통 사람은 장태섭이 부리부리하게 뜬 눈, 앞으로 기울인 상체를 보면 일단 주눅부터 든다.

“장태섭 씨?”

“그렇소.”

“박노익 회장이 부탁한 일 때문에 왔습니다.”

“노익이 형님이? 그 형님이 내게 부탁할 일이 뭐랍니까?”

변호사는 장태섭의 거친 태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죽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서류를 보았던 장태섭은 눈만 치켜떴다.

“장태섭 씨가 소유한 토지와 주택 목록입니다. 이걸 박노익 회장께서 매입하고자 합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거였구만.”

서류를 잠시 내려다본 장태섭이 비릿하게 웃었다.

“씨발. 함께 잡혔다가 혼자 나갔으면, 직접 접견을 오든가, 아니면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러니 작업을 이렇게 하라고 조언을 하든가 해야지. 언제 나갈지 모르는 나한테 땅하고 집을 사겠다고 변호사를 보내? 노익이 형님도 양아치 다 됐네.”

눈매를 고약하게 뜬 장태섭이 불만을 뱉어내는 데도 변호사는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건설사에서 장태섭 씨가 소유한 토지와 주택에 압류를 준비 중입니다.”

“이런 씨발. 그걸 건설사가 왜 압류해?”

“투자금을 회수하는 정당한 절차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급하게 찾아온 이유도 시간을 끌다가 압류되면 매각할 기회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 땅과 집을 누구 마음대로 매각해? 어떤 놈이든 그런 짓을 하면 배때기에 구멍을 뚫어줄 테니까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장태섭이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변호사를 노려보았다.

“나는 박노익 회장님 일로 온 변호사니까 그런 건 건설사에 직접 말씀하시고, 토지와 주택을 매각할 의사가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과 거래한 경험이 많은 모양이었다. 장태섭의 거친 눈매 앞에서 변호사는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주식 시장에서 온갖 마귀들을 상대하는 박노익과 함께 일하는 변호사라면 확실히 깡패에 주눅 들지 않을 정도의 강단과 배짱, 경험이 있겠다.

“보쇼. 변호사 양반. 변호사 양반 말대로라면 내가 팔아봐야 그 돈을 건설사가 다 처먹을 테니까 나는 어차피 말짱 꽝 아냐?”

“매매계약서를 작성하면 박노익 회장께서 건설사에 선투자금을 상환할 겁니다. 그런 뒤에 장태섭 씨에게 그 금액의 5퍼센트를 드릴 생각입니다.”

“하아, 씨발.”

대화를 이어나가려던 장태섭은 변호사의 제안을 듣는 순간, 뜨거운 김을 푹 쏟아냈다.

“5퍼센트? 내가 그 땅하고 집을 어떻게 사들였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5퍼센트야? 내가 건설사 회장이든, 전무든, 배때기를 갈라버리는 한이 있어도 알아서 할 테니까, 변호사 양반은 이만 가쇼.”

단칼에 자르기는 했지만, 잠시 틈이 더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장태섭을 보던 변호사는 곧바로 앞에 놓은 서류를 들어 서류 가방에 넣었다.

“어이, 변호사? 깡패들은 많이 상대해 보셨나 본데?”

“주식 시장에도 거친 분들이 많아서요.”

박노익이 하는 일을 짐작한 장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만 물읍시다. 내가 알기로 노익이 형님은 주식으로도 배 터지는 데, 왜 갑자기 개발 사업에 손을 뻗치는 거요?”

서류를 담고, 지퍼를 잠근 변호사가 가죽 가방을 테이블에 올리면서 시선을 들었다.

“내가 아는 건, 토지와 주택을 건설사가 압류할 거란 사실과 그렇게 되면 장태섭 씨에게 남는 게 하나도 없을 거라는 것, 마지막으로 박노익 회장이 5퍼센트을 제안했다는 게 전부입니다.”

워낙 냉정한 대꾸였다.

분하기도 하고, 멱살을 잡힌 것처럼 억울하기도 해서, 나중에 어떻게 되든 장태섭은 변호사의 냉정한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고 싶다는 욕구가 훅 피어났다.

장태섭의 거친 시선에 묻은 감정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몸을 세운 변호사가 가방에 손을 얹은 채 장태섭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감히 강북대장 장태섭을 내려다봐?

감정이 뒤틀린 장태섭은 독한 눈과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온 김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가지요. 건설사 회장이나 임원의 배를 찔러도 토지와 주택은 압류될 거고, 그렇게 되면 장태섭 씨는 0.1퍼센트도 얻는 게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변호사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장태섭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교도소 접견장에서 변호사를 폭행하면 법원이 굉장히 악질로 판단합니다. 최소 징역 1년 이상, 그리고 변호사가 전치 4주 이상의 진단을 받으면, 최소 3년 이상의 징역형이 추가된다는 의견도 전해드립니다.”

졌다. 강북대장 장태섭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변호사가 업무를 마쳤다는 투로 접견실을 나섰다.

**

최치곤과 헤어진 강성태는 샌드위치와 과일 주스를 잔뜩 사서 서라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이틀 뒤에 저녁을 약속했지만, 시간이 났을 때 안다미의 얼굴을 보고 싶었고, 이어 며칠째 들여다보지 못한 키란의 병실에 들를 생각이었다.

택시를 이용해 서라대학병원에 도착한 강성태는 응급실 앞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잠깐 시간 돼요?]

답이 없으면 샌드위치만 전해주고 키란의 병실에 올라갈 생각이어서 조급할 것도 없었다.

많이 바쁜가?

1분쯤 기다린 강성태가 본관 출입구로 움직일 때였다.

우우웅.

[응급실에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진동과 함께 바쁘다는 사실이 잔뜩 묻어 있는 안다미의 문자가 액정에 올라왔다.

[샌드위치 사 왔는데 전해주고 키란의 병실로 올라갈까 하고요.]

우우웅.

[응급실 앞으로 나갈게요.]

문자를 확인한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난 뒤였다. 응급실의 자동문이 열리면서 허름한 수술복에 하얀 가운을 덧입은 안다미가 급한 걸음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성태를 발견한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눌러두었던 설렘이 혈관을 통해 심장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웬일이에요?”

“그냥 보고 싶어서요.”

확실히 안다미는 로맨틱한 장면에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고, 그건 강성태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질문과 뻔뻔한 답을 주고받은 강성태와 안다미가 마주 보며 웃었다.

“얼굴 보고 싶어서 왔어요. 너무 바쁜 거 같아서 걱정도 되고. 오늘은 이렇게 얼굴 봤으니까 됐어요. 키란 병실에 있다가 갈 테니까 이거 응급실 식구들하고 드세요.”

강성태는 양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와 음료수 봉지를 안다미에게 내밀었다.

“아쉽다.”

모처럼 애교 섞인 반응을 보며 웃던 강성태는 짧은 순간, 눈가를 좁혔다.

응급실 옆의 계단, 그 앞 화단에 서 있는 남자 두 명이 강성태와 안다미를 적대감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원자춘을 연상시키는 짧은 머리, 유행하고 동떨어진 더블 재킷, 그리고 펑퍼짐한 정장 바지, 삼합회에서 보낸 인물이 틀림없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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