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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권 - 1화 (253/513)

13권 - 1화

제1장. 강성태를 해결할 방안은 있는가?

박노익이 알지 못하는 번호였다. 그런데도 그는 ‘혹시?’ 하며 강성태를 떠올렸다. 어쩌면 강성태가 전화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통화버튼을 누른 박노익은 모처럼 설레는 심정으로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 강성태입니다, 회장님.

“흐흐흐.”

웃음을 흘렸던 박노익이 너무 품위가 없었나 하는 얼굴로 앞에 앉은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고맙네, 동생. 오늘 크게 덕 봤다.”

- 저 때문에 당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이거 좀 봐라.

공치사를 늘어놓아도 모자랄 상황에서 불리할 수 있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저 강직함이라니.

“동생. 이럴 땐 검찰 일 보느라 많이 힘들었다든가, 다음에 동생이 어려울 때 갚으라든가, 그렇게 말하는 게 좋아.”

박노익은 먼저 농담 섞인 조언을 건넸다.

“그리고 말이지. 이미 우리 바닥에서 입지를 굳히지 않았나. 이제는 고문님이나 회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형님이라 불러. 그래야 지방 조직들을 상대할 때 편해.”

- 고민하겠습니다.

“고민할 게 뭐 있어? 클럽에서 인사 나눈 거로 나는 앞으로 동생으로 알고 지낼 테니까, 동생도 그렇게 생각해. 아! 전화는 무슨 일로 했나?”

- 고문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신 거 같아서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클럽에서 이광준을 개 패듯 두들기고, 성북구 개발 현장에 도끼를 박아놓은 신강남파 보스가 사실은 이런 사람일까.

강성태가 직접 전화해준 것도 좋았지만, 가식 없이 진솔하게 대해주는 것도 박노익은 좋았다.

“내가 고맙다니까. 언제 밥 한 번 먹세. 내가 살게.”

-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동생도 들어가세.”

흐뭇한 얼굴로 통화를 마친 박노익은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음 같으면 오늘 시간이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형님이 돼서 고맙다고 만나는데 어떻게 맨손으로 나서겠나.

먼저 들어가서 씻고, 성북구 개발 사업도 알아보고 나서 뭔가를 손에 쥐고 나서는 게 박노익이 생각하는 형님의 도리였다.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강성태는 탐나는 인물이었다.

“진짜 보스를 참 오랜만에 보네.”

“예? 형님?”

“아니다.”

혼잣말을 뱉은 박노익은 잘못됐으면, 25년 뒤에나 볼 뻔했던 강남의 거리를 눈에 담았다.

솔직히 강성태와 같은 보스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다.

박노익이 마지막까지 마음으로 모셨던 형님도 결국 노름과 유흥을 위한 돈을 끝없이 요구하는 바람에 피를 보고 갈라서지 않았나 말이다.

어디선가 박노익 이름 팔아먹으며 꽁짓돈 당겨쓴다는 말을 들은 게 마지막이었다.

“집에 가서 씻을 테니까 장태섭이 아래 일 보는 놈 있지?”

“예? 형님?”

“강북대장 장태섭이. 그 아래 동생 놈 말이다.”

“미아리 경일이 형님 말씀이십니까, 형님?”

박노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 지금 뭐 하냐?”

“지난번에 신강남파 유섭우 형님의 발길질에 얻어맞아서 광대뼈가 부러졌답니다, 형님.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형님.”

“그럼 그 새끼는 안 되겠네. 알았다. 변호사 시키자.”

“예, 형님.”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문기주가 고개를 숙였다.

**

소신영은 오전 9시 20분에 강서구 사거리의 호텔에 들어섰다.

마음 같으면 운전한 직원과 함께 움직이고 싶었는데, 행여나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까 봐 떨리는 마음을 눌러가며 혼자 로비에 섰다.

전화를 해볼까?

그가 스마트폰을 드는 순간이었다.

오른쪽의 작은 커피숍에서 눈매와 인상이 독하게 생긴 덩치가 걸어 나왔다. 살인마도 아닐 텐데 눈이 시뻘겋게 충혈돼 있었다.

“소 회장님 되십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오?”

소신영을 확인한 덩치가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성태 형님이 방에서 기다리십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른 침을 삼키며 머뭇대는 소신영을 덩치가 갑갑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안 가십니까?”

재촉을 받고서야 소신영은 납으로 된 구두를 신은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는 앞에 있는 덩치의 넓은 등판을 보며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방송국 회장 정도 되면 제법 이름을 떨친 깡패 한두 명은 안다. 멀리 볼 것 없이 이전에는 조태완에게 온갖 아쉬운 일을 맡겼었다.

그때 마주쳤던 어린 깡패들은 소신영을 참 어렵게 대하곤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술을 많이 마셨나?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술 냄새를 맡으며, 소신영은 강성태를 떠올렸고, 이어 이대로 시간이 멎었으면 싶었다.

