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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16화 (248/513)

12권 -16화

제6장. 숫자를 세고 있었어.

승용차가 호텔 입구에 멈춘 다음이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유섭우가 몸을 감추듯 문을 열어주었고,

“미스터 강?”

그와 동시에 이전에 보았던 곤잘레스 이두안의 비서 두 명이 다가왔다.

“한 시간쯤 걸릴 텐데, 끝나는 대로 전화할 테니까 저녁 먹고 쉬고 있어.”

유섭우에게 짧게 시간을 말한 강성태는 두 명의 비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로비를 거친 두 사람은 투숙객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위로 올라갔고, 곧장 곤잘레스 회장이 묶고 있는 객실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존 보스만이었다.

“미스터 강.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악수를 나누는 사이 짧은 인사를 마친 존 보스만이 곤잘레스 회장의 공간으로 강성태를 안내했다.

“회장님과의 면담이 끝나고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오늘은 여유로워.”

씨익 웃은 존 보스만이 문을 노크했다.

“미스터 강을 모셔왔습니다.”

문을 연 존 보스만이 비켜서자 숨어 있던 것처럼 곤잘레스 이두안이 나타났다.

“어서 오게.”

역시나 악수로 강성태를 맞은 곤잘레스 회장이 거실 한쪽의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앉게.”

강성태와 곤잘레스 회장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직원들이 커다란 접시에 담긴 요리들을 줄줄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샐러드부터 여러 종류의 음식을 깔아두고 앞접시에 조금씩 덜어 먹는 건, 코스에 따라 하나씩 나오는 식사를 싫어하는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방식이었다.

와인을 따라준 직원들이 조용하게 방에서 나갔다.

“드세.”

손으로 요리를 가리킨 곤잘레스 회장이 포크를 움직여 음식을 옮겼다.

“자네가 러시아와 가페의 히트맨을 차례로 제거한 일이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지.”

치즈와 토마토를 입에 넣은 이두안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세타스 카르텔이 드디어 협상을 제안했네.”

빵을 뜯어 입으로 가져가던 강성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곤잘레스 회장을 바라보았다. 세타스 카르텔이 욕심을 접고, 협상을 제안했다는 건 확실히 놀랄 일이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가페가 중재했다면 어떤가?”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은 강성태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놀라운 소식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가페가 중재했다면 더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협상이라면 조건이 있었을 텐데요?”

“그들이 원하는 아보카도 농장을 조성해 주기로 했지.”

그 정도라면. 양귀비보다 더 수익이 높다는 아보카도 농장이라면 강성태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내가 자네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린 게 그 때문일세.”

“설마 저더러 아보카도 농장을 관리하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흐하하.”

고민하던 문제, 그의 사업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세타스 카르텔을 해결하게 돼서인지 곤잘레스 이두안의 웃음은 그 어느 때보다 유쾌했다.

“아보카도 농장, 그리고 시에라 산맥에 계획했던 생산 시설과 주변 도시의 건설을 자네에게 맡길까 하네.”

뜻밖의 조건을 던진 곤잘레스 이두안이 강성태의 반응을 기대하는 투로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저는 건설업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시행사의 공동대표가 할 말은 아닌 듯싶네.”

확실히 강성태의 최근 행보를 낱낱이 살핀 듯한 대꾸였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이두안이 옆자리에서 서류철을 들어 강성태에게 건넸다.

“원래는 입찰 방식이지. 공사비의 40퍼센트는 자체조달, 나머지 60퍼센트는 해외투자인데 이미 투자협상은 끝나 있지. 한화로 계산하면 총 공사비가 120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일세.”

엄청난 돈인 건 알겠는데 먼저 실감이 나지 않았고, 직전에 답한 것처럼 건설업에 관해 아는 것이 부족해서 크게 감동받지는 않았다.

강성태의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자네가 개입했던 개발 사업의 총액이 한화로 2조 원가량일세. 이제 어느 정도 규모인지 짐작하겠나?”

“시에라 산맥을 개발하려면 그 정도 비용은 들겠구나 싶습니다. 다만, 그렇게 투자하고 수익을 남길 수 있는지 그게 걱정됩니다.”

“투자자들이 악착스럽게 조사했던 일일세. 여기에서 중요한 건 선정사를 결정하는 권한이 내게 있다는 사실이지. 공사를 발주할 권한을 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전 세계에서 달려올 걸세. 한국의 건설사는 말할 것도 없지.”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을 건넨 곤잘레스 회장이 고개로 건네주었던 서류철을 가리켰다.

“그 건설사를 결정할 권한이 내게 있네. 그리고 나는 그 결정을 자네에게 위임할 생각이지.”

