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20화
출근해서 자리에 앉기 무섭게 연순동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진짜 가방만 내려놓아서 아직 여직원이 커피조차 만들기 전이었다.
“연순동입니다,”
통화버튼을 누른 연순동은 급하게 걸음을 옮겨 옆의 자료실로 들어갔다.
- 고생이 많지?
“아닙니다. 증거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오히려 송구할 뿐입니다. 오늘 안으로 박노익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증거를 준비하겠습니다.”
고강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연순동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끌어올렸다.
오늘 중으로 박노익의 진술을 꼼꼼하게 검토해 토씨 하나, 단어 하나도 비틀고 비틀어서 증거인멸과 도주 정황을 만들어낼 거고, 그렇게 엮고 엮어서 반드시 강성태의 죄를 토해내게 하겠다는 의지가 그의 눈매와 어깨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래도 버티면, 압수수색 과정에서 증거를 만들어내는 마지막 수단을 사용해 박노익만이라도 25년을 교도소에서 썩게 한다.
- 아! 그 박노익 건 말인데.
“예! 오늘 자금세탁과 증거인멸 혐의로 부인과 아들 둘을 긴급체포할 예정입니다. 또, 노부모에게 매달 송금한 내역도 확보했습니다. 내일 중으로 노부모를 공동정범에 포함하겠습니다.”
- 뭐?
화들짝 비명같이 날아든 외마디 질문에 연순동은 고개를 갸웃했다.
- 야, 이 새끼야! 수사에도 정도가 있어야지. 부인하고 자식은 왜 네 멋대로 불러? 그리고, 네가 깡패야? 노부모를 불러서 어떻게 하려고? 이 새끼가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요강을 닦아서 찬장에 넣을 놈이네.
마른침을 삼킨 연순동은 눈알을 굴렸다.
기획수사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이 술자리에서 건배사로 외치는 말 중에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조지고 조져라!’가 아니던가.
배우자와 자녀, 다음으로 부모를 불러 압박하는 건 기획수사의 ‘가나다’와 같았다.
“죄송합니다.”
- 죄송은 이 새끼야! 내가 전화했기에 망정이지, 네가 따귀를 대신 맞을 거야?
“예?”
-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박노익 말이지. 지금 당장 구속취소 해서 내보내.
너무 황당한 지시여서 연순동은 어떤 대꾸도 내놓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 왜 대답이 없어? 아니꼬워서 못해 먹겠어? 지방이나 연수원에 가서 한가롭게 지내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해줄게.
“아닙니다! 제가 갑자기 사레가 들어서 침을 삼키느라고 답이 늦었습니다. 박노익은 바로 구속 취소하겠습니다.”
- 아예 사건 종결해. 알았지?
이 정도 지시를 못 알아들을 수준이었으면 연순동은 절대 고강준의 라인을 타지 못했다.
“제가 알아서 잘 달랜 뒤에 내보내겠습니다.”
- 하, 그런데 이 새끼가 오늘 왜 이렇게 나서지? 말이 어려워? 그냥 내보내! 잘 가세요, 잘 있어요, 하지 말고 그냥 내보내라고!
“죄송합니다. 말씀 명심해서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 후우. 그럼 믿는다? 나중에 술 한잔해.
“감사합니다!”
스마트폰을 귀에 건 상태에서 연순동은 상체를 깍듯하게 숙이며 답했다.
통화는 그가 상체를 세우기도 전에 끝났다.
“후-, 씨발, 못 해먹겠네, 진짜.”
분통을 터트렸지만,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연순동은 조심해서 짜증을 뱉었다.
막말로 고강준의 라인에 제대로 올라탄 연순동의 자리를 탐낼 검사들, 그중에서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싶은 검사들이 차고 넘치는 게 현실이었다.
어디에서 잘못 되었을까?
고강준이 엄청난 걸 받아먹었거나, 거부할 수 없는 곳에서 힘을 썼거나, 둘 중 하나였다.
