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9화
제7장. 이걸 어디에서 얻었지?
얼마 만에 맞는 여유인지 모른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강성태는 한가롭게 걸어서 볼링장 맞은편의 포장마차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양념 냄새가 강성태를 반겼고, 이어 먼저 자리를 차지한 손님들의 소란이 효과음처럼 뒤따랐다.
모처럼 진바지에 면티, 점퍼의 편안한 차림이었다. 그런 강성태를 향해 손님들의 시선이 달려들었다.
“삼촌!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치곤이는요?”
“아직 안 왔는데?”
얼굴이 얽은 이모가 강성태를 살갑게 맞이한 순간이었다.
사타구니에 주먹을 끼워 넣은 것처럼 독특한 걸음으로 최치곤이 들어섰다.
“왔네, 저기. 어서 와, 삼촌.”
강성태를 향해 히죽 웃은 최치곤이 곧바로 이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주는 알아서 만드시고, 알죠? 소주와 맥주로다가?”
“앉기나 해.”
이모와 짧은 대화를 마친 최치곤이 안쪽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 잘생긴 남자와 잔인한 인상의 남자가 친구야?
혹시 못된 인간이 윽박지르는 바람에 억지로 만나는 거 아닐까?
손님들의 시선을 짓밟듯 움직인 최치곤이 테이블 맞은편에 서 있었다.
“뭐 하냐?”
“너 앉아야 앉지.”
“지랄을 해라. 둘이 있을 때도 이러면 다시는 너랑 술 안 마신다?”
“그럼 안 되지.”
킬킬댄 최치곤이 얼른 자리에 앉았다.
“뭐 하느라 안 보였어?”
“아버지한테 다녀왔어. 네가 하는 일 같이 한다고 말씀드렸다.”
“많이 실망하셨겠는데?”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실망 안 해.”
너무도 자신에 찬 답을 내놓은 최치곤이 ‘다 알면서?’ 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워낙 실망에 단련된 분 아니냐? 이번에도 큰 사고 친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하시더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미친놈.”
확실히 최치곤과 있으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도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오랜만에 만든 여유가 좋았고, 최치곤이 맥주잔에 소주를 반, 맥주를 반 채우는 모습도 좋았다.
“마셔.”
그가 건네주는 잔을 받은 강성태는 주저하지 않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좋지?”
“좋다.”
최치곤이 물었고, 강성태가 답한 다음이었다. 이번에는 강성태가 소주와 맥주를 따랐다.
“나는 이제부터 젖은 낙엽이다.”
언젠가 들었던 말 같은데?
소주를 먼저 부어넣은 잔에 맥주를 채우며 강성태는 시선만 들었다.
“아무리 빗자루질을 해도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낙엽처럼 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역시 실없는 웃음을 만드는 건 최치곤이 최고였다.
최치곤도, 강성태도, 신강남파와 지금 감당해야 하는 일을 전혀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먼 과거로 돌아가서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를 꺼내 들고 킬킬거렸다.
“또 이런다. 안주들 좀 먹어.”
“배가 후끈해져야 안주가 잘 들어간다니까. 우리를 잘 알면서 그래. 우리 당근이랑 오이나 더 줘.”
소주를 반씩 잔에 채우는 최치곤을 다른 손님들이 놀라는 눈으로 보았고, 둘이서 단숨에 마시는 모습을 신기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
구치소든, 교도소든 보안과장 방에 앉아 전화를 마음껏 사용하는 정치권이나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용털이라 부른다.
다음은 하루에도 두 번씩 변호사가 접견 와서 온갖 잔심부름을 다 해주는 재력가와 사업가들을 범털이라 분류한다.
다들 알지만, 빈털터리로 들어와 법무부 교정국에서 제공하는 음식과 옷가지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법무부의 자식’이라 해서 소위 ‘법자’라고 부르는데 용털, 범털, 법자 모두 교도소에서 절대 건드리지 못하는 부류가 있으니 그들이 조폭이었다.
구치소와 교도소는 어둠의 세상에 속하는 유일한 국가 시설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 안에서 조직폭력배들이 지니는 힘과 권한은 막강했다.
강남 삼대장 중 한 명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고, 돈마저 많은 박노익은 그야말로 범접 불가의 인물이었다.
복도 쪽 창 바로 아래가 상석인 구치소 방에서 박노익은 작은 밥상을 놓고 책을 읽었다.
그동안, 다른 수감자들은 박노익이 좀 더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소위 벽을 탄다는 표현대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박노익 정도 되면 교도관은 아예 고개를 조아리는 수준이었다.
“이불 깔겠습니다, 큰형님.”