엄청난 제안인 건 알겠는데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한국의 건설사에게 맡길 계획이었던 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단독으로는 어려울 테고,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할 텐데, 지금 개발 사업을 진행하려는 건설사 두 곳을 묶어버리게. 개발 사업에서 양보한 만큼 이번 건설에서 퍼센티지를 더 줘.”

“그렇게 하면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건설사가 장태섭을 버리겠지.”

모든 걸 알고 있었구나!

선물을 멋지게 선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바르지오 만시니가 그렇게 연락하라고 애원했었고.

“한국의 그룹 건설사가 자네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뛸 걸세. 어나니머스가 어둠에서 움직이고, 브리태니커 용어 사전에도 올라가 있는 재벌이 힘을 쓰기 시작하면, 이번 일쯤 가볍게 넘어갈 걸세.”

강성태는 건네받은 서류철을 내려다보았다가 시선을 들었다. 준비한 선물을 선보인 곤잘레스 이두안이 만족한 표정으로 강성태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멕시코에서 납치된 한국 의사들을 구해주었고, 이번에 나와 로라의 생명을 지켜준 것에 대한 내 방식의 보답이라고 생각해주게.”

그저 그런 부자가 아니라 곤잘레스 이두안 정도의 거부는 보통 사람이 상상하지 못하는 돈을 건네고라도 자신의 자부심을 지키고 싶어 했다.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답, 굉장히 도덕적으로 들리지만, 지금 그가 내놓은 제안은 강성태에게 알아서 수익을 얻어가고, 대신 은혜를 갚았다는 자부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보였다.

강성태는 서류철을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 앞쪽의 빈 곳에 내려놓았다.

‘뭔가?’

의아한 기색과 불편한 표정을 떠올린 곤잘레스 회장의 시선이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회장님. 저는 건설업에 관해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물론, 제가 업체를 선정하면 심사기준에 맞추도록 도움을 주시겠지만, 이렇게 엄청난 사업을 결정할 만큼 경험이나 지식이 없습니다.”

이런 제안을 거절한다고?

눈가를 좁힌 곤잘레스 회장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닥친 위기는 어나니머스의 힘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 사업은 회장님께 이득이 가는 방향으로 결정하십시오.”

“이보게, 미스터 강. 이 정도 사업의 결정권을 지니면 공식적인 리베이트만 최소 0,3퍼센트일세.”

“사업의 성공이 우선입니다.”

“자네는 정말 욕심이 없나?”

“우리나라에 마약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런 일을 하다가 체포될 위기에 놓이지 않았나? 이걸 쥐게. 그리고 힘으로 사용해.”

선물을 받아달라고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여겨졌는지 말을 하던 곤잘레스 회장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고 회장님께 진심으로 바라는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큰돈이 필요해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사업을 빌미로 리베이트를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흐음.”

숨을 길게 내쉰 곤잘레스 이두안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멕시코에서도 그렇더니 항상 내가 원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무시하는군.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마지막으로 넘어온 곤잘레스 회장의 말에 어쩐지 뭔가 감춰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게 있냐고 꼬투리를 잡을 것도 아니어서 강성태는 잠자코 내려놓았던 빵을 집어들었다.

**

밝은 조명, 깃대에 세워놓은 태극기와 검찰을 상징하는 깃발, 우드 톤의 책장, 그리고 같은 빛깔의 책상에 앉은 고강준은 눈을 몇 번이나 끔벅여 가며 스마트폰으로 날아온 영상과 문자를 확인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고강준, 소신영, 이우섭, 선중일의 통화목록, 연결된 기지국 위치, 시간, 그리고 추악한 영상, 그 뒤에 다시 서로 주고받은 문자와 통화 내역이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읍!”

속이 뒤집힌 고강준이 입을 틀어막았다.

영상이 가짜라고 우기기에는 증거가 너무 확실했다.

심지어 영상에 올라온 얼굴을 부분 확대해서 특징까지 선명하게 구별해 놓았다.

멍한 상태에서 고강준은 이어진 내용을 살폈다.

주 내용은 그의 스마트폰 사용 기지국이었다.

룸살롱, 골프장, 건설사 대표와 주고받은 통화 목록, 심지어 사용하는 통장과 카드 사용 명세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내일 오전 9시까지다. 그 시간이 지나면 무작위로 선정한 스마트폰에 지금 보낸 자료를 배포하겠다.]

밑도 끝도 없는 경고가 끝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은 고강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에서 번호를 찾던 그가 움찔했다.