때앵.

어림없지, 하는 느낌으로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벨 소리와 함께 멈췄다.

문아, 열리지 마라.

이 안에 갇혀서 강성태에게 가지 않도록.

바보, 연속해서 소신영의 간절한 소망을 무시한 엘리베이터가 문을 시원하게 열었다.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덩치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신영은 ‘닫힘’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숨을 길게 내쉬어야 했다.

“뭐 하십니까?”

쇳가루 가득한 덩치의 음성에 소신영은 반사적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 이럴까?

포도주색 카펫을 밟으며 복도 끝으로 움직인 덩치가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모시고 왔습니다, 형님.”

안을 향해 상체를 숙인 덩치가 몸을 비켜서고는 소신영을 보았다.

이제 알겠다. 얼굴이 부었고, 눈이 충혈되었으며, 숨 쉴 때마다 술 냄새가 풍기는 거로 봐서 저 덩치는 어젯밤에 신나게 달린 게 틀림없었다.

그런다고 바뀔 건 없어서 소신영은 두 걸음 남은 복도를 걸어 객실에 들어섰다.

강남의 특급 호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침실과 거실이 분리된 구조였다. 그리고 강성태는 거실의 소파 상석에 앉아 소신영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지켜보는 깡패만 아니면, 단박에 무릎이라도 꿇고 사정해보겠는데 그놈의 방송국 회장 체면이 뭔지, 인사조차 못 한 소신영이 어색하게 소파 앞으로 다가섰다.

“치곤아. 바깥에 잠깐 있어.”

“예, 형님.”

독하게 생긴 덩치가 세상 공손한 태도로 답을 내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앉아.”

뜻밖에도 강성태는 앞의 소파를 가리켰다.

혹시 오늘 일을 넘어가 주는 대신 뭔가 요구하려나?

한 가닥 희망을 품으며 소신영은 강성태의 왼편에 앉았다.

“소 회장. 하지 말리는 짓은 하지 마. 알았어?”

“방송에 내보낼 생각이 없어서 정말로 오늘 취재 중단하라고 할 참이었다. 아무렴, 어제 고검장의 모습을 보았는데 내가 뒤를 노리겠나? 나 그렇게 바보 아니야.”

소신영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투로 강성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보도국은 노조가 있어서 함부로 자르지를 못해. 그러니까 내가 먼저 보도국장을 가장 한가한 지사로 내보낸 뒤에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할게. 이번 한 번만 봐주게.”

소신영은 간절한 눈빛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사람 마음 약해지게?”

“제발, 내가 진짜 잘못했다. 다시는 이런 실수 안 할 테니까 제발 뺨만은 봐주라. 당장 이 사람, 저 사람, 얼굴을 물어보는데 아주 죽을 맛이야.”

전화로도 그러더니 또다시 강성태는 망설이는 눈빛과 표정이었다.

소신영이 간절하게 바라보는 앞이었다.

“원래는 아홉 대였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여섯 대로 줄여줄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결정을 강성태가 내놓았다.

뭐라고 애원을 내놓기도 전이었다.

움찔한 소신영의 머리칼이 강성태의 왼손에 붙잡혔다.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자들이 살려달라고 매달릴 때의 심정이 지금 너와 비슷할 거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심정, 너는 볼에 든 멍이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그 여자들은 평생 상처를 품고 살아야 돼.”

강성태의 표정과 눈빛이 무서워서 소신영은 의식도 못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한번 맞아봐서 그런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게 차라리 얼른 맞고 말지, 숨이 턱턱 막히다 못해 심장이 뻑뻑한 느낌이었다.

“베풀고 살아. 양보하고 살고.”

“예.”

놀라서 얼떨결에 나온 답이었다. 그만큼 지금 소신영은 강성태가 두려웠다.

“이 꽉 깨물어. 안 그러면 진짜 이 나간다.”

소신영은 이를 힘껏 깨물었다. 그리고 알았다. 이를 정말 악착같이 깨물면 고개 전체가 떨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짜아아아악. 짜아아아악. 짜아아아악.

세 번의 불똥이 튀면서 소신영은 그사이 우주를 가득 메우며 화려하게 빛나는 은하수를 강서구 사거리 호텔 객실에서 보았다.

주르륵, 코에서 흘러내린 피가 입술을 적셨고, 이어 찝찔한 피 냄새가 코를 타고 들어왔다.

“또 마약을 하거나, 내 뒤를 노리다가 걸리면 정말 죽어.”

“예.”

짜아아아악. 짜아아아악. 짜아아아악.

이번에도 새카맣게 변한 하늘에서 은하수를 보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본 것도 같았다.

강성태가 손을 놓자 소신영은 탁자를 짚으며 상체를 버텼다.