“푸후.”
아무렴 어떠냐.
공을 세우지 못해 아쉽지만, 고강준이 술 한잔 사겠다는 언질을 남긴 것으로 연순동은 만족했다.
이렇게 되면, 다음번 기수 사건에서도 가장 먼저 선발될 테고, 그렇다면 고강준의 심복 중 심복으로 인정받게 된다.
“내보내 줄 테니까 얼른 나가라. 얼른.”
박노익을 떠올린 연순동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료실을 나섰다.
**
피트니스 센터의 러닝머신에 올라간 소신영은 느긋하게 산책하는 속도인 레벨 3에 맞춰 천천히 몸을 덥혔다.
“소 회장?”
“아, 장관님. 오랜만입니다.”
15년 전에 장관에 임명됐다가 부동산 비리가 터져 두 달 만에 물러난 전직 장관이 탐욕 가득한 몸뚱이를 러닝머신에 올려놓고 소신영을 불렀다.
“얼굴은 왜 그렇소? 멍 아니오?”
“라운딩 나갔다가 나무에 크게 부딪혔습니다.”
“저런! 우리 나이에는 조심, 또 조심해야지요.”
두 달짜리 전직 장관에게 어색한 미소를 남겨준 소신영은 앞에 있는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선명하게 찍혔던 손자국이 점점 넓게 퍼지더니 지금은 왼쪽 뺨 전체가 검게 변했다. 이만하길 다행이지, 하마터면 어젯밤에 오른쪽 뺨까지 손자국을 남길 뻔하지 않았나.
어나니머스라니? 어나니머스라니?
소신영은 고개를 털어내며 모니터에 올라온 뉴스에 집중했다.
그들이 보내온 자료에는 아들 소영천의 내용도 있었다. 이우섭 또한 아들 이진기의 자료를 보고 목을 더욱 움츠렸을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호랑이들인데 왜 자식들은 하나같이 고양이가 나왔는지 원. 언젠가 호랑이의 본성을 깨닫겠지만,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15분쯤 지났다.
‘오늘 운동 끝!’
러닝머신에서 내려온 소신영은 목에 걸어둔 수건의 끝을 잡아 볼과 목덜미를 찍었다.
어제부로 지난 악몽은 모두 털어버리고, 오늘부터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방송 발전에 이바지하련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몸을 돌리던 소신영의 손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부인과 아들, 비서실만 아는 스마트폰인 데다, 액정에 떠오른 번호 역시 생소했다.
부동산 개발 소개, 혹은 스마트폰을 최신 기종으로 바꾸면 30만 원을 준다는 영업일까?
액정을 들여다보던 소신영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상황이 상황이어서 우선 받아본 뒤에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바로 끊을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 소신영 회장. 강성태다.
“쿨럭. 커흠. 큼.”
느닷없이 들린 강성태의 음성에 소신영은 사레가 들른 것처럼 연달아 헛기침을 토해냈다.
- 내가 두 번이나 경고했고, 어제 마지막 기회까지 줬는데 끝까지 뒤를 노려?
“무슨 소리를 하나? 내가 뭘 어쨌다고?”
소신영은 한적한 구석으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마치 중요한 업무 전화를 받는 양,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 회장님께서 급하게 지시하셨던 보고입니다. 신강남파의 설립과 성장, 운영하는 업소, 주 수입원, 보스와 고문, 중간 간부등, 조직 구성을 조사한 내용입니다. 검토하시고, 구두로라도 허락하시면 바로 취재에 나서겠습니다.
‘이세종, 이 쳐 죽일 인간이 끝내 나를 벼랑 끝으로 미는구나!’
강성태가 읽어주는 문장을 들은 소신영은 얼음으로 만든 칼로 등골을 긁어내리는 것처럼 서늘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왼쪽 볼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 당신 이메일 주소에 담겨 있는 보고서도 읽어봤는데 제법 잘 썼더라고. 어제 경고했었지? 한 번 더 도발하면 내가 어떤 놈인지 진짜 알게 된다고.
