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 14화
늦은 시간에도 집무실에 남은 고강준은 태극기와 검찰을 상징하는 깃발 앞에서 통화를 이어나갔다.
“박노익은 강성태와는 아무 관련 없는 조폭 두목입니다. 우리가 힘이 없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넋 놓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소신영과 통화하는 동안, 별장에서의 역겨웠던 장면이 떠올랐고, 그에 대한 반응처럼 속이 뒤집히는 바람에 고강준은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매력적인 여자는 물론이고, 야한 동영상을 봐도 역겨운 장면이 겹쳐지고, 이어서 따귀를 맞는 순간이 떠올라서 그의 상징은 아예 반응하지 않았다.
성폭행범들을 무작위로 짝지어서 강제로 관계를 갖게 한 뒤에 녹화한 영상을 보여주고, 따귀를 시원하게 올려붙이면 평생 성불구로 살지 않을까?
고강준이 엉뚱한 생각을 떠올릴 때였다.
-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군요. 먼저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고, 다음으로 폭력 조직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이어가면 사람들 뇌리에 폭력 조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깊게 박힐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보도를 이어간다는 생각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던 고강준이 만족한 음성으로 소신영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 어떻게? 우선 오늘 긴급체포한 두목을 자세하게 파실 거요? 아니면 추가로 몇 놈 더 잡아들이실 생각이오?
“굵직한 놈으로 골라서 두 놈쯤 더 잡아들일 생각입니다. 깡패 놈들이 정보는 또 얼마나 빠른지 벌써 몸을 숨긴 놈도 있는데 조직을 두들길 명분이 되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 알았소. 보도 자료를 보내주면 여론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통화를 마친 고강준은 책상 한쪽에 두었던 사탕을 집어 입에 넣었다.
달그락, 달그락,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면서 고강준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마약 한 방 꽂은 뒤에 정수리가 짜릿하도록 여자를 품으면 바로 회복될 거 같은데, 그 바닥에 다 한 줄기로 연결된 탓에 강성태에게 걸릴까 봐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에이, 씨!”
짜증을 토해낸 고강준이 한쪽에 올려둔 서류들을 신경질적으로 당겼다.
“장태섭, 이놈이 가장 적당한데….”
죄질도 무겁고, 보도도 여러 차례 탔던 인간이라 잡아들일 명분은 충분했다. 거기에 개발 사업을 하면서 조직원들을 데리고 다닌 영상 자료들이 많아서 범단으로 엮기에도 차고 넘치는 인물이었다.
“장태섭이 강성태를 물고 늘어지면?”
개발 사업 구역 한복판에 도끼를 박아놓았다는 말을 떠올린 고강준이 눈가를 좁혔다.
“장태섭이 먼저 멘트 날리고, 지금껏 사업을 진행하던 건설사가 나서서 강성태를 씹어대는 거라면 내가 뭘 어떻게 한 건 없는 거잖아?”
입술과 눈매를 뒤튼 고강준이 서류를 꼼꼼하게 다시 살폈다.
10분쯤 지난 뒤였다.
서류에 시선을 두던 고강준이 비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뒤에 바로 앞에 내려두었던 스마트폰을 집었다.
- 여보세요?
조금 전에 통화를 마쳤던 소신영이었다.
“회장님. 영상 전문가 섭외가 가능하십니까? 이왕이면 대학 교수, 항간에 이름 좀 알린 전문가, 이렇게 두 명을 구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느닷없는 고강준의 요구에 소신영은 잠시 침묵했다.
영상 전문가를 구하는 게 어려운가?
고강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쯤 녹은 사탕을 굴릴 때였다.
- 혹시 영상이 가짜라거나 편집됐다고 주장할 생각이오?
고강준의 속을 읽은 듯한 질문이 건너왔다.
“확실히 회장님은 다르십니다. 영상이 터졌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영상 자체가 워낙 믿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역겨운 장면을 본능적으로 외면합니다.”
계획을 펼쳐내는 고강준은 막힘이 없었다.