지금 소신영과 통화하면 또 기록이 남을 테고, 이제는 도청도 의심해야 하는 단계였다.

현직 고검장을 협박한 사건으로 수사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를 하려면 어느 곳에라도 지금 받은 문자를 내놓아야 한다. 만에 하나, 이런 내용이 밝혀지면 협박한 범인을 잡아도 고강준은 재기 불능의 상태에 놓일 확률이 높았다.

“도대체 깡패 놈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혼잣말을 뱉어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황급히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고강준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문 바로 안쪽에서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연순동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장태섭이 원하는 진술을 모두 마쳤습니다.”

고개를 든 고강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연순동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박노익은 진술을 거절했습니다. 그 점은 면목 없습니다.”

“증거는?”

“예?”

“증거는 없냐고?”

기수 사건은 진술에 의존하지 증거를 찾지 않는다.

상식을 벗어난 고강준의 질문에 연순동은 답을 내놓지 못했다.

“최소한의 증거는 확보해야지. 가서 증거를 짜 맞춰서 내일 다시 보고해.”

지시를 마치고 책상 서랍을 열던 고강준이 안 가고 뭐 하냐는 투로 고개를 들었다.

“예.”

고개를 숙인 연순동이 밖으로 나간 다음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걸 의논해야 하는데?

전화는 절대 안 되고, 만나자니 당장 어디에 있는지도 알 길이 없고, 약속을 잡을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판단이 흐려진 그가 멍하니 창을 바라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화들짝 놀란 그가 급하게 액정을 확인했으나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 고강준 고검장님 되십니까? 소신영 회장님 비서실입니다.

“맞아요. 무슨 일입니까?”

- 급하게 의논하실 일이 있어서 시간이 어떠신지 여쭙기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제게 시간과 장소를 정해주시면 좋겠다는 말씀과 전화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소신영도 받았구나.’

우습게도 고강준은 묘한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30분 뒤에 잠실 한강 공원에서 뵙자고 전해주시오. 편의점 앞 주차장에 있겠다고 하면 되겠소. 혹시 장소가 엇갈리면 다른 번호로 연락 달라고 말씀드려 주시고.”

-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고강준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곤잘레스 이두안과 인사한 강성태는 존 보스만이 안내하는 작은 회의실로 향했다.

“커피는 드셨을 테고, 다른 음료를 드릴까요?”

“고맙지만, 지금은 괜찮아. 그보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그렇더니 이번에는 존 보스만이 뜬금없다고 생각될 인사를 내놓았다.

“경호를 하면서 막막할 때가 있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멕시코에서 세타스 카르텔의 하부조직을 선제공격했던 미스터 강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돕니다.”

“다시는 경호원 못 할 거란 경고처럼 들리는데?”

“미스터 강.”

편안하게 말을 받은 강성태를 존 보스만이 나직하게 불렀다.

커다란 머리, 피부색 탓에 유독 하얗게 보이는 눈, 굵은 목, 트럭을 연상시키는 상체를 지닌 존 보스만이 강성태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세타스 카르텔을 상대로 한 멕시코 활약이 은밀하게 소문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의뢰가 있었습니다. 파리오 가문의 수장인 보리스 파리오가 경호 팀장을 구하고 있답니다.”

“솔깃하지만, 나는 그쪽으로 돌아가기 어려워.”

존 보스만이 건넨 제안을 강성태는 부드러운 말로 거절했다.

“경호와는 다른 의미로 그림자가 됐다. 지금 내가 빠지면 나를 믿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다쳐. 지금은 그들을 지키는 게 먼저다.”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조건이 좋았던 모양이지?”

말해서 뭐하겠냐는 의미로 존 보스만이 어깨를 들었다가 내렸다.

강성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스마트폰이 짧게 울며 문자가 들어왔다.

“잠시만.”

고강준과 나머지 세 명의 기록이 꽤 자세하게 담겨 있었다.

[그들이 만나는 모양이다. 어설프게 다른 번호로 서로 연락하고 있어서 통화를 녹음했다. 한 시간 뒤에 만나는 사진을 전송해 주지.]

스마트폰에 담긴 내용을 확인한 강성태는 픽 웃었다.

[혹시 만나는 장소를 알게 되면 문자로 알려줘.]

답을 보낸 강성태가 액정을 통해 확인한 시간은 오후 8시 40분이어서 잘하면 자정 전에 고강준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뒤에서 이렇게 또 수를 쓰니까 세 대를 더하면?

“내가 꼭 갚아줘야 할 게 있어서 숫자를 세고 있었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존 보스만을 향해 강성태는 이해하지 못할 이유를 내놓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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