“이봐! 오해야, 오해. 내가 박노익과 장태섭 건으로 지시한 건 있는데 보도국장이 오바해서 보고서를 올린 모양이다.”
소신영의 변명이 건너간 직후에 픽 하는 웃음이 대꾸처럼 넘어왔다.
- 신강남파에 관해서만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오바라는 변명을 하다니? 많이 실망스러워.
“나는 그 기획서가 온 줄도 몰랐다.”
또다시 급한 변명을 던졌으나 대꾸는 없었다. 침묵이 소신영은 더 무서웠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 피트니스 센터에서 땀 좀 뺐어?
어떻게 알았지?
소신영은 또 다시 얼음 칼이 등골을 긁어대는 양,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회원만 들어오는 장소여서 낯익은 이들이 수다를 늘어놓으며 이따금 기구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있었다.
- 따귀 몇 대 때리고 끝내려고 했는데 끝까지 변명으로 넘어가려고 해? 알았다. 오늘 중으로 네 인생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마. 우선 국세청에서 먼저 나설 거 같은데 준비나 해둬.
“오해라니까!”
피트니스 센터에 있는 것까지 알아내는 강성태와 어나니머스가 독하게 마음먹으면 소신영은 실제로 국세청 조사를 받아야 하고, 이어 줄줄이 비리가 터져 나온다.
“이봐! 내가 갈게! 갈 테니까 일단 따귀를 때려! 그런 뒤에 내가 보도국장을 해임하는 것으로 끝내자.”
급하게 매달리던 소신영의 음성이 마지막에는 애원으로 바뀌었다.
통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심정을 숨소리로 알아들을 때가 있다. 위기를 맞아 촉이 날카롭게 선 소신영은 통화를 끊지 않은 강성태가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럴 땐 솔직하게 매달리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신강남파를 조사하란 지시를 했던 건 있는데 보도를 하지 않았으니까 문제없다고 방심했다. 오늘 취재를 취소하라고 지시할 참이었고. 가서 따귀를 맞을 테니까 나한테도 고검장에게 주었던 것처럼 한 번만 기회를 줘.”
살면서 따귀를 때려달라며 매달릴 거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실제로 지난번에 별장에서 강성태에게 얻어맞은 게 소신영 인생에서 따귀를 맞은 첫 번째 경험이기도 했다.
따귀를 때려달라며 매달리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어디에 있나? 내가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제발 기회를 줘.”
연달아 매달리는 소신영의 애원에 먼저 강성태의 나직한 한숨이 건너왔다.
- CCTV를 통해 동선을 지켜볼 테니까 지금 강서구 사거리에 있는 호텔로 와. 중간에 전화 사용 금지, 1분이라도 다른 곳에 들르지 말 것. 할 수 있겠어?
“그야 어려울 거 없지. 바로 가마.”
- 한 시간이다. 지금이 8시 40분이라 출근 시간이다. 길이 좀 막힐 텐데 불편하면 오지 않아도 돼. 나도 그쪽이 더 재미있을 거 같으니까.
“지금 출발해.”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소신영은 탈의실로 걸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천장과 코너에 달려 있는 카메라들을 확인했다.
저런 걸 들여다보는 강성태를 이길 방법이 소신영에게는 없었다.
마음 같으면 당장에라도 이세종에게 전화를 걸어 온갖 욕을 퍼붓고 싶었는데 강성태가 내건 전화 사용 금지라는 지시가 그의 욕망을 붙들었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조차 대충 건너뛴 소신영은 샤워마저 건너뛴 채 옷을 꿰고 피트니스 센터를 나섰다.
**
오전 9시 30분에 박노익은 쫓겨나다시피 구치소를 나섰다.