“다음으로 수사했는데 가짜로 판명 났다, 또는 확인이 어렵다로 검찰이 발표하고, 이어서 심층보도에서 영상 전문가에게 의뢰했는데 얼굴만 교묘하게 바꾼 편집 영상이더라로 결론 내는 겁니다. 그런 뒤에 그날 약을 준비한 양길동을 잡아서 똘똘 엮는 게 시작입니다.”
- 카하.
얼마나 기뻤는지 소신영이 천박하게 들리는 감탄을 뱉어냈다.
“강성태와 개발 사업으로 충돌한 폭력 조직 두목을 긴급 체포하겠습니다. 그놈이 우리가 원하는 진술을 하면, 강성태를 먼저 체포하고, 신강남파 나머지 놈들을 줄줄이 엮겠습니다.”
- 그놈이 우리가 원하는 진술을 하겠소?
“어떤 진술을 듣고 싶으십니까? 원하시면 김정은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진술도 받아내겠습니다. 그런데도 버틴다면 그놈은 죽을 때까지 교도소에 두고, 다른 놈을 찾으면 됩니다.”
- 총장이 되실 분은 확실히 다르십니다. 영상 전문가는 안심하시고, 편히 계획하신 일을 진행하십시오. 내가 부의장께도 연락하겠습니다.
흥분한 소신영의 음성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손을 비빈 고강준은 팔을 뻗어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나다. 여기 강북 조폭 장태섭이 말이지. 이 자식도 긴급체포해. 죄질이 워낙 나쁘니까 그거로 일단 엮고, 여죄를 집중해서 파봐. 그래. 내가 듣고 싶은 추가 진술이 있으니까 실망시키지 마라.”
수화기를 내린 고강준은 “후아!” 하는 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상체를 묻다시피 기댔다.
**
통화 내용을 전해들은 이병렬은 뜻밖에도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일 키우는 거 하나는 진짜 대한민국 최고다.”
원망이나 푸념이 아니라 자부심이 담긴 투정처럼 들렸다.
“이제 우리 보스께서는 어떻게 하시려나?”
“가서 자수할까?”
“지랄을 하십시오, 보스.”
강성태가 흐느끼듯 웃음을 터트렸을 만큼 뜬금없는 대꾸였다. 강성태야 대놓고 웃었지만, 자리를 지키던 조봉진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괜찮겠냐? 뭐하면 고문님 말씀대로 잠깐 피해 있어.”
“아직 시간이 좀 있을 거 같으니까 천천히 대비하자.”
“그러다가 달려가면? 골인되는 거 한 방이다. 골인이 무서운 건 의사전달이 안 된다는 거다. 안에 있는 보스랑 불려들어간 식구들의 진술이 꼬이기 시작하면 결국 저놈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 전부 사서함 서신 주고받아야 해.”
“사서함 서신? 그게 뭐야?”
“이거 왜 이러시나? 교도소 주소는 전부 사서함을 쓰잖아. 서울구치소 사서함 20호, 의정부 99호, 안양 101호, 이렇게.”
별거 아니지만, 사서함 번호를 막힘없이 술술 내놓는 이병렬의 대답에 강성태는 픽 웃고 말았다.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준비해 놨지? 그렇지?”
“그러니까 얼른 털고 일어나. 혼자 다 하기 벅차다.”
“뭔데?”
답을 듣고 싶은 욕망에 강렬하게 빛나는 이병렬의 시선을 피하듯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일단 저쪽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결정하자.”
“그러다가 보스가 골인되면 답이 없다니까.”
“구속되면 고강준을 찾지 뭐.”
“작정하고 나선 모양인데 그놈이 널 풀어줄 거 같아?”
“얼굴 보게 되면 따귀나 한 대 갈겨주려고.”
“미치겠네, 진짜.”
답답한 심정에 상체를 뒤틀던 이병렬이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강성태와 떠드는 동안 잊고 있었던 상처가 제대로 울린 모양이었다.
그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또다시 울었다.