박노익을 수발들기 위해 다른 방에서 옮겨온 지방 꼬마 건달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마스크를 건넸다.
박노익이 창을 향해 서 있는 동안 꼬마 건달은 일급수들만이 사용한다는 솜이불과 침낭을 이용해 아예 침대를 만들어주었다.
이부자리를 깔고 나서 밤이 이슥해졌는데도 박노익은 작은 밥상을 펴놓고 앉아 무협소설을 읽으며 어수선한 심정을 달랬다.
강단 있게 버텼다. 잘했다. 하지만, 25년이라는 형량이 주는 무게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설혹 병보석을 작업한다고 해도 최소 10년은 이러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숨통을 틀어막았다.
무협소설의 주인공처럼 무공을 이용해 벽을 부수고 나가거나 경공을 발휘해 담장을 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지 무협소설 진짜 잘 썼다.
무림 세상의 주인공 백리건이 된 박노익이 소설에 쑥 빠져들었을 때였다.
조용하게 창 앞으로 다가온 교도관이 눈짓으로 박노익을 찾았다.
“큰형님.”
혹시 모를 수발을 위해 꼿꼿하게 앉아 있던 지방 조직의 깡패가 나직하게 부르고서야 박노익은 시선을 들었다.
뭐지?
자리에서 일어난 박노익은 복도 쪽 창을 향해 다가섰다.
“조태완 씨라는 분이 말을 전해달랍니다. 강성태란 분이 내일 나갈 수 있게 일을 정리했으니 염려하지 말랍니다.”
다른 수감자들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속삭이는 교도관의 말을 들으며 박노익은 볼을 씰룩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강렬하게 빛나던 강성태의 눈빛과 이광준을 두들기던 당찬 모습을 떠올렸다.
말을 전한 교도관이 복도를 돌아본 뒤에 왔던 것처럼 조용하게 사라졌다.
‘강성태라.’
아직 복도를 향해 서 있던 박노익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창살을 붙들었다.
진짜 보스를 만났다.
그것도 같은 조직원이 아닌 박노익을 구치소에서 꺼내주는 보스, 조태완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 10년에서 25년의 형량을 강성태가 덜어준 상황이었다.
어떤 수단을 발휘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장태섭이 나불거린 뒤라 박노익을 돌아볼 틈이 없을 테고, 그냥 둔다고 해서 강성태가 손해 보거나 불리할 게 전혀 없는데도 구해내기 위해 애썼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왜?’
창을 붙든 박노익이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는 동안, 수발드는 꼬마는 양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잡고서 그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커피 있냐?”
“믹스하고 블랙이 있습니다, 큰형님.”
믹스 커피를 신문에 부어넣은 뒤에 알갱이를 일일이 골라 모아놓은 커피가 블랙이었다.
“블랙으로 한잔 타라.”
“예, 큰형님.”
어차피 오늘은 자기 틀렸다.
**
글자 그대로 떡이 된 최치곤은 강성태의 빌라 거실에서 한 마리 악어처럼 버둥거렸다.
“성태야. 나 라면.”
저건 투정이라 무시해도 된다.
지금 라면을 끓여주어봤자 먹기 귀찮다고 그냥 자기 때문이었다.
진짜 라면이 먹고 싶을 때의 최치곤은 직접 일어나 냄비를 떨어트리고, 라면 부스러기를 사방에 휘날려서 강성태가 끓이게 만들지, 저렇게 요구하지 않는다.
식탁에 앉은 강성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랜만이었고, 힘겨운 일이 많았던 탓인지 익숙한 이모들마저 놀랄 정도로 많이 마셨다. 그런데도 강성태는 식탁에 앉아 거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솔직하게 말하면 두 사람이 보고 싶었다.
한 명은 당연하게 안다미였고, 다음은 서달수였다.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병렬의 앞을 막아서며 마지막까지 연장에 몸을 던졌을 서달수가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 덕분에 비록 병실이지만, 이병렬과 마주해서 일을 의논하기도 하고, 조언을 들을 수도 있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강성태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그리움을 접어두고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었다.
**
자정 직전까지 기획 회의를 진행했던 이세종은 남은 밤을 하얗게 불태워가며 신강남파의 탄생 배경과 성장 과정, 보스 강성태와 간부, 고문 조태완 등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후아.”
완성된 보고서를 훑어본 이세종이 만족한 탄성을 터트렸다.
그가 직접 만나보고 경험했던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획서라 클럽의 관리책임자부터 가드를 인솔하는 중간 간부까지, 일반 취재로는 도저히 알기 어려운 세부적인 사항까지 넣었다.
그뿐이랴.