뭐가 그리 급한지 속전속결로 서류를 처리한 교도관들이 그야말로 등을 떠밀어서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어떻게 왔냐?”
“변호사가 연락했습니다, 형님.”
박노익의 심복 문기주가 동생들을 데리고 박노익을 맞았다.
“두부 드시겠습니까, 형님?”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죄송합니다, 형님.”
짧은 대화를 마친 박노익은 문기주가 열어주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우선 집으로 가자.”
“모시겠습니다, 형님.”
승용차가 구치소 주차장을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뒷좌석에 앉은 박노익은 돌려받은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가장 먼저 찾은 번호는 조태완이었다.
- 여보세요?
“박노익입니다, 형님.”
- 어디야?
풀려날 거라고 연락까지 했었던 조태완이 어쩐 일인지 상황을 확인하고 싶은 느낌의 질문을 던졌다.
“지금 막 구치소에서 나왔습니다. 구속취소랍니다. 강성태와 형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바로 전화 드렸습니다.”
- 나야 우리 보스가 알려준 내용을 전해주기만 한 거니까 고마울 것도 없지. 고생했다. 우선 몸 좀 풀고 시간 되면 얼굴 보자.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이번에 신세 진 건 뵙고 의논드린 뒤에 갚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통화를 마친 박노익은 창밖을 보며 잠시 고민한 뒤에 다시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 정신을 못 차릴 거야.]
하여간 이놈의 노래만 들으면 박노익의 정신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 여보세요? 우리 박 회장이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전화를 하셨을까? 돈 냄새도 별로 안 나는데?
“긴소리 하기는 그렇고 부탁 하나 합시다.”
- 부탁이라? 또 상장사를 인수하시려나?
“그게 아니라 성북구 개발 사업을 맡을 건설사를 찾아주시오. 지금 설치는 시행사를 내가 밀어버릴 테니까 진짜 책임지고 할 수 있는 업체로 부탁합시다.”
- 흠. 혹시 은혜 갚으려는 건가?
무서운 인간, 송도상인 박승양.
구속되었던 박노익이 강성태의 덕분에 풀려난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놓고도 전혀 모르는 척 헛소리를 늘어놓다니.
- 우리 박 회장은 확실히 은혜를 알아요, 은혜를. 옛날에는 까치가 그랬다던데 말이지요. 새끼를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김일 선수가 안토니오 이노끼의 머리를 들이받듯, 종을 이마로 그냥 때앵. 때앵. 때앵. 쓰러진 안토니오 이노끼를 김일 선수가 덮치고, 심판이 하나, 둘, 셋, 우와아!
“그만 좀 하고!”
- 박 회장.
버럭 짜증을 토해내는 박노익을 박승양이 차갑게 불렀다. 이럴 때 박승양은 조심해야 한다.
- 건설사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텐데, 선투자를 받을지 아닌지만 결정합시다.
“투자금은 모두 내가 댑니다.”
- 오케이. 그럼 최대한 서둘러서 오늘부터라도 장태섭이 사들인 주택과 토지 매입하십시다. 그거 이전 건설사가 압류 걸려고 준비하고 있으니까 웃돈을 조금 제시하면 장태섭이 바로 넘길 거요.
진짜 돈과 관련된 일에는 박승양을 이기기 쉽지 않다. 지난번에 한 번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기는 했는데 그 뒤로 이렇게까지 파고 있을 줄은 몰랐다.
- 광주 쪽 조직이 움직이는 눈치니까 서두릅시다.
“어떤 놈들이 신강남파 사업에 침 바르겠답디까?”
- 그런 일은 박 회장이 알아서 챙기셔야지. 그럼 난 김일 선수를 위해 건설사를 섭외합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액정을 내려다보던 박노익은 나직하게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성태를 위한 선물로 성북구 개발 사업은 나쁘지 않았다.
애써줘서 고맙다는 전화를 해야 하나?
박노익이 고민할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울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