이번 건 뭔가 섬뜩한 느낌이었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던 이병렬도 날카로운 눈매로 강성태를 올려다보았다.
“고문님이다. 여보세요?”
- 장태섭이 긴급체포됐다. 워낙 걸릴 게 많은 인간이라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박노익 다음이라는 게 걸려. 조 변호사 통해서 상황 파악할 때까지 일단 피해.
피해 있으면 어떻겠냐며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조태완은 단호하게 피하라고 나섰다. 그만큼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 지금 우리를 파기 시작하면 당장 문도진 건부터 약점이 너무 많아. 줄줄이 구속되는 모습을 보면, 범단에서 빠지고 싶은 놈들이 알아서 자술서 쓰겠다고 나설 테고. 그러니까 이번은 내 말 들어.
“고문님.”
- 여권은 있지? 여차하면 마카오로 가. 아니면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도 괜찮아. 내가 현지에 있는 사람을 연결할 테니까 가서 좀 쉬다 와.
“정훈이에게 시켜서 옥상 연결된 철문 확실히 단속하라고 따로 지시하십시오.”
- 야, 강성태!
보스라며 예우해주던 조태완이 조카에게 화난 삼촌처럼 강성태의 이름을 강하게 불렀다.
- 지금은 자만할 때가 아냐. 우리 조직은 보스가 없으면 바로 무너져. 내부 정비도 못 한 상황이라 보스가 잡혀가면 이놈 저놈 기회를 노린다고.
급하게 말을 전한 조태완이 막막한 느낌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 뭐? 어떻게 할 건데?
“닥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정훈이에게 옥상 철문부터 확인하라고 지시하십시오.
- 진짜야?
“내가 잘못되면 고문님, 병렬이, 진용이, 정훈이,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기와 사모님까지 위험해진다는 거 잘 압니다. 생각하는 게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옥상부터 확인하십시오.”
침대에 누운 이병렬이 눈빛을 빛내며 강성태의 통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해 둔 준비가 뭔지 몹시 궁금한 표정이었다.
- 보스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일단 믿기는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조심은 하자. 일머리를 알아볼 테니까, 오늘부터 내가 준비한 빌라에서 지내.
생각한 게 뭔지 궁금한 심정을 억지로 누른 조태완의 당부였다.
간절함마저 묻은 당부를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거절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고민했던 강성태는 순순히 답했다.
- 전화해 놓을 테니까 바로 가. 비밀번호는 문자로 보낼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조태완이 했던 말을 이병렬에게 들려주었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어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원래는 치곤이 불러서 포장마차에 갈 생각이었는데 고문님이 저렇게 당부하니까 한강 빌라에 가서 있을게.”
“잘 생각했다.”
“걱정하지 말고 몸 추슬러. 아, 참!”
강성태는 아르윈에게 프리 스테이션을 둘러보라고 했다는 말을 뒤늦게 전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더 좋지. 언제고 가서 마음 편하게 술 마실 거 아냐?”
다행히 이병렬이 더 반가운 얼굴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얼른 일어나서 도와달라는 말, 그거 진심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병렬에게 의미 있는 시선으로 인사한 강성태는 병실을 나섰다.
장태섭까지 잡았다고?
마약을 막겠다며 뛰는 깡패 두목과 부패한 고검장의 대결이라니.
복도를 걸으며 강성태는 픽 웃었다.
**
저녁시간이 지나 조서를 받는 건 특별한 의미였다.
물론 낮에 받던 조서가 밀려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박노익 정도 되는 인물은 조서를 먼저 받으면 받았지, 순번을 뒤로 빼지 않는다.
박노익은 유치장이든, 구치소든, 그곳에 있는 깡패들이 무조건 챙겨야 하는 전국구 거물이었다.
입소하기 무섭게 몸에 맞춰 수선한 죄수복이 날아오고, 아침, 점심, 저녁마다 특식이 몰래 들어오는 데다, 이십 대의 꼬마가 잠자리, 빨래, 심지어 물 한 잔 마시는 것까지 모두 챙긴다.