강성태가 도끼를 박아넣은 내용도 직접 본 듯이 작성했고, 그 부분에 괄호를 넣어 ‘사진 첨부, 윤중선과 농성자들의 인터뷰’라는 세세한 항목까지 써넣었다.
아무리 기획 보도라고 해도 이 정도로 치밀하게 알기 어렵다.
크게 만족할 소신영 회장, 탄성을 지를 기자들, 놀라고 감탄한 뒤에 부러워하고 좌절할 경쟁 방송사 보도국장들의 모습을 떠올린 이세종은 출력 버튼을 눌렀다. 그런 뒤에 그는 구내전화기를 들어 소신영 회장의 비서실 번호를 눌렀다.
- 회장님 비서실입니다.
“보도국장입니다. 회장님 출근하시면 지난번에 지시하신 보도에 관한 보고가 있습니다. 일정 확인 부탁합니다.”
- 오전은 외부 일정이 있으십니다.
사무실에 나오지 않을 거란 말을 비서실에서 적당하게 둘러댔다.
“회장님께서 급하게 처리하라셨던 보도 기획서를 이메일로 보내놓겠습니다. 급한 취재여서 마음에 드시는지 확인만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바로 취재에 나서야 하는 급한 보고입니다. 가능하면….”
시간을 확인한 이세종이 다시 말을 이었다.
“구두 결재라도 바란다고 전해주십시오.”
- 말씀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세종은 손을 비비며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7시 40분이었다.
최근에 이렇게까지 매달렸던 기사가 있었나 싶은데 그만큼 완벽한 기획서가 뽑혀서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은 초등학생처럼 그는 조바심마저 일었다.
**
아침에 일어난 강성태는 간단하게 씻고 난 뒤에 마트에서 판매하는 누룽지를 끓였다.
술을 많이 마신 날, 최치곤은 먼저 누룽지를 두 그릇쯤 먹어 속을 풀고 난 뒤에 다시 라면을 세 봉지 정도 먹어 버릇했다.
물이 말라버린 늪지대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 의식을 잃은 악어처럼 최치곤은 머리를 거실 창에 바싹 붙이고, 다리 하나는 구부렸으며, 반대편은 소파 아래에 밀어 넣은 자세로 의식이 없었다.
술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최치곤을 보며 강성태는 혼자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누룽지가 거의 다 끓었다.
구수한 향이 좀 더 진해지면 톰슨가젤을 발견한 것처럼 의식을 잃었던 악어가 부스스한 머리와 퉁퉁 부은 눈을 끔벅이며 몸을 일으킬 거다.
언제 일어날까?
강성태가 흥미롭게 최치곤을 내려다볼 때였다.
우우웅.
식탁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안다미가 아니라면 정말 급한 소식일 확률이 높아서 강성태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흥미로운 내용이라 보내. 미스터 강이 한국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농담 가득한 바르지오 만시니의 문자 아래로 기획서가 첨부되었다.
5분쯤 걸려 기획서를 읽은 강성태는 바로 바르지오 만시니의 번호를 눌렀다.
-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어디에서 얻었지?”
- 보도국에서 비서실에 올린 걸, 비서가 소 회장의 개인 메일로 보냈다. 우리가 경고한 직후에 이럴 정도면 미스터 강이 정말 우스웠거나 아니면 그 정도로 반격할 다른 무기를 손에 쥐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진해진 누룽지 냄새에 거실 바닥에 쓰러진 악어가 꿈틀대고 있었다.
“소신영 회장의 지금 위치를 알 수 있어?”
-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삼성동 사거리에 있는 호텔의 피트니스 센터에 있는데 호텔에 들어선 지 17분 지났고, 이제 막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러닝머신 앞에 있다.
소신영과 함께 있나 싶을 정도로 자세한 설명이었다.
- 이전 영상에서도 봤지만, 저렇게 운동하는 데도 참 몸매 볼품없어.
“CCTV를 보고 있나?”
- 원한다면 지금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연결해 주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미안하지만, 소신영이 지금 휴대한 스마트폰 번호를 알고 싶다.”
- 스마트폰 번호가 많더라고. 지난번 문자 뒤로 오전과 오후에 다른 번호를 가지고 다니고. 됐어. 지금 보냈다.
우우웅.
바르지오 만시니의 말과 동시에 스마트폰이 바로 울었다.
- 그럼 또 연락하지.
통화가 그렇게 끝났다.
어제 그 꼴을 보고도 이런 짓을 한 게 세 대, 기획서를 작성한 거로 세 대 추가, 그리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세 대.
강성태는 최치곤을 내려다보며 소신영이 맞아야 할 따귀 대수를 계산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