방울방울 피가 떨어져 광고에 나오는 우유처럼 멋진 왕관을 그린 뒤에 탁자를 붉게 수놓고 있었다.

“닦아.”

강성태가 내민 티슈가 소신영의 시선 아래로 들어왔다.

따귀를 맞으면 왜 눈물이 나는 건지.

“흐으으. 흐으으으.”

이상하게 서러워서 소신영은 실제로 울음을 터트렸다.

“억울해서 그래?”

괜히 따귀 대수가 늘어날까를 염려한 소신영이 눈물을 삼킨 뒤에 강성태가 내민 티슈를 받아서 코를 닦았다.

소신영이 티슈에 묻은 피를 보며 서러운 감정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심으로 반성하는 소 회장을 이렇게 한 게 걸리네.”

강성태가 티슈를 좀 더 뽑아 소신영에게 내밀었다.

티슈 따위 필요 없으니 소신영은 얼른 이 객실을 나서고 싶었다.

**

무등산 아랫자락에 있는 온천 보리밥집이었다.

오전 11시 30분에 문을 열고, 잘났든, 못났든, 댓돌 앞에 신발 벗어놓고 창호지 덧댄 문을 열고 들어가 방마다 두 개, 세 개씩 있는 밥상 앞에 앉아서 보리밥을 먹는 집이었다.

“어째 그런가?”

“좋은데 놔두고 왜 이런 델 와?”

뱁새 박배근은 낡은 방 안을 둘러보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나머지 상을 동생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일반 손님들과 뒤엉켜 마음 편히 말도 못 할 뻔했다.

“위쪽에 가면 닭백숙 식당들 있던데 그리 가지?”

“달구야 어델 가도 먹는 거 아닌가? 아니야?”

“알아. 아는데, 모처럼 만나기도 했고, 중요한 이야기도 나눌 게 있으니까 그렇지.”

“보리밥이라고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여기가 여간 맛있네. 저붐 가게 만들었다니까.”

“저붐?”

“아따, 젓가락! 여기 젓가락!”

황상열이 들어 보이는 젓가락을 보며 박배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개발 사업 건은 말이시. 내가 한번 알아볼라니까 그렇게 아소.”

“알아볼 게 뭐 있어? 장태섭이 골인됐으니까 그 새끼가 쥐고 있는 토지하고 주택만 매입하면 끝인데. 백 억 단위로 번다니까.”

다급하게 재촉하는 박배근을 황상열이 삐뚜름하게 보았다.

“자네, 신강남파 꼬마한테 뒈지게 맞았담서?”

“어떤 개새끼가 그런 소리를 해?”

“성내지 말고.”

황상열이 말릴 때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들어와 깨끗하게 씻은 열무와 나물을 줄줄이 내려놓았다. 그런 뒤에 다시 냉면 그릇에 가득 담긴 보리밥이 나왔다.

음식이 모두 나온 뒤였다.

조신하게 앉아 있던 덩치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박배근과 황상열에게 고개를 숙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두 사람은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여기 지름이랑 넣고 비비소.”

가위로 열무를 잘라 밥에 넣은 황상열이 이런저런 나물을 담아 넣고는 마지막에 약병에 담긴 참기름을 부어 넣었다.

“토지랑 주택을 살라믄 돈이 솔찬이 들것는디?”

“장태섭이 넘긴다고만 하면 내가 통하는 건설사에서 얼마든지 밀어준다더라고. 어차피 개발 사업은 우리 같은 조직 없이 안 되잖아?”

황상열이 하는 대로 밥을 비벼가며 박배근이 답을 내놓았다.

“여기 열무에 싸먹어.”

황상열은 손으로 뚝 끊은 열무 이파리를 답 대신 박배근에게 내밀었다.

“내가 궁금한 건, 건설사까지 다 섭외한 자네가 어째서 나한테 이러는가, 이거거든. 솔직히 말하소. 강성태가 걸린가?”

열무 이파리에 밥을 싸 입에 가득 넣은 박배근은 불편한 얼굴로 답을 하지 못했다.

“도진이 성님이 우리 호남 식구들 홀대한 게 있어서 모른 척하기는 했는데, 신호남파가 당한 거로 벼르고는 있었지. 그란 참에 자네가 명분을 가지고 온 거시고. 그런데 말이시.”

능숙하게 열무 이파리를 끊은 황상열이 비벼 놓은 밥을 올리고는 시선을 들었다.

“신강남파 강성태가 느자구는 읍어도 실력은 대단하다든디, 어치케? 강성태를 해결할 방안은 있는가?”

느물거리는 데다 인상과 체형이 금복주의 광고 모델과 똑같다고 해서 별명이 금복주인 황상열이었다. 그가 귀 바로 옆까지 찢어진 눈꼬리로 박배근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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