박노익처럼 구치소가 편안한 사람들의 진을 빼기 위해 검사들은 소위 ‘불러 뻥’을 시전한다.
아침 일찍 검찰청으로 불러내서 종일 좁은 지하 독방에 가뒀다가 저녁 늦게 구치소로 돌려보내는 방법이었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보름 정도 그렇게 불러대면 어지간한 사람은 제풀에 지쳐 조서 받는 순간을 간절하게 바라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진술을 하면 또 ‘불러 뻥’, 검사가 원하는 진술을 토해내면 다음 날부터 구치소에서 편히 쉬도록 더 부르지 않는다.
“저녁은 먹었어요?”
마흔 정도로 보이는 검사가 시선을 모니터에 둔 채 툭 질문을 건넸다.
수갑 찼던 손목을 번갈아 문지르며 박노익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장검사 연순동’이라는 명패를 확인한 박노익이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연순동이 고개를 박노익에게 돌렸다.
“돈 많이 벌었나 보더라고. 오늘 연락받은 것만 여섯 건이 넘는데 그분들 수임료를 계산해 보니까 얼추 10억 정도 되겠던데? 맞지요?”
박노익은 연순동을 빤히 바라보며 침묵했다.
너는 그래라. 나는 내 할 일 하련다.
박노익의 침묵에도 연순동은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로 앞에 있던 서류철을 빠르게 위로 넘겼다.
“보자! 증권거래법 위반, 횡령, 배임, 이 정도면 뭐 대략 7년에서 10년 정도 살 건데, 벌금을 안 내고 버틸 거니까 거기에 3년을 더해야 할 테고.”
박노익은 속이 보이지 않는 묵직한 눈으로 형량을 떠벌이는 연순동을 지켜보았다.
“뭐, 돈 있겠다, 전국에서 알아주는 건달이고 하니까 그리 힘들지 않게 지내겠네. 그렇죠? 변호사 빵빵하니까 대법원까지 갈 테고, 그럼 형이 확정되는 데 대략 2년 정도 보면 되겠어요. 문제는 그다음인데…….”
말을 뱉던 연순동이 직전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눈매로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대법원까지 가서 형이 확정되면 내가 당신을 범단으로 다시 기소할 거거든. 당신도 그렇고, 데리고 있던 동생들 모두 전국 계보에 올라와 있어서 최소 15년은 내 직책을 걸고 장담한다.”
‘작업이구나.’
대법관, 부장판사, 중앙지검장 출신의 변호사를 동원했는데도 현직 부장검사가 이렇게 나온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궁금한 건 과연 검찰이 원하는 답이 뭐냐는 점이었다.
“횡령, 배임으로 10년, 다시 범단으로 15년, 모두 25년을 교도소에서 보낼 텐데, 할 말 없어요? 아! 거기에 증권거래법 부당 이득 추징금이 꽤 될 테니까 잘못하면 알거지가 될지 몰라요. 교도소에서 돈 없으면 나이 먹어서 서러울 텐데, 안 됐다, 그렇죠?”
그사이 다시 태도를 바꾼 연순동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뒤에 박노익이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투로 양손을 오므려 손톱을 살폈다.
박노익과 연순동이 팽팽한 시간을 보낸 뒤였다.
“3년에 5년 집행유예, 추징금 없고, 벌금만 5억. 어때요? 이렇게 받으면 일사부재리로 앞에 지은 죄를 깔끔하게 터는데?”
25년의 형량을 듣고도 묵묵하게 버티던 박노익이었다. 그런데 집행유예와 벌금 5억 원이라는 조건을 듣는 순간,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장태섭이라고 알죠? 그 인간도 들어왔어요. 먼저 협조하는 사람이 집행유예인데, 저쪽은 어쩌고 있을까요?”
“원하는 게 뭐요?”
어차피 묻게 될 말이라고 생각한 박노익이 질문을 던졌고,
“신강남파 강성태.”
기다렸다는 것처럼 연순동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